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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 요왈 - 3. 명(命)과 예(禮)와 말을 알아야 한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 요왈 - 3. 명(命)과 예(禮)와 말을 알아야 한다

건방진방랑자 2021. 10. 1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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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 예()와 말을 알아야 한다

 

 

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程子: “知命者, 知有命而信之也. 人不知命, 則見害必避, 見利必趨, 何以爲君子?”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禮, 則耳目無所加, 手足無所措.

 

知言, 無以知人也.”

言之得失, 可以知人之邪正.

氏曰: “知斯三者, 則君子之事備矣. 弟子記此以終篇, 得無意乎? 學者少而讀之, 老而不知一言爲可用, 不幾於侮聖言者? 夫子之罪人也, 可不念哉?”

 

 

 

 

해석

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程子: “知命者, 知有命而信之也.

정이천(程伊川)이 말했다. “명을 아는 사람은 명()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믿는다.

 

人不知命, 則見害必避,

명을 알지 못하면 해로움을 보고서

 

見利必趨, 何以爲君子?”

반드시 달려드니 어찌 군자가 될 수 있겠는가?”

 

논어가운데 마지막 제20편이 요왈(堯曰)’편으로, 모두 3장이다. 그 제3장에서 공자는 온전한 인격을 갖춘 군자라면 지명(知命)ㆍ지례(知禮)ㆍ지언(知言)의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명(知命)을 맨 먼저 꼽았다.

공자는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고 했으니 지명(知命)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지명(知命)은 천명(天命)을 알고 그것에 편안함이다. 천명(天命)은 하늘이 명한다. 하늘이 명한 것에는 타고날 때 지니는 본성(本性),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의의(意義),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運命)이 있다. 운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자율성을 부정하게 되지만 어떤 경우라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태도를 취한다면 숙명론(宿命論)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인간 본성과 삶의 의의를 깨닫는 일은 현실을 살아나갈 의지를 다잡는 일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정이(程頤)는 지명(知命)의 군자라면 견리사의(見利思義)한다고 말했다. ‘()을 안다는 것은 명()이 있음을 알고서 믿는 것이다. ()을 알지 못하면, ()를 보면 반드시 피하고 이()를 보면 반드시 쫓을 것이니, 어떻게 군자일 수 있겠는가.’

술이(述而)’편에서 공자는 불의(不義)로우면서 부귀한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고 했다. 부귀재천(富貴在天)의 천명관(天命觀)에 근거하여 모든 불의(不義)와 결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팔일(八佾)’편에서는 위()나라 대부(大夫) 왕손가(王孫賈)집안 서남쪽의 신에게 아첨하기보다는 부뚜막 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라 하여 실세(實勢)인 내 도움을 받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말하자, 공자는 그렇지 않다. 하늘에 대해 죄를 얻으면 더 기도할 곳이 없다[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고 했다. 참람(僭濫)의 죄를 꾸짖고, 나는 천명(天命)을 존중하기에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천명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으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不知禮, 無以立也,

예를 알지 못하면 서질 못하며,

不知禮, 則耳目無所加,

예를 알지 못하면 귀와 눈을 집중할 곳이 없고

 

手足無所措.

손과 발을 둘 곳이 없다.

 

요왈(堯曰)’ 3장에서 공자는 온전한 인격을 갖춘 군자라면 지명(知命)ㆍ지예(知禮)ㆍ지언(知言)의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가운데 지예(知禮)는 한 인간이 자주적으로 독립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고 했다. ‘태백(泰伯)’ 편에서 공자는 ()에서 도의적 감흥을 일으킨 후 예()에서 인륜의 규범을 바로 세워 인격체로서 독립하고서 악()을 통해 품성을 완성한다3단계 학습론을 제시했는데, 입어례(立於禮)를 그 두 번째 단계로 설정했다.

()는 개인이 몸에 지녀야 할 예절,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질서를 뜻한다. , 개인의 행동거지(行動擧止), 관혼상제(冠婚喪祭) 등과 기타 사회적 관습, 국가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공자는 안연(顔淵)’ 편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라 했고, ‘헌문(憲問)’ 편에서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다스리기 쉽다[上好禮, 則民易使也].’라고 할 만큼 예를 중시했다. 그런데 팔일(八佾)’ 편에서는 예의 형식에 구애되는 것을 경계하여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다라고 해서, 충신(忠信)의 내용이 우선이고 예법은 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자는 곳곳에서 예의 절제를 받지 않으면 어떤 덕목도 바르게 구현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태백(泰伯)’ 편에서는 공이무례즉로(恭而無禮則勞)하고 신이무례즉사(愼而無禮則葸)하고 용이무례즉란(勇而無禮則亂)하고 직이무례즉교(直而無禮則絞)이니라라고 했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고달프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려우며,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문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박절하다는 뜻이었다. ‘예기’ ‘중니연거(仲尼燕居)’ 편에서도, 공경하되 예에 맞지 않으면 야(), 공손하되 예에 맞지 않으면 급(, 아첨함), 용감하되 예에 맞지 않으면 역()이라 했다.

 

···덕목을 갖춘 당당한 주체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예를 중시해야 하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知言, 無以知人也.”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言之得失, 可以知人之邪正.

말의 득실로 사람의 사악하고 바름을 알 수 있다.

 

氏曰: “知斯三者, 則君子之事備矣.

윤순(尹淳)이 말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군자의 일이 완비된다.

 

弟子記此以終篇,

제자가 이것을 기록함으로 한 편을 마쳤으니

 

得無意乎?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겠는가?

 

學者少而讀之,

배우는 사람이 적게 그것을 읽어

 

老而不知一言爲可用,

늙어서 한 마디 말도 쓸 만한 것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不幾於侮聖言者?

성인의 말을 모욕하는 사람에 가깝지 않겠는가?

 

夫子之罪人也, 可不念哉?”

그러하다면 부자의 죄인이니 유념하지 않겠는가.”

 

요왈(堯曰)’ 3장에서 공자가 군자의 조건으로 거론한 지명(知命)ㆍ지례(知禮)ㆍ지언(知言)의 셋 가운데 마지막 지언(知言)에 관한 내용이다. 지언(知言)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어떤 심경에서 나왔는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일을 뜻한다. ‘안연(顔淵)’편에서는 통달이라고 하는 것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정의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가려듣고 안색을 살펴서 사려하여 상대방에게 겸손하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라고 했으니, 이때의 찰언(察言)이 곧 지언(知言)이다.

공자는 언어가 내면의 진실을 담아내야 한다고 여겼다. ‘학이(學而)’편에서는 말 잘하고 얼굴빛을 잘 꾸미는 자 가운데는 어진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고 하여 내실 없이 말만 잘하는 자를 경계했다. ‘선진(先進)’편에서는 말을 하면 반드시 사리에 들어맞는다는 뜻의 언필유중(言必有中)이란 성어가 나왔다. ‘헌문(憲問)’편에서는 내면에 덕을 지닌 사람은 선언(善言)을 하지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내면에 덕을 갖춘 것은 아니다[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라고 했다.

상대방의 말이 교언(巧言)이 아닌지, 그 말이 사리에 맞는지, 말하는 사람이 유덕자(有德者)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일이 모두 지언(知言)에 관계된다. ‘맹자’ ‘공손추(公孫丑)’에서는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고 했는데 주자학에 따르면 상대방의 말을 아는 일은 궁리(窮理)의 지() 공부에, 인의(仁義)의 행실을 쌓아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은 수신(修身)의 행() 공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논어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다. 윤순(尹焞)은 말했다. ‘배우는 자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책을 읽었어도 쓸 만한 말씀을 한마디도 알지 못한다면,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는 공부자의 죄인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學者少而讀之, 老而不知一言爲可用, 不幾於侮聖言者? 夫子之罪人也, 可不念哉].’ 우리는 논어의 말씀을 이용하여 내 삶을 윤택하게 하고 나를 둘러싼 현실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고작 공부자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인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목차 / 전문 / 편해 /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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