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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ㆍ존송파의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 4.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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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ㆍ존송파의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 4. 결론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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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 尊宋派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파(各派)에 따라서 같은 시인이라도 다르게 평론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평가와 관점 및 시론은 무엇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존당파에서는 이백과 두보에 대한 역대의 우열 논란과 그 계보, 이백과 두보 시의 장점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먼저 이백과 두보의 우열 논란을 살펴보도록 한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를 더 인정하다

 

조선중기의 학자 남용익(南龍翼, 1628~1692)호곡시화(壺谷詩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의 우열은 자고로 정해지지 않았다. 원진은 처음부터 두보를 존경했지만 한유는 두 사람을 다 존경하였다. 송 이후로는 두보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도손(敖陶孫)의 시평(詩評)에서는 두보(杜甫)는 주공(周公)이 제례(制禮)한 것과 똑같아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다.

…… 주자(朱子)는 시성(詩聖)으로 이태백(李太白)을 불렀으니, 그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또한 알만하다. ()나라에 이르러 왕세정(王世貞)은 다시 두 사람을 높이 보는 평을 하였으나 두보를 약간 더 높이 보았다.

杜優劣, 自古微定. 元微之始尊杜, 而韓昌黎兩尊之. 自宋以後, 無不尊杜. 敖陶孫詩評以杜爲周公制禮, 不敢定議; 此言是矣.

……紫陽以聖歸之於李, 則微意亦可知. 而至明弇州有兩尊之評, 而少有右杜意.

 

 

중국 역대로 이백두보에 대하여 우열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호도를 정리하여 원진과 오도손, 송 이후 사람은 두보를 더 존중하고, 한유는 이백과 두보를 둘 다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왕세정은 후칠자의 한 사람으로 시필성당(詩必盛唐)’을 주장한 종당(宗唐)의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을 존중하였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하였고 주자는 이백을 시성으로 불러 그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이백보다 두보를 더 존중했다고 볼 수 있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가 더 원숙하다고 보다

 

남용익에 이어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만중(金萬重, 1637~1692)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더욱 분명하게 두보를 선호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는 이름이 똑같이 났으나,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이 판단한 것은 두보에 기운 사람이 70~80%나 차지한다. 백거이, 원진, 왕안석 및 강서시파들은 두보를 존중했고, 구양수, 주희, 양신은 이백을 높였으며 한유와 소동파는 이들을 다 같이 존중했다.

명대의 홍치ㆍ가정 연간의 여러분들도 둘 다 존경했지만, 그들의 본뜻을 살펴보면 대부분 두보에 편향되어 있다. 시도(詩道)가 두보에 이르러 크게 완성되어 고금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여 대가(大家)로 삼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으니 이백은 정녕 함께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물이 극히 성하게 되면 곧 쇠미한 경향이 나타난다. 소옹은 꽃을 볼 때 피지 아니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백이 꽃이 처음 핀 것과 같다면 두보는 완전히 핀 것 같다. 두보의 기주(夔州) 이후의 시는 시들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杜齊名, 而唐以來文人之左右袒者, 杜居七八. 白樂天元微之王介甫及江西一派幷尊杜. 歐陽永叔朱晦蓭楊用修右李, 韓退之蘇子瞻幷尊者也.

若明弘嘉諸公, 固亦幷尊, 而觀其旨意, 率皆偏向少陵耳. 詩道至少陵而大成, 古今推而爲大家無異論, 李固不得與也.

然物到盛, 便有衰意. 邵子曰:‘看花須看未開時.’ 李如花之始開, 杜如盡開, 夔後則不無離披意.

 

 

이는 남용익의 시론을 부연ㆍ설명한 느낌이다. 김만중에 의하면 크게는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의 70~80%두보를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백거이ㆍ원진ㆍ왕안석 및 강서시파는 두보를 존중하고, 구양수ㆍ주희ㆍ양신은 이백를 존중하고 한유소동파는 둘 다 존중하였고 명대의 홍치와 가정 연간의 문인들은 둘 다 존중한 것 같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중국 사람들의 이백과 두보에 대한 선호도를 적은 것이지만 김만중도 은연중에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중국의 풍조는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

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性情詞意, 古今爲最. 記行及等作, 分明可愛者, 不可不熟讀摹襲, 以爲準的.

其大篇如八哀等作, 非學富才博不可學, 亦非詩之正宗, 姑舍之.

 

 

표일(飄逸)은 시 풍격의 특성을 지적한 말로 사공동(司空圖)가 시품(詩品)에서 표일(飄逸)을 하나의 풍격으로 배치하였다. ‘표일(飄逸)’은 체기(體氣)가 경양(輕揚)하고 형영(形影)이 표홀(飄忽)하고 신정(神情)이 한일(閑逸)하다는 뜻으로 시 전체의 풍격이 날듯 가볍고 편안하고 한가롭다는 것이다.

 

사의(詞意)는 문사(文詞)의 함의(含意)라는 뜻이다. 두보는 성정의 표현과 함축적 표현에 있어서 고금을 통틀어 최고라고 하면서 그의 작품 중에서 삼리(三離)삼별(三別)을 준칙으로 삼아 모방하여 그의 시를 배워야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삼리(三離)삼별(三別)팔애(八哀)등은 숙독하거나 학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배워 모방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식의 이러한 견해는 명대 후기의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의 견해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왕세정은 이백두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언고시와 칠언가행에서 이백은 기()를 위주로 하고 자연스러움을 으뜸으로 한 뒤에 준일(俊逸), 고창(高暢)함을 귀하게 여겼다. 두보는 의()를 위주로 하고 독특하게 나아감을 으뜸으로 삼으며 기일(奇逸), 침웅(沈雄)함을 귀하게 여겼다.

맛이 사람을 날아갈듯 신선 같게 하는 것은 이백이고 사람을 비분강개하게 하고 격렬하게 만들어 흐느끼게 하는 것은 두보이다.

弇州評李杜曰: ‘五言古七言歌行, 太白以氣爲主, 以自然爲宗, 以俊逸高暢爲貴; 子美以意爲主, 以獨造爲宗, 以奇逸沈雄爲貴.

味之使人飄揚欲仙者, 太白也; 使人慷慨激烈歔欷欲絶者, 子美也.……

 

 

()는 시인의 정신 기질이 작품에 관통되어 형성된 함축, 생기, 기세를 가리키고 준일(俊逸), 고창(高暢)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는 시의(詩意)두보의 시는 함축적으로 뜻을 표현하는데 독자적 경지를 열었다는 것이다. 기일(奇逸), 침웅(沈雄)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이상(以上)의 말은 이식이 왕세정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왕세정(1526-1590)은 명대의 당시를 추종한 사람으로 이식이 태어나기 7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이식의 학시준적(學詩準的)인조 251647년에 완성되었는데 이는 바로 왕세정이 죽은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인용한 내용을 볼 때, 이식은 왕세정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식의 이백두보에 대한 평론은 왕세정의 평론을 간결화시키고 두보를 더욱 높이 평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리

 

남용익은 종당파(從唐派)로 앞에서 고찰한 대로 이백과 두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호곡시평(壺谷詩評)에서 소식과 황정견에 대하여 소동파는 홍대하면서 풍족하고 황산곡은 기이하지만 편협하다.(송대)에서 대가라고 한다면 소식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蘇東坡大而飫, 黃山谷奇而狹.……然大家則無出坡翁之右]위의 책, 3권의 壺谷詩評, 343.”라고 하여 소동파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는 당대와 송대를 통틀어 소식을 대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송대에서는 소식을 대가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식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는 하지만 당시가 더 훌륭하다는 전제 하에 소식을 높이 평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당시(唐詩), 오대시(五代詩), 원시(元詩), 명시(明時) 등 각 조대의 시인의 시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그가 평한 당대와 송대의 시인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 시인 중에서는 우세남(虞世南)ㆍ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송지문(宋之問)ㆍ이백(李白)ㆍ교지지(喬知之)ㆍ이교(李嶠)ㆍ진자앙(陳子昻)ㆍ맹호연(孟浩然)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ㆍ김운경(金雲卿)ㆍ위응물(韋應物)ㆍ한유(韓愈)ㆍ유가(劉駕)ㆍ원진(元稹)ㆍ이하(李賀)ㆍ왕건(王建)ㆍ두목(杜牧)ㆍ두공(竇鞏)ㆍ이상은(李商隱)ㆍ허혼(許渾)ㆍ육구몽(陸龜蒙)ㆍ두상(杜常) 등을 거론하여 그들의 시와 자구에 대하여 비평하였고, 시인 중에서는 구준(寇準)ㆍ안수(晏殊)ㆍ양휘지(楊徽之)ㆍ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악비(岳飛)ㆍ양만리(楊萬里) 등을 거론하고 그 시와 자구를 비평하였다.

 

 

이백을 극찬하다

 

이 중에서 본 논문과 관련이 있는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이백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보의 시에 붉은 빛이 드니 복숭아꽃이 곱고, 푸른빛이 돌아오니 버들잎이 새롭다.’라고 하였고 이백의 시에 차가운 눈은 매화 속에서 다하였고, 봄바람은 버들 위에 돌아왔다.’라고 하였으며, 왕안석의 시에는 푸른빛은 차갑고 거친 잡초 사이를 어지럽히며, 붉은 것은 다투어 따뜻한 나무에 돌아온다.’라고 하였다.

杜詩紅入桃花嫩, 靑歸柳葉新.’ 李白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王荊公詩綠攪寒蕪出, 紅爭煖樹歸.’

 

이 세 사람의 시에 모두 돌아가다[]”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옛사람들은 왕안석의 시가 매우 뛰어나다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두보의 시는 교묘하나 힘을 써서 지은 것이고 왕안석의 시는 교묘하게 짓고자 하여 더욱 자세히 조사하였고 이백의 시는 자연에 가깝다.

此三詩皆用, 而古人以荊公詩爲妙甚, 余謂不然, 老杜巧而費力, 荊公欲巧而尤穿鑿, 李白爲近自然.

 

 

위의 인용문에서는 각 시인의 시구를 들어서 그 우열과 차이를 논하고 있다. 이는 이수광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즐겨 쓴 비평방법의 하나이다. 본문에서는 ()’자 한 글자를 가지고 시의 우열을 논하고 각 시인의 장점을 들어 두보는 힘을 다한 교묘한 표현, 즉 조탁미가 뛰어나다고 하였고, 이백은 자연에 가깝다고 하였다.

 

 

맹호연보다 두보를 낮추다

 

이수광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서 이백두보의 장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그들의 단점도 지적하고 있다.

 

 

맹호연의 시에 말하기를 강이 맑으니 달이 사람에게 가깝다.” 하였다. 두보는 강물 속 달이 사람에게서 겨우 두어 자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나대경(羅大經)이 말하기를 맹호연의 시는 원만하고 함축이 있으며 두보의 시는 정교하다고 하였다. 나는 두보의 이 글귀는 맹호연보다 매우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孟浩然詩曰: ‘江淸月近人.’ 杜子美云: ‘江月去人只數尺.’ 羅大經以爲浩然渾涵, 子美精工. 余謂子美此句大不及浩然.

 

 

나대경이 두보의 시는 정교하다.”라고 평을 하였지만, 이수광은 두보의 시가 맹호연보다 못하다고 평을 하고 자세한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대경의 평을 통하여 두보의 시가 원만함과 함축성 측면에서 맹호연의 시보다 못하다고 보고 있음을 추리해볼 수 있다.

 

 

강서시보단 두보시

 

다음은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진여의(陳與義)의 시와 두보 시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한 부분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 나온다.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만 리를 와서 노닐면서 도리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삼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거니, 다시 위태한 곳에 기대어 섰네.”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시구를 매우 좋아한다.

두시에 말하기를 만 리에 가을이 슬프다. 이 몸은 항상 나그네 되어, 백년에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여의의 이 글귀가 오로지 두보 시에서 나온 것을 알겠다. 그러나 두보시가 더 좋다.

簡齋詩萬里來游還望遠, 三年多難更憑危.’ 余常喜之.

杜詩云: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乃知簡齋此句專出於杜, 而杜尤佳矣.

 

 

이수광은 두 시를 모두 좋아하면서도 두보의 시가 더 좋다고 하였는데 이는 두보의 시가 대구적(對句的) 측면에서 더 조화롭고 시의적(詩意的) 측면에서 만리타향의 객수(客愁)를 보다 함축으로 표현하여 긴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두보시의 음률미와 함축미를 높이 평가하여 송시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두보 악양루시가 부족한 점

 

이수광은 두보 시의 뛰어난 점만 논하지 않고 부족한 점에 대하여서도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서 논하였다.

 

 

두보(杜甫)악양루시는 고금에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친한 벗에게선 한 글자의 서신도 없고, 늙고 병든 몸은 외로운 배를 타고 있네.”라고 한 글귀는 윗글귀와 서로 연속이 되지 않고 또 악양루와는 글이 서로 걸맞지 않는다.

진여의(陳與義)악양루시 또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다만 주렴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는데 석양은 더디다.”라고 한 것은 어구가 빈약한 것 같고, 등림(登臨, 올라 굽어보니)”이니, “사의(徙倚, 배회하다)”빙위(憑危, 난간에 기댄다)”니 한 말들과 석양(夕陽)”이니 욕모(欲暮, 저물려 한다)”느니 한 말들을 쓴 것은 중첩인 것 같다.

杜子美岳陽樓, 古今絶唱,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與上句不屬, 且於岳陽樓不相稱.

陳簡齋岳陽樓, 人亦膾炙, 簾旌不動夕陽遲’, 語句似餒. 登臨徙倚憑危夕陽欲暮等語似疊.

 

 

위의 문장에서는 두보시의 장법에 대하여 악양루시를 예로 들어서 의미상 상하구(上下句)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시제(詩題)하고도 맞지 않다는 점을 비평하였다.

 

이상에서 이수광은 두보시의 표현의 정확성, 음률미와 함축미를 높이 평가하고 표현의 중첩성에 대하여는 비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수광, 이백와 황정견의 시를 비교하다

 

 

이수광이백 시에 대하여서도 많은 평을 하였는데 주로 표현의 자연스러움, 시법, 시구의 원류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91, “喬知之詩曰: ‘草綠鴛鴦殿, 花紅翡翠樓.’ 按李白詩水綠南薰殿, 花紅北闕樓.’; 玉樓巢翡翠, 金殿鎖鴛鴦.’ 蓋出於喬矣.”, 시구의 주석, 인품과 시품의 관계, 습작문제, 정확성 문제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백의 악부에 말하기를 홀로 물속의 진흙을 거르려하나 물은 깊은데 달을 볼 수 없네. 보지 않아도 달은 그냥 있겠지만, 물이 깊어서 행인이 빠지겠네.”라고 하였다. 이 사의 구법은 희롱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어서 기뻐할 만하다.

산곡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짓기를 돌은 내가 너무 좋아하니, 소로 하여금 거기에 뿔을 갈지 말게 하라. 소가 뿔을 가니 뿔은 오히려 좋겠지만, 소가 싸우면 나의 대나무를 상하겠구나.”하니 사람들이 잘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것은 돌과 대나무뿐이다. 비록 시격(시의 형식)은 같으나 마음 쓰는 것이 서로 멀기가 이와 같다. 그들의 높고 낮음을 구분할 수 있다.

李白樂府曰: ‘獨漉水中泥, 水深不見月. 不見月尚可, 水深行人沒.’ 此詞句法出於戲語, 而自愛人之意, 爲可喜耳.

山谷效之曰: ‘石吾甚愛之, 勿使牛礪角. 牛礪角尚可, 牛鬪傷我竹.’ 人以爲佳.

然所愛者, 石與竹耳. 詩格雖同, 而用意相遠如此, 此可辨其高下矣.

 

 

이백과 황산곡의 시를 비교하였는데 두 시인이 시격(詩格, 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시의(詩意)는 이백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는 황산곡의 환골탈태법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01, 344,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模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의 한계를 비판한 것으로 황산곡이 이전의 형식은 잘 습득하였으나 시의(詩意)를 체득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당시의 뛰어남과 송시의 한계를 시구분석을 통하여 전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송풍의 모방을 비판하다

 

이수광은 또한 소식과 황정견의 시에 대해서도 시의 자구선택, 시구의 정확성, 구법과 대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평하고 있다. 우선 소식의 시의 자구 선택문제에 대한 평을 보도록 하자.

 

 

당나라 유가(劉駕)조행(早行)시에 이르기를 말 위에서 남은 꿈을 계속 꾸다가, 말이 울 때마다 다시 놀란다.”라고 하였다.

소식이 이것을 모방하여 말하기를 말 위에 서 우뚝 남은 꿈을 꾸다, 아침 해가 올라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잘됨과 졸렬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파의 올잔몽(兀殘夢)”이라고 한 ()”자를 후인이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唐劉駕早行詩云: ‘馬上續殘夢, 馬嘶時復驚.’

東坡效之曰: ‘馬上兀殘夢, 不知朝日昇.……

細味之, 工拙自見. 兀殘夢, 後人有譏之者, 是矣.

 

 

유가(劉駕)의 시와 소식이 모방하여 지은 시를 들어 비교함으로써 시의 우열을 평가하고 송시에 나타나는 모방하여 시를 짓는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소식 시의 자구 선택이 정확하지 못함을 비평하였다.

 

 

송풍의 산문화를 비판하다

 

소동파의 시에 이르기를 그대들은 유독 그 맛을 알지 못하니, 내가 이제 다시 맞춰 보겠네.’라고 하였다. 예전부터 기묘한 대구로 여긴다. 이것을 사륙문의 짝수 대구로 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 쓰는 것은 구법이 속된 것 같고 자연스러운 성정 표현도 또한 얕다. 당나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글귀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東坡詩曰: ‘公獨未知其趣耳, 臣今時復一中之.’ 古今以爲奇對.

然此爲四六偶對則好矣, 用之於詩, 則句法似俗, 而天機亦淺; 唐詩則必亦不如是作句矣.

 

 

이 부분은 소식 시의 산문적 성격을 비평한 것으로 송시 특징 중의 하나인 시의 산문화 문제를 비평한 것으로 이수광이 송시(宋詩)가 당시(唐詩)만 못한 이유로 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황정견에 대해서는 시의 자구선택, 습작문제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였다. 시의 자구문제에서는 악양종괴파서(樂羊終愧巴西)’라는 시구 중에서 진서파(秦西巴)’는 사람이름인데 이것을 거꾸로 파서(巴西)’라고 쓴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02, “山谷詩: ‘樂羊終愧巴西.’ 按秦西, 巴人, 姓名倒作巴西, 則未穩.”. 습작문제에 있어서는 황정견이 왕유의 연지행(燕支行)을 모방하여 지은 것에 대하여 비평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유의 시에 칼을 뽑아서 천교의 팔을 베고, 돌아오는 안장 위에서는 함께 월지의 두개골로 술을 마셨네.”라고 하였다.

산곡이 이것을 습용하여, “장막 속에서 흉노의 팔을 베고, 군대의 앞에서 다시 월지의 두개골로 술을 마신다.”라고 하였다. 악중(幄中)과 군전(軍前)이라는 네 글자만을 바꿨으나 우열이 스스로 판이하다.

산곡의 시에 또, “돌아오는 안장에 월지를 거꾸로 달았네.”라고 한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王維詩: ‘拔劍已斷天驕臂, 歸鞍共飮月支頭.’

山谷用之曰: ‘幄中已斷匈奴臂, 軍前更飮月支頭.’ 只換幄中’‘軍前四字, 而優劣判矣.

山谷詩又曰: ‘歸鞍懸月支.’ 則尤不成語矣.

 

 

이는 황산곡의 환골탈태법의 한계를 비판한 것으로 시의(詩意)는 그대로 취하고 자구(字句)만을 바꾸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시가 지어진 전체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자구만 바꿀 때의 시의의 졸렬함을 지적한 것이다.

 

 

존당파는 당시엔 소소한 비평을 가했지만 송시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다

 

지금까지 존당파(尊唐派) 문인(文人)들의 이백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았다. 그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의 문인들은 이백과 두보에 대하여서는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점에 대하여서는 과감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비평을 가하였다. 그 중 이백시의 뛰어난 점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시의(詩意)의 풍부함, 표현적 측면에서는 자연(自然)스러움, 풍격의 측면에서는 표일(飄逸), 준일(俊逸), 고창(高暢) 등이다. 두보시의 뛰어난 점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성정(性情)의 표현,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의(詞意, 함축적 표현), 정확성, 조탁미, 풍격의 측면에서는 기일(奇逸), 침웅(沈雄) 등이라고 하였다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두보는 이백의 표일(飄逸)함을 할 수가 없고, 이백은 두보의 침울(沈鬱)함을 할 수가 없다[子美不能爲太白之飄逸, 太白不能爲子美之沈鬱].”라고 하였는데, 이를 본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이백에 대한 풍격으로 표일(飄逸)은 동일하고 두보 시의 풍격에 대하여는 침웅(沈雄)과 침울(沈鬱)이라고 하여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은 한국시화에서는 두보 시의 웅장한 풍격을 추가한 점이다..

 

반면에 존당파 문인들의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은 소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당시(唐詩)가 우위에 있음을 전제로 하여 소식시의 훌륭함을 논하였고 황정견에 대한 평에 있어서는 강서시파의 병폐로 알려진 환골탈태법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였으며, 송시의 폐단으로 의론으로 시를 지었다는 비평은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지적되었다. 따라서 이백과 두보에 대한 비평은 존당의 관점에서의 비평이기 때문에 옥의 티를 찾아내는 소소한 것에 대한 비평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비평은 존당의 관점에서 송시의 특징이자 당시에 비교되는 상대적 약점을 비평한 것으로 근본적인 큰 문제에 대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비평을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는 아무 생각 없이 베끼는 게 문제가 된다.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1권의 謏聞瑣錄, 237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중종(中宗) 20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서이다. 1장에서 이미 조선전기에는 송시가 유행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이 문장을 통하여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송시(宋詩)가 자못 유행을 하였고 그 중에서도 소식(蘇軾)왕안석(王安石)에 대한 선호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는 소식(蘇軾)을 전범(典範)으로 삼았다가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로 옮기고, 다시 선조(宣祖) 연간(年間)에 당시풍(唐詩風)으로 전환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에서 존송파는 고려 말과 조선전기에 유행하였다.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한 이인로

 

존송의 시대적 상황과 소식ㆍ황정견의 시에 대하여서는 이인로(李仁老), 권응인(權應仁), 김창협(金昌協), 이의현(李宜顯)이 잘 논하였는데 아래에 고려후기의 학자 이인로(李仁老, 1152~1220)파한집(破閑集)권상 21권하 3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장을 다듬는 방법은 소릉(少陵)만이 유독 그 묘함을 다 발휘했다. ‘내 신세는 해와 달 아래서 조롱속의 새와 같기도 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기도 하네.’십년 여름동안 민산에서 갈포옷을 입고 살았고, 삼년 가을 동안 초지방의 다듬이소리를 들었네.’와 같은 것이다. ……

소동파와 황산곡에 이르러 용사(用事)에 더욱 정교하였으며, 뛰어난 기개가 흘러넘치니 절묘함이 가히 소릉과 견줄 수 있다고 하겠다.

琢句之法, 唯少陵獨盡其妙. 日月籠中鳥, 乾坤水上萍’, ‘十年岷山葛, 三霜楚戶砧之類是已.……

及至蘇, 則使事益精, 逸氣橫出, 琢句之妙, 可以與少陵幷駕.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 전고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을 점귀부(點鬼簿)라고 한다.…… 요즈음 소동파와 황산곡이 우뚝 일어나서 그들의 풍조를 따르기는 하지만 언어가 더욱 정교하여 조금도 어색한 흔적이 없으니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고 할 수 있다.

詩家作詩多使事, 謂之點鬼簿; …… 近者蘇黃起, 雖追尙其法, 而造語益工, 了無斧鑿之痕, 可謂靑出於藍矣. ……

 

 

이인로는 존송파의 입장에서 한국시인과 중국시인의 작품을 많이 비교하고 소식과 황정견의 평론에 치중했는데, 첫 번째 인용문에서 두보는 조탁미가 매우 뛰어나지만 소식과 황정견은 용사와 전고를 활용하여 시를 잘 써서 감히 두보와 견줄 수 있다고 극찬하였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소식과 황정견의 시법을 배운 고려의 시인이 시에서 인공적인 조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에서 두 가지 점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인로가 두보를 조탁미의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동파의 시를 만당시보다 낫다고 본 권응인

 

다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 권응인(權應仁, ?~?)송계만록(松溪漫錄)권하 10에서 송시와 소식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를 버려두고 있다. 정사룡(湖陰)이 듣고 웃으며 소동파의 시를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퇴계선생 역시 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라 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 어찌 청주의 육종사가 오유선생이 될 줄 알았으리오? 옥루가 얼어붙어 소름이 돋을 만큼 춥고, 은해가 빛에 일렁이니 눈이 부실만큼 빛나네. 바람에 날린 눈은 장춘원에 잘못 들어오고 구름 낀 달은 불야성에 오래도록 임하네.”라는 시구가 있는데, 만당시 가운데 이처럼 기절(奇絶)한 것과 대적할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우리 조선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다.

今世詩學, 專尙晩唐, 閣束蘇詩. 湖陰聞之笑曰: ‘非卑之也, 不能也.’ 退溪亦曰: ‘蘇詩果不逮晩唐耶?’

愚亦以爲如坡詩所謂豈意靑州六從事, 化爲烏有一先生’, ‘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眩生花.’, ‘風花誤入長春苑, 雲月長臨不夜城’, 不知晩唐詩中有敵此, 奇絶者乎? 高麗時每榜云: ‘三十三東坡出矣.’ 麗代文章優於我朝, 而擧世師宗, 則坡詩不可謂之卑也.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독 퇴계 대감은 소동파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 구름 흩어져 달 밝으니 그 누가 가리겠는가? 하늘색과 바다 빛은 본디 맑은 것이네.”라는 구를 외우며,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若薄其爲人, 則晩唐詩人賢於蘇者幾何人耶? 唯退溪相公好讀坡詩, 常誦雲散月明誰點綴, 天容海色本澄淸.’之句, 其所著詩, 使坡語者多矣.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주로 소동파 시를 논하였고 그의 시 3인용시 맨 처음 2구는 章質夫送酒六壺, 書至而酒不遠, 戱作小詩問之라는 시이고, 두 번째 두 구는 雪後書北臺壁이라는 시이고, 마지막 두 구는 雪後到乾明寺라는 시이다.를 직접 인용하여 만당시에는 소동파와 대적할 만한 기절(奇絶)한 시가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당시 고려 시대에는 소동파 시가 몹시 유행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33명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동파시가 만당시보다 뛰어나다는 것으로 그 비교 대상이 성당의 이백두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는 역시 성당의 시가 제일이라는 인식하에 송시의 우수성을 평가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

 

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誌)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격조(格調)가 조금 낮지만 시인의 풍치를 다하였다.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를 배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나 육유(陸游)를 취하는 것이 나은데 이들이 그나마 시도(詩道)에 가깝다.

宋詩如山谷後山, 最爲一時所宗尙, 然黃之橫拗生硬, 陳之瘦頸嚴苦, 旣乖溫厚之旨, 又乏逸宕之致; 於唐固遠, 而於杜亦不善學, 空同所譏不色香流動者, 誠確論也.

簡齋雖氣稍詘, 而得少陵之音節; 放翁雖格稍卑, 而極詩人之風致. 與其學山谷后山, 無寧取簡齋放翁, 以其去詩道猶近爾.

 

 

농암은 우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한 때 최고의 시인으로 여겨졌음을 인정한 후, 황정견의 횡요생경(橫拗生硬)진사도의 수경엄고(瘦頸嚴苦)한 단점을 비평하고 당시와 멀어져 있기 때문에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시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의 시를 배우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唐詩)의 여운(餘韻)이 있는 사람의 시()를 학습(學習)하라는 것으로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는 두보(杜甫)의 음절(音節)과 시인(詩人)의 풍치(風致)가 있어서 시도(詩道)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농암이 당시(唐詩)를 최고로 여기고 두보를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암이 당시와 송시를 겸존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당시(唐詩) 전체가 아닌 성당시(盛唐詩)를 최고로 인정한 바탕 위에서 송시(宋詩)의 장점(長點)을 평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성당시(盛唐詩)가 아닌 초당(初唐)ㆍ중당(中唐)ㆍ만당시(晩唐詩)는 송시(宋詩)보다 못한 점도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권응인(權應仁)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만당시(晩唐詩)가 소식(蘇軾)의 시()만 못함을 말할 때 이미 지적하였다. 또한 농암은 송시의 전체적인 변화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소식이나 황정견 이전에 있었던 구양수나 왕안석 같은 사람들은 비록 당나라 시만큼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율시나 절구 등의 시체는 당나라 시의 격조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양수는 너무 유창하였고 왕안석은 너무 정밀하고 적절하였으며 또한 의론이나 옛이야기와 같은 누가 있었을 따름이다. 소식이 나오면서 비로소 한차례 변화가 있었으며, 황정견이나 진사도가 나오면서 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

黃以前, 如歐陽荊公諸人, 雖不純乎唐, 而其律絶諸體, 猶未大變唐調.

但歐公太流暢, 荊公太精切, 又有議論故實之累耳. 自東坡出而始一變, 至山谷后山出, 則又一大變矣.

 

 

농암(農巖)은 송시(宋詩)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한 번씩 변했다고 하였다. 이는 소식(蘇軾)에 이르러 한 번 크게 변하여 고실(故實)과 의론(議論) 즉 산문화(散文化), 의론화(議論化), 용사(用事)의 중용(重用)이라는 송시(宋詩)의 특징이 갖춰졌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변하여 점철성금(點鐵成金)탈태환골(奪胎換骨)을 기치로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시를 써서 당의 시풍이 변하였다[東坡山谷, 始自出己意以爲詩, 唐人之風變矣].”라고 하고, 이어서 시풍(詩風)에 대해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문자(文字)로 시를 쓰고, 재학(才學)으로 시를 쓰고, 의론(議論)으로 학문을 삼았다[以文字爲詩, 以才學爲詩, 以議論爲學.].”라고 하였는데, 농암(農巖)이 송시(宋詩)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 것은 바로 엄우(嚴羽)가 말한 시의 산문화, 의론화, 용사의 추구 등을 지적한 것으로 엄우(嚴羽)와 견해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고 송시(宋詩)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에서 완성되었으며 이들을 송시(宋詩)의 대표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권중 20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는 백설처럼 희어 향기가 나네[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라는 시구 같은 것이니, 이는 곱고 아름답고 정교하여 거의 머물러 생각했거나 애써 괴로이 구한 것이 아닐 것이다.

詩率意立成者, 如李太白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婉麗精巧, 略無留思苦求者.

 

보한집은 다만 본조 고려의 시만을 싣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를 말함에 있어서 두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학을 말하면서 공자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이 글의 끝에 간략하게 언급했다.

무릇 시를 다듬고 연마함에 있어서 두보와 같이 한다면, 묘하기는 묘할 것이다. 그러나 솜씨가 서투른 자가 시를 다듬고자 하여 수고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졸렬하고 난삽하게 되며 그것이 더욱 심하면 헛되이 애만 태울 따름이다. 그러니 어찌 각자 자신의 재주에 따라 천연스럽게 뱉어내어 갈고 줄질한 흔적이 없는 것과 같으리오?

補閑, 只載本朝詩, 然言詩不及杜, 如言儒不及夫子, 故編末略及之.

凡詩琢鍊如工部, 妙則妙矣, 彼手生者, 欲琢彌苦, 而拙澀愈甚, 虛雕肝賢而已; 豈若各隨才局, 吐出天然, 無礱錯之痕?”

 

 

첫 번째 인용문인 권중 20에서는 소식의 신의(新意)이백의 재빠른 작시솜씨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의(新意)는 송시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그 의미는 고인(古人)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不襲古人語] 새로운 뜻을 지어내는 것[創出新意]으로 작시자(作詩者)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새로운 의경(意境)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소식의 특징이지 송시의 특징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백이 시를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짓는 솜씨에 대하여는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도 일찍이 이백(李白)은 천재(天才)로 호매(豪邁)하여 시어가 대부분 재빠르게 이루어진 것이다[太白天才豪邁, 語多卒然而成者].”라고 평하였는데, 최자 또한 염동수(閻東叟, 고려 문인, 미상)의 말을 인용하여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인용문인 권중 34에서는 보한집의 한계는 고려조의 시만을 실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권하 12에서는 학시(學詩)의 문제를 제기하여 두보의 조탁미가 뛰어나긴 하지만 서투른 솜씨로 배우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자신의 재주와 역량에 따라 쓴 시가 더 좋다고 하였다. 최자는 고려중ㆍ후기 사람으로 보한집은 고종 411254년에 완성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려시인을 평가할 때 중국시인 및 시작과 서로 비교하였다. 고려후기는 송시를 추존한 시기로 최자 또한 존송파이므로 그 입장에서 학시(學詩)의 문제(問題)를 제기하고 무조건 두보를 배우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의현, 존송파(尊宋派)임에도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두보는 시의 표현이 절묘하고위의 책, 1권의 櫟翁稗說, 144, “杜少陵有地偏江動蜀, 天遠樹浮秦……方知此句少陵爲, 蜀傳神, 而妙處正在阿堵中也.” 동파의 시는 호탕하다위의 책, 1권의 櫟翁稗說, 158東坡云: 火色上騰雖有數, 急流勇退豈無人? 又豪宕可人.”고 하였는데 이는 소식 시에 나타나고 있는 호탕한 풍격을 평한 말이다.

 

 

두보를 정점으로 삼은 이의현

 

한편 이의현(李宜顯)도곡잡저(陶谷雜著)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성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삼백 편에 비록 정()과 변()이 있을지라도 대략 온유돈후라는 네 글자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천고(千古)에 시를 논하는 표준인 것이다.……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더욱 정련되어 모든 시체가 두루 갖추어졌고 두릉(杜陵)이 집대성하였다. 이것이 또한 시가의 정맥이다. 시를 지음에 있어서 이런 규칙을 벗어나면 시라고 할 수 없다. 송나라 사람은 비록 스스로 기축(機軸)을 냈을지라도 또한 각자가 그 성정을 잃지 않아서 오히려 진실한 뜻이 넘치는 것이 있다.……비유하자면 시경(詩經) 삼백 편과 초사(楚辭), 한대(漢代)와 위대(魏代)의 시()로부터 성당(盛唐)의 이백과 두보 등 여러 사람에 이르기까지는 그 재주가 비록 차등이 있을지라도 모두 옥인데 옥에 또한 품질의 고하(高下)가 있는 까닭이다. ()은 옥돌과 같고 명()은 수정과 유리 등속이다.

詩以道性情. 詩經三百篇, 雖有正有變, 大要不出溫柔敦厚四字, 此是千古論詩之標的也. ……

至唐益精鍊, 衆體克備, 而杜陵集大成, 此又詩家正脉然也. 爲詩而偭此矩, 則不可謂之詩矣. 宋人雖自出機軸, 亦各不失其性情, 猶有眞意之洋溢者. …… 譬之則三百篇ㆍ초사(楚辭),漢魏以至盛唐李杜諸公, 其才雖有等差, 而皆是玉也. 玉亦有品之高下故也. 宋則珉也, 明則水晶琉璃之屬也.

 

 

이의현은 인용문에서 시의 정의, 시의 표준을 제시한 다음, 그 기준인 성정의 표현과 온유돈후한 풍격에 의거하여 역대 시를 평가하여 두보가 집성자이자 시의 정맥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송시도 성정을 잃지 않고 진실한 뜻이 표현되어 있어서 평가할 만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이의현은 존송파임에도 불구하고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인정한 바탕위에서 송시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존송파는 당시를 인정한 상태에서 송시를 얘기하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존송파는 이백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시작의 자연스러움과 재빠름[詩率意立成者], 두보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절묘(絶妙), 조탁미(彫琢美), 소식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기절(奇絶), 용사(用事)의 묘용(妙用), 신의(新意), 풍격(風格)의 측면에서 기개(氣槪), 호탕(浩蕩), 황정견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용사(用事)의 묘용(妙用), 환골탈태(換骨奪胎), 횡요생경(橫拗生硬), 풍격의 측면에서 기개(氣槪) 등에 대하여 평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존송파의 시론과 시평을 볼 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평론을 피상적으로 보면 모두 존당파와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평론 속에 이백과 두보의 우수한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존송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송파는 존당파에 비하여 송시의 특징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존송파는 송시(宋詩)를 추존하고 소식과 황정견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이인로는 소식과 황정견을 두보와 비견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지만, 당시(唐詩)에 비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관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소식과 황정견의 시가 모든 면에서 당시(唐詩)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고 당시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소식과 황정견이 두보, 이백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이백과 두보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존송파 역시 존당파가 파악했던 당시(唐詩)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최고의 시인으로 이백과 두보, 특히 두보를 상정하고 평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황산곡이 두보를 대단히 추존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송시(宋詩)가 당시(唐詩)보다 뛰어난 점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의론과 용사와 전고의 정확한 활용이고 다음으로는 환골탈태법을 통한 조어(造語)와 련자(鍊字)이다. 이에 대하여 존송파는 존당파보다 더욱 높게 평가하였고 한국에서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송시, 즉 소식과 황정견의 시가 추존한 주된 원인이었다고 사료된다.

 

 

 

4.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았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명대(明代)에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논쟁이 있었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종당파와 종송파의 논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고려후기와 조선전기까지는 존송시대였고 조선중기부터는 존당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처럼 유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존당과 존송으로 나눠져 그 평론을 전개하였다.

 

존당파는 당시(唐詩)에 대하여 성정과 흥기, 자연스러움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백의 성정과 두보의 조탁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백보다는 두보를 좀 더 높이 평가는 특징을 드러냈다. 반면에 소식 시의 산문화와 황정견의 습작에 대하여는 비평하였다.

 

존송파는 송시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의론과 용사, 전고의 정확한 활용, 조어(造語)와 련자(鍊字) 등을 높이 평가하고 황정견보다는 소식을 좀 더 높이 평가하였다.

 

존당파와 존송파의 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송파의 당시(唐詩)에 대한 관점인데 비록 존송파일지라도 성당의 두보를 최고로 인정한 상태에서 송시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존송의 입장을 견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존송의 입장은 김창협(金昌協)과 이의현(李宜顯)이 말한 것처럼 만당(晩唐)의 시()보다는 송시(宋詩)가 뛰어나고 당시(唐詩) 전체와 비교할 때는 송시가 상대적으로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존당파는 소식과 황정견에 대하여 의론과 전고의 다용을 지적하여 시가 산문화됨으로써 함축미가 줄어들었다고 비평하였고, 존송파는 성당의 시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중 두보를 더 인정하면서 존당파보다 두보의 조탁과 용사에 대하여 더욱 주목하고 높은 평가를 하였다. 이는 시가 발전상 상보적 발전의 한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唐詩)의 우수성을 수용하면서도 송시(宋詩)의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 속에서 송시 발전의 한 규범으로 두보 시를 더욱 주목하여 배움으로써 송시의 특색을 드러내어 존당과 존송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시의 새로운 경계를 개척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존당과 존송의 논쟁을 전개하면서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과 많은 시가 인용되어 분석됨을 볼 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장점에 대한 인식이 한ㆍ중에서 거의 비슷하고 이백과 두보, 소식과 황정견의 장점에 대한 인식도 비슷한 점이 많다. 본 논문이 존당과 존송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 영향관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참고문헌(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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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概要

 

韩中两国同属于东洋汉字文化圈在相当长的一段时间内各个方面都进行着广泛的交 流 文学方面亦是如此这其中最显著的交流之一便是诗文学方面的交流 诗在韩中两国都 曾有过极盛的繁荣期因而对诗的创作感想批评等有关内容进行著述的书籍便以诗话来 命名 诗话这个名字的由来最初是源于宋代欧阳修他首次将自己的诗话著作命名为六一 诗话诗话是对诗歌有关的闲谈以随笔的形式写成的一种独特的文体 这其中包括诗 的逸事和诗论 蔡镇楚从狭义和广义两方面对诗话进行定义狭义的诗话按其内容来说是诗歌之话就是关于诗歌的故事按其体裁而言就是关于诗歌的随笔体 广义的诗话乃是一种诗歌评论样式 凡属评论诗人诗歌诗派以及记述诗人议论行事的著作皆可 名之曰诗话 这样诗话中就存在着许多关于诗的论争和批评其中最重要的论争之一便是关 于尊唐和尊宋的论争 在韩国高丽后期到朝鲜前期是尊宋时期从朝鲜中期开始是尊唐时 期 虽然不能像中国那样发展成为一个诗派但是分化成为尊唐和尊宋两派并各自展开评 论 尊唐派对唐诗性情的自然表现和精巧评价极高与李白相比更加追崇杜甫 而尊宋派 在宋诗学问的基础上对灵活运用用事和典故来表现议论的评价极高比起黄庭坚对苏轼 的评价更高 在尊唐派和尊宋派的比较中最重要的一点是尊宋派虽然被称为尊宋派但 是在对唐诗的观点上他们认为盛唐诗和杜甫是至高无上的然在此基础上他们仍然肯定 宋诗的卓越坚持宋诗的立场 尊宋的立场就如同金昌协和李宜显所说的那样与晚唐诗相比的话宋诗可以说是很突出但与唐诗相比的话宋诗相对而言也具有突出特点

从韩国诗话引用大量中国著名诗话的内容和诗歌进行分析的情况来看韩国的尊唐和尊 宋论争受到了中国极大的影响 因而在对唐诗和宋诗长处的认知上韩中两国的观点几乎一 致在对李白和杜甫苏轼和黄庭坚长处的认知上也有着很多的相同点 但在高丽末期和 朝鲜初期宋诗在韩国得以尊崇这一特殊现象与中国的情况相接轨 但本论文是以尊唐和尊 宋问题为着重点对影响关系没能做出具体的分析因而将在下次对此进行讨论

 

中心语詩話, 唐詩, 宋詩, 用事, 詩法, 風格, 自然, 詩理, 詩味. 접수일자 2012.11.10 심사완료일 2012.12.04 게재확정일 2012.12.15

 

 

 

 

인용

목차 / 지도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

3.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2) 존송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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