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백이와 숙제는 묵은 원한으로 괴롭히지 않았다
5-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와 숙제는 사람들이 저지른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5-22. 子曰: “伯夷ㆍ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
임마누엘 칸트의 신(神)의 실존(實存, die Existenz Gottes)에 대한 문제의식은 바로 인간의 도덕성(Sittlichkeit)과 행복(Glückseligkeit)의 불일치라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선업(善業)을 쌓는 인간에게 그 선업에 비례하여 행복이 보장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이란 현세에 사는 이성 존재자가 자기의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Glückseligkeit ist der Zustand eines vernünftigen Wesens in der Welt, dem es im Ganzen seiner Existenz alles nach Wunsch und Willen geht, und beruht also auf der übereinstimmung der Natur zu seinem ganzen Zwecke, imgleichen zum wesentlichen Bestimmungsgrunde seines Willens. 『실천이성비판』 224).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의욕과 행복한 상태는 자연적 현실 속에서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적 현실은 이러하질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이성의 실천적 과제에 있어서는, 다시 말해서, 최고의 필연적 추구에 있어서는 도덕과 행복의 연관은 필연적인 것으로 요청된다. 따라서 최고선이 가능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관의 근거, 즉 도덕성과 행복이 엄밀히 조화되는 근거를 내포하는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생존이 요청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행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끊임없이 도덕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언젠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행복을 보장해 주리라는 우리의 신념을 가능케 하는 선(善)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존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史記)』 열전에 「백이열전(伯夷列傳)」을 그 관(冠)으로 삼은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칸트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천도는 공평무사해서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라고 하였다.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처럼 인덕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내 굶어죽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랴! 70문도 중에서 공자는 오직 안 하나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항상 가난해서 조강 같은 거친 음식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상해준다고 한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빼내어 회쳐먹으며 포악무도한 짓을 자행하였다.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끝내 천수를 다 누리고 나는 이 죽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떠한 덕행에 의거한 것이란 말인가? …… 나는 이에 대해서 매우 의혹스러움을 느낀다. 만약에 이런 것이 이른바 천도라고 한다면 그 천도는 과연 맞는 것인가? 틀린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ㆍ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穅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 余甚惑焉, 償所謂天道, 是邪非邪?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금의 정의파의 대표로서 사마천 『사기(史記)』 열전(列傳)의 제1권에 보이는 형제의 인물이다. 이름의 글자가 말해주듯이 백이(伯夷)가 형이요, 숙제(叔齊)가 동생이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국왕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우 숙제를 다음 왕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였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었다[父命也]’라고 말하면서 마침내 피해 가버렸고, 숙제도 왕위에 오르지 않고 피해 가버렸다. 이에 나라 안의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둘째 아들(백이와 숙제의 가운데 아들)을 옹립하였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 창(昌)이 장자를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의지하고자 하였다【창(昌)이 곧 주(周)의 문왕(文王)이다】. 가서 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추존한 아버지의 나무 위패를 수레에다 받들어 싣고 동쪽으로 은(殷)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고 있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다음과 같이 간하는 것이었다[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爲文王, 東伐紂. 伯夷ㆍ叔齊叩馬而諫曰:].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를 효라고 말할 수 있겠나이까?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이를 인하다 말할 수 있겠나이까?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弑君, 可謂仁乎?
그러자 무왕 좌우에 있던 시위자들이 그들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이때 군사(軍師)였던 강태공(姜太公)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此義人也]”라고 하며,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그 후 무왕이 은란(殷亂)을 평정한 뒤, 천하는 주(周)왕실을 종주로 섬겼지만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薇]를 꺾어 배를 채웠다. 마침내 이들은 수양산에 서 굶어 죽고 말았다.
미국정부의 비도덕적 행태에 대하여 시민의 불복종 권리(civil disobedience)를 주장한 헨리 써러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도 미국문명을 버리고, 월든 폰드(Walden Pond) 곁의 숲 속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나는 미국 유학시절 그 오두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어버린 써러우의 캐빈터를 자주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백이ㆍ숙제를 생각했다. 그러나 써러우와 백이ㆍ숙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써러우는 초월주의자 (Transcendentalist)였던 절친한 친구며 그 지역의 부자였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재정적 후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문명의 모든 것을 단절시켰다. 써러우는 살았고, 백이와 숙제는 죽었던 것이다.
인간의 절개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절개 때문에 생명을 던지는 것, 오늘날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도 같은 수절(守節)의 강도를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절개와 충의는 특히 혁명(革命)의 시대에는 하나의 문제상황이 된다. 절개가 곧 충의가 되는가 하면 동시에 반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의란 강자의 편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The just is nothing else than the advantage of the stronger.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의 유명한 말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공민왕에게는 충의를 지켰지만 이성계에게는 역도였다. 그리고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선죽교에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그는 절개가 드높은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은 바로 그를 죽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태종 1년의 사건이었다. 혁명(革命)의 시대가 지나면 다시 수명(守命)의 시대가 온다. 수명(守命)의 시대가 오면 아쉬운 것은 바로 역도의 누명을 쓰면서까지 절개를 지킨 충신들의 의로움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백이와 숙제의 절개는 주나라 역사를 통하여 가장 드높은 충의로서 칭송되었다.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600년 전의 이 고결한 인품에 대한 존경심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 또한 이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늦추지 않는다. 이 장 이외에도, 「술이(述而)」 14, 「계씨」 12, 「미자(微子)」 8에 언급이 있으나, 세속적 관념에 대한 이설을 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편집상의 맥락을 따라간다면 영무자의 우(愚)와 백이숙제의 절개는 같은 주제의 흐름을 타고 있다.
‘불념구악(不念舊惡)’이란, 남들이 나에게 저지르는 잘못들, 당할 때는 괴롭고 원망스러운 것이지만 이미 흘러가 버리게 되면 그것을 꽁하게 나의 의식 속에 간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악을 기억치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현자가 아니면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구악(舊惡)을 기억하기 때문에 서로가 원망 속에 빠져 저주스러운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먹으며 굶어죽는 순간까지도 무왕의 악(惡)을 기억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백이와 숙제의 삶으로부터 감동을 받는 측면은, 즉 사마천이라는 위대한 사가(史家)가 백이와 숙제를 『사기(史記)』 열전의 관(冠)으로 앉힌 이유는, 바로 위대한 주(周)나라의 성립의 배면(背面)의 진실을 백이ㆍ숙제가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이ㆍ숙제와 같은 현인(賢人)들이 은(殷)의 마지막 왕 주(紂)를 정벌하러가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간(諫)했다고 한다면, 후대의 주나라의 입장에서 기술한 폭군 주(紂)의 모습과는 달리, 주(紂)임금의 훌륭한 측면 또한 백이ㆍ숙제의 간언(諫言) 속에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규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을 재차 확인케 되는 것이다.
위대한 인간의 삶에는 끊임없이 저주의 화살이 꽂힌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화살들, 그리고 용렬한 소인배들의 배신의 비수들, 참으로 들끓어 오르는 분노의 대상들이지만 그 구악(舊惡)들을 기억치 않는다는 것은 나의 생명과 나의 승리의 구가이다. 백이와 숙제는 구악을 기억치 않았다.
역대의 주석은 다음 구절의 해석에서 엇갈리고 있다. 우선 신주는 ‘원시용희(怨是用希)’의 원(怨)을 타인들의 백이ㆍ숙제에 대한 원망으로 풀었다[人亦不甚怨之也]. 즉 백이ㆍ숙제는 남들이 자기들에게 저지른 지난 잘못들을 기억치 않았기 때문에 남들의 원망을 사는 일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원시용희(怨是用希)’의 ‘시용(是用)’은 ‘시이(是以)’ ‘시고(是故)’의 뜻이다. ‘그러하기 때문에’의 뜻이다. ‘용(用)’이 ‘이(以)’의 뜻으로 쓰인 예는 『논어』에 많지는 않다. 「학이(學而)」 12의 ‘예지용화위귀(禮之用和爲貴)’의 ‘용(用)’의 용법이 그러했고(고주의 입장을 따르면), 「자한」 26에 인용된 시, ‘하용부장(何用不臧)’의 용례가 그러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원한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라는 맥락에서 해석했다. 즉 원(怨)의 주체를 백이ㆍ숙제 자신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술이(述而)」 14에 나오는 ‘구인득인(求仁得仁), 우하원호(又何怨乎)?’【『논어』의 현존문구는 ‘구인이득인(求仁而得仁), 우하원(又何怨)?’이다】를 같이 인용한다. 이것은 또 ‘백이와 숙제는 인을 구해서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랴!’는 식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들의 삶에 원망이 없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죽기 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속엔 원망의 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登彼西山兮, | 저 서산에 올라 |
采其薇矣. | 고사리나 캐자꾸나. |
以暴易暴兮, |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었네, |
不知其非矣. | 근본이 잘못된 것조차 깨닫질 못하니. |
神農虞夏忽焉沒兮, | 신농ㆍ우ㆍ하의 시대가 홀연히 사라지는구나. |
我安適歸矣? |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꼬? |
於嗟徂兮, | 아! 슬프도다, 죽음만이 우리를 기다린다. |
命之衰矣! | 스러질 뿐인 우리의 천명이여! |
사마천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마지막 해답은 무엇인가? 인간의 도덕성과 행복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칸트는 신의 실존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신의 실존을 요청하지 않는다. 바로 사마천이 요청한 것은 역사의 실존이다. 역사의 실존이란, 곧 역사의 도덕성을 구현하는 위대한 소수들의 정직한 판단이다. 바로 이 장의 백이숙제에 대한 공자의 평어야말로 백이숙제가 역사에서 그 위대한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판단의 집적에 의하여 인간세의 정의는 구극적으로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요청을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雲從龍, |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
風從虎, |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
聖人作而萬物覩. | 그처럼 성인이 나타나면 이에 따라 세상만물의 모습이 모두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
‘백이(白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맹자는 이들을 칭(稱)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악한 사람의 조정에서 서지도 아니 하며, 악인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아니 한다. 향당의 사람들과 서있을 때에도 그들의 관이 바르지 못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며 마치 그들의 바르지 못함이 자신을 더럽힐까 생각하였다.” 그 절개가 이와 같았으니, 포용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워하는 사람이 허물을 고치기만 하면 미워하는 마음을 즉시 그쳤다. 그러므로 사람들 또한 그를 심히 원망치 않은 것이다.
伯夷ㆍ叔齊, 孤竹君之二子. 孟子稱其“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 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 其介如此, 宜若無所容矣, 然其所惡之人, 能改卽止, 故人亦不甚怨之也.
○ 정이천이 말하였다: “남이 나에게 저지른,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깨끗한 사람의 도량이다.”
○ 程子曰: “不念舊惡, 此淸者之量.”
그리고 또 말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을 부자가 아니 셨다면 그 누가 알리오!”
又曰: “二子之心, 非夫子孰能知之?”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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