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李石亨)ㆍ성간(成侃)ㆍ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ㆍ이승소(李承召)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ㆍ성현(成俔)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 활약하여 문명(文名)으로 일세를 울렸다.
그러나 호방(豪放)한 김수온(金守溫)과 평이(平易)한 성현(成俔)의 문장은 모두 후에 평가(評家)들의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시업(詩業)으로 떨치지는 못했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ㆍ김시습(金時習) 등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시세계를 이룩하면서 소단(騷壇)의 대가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와 김종직(金宗直)의 문(文)이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서거정(徐居正)은 훈구관료(勳舊官僚)의 전형(典型)으로, 김종직(金宗直)은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표로 또는 사림파(士林派)의 사종(師宗)으로 단정하여 신진관료(新進官僚)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학은 훈구관료층의 문학과는 성격까지도 달리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임형택(林熒澤), 「조선양반관료사회(朝鮮兩班官僚社會)의 문화(文化)」, 國史編纂委員會編韓國史제11권】. 김종직(金宗直)은 지방에서 관료로 진출한 새로운 인물이므로 신진관료(新進官僚)와 훈구관료(勳舊官僚)는 이해가 상충되고 기질(氣質)도 서로 달라 문학도 그러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신진(新進)과 훈구(勳舊)는 정치 현실의 선후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뿐,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간섭하는 요인일 수는 없다.
문학은 개성이다. 그러므로 계층간의 대립은 있을 수 있지만 개성의 문학세계에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열을 다투는 적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림파(士林派)의 ‘사림(士林)’과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산림(山林)’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류정치(士類政治)로 일관해온 전통사회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만이 사림(士林)일 수 있다는 논리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김수온(金守溫, 1409 태종9~1481 성종12, 자 文良, 호 乖崖ㆍ拭疣)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문장은 호방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거니와, 시작(詩作) 역시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거칠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다음의 「술악부사(述樂府辭)」를 보면, 시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다방면(多方面)에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十月層氷上 寒凝竹葉栖 | 시월달 꽁꽁 언 얼음 위에, 서릿발이 댓닢자리에 엉겼네. |
與君寧凍死 遮莫五更鷄 | 님과 함께 얼어 죽을망정, 새벽 닭이야 울거나 말거나. |
이 시는 제목과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를 한시로 옮긴 소악부(小樂府)이다.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의 원사(原詞)는 다음과 같다. “어름우힛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덩 어름우힛 댓닙자리 보와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情둔 오낤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농도 짙은 사랑 노래를 한시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는 억제되고 있으며 제명(題名) 그대로 ‘악부(노래)를 풀이한 시’에서 그치고 있다.
성간(成侃, 1427 세종9~1456 세조2, 자 和仲, 호 眞逸齋)은 형 임(任), 아우 현(俔)과 더불어 일세(一世)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며 특히 그는 학문에 포부가 커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다. 30세에 요절하여 많은 시작(詩作)을 남길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조선 초기에 드물게 보이는 의고시인(擬古詩人)으로 꼽힌다. 「효도징군(效陶徵君)」(五古), 「효안특진(效顔特進)」(五古), 「효포참군(效鮑參軍)」(五古) 등이 모두 그러한 작품이다. 특히 그는 당인(唐人)의 악부제(樂府題)를 차용하여 「나홍곡(羅嗔曲)」(五絶) 12수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밖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중(道中)」(七), 「유성남(遊城南)」(七絶), 「궁사(宮詞)」(七) 등도 당시(唐詩)의 유향(遺響)을 쉽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나홍곡(羅嗔曲)」(其一)은 다음과 같다.
爲報郞君道 今年歸不歸 | 낭군에게 말씀 드리오니, 올해는 돌아 오실는지요? |
江頭春草綠 是妾斷腸時 | 강가에 봄 풀 푸를 때, 첩의 애가 끊어진답니다. |
「나홍곡(羅嗔曲)」은 오언사구(五言四句)의 악부(樂府)로 당(唐) 문종(文宗) 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망부가(望夫歌)」라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지금 곁에 있지 않는 남성을 그리는 여인의 심정을 읊조린 것이다. “금년귀불귀(今年歸不歸)”, “강두춘초록(江頭春草綠)”은 왕유(王維)의 「송별(送別)」에서 의경(意境)을 얻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점화(點化)의 솜씨는 일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귀불귀(歸不歸)’는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도중(道中)」은 다음과 같다.
籬落依依半掩扃 | 울타리는 무너져 반나마 문을 가렸는데, |
斜陽立馬問前程 | 빗긴 해에 말 세우고 갈길을 묻는다. |
翛然細雨蒼烟外 | 저녁 연기 저편으로 갑자기 가랑비 내려 |
時有田翁叱犢行 | 어떤 농부 송아지를 재촉하며 가네. |
정도전(鄭道傳)의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를 다시 보는 듯한 작품이다. 그림같이 영롱(玲瓏)한 당시(唐詩)의 풍격(風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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