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바뀌어졌지만 소식(蘇軾)의 뒤를 이은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 강서시파(江西詩派)의 활약으로 송시(宋詩)의 특색을 두드러지게 했다. 이들은 당시(唐詩) 정통을 거부하고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숭상하여 신풍(新風)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발(奇拔)함에 치우치다가 궤벽에 빠지거나, 참신을 다가 생경(生硬)을 드러내어 시(詩)의 품위를 저상(沮喪)케 하는 일도 있어 왔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명(明) 이동양(李東陽)은 천진(天眞)을 잃은 포풍착영(捕風捉影)의 시풍(詩風)이라 하여 혹평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시(詩)는 고려 중기 이후 200년 동안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조선조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강서시파(江西詩派)와 비슷한 시풍(詩風)이 유행하여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이 서로 경향을 같이하면서 신풍(新風)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선조 때의 대표적인 시인 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 등도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자주 시험하고 있어 때로는 이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상(朴祥)ㆍ김정(金淨)ㆍ신광한(申光漢)도 모두 같은 시대에 소단(騷壇)을 빛낸 주역들이지만 특히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은 같은 시대에 같은 경향으로 시(詩)를 써 각각 조선조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칭송을 받았다. 물론 평가(評家)들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서는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풍(詩風)으로 시(詩)를 써서 양인(兩人)이 모두 조선조 제일의 시인으로 기림을 받았다면, 이러한 시(詩)의 경향은 이행(李荇)이나 박은(朴誾)과 같은 시재(詩才)에 의해서만 성공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며 뒤집어 말하면 우리나라 시인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唐詩)보다 송시(宋詩) 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 등이 간헐적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신경(新警)을 시험한 것도 우리나라 한시가 이때에 이르러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박은(朴誾, 1479 성종10~1504 연산10, 자 仲悅, 호 挹翠軒)은 15세에 이미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18세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힐 만큼 재주를 타고 났다. 풍채가 청수하여 마치 신선(神仙)을 방불했다 하며 신용개(申用漑, 申叔舟의 孫子)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26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을 당했으므로 그의 유고(遺稿)는 시집(詩集) 2책(冊)이 있을 뿐이다.
박은(朴誾)은 이행(李荇)과 주고 받은 시편(詩篇)이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거니와 시작(詩作)의 태반이 이행(李荇)과 증답(贈答)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작도 대개 이행(李荇)과 주고 받은 시편(詩篇) 속에 있다. 후세 선문가(選文家)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는 「우중회지(雨中懷之)」(五律), 「효망(曉望)」(五律), 「화택지(和擇之)」(七律), 「복령사(福靈詩)」(七律), 「증택지(贈擇之)」(七律), 「영보정오수(永保亭五首)」(七律), 「야와유회사화(夜臥有懷士華)」(七律), 「기택지(寄擇之)」(七律) 등이 있으며 이것들도 그 절반이 이행(李荇)과 증답(贈答)한 것이다.
「복령사(福靈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伽藍却是新羅舊 | 가람(伽藍)은 신라의 옛 것이요 |
千佛皆從西竺來 | 천불(千佛)은 다 서축(西竺)에서 모셔온 것, |
終古神人迷大隈 | 예로부터 신인(神人)도 대외(大隈) 만나려다 길을 잃었거니 |
至今福地似天台 | 지금의 이 복지(福地)도 천태(天台)와 같네. |
春陰欲雨鳥相語 | 봄날 흐려 비오려 하니 새가 먼저 속삭이고 |
老樹無情風自哀 | 늙은 나무는 정(情)이 없는데 바람이 스스로 슬프게 하네. |
萬事不堪供一笑 | 세상만사 일소(一笑)에 붙일 것도 못되지만 |
靑山閱世自浮埃 | 청산도 세상을 지내느라 스스로 먼지 위에 떠있네. |
1502년의 작품으로 박은(朴誾)의 대표작이다. 박은(朴誾)의 시(詩)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는 모두 그의 타고난 높은 재주를 칭도하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다. 비록 황진(黃陳)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의 뛰어난 재주가 스스로 그렇게 얻어낸 것이라 하였다.
특히 이 「복령사(福靈詩)」의 “춘음욕우조상어 노수무정풍자애(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28에 ‘비장노건(悲壯老健)하고 청신경절(淸新警絶)하여 이규보집(李奎報集) 같은 데서 어찌 한마디라도 이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悲壯老健 淸新警絶 如李奎報集中 那得有一語似此]?’라 반문하였으며, 허균(許筠)도 『성수시화(惺叟詩話)』 29에서 이 구(句)에 대해서는 신조(神助)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구(句)는 인간이 천기(天機)를 누설한 것이므로 그가 단명(短命)했다고도 하며 그래서 호사가(好事家)들은 이를 가리켜 단명구(短命句)라고도 했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29에서 특히 박은(朴誾)의 시(詩)를 정성(正聲)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이는 그의 당시(唐詩) 정통론이 논시(論詩)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애는 26년에서 그쳤지만, 그의 ‘청신(淸新)’에 못지 않게 세련의 극치를 보인 ‘노숙(老熟)’은 분명 나이를 초월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청산도 오래도록 세상을 지내노라니 뿌옇게 세상 먼지 위에 떠있다고 한 미련(尾聯) 하구(下句)의 솜씨는 경련(頸聯)의 신경(新警)과 좋은 대조를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함련(頷聯)에서 ‘종고(終古)’, ‘지금(至今)’과 같은 허자(虛字)로 대우를 맞추고 있는 기법은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높은 수준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박은(朴誾)과 신교(神交)를 맺은 사이로 알려진 시우(詩友) 이행(李荇)에게 준 「재화택지(再和擇之)」이다.
深秋木落葉侵關 | 깊은 가을 떨어진 잎이 문간에 침노하고 |
戶牖全輸一面山 | 창문으로 온통 산을 통째로 들여 보내네. |
縱有盃尊誰共對 | 비록 술이야 있지만 누구와 함께 대작할까? |
已愁風雨欲催寒 | 벌써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스럽네. |
天應於我賦窮相 |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를 내려 주었으련만, |
菊亦與人無好顔 | 국화 또한 사람과 같이 좋은 얼굴이 없네. |
撥棄憂懷眞達士 | 근심 걱정 내던지는 것이 진정한 달사(達士)이니, |
莫敎病眼謾長潸 | 병든 눈에 부질없이 눈물 흐르게 하지 마오.. |
1502년 파직되었을 때의 작품이다. 가을과 작자의 처지를 한묶음으로 처리하여 비감(悲感)을 더하고 있는 솜씨가 일품이다. 허자(虛字)의 적절한 사용이 자연스럽거니와 세속의 인정을 무리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도 친근감을 준다. 특히 경련(頸聯)은 황정견(黃庭堅)의 시(詩)와 흡사하다고 남용익(南龍翼), 『호곡시화(壺谷詩話)』 6번에서 했던 평도 있지만, 여기서도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모습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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