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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표류하는 고려 -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영업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영업전)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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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쉽다.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답이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건 사실이나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므로 명장이든 졸장이든 장수는 아니다. 이렇듯 문관이 안팎에서 벌어진 전란의 해결사로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터이다.

 

960년에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자신이 후주의 절도사라는 신분으로 새 왕조를 건국했기에 처음부터 문치주의를 앞세웠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5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군에서 전역하면서 두 번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는데, 1천 년 전 중국의 조광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행여 다른 절도사가 자신의 흉내를 내면 안 될 테니까. 이런 중국의 분위기는 그대로 고려에 전해진다. 광종(光宗)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해 호족의 군대 조직을 약화시키고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해 관료 사회를 앞당기려 한 게 바로 문치주의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의도가 지나쳐 과거 과목에 무과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이른바 양대업(兩大業)이라 불렸던 명경(明經)과 제술(製述)이니, 오로지 글을 읽고 쓰는 것만 중시했던 셈이다. 사실 호족 세력이 강력하게 남아있었던 초기 고려의 상황에서는 과거에 굳이 무과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다. 모든 무장들은 지역의 지배자인 호족 휘하에 있으면서 그 호족을 왕처럼 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 필요한 군사력 외에 특별히 무관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호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다시 말해 고려가 중앙집권적 왕국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현실은 변하는데 제도는 변하지 않는다. 몸은 자라는데 옷은 바뀌지 않는다. 그 점을 감지한 예종이 1109년 과거에 무과를 포함시켜 새 옷을 맞춰 주었으나 얼마 못 가서 인종 때인 1133년에 다시 낡은 옷을 걸쳐 입는다(무과가 다시 부활하는 건 조선시대의 일이다)아마 이렇게 수구적인 자세로 되돌아간 데는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이 남긴 후유증이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척준경마저 제거하고 난 뒤 인종과 개경 귀족들은 역시 유교적 국가 체제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소폭의 체제 개편을 실시했다.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鄕學)이라는 유학 교육기관을 세우고 서적소를 설치해서 유학자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낼 루트를 설치한 게 그것이다. 그 마무리 작업이 바로 예종이 도입했던 무과의 과거, 즉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한 조치다. 이런 제도에서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상장군(上將軍)이었으나 이는 정3품의 벼슬일 뿐이니 2품 이상은 꿈도 꿀 수 없다. ‘무관이 되지 못하는 무장은 좋게 말해 전투 기술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싸움꾼일 따름이다.

 

 

공민왕릉(황해북도 개성) - 출처: 우리역사넷

 

 

그나마 생활의 안정이라도 보장된다면 승진의 꿈은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것마저 불안하다. 무신의 봉급은 그들에게 주어진 영업전(永業田)이라는 토지다. 군인들은 현직에 있는 한 영업전의 수조권을 가지고 있었고, 죽은 뒤에도 식구 중에 군인직을 승계하는 자가 있으면 이 권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직업[]을 계속하는 한 영구히[] 소유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영업전이다). 전란이 많았던 초기에 군인의 역할이 컸던 만큼 당연히 영업전의 수혜 폭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굴러간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거란의 침략을 받은 현종 때 변방에서 공을 세운 상장군 김훈(金訓, ?~1015)과 최질(崔質, ?~1015)은 내심 문관 승진을 기대했다(무관은 정3품이 한계니까 그 이상을 원하면 문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층인 문관들은 전혀 그들을 승진시켜줄 마음이 없는 데다 현종은 나라를 지키는 데 유교와 불교의 힘(문묘종사와 대장경)이 군인의 힘보다 더 낫다고 믿는 군주다. 가뜩이나 불평과 불만이 팽배한 그들에게 좌절을 넘어 분노를 안겨준 사건은 1014년에 문관들이 경군(京軍, 수도 경비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부족한 문관들의 녹봉에 충당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비를 빼다가 공무원 연금으로 전용한 격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은 없다고 판단한 김훈과 최질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에 쳐들어가 그 정책을 지휘한 문관들을 잡아죽이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 최초의 군사쿠데타는 5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서경의 책임자인 왕가도(王可道, ?~1034)가 서경에서 파티를 열고 현종과 그들을 초대한 후 거기서 그들 일당을 도륙해 버린 것이다(이처럼 개경이 쿠데타 세력에 넘어가도 서경이 또 다른 수도로 기능할 수 있었기에 묘청妙淸의 난도 가능했던 거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듯 국가는 문무의 날개로 굴러간다. 이럭저럭 위기는 넘겼지만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인식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으니 어차피 위기는 또 닥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이 끝나고 군인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일단 그 모순은 유예된다. 윤관(尹瓘)9성을 쌓을 때 잠시 있었던 여진과의 다툼은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고, 금나라와 형제관계가 군신관계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다시 모순은 잠복한다. 대외적인 문제가 일단락된 후 이자겸(李資謙)과 묘청의 내전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모순이 바로 발동했으리라. 군인들은 여전히 제 몸값을 못 받고 있고, 여러 차례의 전란을 통해 발언권은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사태가 끝난 뒤 드디어 그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필연이다. ‘군사쿠데타의 조건은 숙성되고 있다. 다만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외척을 제거하고 묘청의 난으로 서경 세력을 제거한 뒤 독주 태세를 갖춘 개경 귀족들만 그런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심한 청자 나라가 안팎의 위기를 맞았어도 문화의 발달은 무심하기만 하다. 위쪽은 11세기 초반에 등장한 비색청자이고 아래쪽은 그 직후에 제작되기 시작한 상감청자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청자가 탄생한 시기였지만 그 배경에는 흥청거리는 개경 귀족의 향락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도 귀족들의 재정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면, 결국 예술은 모두 그런 배경을 가지는 걸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쿠데타의 조건

한 세기를 끈 쿠데타

하극상의 시대: 윗물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틀을 갖춘 군사독재

격변의 동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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