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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5부,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5부,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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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말똥구리에서 코끼리까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螗琅自愛滚丸, 不羡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

 

 

이 글은 연암의 벗이자 제자인 이덕무(李德懋)의 것으로, 연암이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재인용하면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된 아포리즘(aphorizm)이다.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따라 달라질 따름이다. 지극히 낮고 천한 미물인 말똥구리와 신화적 상상력에 감싸인 여룡을 대비함으로써 그 효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렇게 정리하면 참 범박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중세적 초월론을 내파하는 뇌관이 잠복해 있다. 초월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대상들의 차이를 하나의 초월적 기호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런 지반에서는 한, 모든 차이는 다양성이 아니라 엄격한 위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즉 말똥구리는 절대 여룡과 같은 평면에서 비교될 수 없다. 이덕무는 바로 그러한 위계와 구획의 장을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 또한 동물의 수사학을 즐겨 사용하였다. 동물에 각별한 관심이 있기도 했고, 열하로 가면서 온갖 진기한 동물들을 두루 접하기도 한 덕분이다. 개중에는 낙타처럼 인연이 영 꼬이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한번은 말 위에서 졸다가 놓치고, 또 한번은 사나운 바람이 일어 사관에 들어 한숨 자다 나왔더니, 일행이 낙타 수백 마리가 철물을 싣고 금주로 가데그려한다. 아뿔사! 하지만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낙타를 보고야 만다. 그것도 떼거리로 지나가는 걸.

 

그가 가장 주목한 동물은 코끼리다. 연행 동안 연암은 두 번에 걸쳐 코끼리를 직접 볼 기회를 갖는다. 한번은 열하에 있는 선무문(宣武門) 안 상방(象房)에서. 또 한번은 북경 선무문 상방에서. 지금처럼 영상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는 시대에도, 막상 직접 보면 그 덩치와 몸집에 압도당하는데, 서적이나 소문으로만 듣던 시대에 지구상 가장 큰 동물을 직접 보게 된 충격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열하에서 처음 보았을 때, 코끼리 두 마리가 열하 행궁 서쪽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서 마치 풍우가 움직이는 듯하다고 표현한 걸 보면,

 

잠시 동물의 왕국(KBS 1)에서 본 코끼리의 생태 몇 가지, 코끼리의 몸집은 정말 크다. 그런데 그렇게 우람한데도 초식동물이고, 게다가 우애가 넘치는 족속이다. 못에서 함께 목욕할 때 코를 서로 부비며 애무해주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한번은 초원을 이동하는데, 아기 코끼리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가 없었다. 무리들을 따라 가족들이 먼저 떠나다가 몇 번이고 돌아보더니 결국은 다시 돌아와 양쪽에서 감싸더니, 부축하며 간다. 그렇게 힘겹게 가다가 어느 순간 아기 코끼리가 다리를 펴고 걷는 게 아닌가. , 그 감동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더 재미있는 건 코끼리의 파트너가 바로 쇠똥구리라는 사실이다. 쇠똥구리는 코끼리의 똥을 돌돌 말아 식량으로, 혹은 구애의 선물로 삼는다. 코끼리가 멸종되면 쇠똥구리는 먹을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다. 결국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바나의 코끼리들은 사막을 가로지르며 초식동물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물길을 찾아주는 사바나의 지킴이. 맹수의 왕 사자도 코끼리떼한테는 감히 덤비지 못한다. 힘도 힘이지만, 코끼리떼가 아니면 사막 깊숙이 숨어 있는 물웅덩이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용맹과 지혜를 두루 갖춘 셈인데, 그래서 불교에서 코끼리를 가장 높은 수행의 상징으로 삼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연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에 따르면, 코끼리의 힘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강희제 때 남해자(南海子, 북경 숭문문崇文門) 남쪽에 있는 동산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길들일 수가 없어서 황제가 노하여 범을 코끼리 우리로 몰아넣게 했더니, 코끼리가 몹시 겁을 내어 코를 한 번 휘두르자 범 두 마리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코끼리가 범을 죽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범의 냄새를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 게 잘못 부딪쳤던 것이라나[象非有意殺虎也, 惡生臭而揮鼻誤觸也]. 역대 황제들은 이 거대한 동물을 복종시킴으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연암이 전하는 동물의 왕국: 코끼리편은 이렇다.

 

 

상방에는 코끼리 80마리가 있는데 몇 품의 녹봉을 받는다. 조회 때는 백관이 오문으로 들어오기를 마치면, 코끼리가 코를 마주 엇대고 문을 지킨다. 그러면 아무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다. 나는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부채와 환약 한 알을 주고 코끼리 재주를 한번 시켜보라 했더니 그 작자는 대가가 적다며 부채 한 자루를 더 부른다. 당장 가진 것이 없어서 나중에 더 가져다 줄 테니 먼저 재주를 시켜보라 했더니, 그자가 코끼리를 슬슬 구슬린다. 하지만 코끼리는 눈웃음을 치며 절대 할 수 없다는 시늉을 한다. 할 수 없이 동행한 이에게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돈을 더 주게 하였다.

象房 在宣武門內 西城北墻下 有象八十餘頭 凡大朝會 午門立仗及乘輿鹵簿 皆用象 受幾品祿 朝會時 百官入午門畢 則象乃交鼻而立 無敢妄出入者 象或病不能立仗 則强牽他象以代之 莫能屈也 象奴以病象詣示之 然後乃肯替行 象有罪則宣勅杖之 觸物傷人之類 伏受杖如人 杖畢起叩頭謝 貶秩則退居所貶之伍 余畀象奴一扇一丸 令象呈伎 象奴少之 加徵一扇 余以時無所携 當追給 第先使效伎 則象奴往諭象 象目笑之 若落然不可者 使從者 增畀象奴錢

 

코끼리는 한참 동안 눈을 흘겨보더니, 코끼리 부리는 자가 돈을 세어 주머니 속에 넣는 걸 보고서야 시키지도 않은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린다. 머리를 조아리며 두 앞발을 꿇기도 하고, 또 코를 흔들면서 퉁소 불듯 휘파람도 불고, 또 둥둥 북소리를 내기도 한다. 대체로 코끼리의 묘한 재주는 코와 어금니에서 나온다. (중략)

象睥睨久 象奴數錢納囊中 然後象乃肯 不令而效諸伎 叩頭雙跪 又掀鼻出歗 如管簫聲 又塡塡作皷顰響 大約象之巧藝 在鼻與牙 (中略)

 

당나라 명황제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고 한다. 코끼리가 춤을 추다니 그게 말이 되나 하며 속으로 의심을 했는데, 이제 보니 사람의 뜻을 잘 알아듣기로는 코끼리만 한 짐승이 없다. 그래서인가. 이런 말까지 전해진다. “숭정 말년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이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 것도 먹지를 않았다.” (중략)

唐明皇時 有舞象 觀史心常疑之 今果見善諭人意者 莫象若也 崇禎末 流寇破京城 過象房 群象皆垂淚不食云 (中略)

 

해마다 삼복날이면 금의위(錦衣衛) 관교들이 깃발을 늘인 의장 행렬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의 연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황도기략(黃圖紀略)

每歲三伏日 錦衣衛官校 列旗仗鹵簿金皷 迎象出宣武門外壕中洗濯 觀者常數萬 又有象記

 

 

 

코끼리의 지혜와 재주, 그리고 충성심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물론 연암의 관심이 이런 신기한 이야기들에서 멈출 리가 없다. 그의 상상은 훨훨 나래를 펴 코끼리를 통해 천지자연의 원리를 사유하는 장으로 나아간다.

 

 

 낙타

낙타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등에 달린 혹주머니 덕분에 6개월씩 물을 먹지 않고도 버틴다고 한다. 그러니 사막을 옮겨다니는 유목민에겐 없어서는 안 될 이동수단이다. 연암은 낙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짧은 털에 머리는 말과 다름없으나 작은 눈매는 양과 같고, 꼬리는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 다닐 때는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쳐들어 마치 해오라기 같고, 걸음은 학과 같고, 소리는 거위와 같았다.” , 이 놀라운 관찰력!!

 

 

코끼리에 대한 상상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象記). ‘코끼리의 철학이라 부를 만한 이 텍스트는 초월적 주체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시작된다.

 

 

, 사람들은 세상의 사물 중에 터럭만 한 작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하나하나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로 말한다면 천()이요, 성정(性情)으로 말한다면 건()이며,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제(上帝), 오묘한 작용으로 말하자면 신()이니, 그 이름도 다양하고 일컫는 것도 제각각이다. ()와 기()를 화로와 풀무로 삼고, 뿌리는 것과 품부하는 것을 조물(造物)로 삼아, 하늘을 마치 정교한 공장이로 보아 망치 도끼 끌 칼 등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號名多方, 稱謂太褻. 乃以理氣爲爐鞴, 播賦爲造物, 是視天爲巧工, 而椎鑿斧斤, 不少間歇也.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초매란 그 빛이 검고 그 모양은 흙비가 내리는 듯하여, 비유를 하자면 새벽이 되었지만 아직 동이 트지는 않은 때에 사람이나 사물이 분별되지 않는 상태와 같다. 나는 알지 못하겠다.

: “天造草昧”, 草昧者其色皂而其形也霾, 譬如將曉未曉之時, 人物莫辨, 吾未知.

 

 

하늘이 만물을 낸다고 하는데, 그때 하늘이란 과연 실체가 고정된 것인가. (), (), 상제(上帝), () 등 보는 각도에 따라서 무수히 다른 모습일 뿐 아닌가. 게다가 하늘이 초매를 만들어냈다는데, 초매란 카오스(chaos)가 아닌가. 하늘이 어찌 카오스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요컨대 고정된 실체로 환원되는 실체로서의 하늘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초월론적 전제를 뒤흔든 다음, 코끼리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논의가 펼쳐진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범을 죽이고마니 그 코는 천하무적이다. 그러면 코끼리는 대적할 자가 없는가. 만약 쥐를 만나면? 코끼리는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더 세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궤변의 함정에 말려 든 꼴이다. 그럼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말똥구리와 여룡의 비유가 그러하듯이 코끼리와 범, 쥐 사이에는 위계를 설정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종류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들은 서로 순환하면서 때로 상()하고 때론 극()한다. 그뿐이다.

 

대저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더한 것임에랴. 그러므로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코끼리 상[]’자를 취하여 지은 것도 만물의 변화를 궁구하려는 까닭이었으리라.

夫象猶目見, 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 萬倍於象者乎? 故聖人作,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주역의 오묘한 원리를 엿보는 것, 이것이 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名文) 상기(象記)의 결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건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아니다.

 

 

동물원의 코끼리들

동물원 내 상방(象房)에 있는 아기 코끼리들 우애의 동물답게 서로 보듬고 쓰다듬고 갖은 재롱을 다 부렸다. 연암은 코끼리를 통해 우주를 사유했지만, 나는 그저 저 넉넉한 등에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이의 은유

 

 

초월적인 중심을 전복하고 현실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주시할 때 진리 혹은 선악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nihilism)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vector)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이 바로 사이에서사유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열하로 가는 무박나흘의 대장정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비몽사몽 상태를 연암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솔솔 잠이 쏟아져서 곤한 잠을 자게 되니 천상의 즐거움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 달콤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가늘게 이어지고, 머리는 맑아져서 오묘한 경지가 비할 데 없다. 이야말로 취한 가운데 하늘과 땅이요, 꿈 속의 산과 강이었다. 바야흐로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처럼 울려 퍼지고, 공중에선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깊고 그윽하기는 도교에서 묵상할 때 같고, 놀라서 깨어날 때는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와 다름이 없었다. 여든한 가지 장애(八十一難, 불교에서 말하는 81가지의 미혹)가 순식간에 걷히고, 사백네 가지 병(四百四病,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에 생기는 모든 병)이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或旖旎婀娜至樂存焉 或簾纖巧慧 妙境無比 所謂醉裡乾坤 夢中山河 秋蟬曳緖空花亂落 其冥心如丹家內觀 其警醒如禪牀頓悟 八十一難 頃刻而過 四百四病 倐忽以經

 

이런 때에 추녀가 높은 고대광실에서 한 자나 되는 큰상을 받고 아리따운 시녀 수백 명이 시중을 든다 해도,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돌방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 몇 잔에 취한 채, 장주도 호접도 아닌 그 사이에서 노니는 재미와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當是時也 雖榱題數尺 食前方丈 侍妾數百 不與易不冷不溫之堗 不高不低之枕 不厚不薄之衾 不深不淺之杯 不周不蝶之間矣

 

 

참을 수 없는 졸음의 경지를 도교의 내관’ ‘선가의 돈오에 비유하는 것도 독보적이거니와, ‘차지도 덥지도 않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깊지도 않지도 않은’ ‘장주도 호접도 아닌등으로 변주되는 사이의 수사학은 한층 돋보인다.

 

이처럼 연암은 사이의 은유를 즐겨 사용하였다. 예컨대 이런 묘사가 그런 경우이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낮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저 뭐라 형용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넘어갈 상황에서 연암은 늘 그것이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장복이와 헤어지면서 이별론을 펼치는 장면 또한 그러하다. ‘저 강물은 내가 아노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으며, 잔잔하지도 않고 거세지도 않은 물결이 돌을 이끌어 안고 흐느껴 우는 듯하며’, ‘음산하지도 내려쪼이지도 않는 햇볕이 땅을 감돌아 어슴프레 해미가 끼고, 하수(河水) 위의 다리는 오랜 세월에 곧장 허물어지려 하는데, ‘이 가운데 사람은 넷도 아니요, 셋도 아님에도 서로 묵묵히 말없는 이 이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리라뭐라고 꼭 짚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수사적 변주 속에서 이별의 애상이 한층 고조되는 것만은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깊은 밤 고북구의 한 성을 지날 때, 별빛 아래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글자를 쓸 때도 사이의 은유들이 반짝인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었으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이러한 언표들은 단순히 장식적 수사가 아니다. 대상이나 사실은 항상 경계에서 움직인다. 즉 명료하게 하나의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어의 명징함이 그런 식으로 ()’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연암이 현란할 정도로 사이의 은유를 구사하는 건 그러한 환의 장막을 뚫고 나가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그때 대상은 애매하게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분사된다. 숨겨진 곳에서 길을 찾고, 길 밖에서 길을 찾는 이 전략은 사방으로 산포된 복수의 길들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사이의 은유들은 연암 사유를 떠받치는 기저를 이룬다. 이 점을 좀더 파고들기 위해 열하일기바깥의 텍스트들을 음미해보자. 먼저 낭환집서(蜋丸集序), 장님이 비단옷 입고 대로를 걷는 것과 멀쩡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이 둘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나은가? 이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암은 먼저 옷과 살의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 “,”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 “是也婦笑曰: “舅氏是我.”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 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衣膚之間.”

 

 

이 아리송한 변증에 대한 연암의 주석은 이렇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을 알 수가 있겠는가.” 자못 명쾌해 보이지만,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닌 가운데라니?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 自序)에서 들고 있는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는 한술 더 뜬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시골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피우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我無是矣]?”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해석해준다.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중략)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嗟乎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己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病也, 閔人之不知, 况其不病者乎? (中略) 毋聽耳鳴醒我鼻鼾 則庶乎作者之意也.

 

 

이해되는가? 더 헷갈린다고? 맞다. 그러면 연암의 일차적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 길을 아는가?

 

 

연암의 손자는 대원군 집정시 우의정까지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박규수. 그가 평양감사를 지내던 시절, 친지 중에 한 사람이 박규수에게 이제는 연암집을 공간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제안을 했다. 뜻밖에도 공연히 스캔들 일으키지 말자는 게 박규수의 답변이었다 한다. 연암 사후 무려 수십 년이 지난 19세기 후반까지도 연암의 글은 금기의 장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선 후기 담론사의 외부자였다.

 

그러던 그가 20세기 초 지식의 재배치 속에서 화려하게 복권되었다. ‘태서신법(泰西新法)’의 선각자로서, 그 이후 내재적 발전론과 더불어 실학이 한국학의 주요담론으로 부상하면서 연암의 텍스트는 탈중세, 민족주의 민중성의 맹아, 근대주의 등등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이를테면 근대성에 의한 재영토화가 추진되었던 셈.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을 소설사의 계보에 등재한 것 역시 전형적인 근대적 절단이요, 문학의 장르라는 수목적 질서로의 포획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 이 작품들은 열하일기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의 산물이다. 한 가게의 액자에 쓰여진 글을 베꼈다는 호질(虎叱)이나 비장들과 밤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떠오른 거부(巨富) 변씨(卞氏)와 허생의 이야기열하일기의 문체적 흐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텍스트들이 얼마나 소설적 문법에 맞는지 혹은 시대적 모순을 얼마나 리얼하게반영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정말로 노쇠하고 피로한 사유의 전형이다.

 

앞에서도 이미 감지했듯, 중세라는 초험적 장을 전복하는 저도저한 에너지는 결코 근대성이라는 일방향에 갇히지 않는다. 강을 건너며 그는 말한다.

 

 

자네, []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도강록(渡江錄)

君知道乎洪拱曰 惡是何言也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물과 언덕 사이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은 이 사이는 중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극단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제3의 길, 그것이 바로 사이의 특이성이다. 장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장차 재()와 부재(不才),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장자』 「산목(山木)

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游則不然, 無譽無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而無肯專爲. 一上一下, 以和爲量, 浮游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여기서 사이에 처한다는 것은 때론 용이 되고, 때론 뱀이 되는 변이의 능력, 만물과 더불어 조화하는 힘,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는 자유 등을 의미한다.

 

연암이 말하는 사이의 사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벗어나 인연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가 아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무수한 차이들이 생성되는,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그런 것이다.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는 호리(毫釐, 저울 눈의 호와 리로 매우 적은 분량을 뜻함)에서 나누어진다고 할 때의 그 호리의 차이! 물론 그 호리의 차이는 천리의 어긋남을 빚는다[毫釐之差 千里之繆]’는 점에서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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