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본문

문집/열하일기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4:45
728x90
반응형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연암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야 한 젊은 연암연구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참 신기했다. 아니, 그 사실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나를 포함하여)이 더 이상했다. 이런 대가한테 묘지명이 없다니. 권력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한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명망에 질려 감히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원인이 뭐든 묘지명의 부재 혹은 실종(?)’은 연암의 일대기 속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미스터리 목록에 추가될 항목임에 틀림없다.

 

주지하듯이, 연암은 묘지명의 달인이다. 그가 쓴 묘지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채로운 수사법과 느닷없는 비약은 가히 견줄 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의 묘지명은 없다니. 생의 역설치곤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살아 있는 석치(정철조)라면, 만나서 곡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조문을 할 수도 있고, 만나서 꾸짖을 수도 있고, 만나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들이킬 수도 있어서, 벌거벗은 서로의 몸을 치고박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 하는 것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속이 뒤집어지고 어지러워, 거의 다 죽게 되어서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정말로 죽었구나! (중략)

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眞死矣.

 

석치 자네는 정말 죽었는가? 귓바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는가?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술을 쳐서 제주(祭酒)로 드려도 정말 마시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구나.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

石癡眞死. 耳郭已爛, 眼珠已朽, 眞乃不聞不覩, 酌酒酹之, 眞乃不飮不醉.

 

 

석치 정철조에 대한 제문이다.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연암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정철조. 근데 뭐 이런 제문도 다 있나? 하긴, 또 한 대목에선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간세상에서 유희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世固有夢幻此世, 遊戱人間, 聞石癡死, 固將大笑, 以爲歸眞,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라고 했으니, 한마디로 점입가경(혹은 설상가상?)이다. 삶과 죽음의 통념, 나아가 제문의 문법까지 뒤엎어버리는, 이 지독한 패러독스! 다른 한편 이 황당한 유머 혹은 넌센스를 통해 그의 깊은 슬픔이 사무치게 전해져온다. 제문이나 묘지명만큼 판에 박힌 것도 없다. 마치 주례사처럼 한 편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규격화된 것이 바로 이 장르이다. 그래서 연암의 문체적 전복이 가장 빛나는 영역이 이 장르라는 게 그저 우연의 소치만은 아니다.

 

삶이 덧없다고 했던가. 연행 이후 연암은 가까운 친지들의 연이은 죽음과 마주한다. 1781년에 정철조(鄭喆祚)가 병사했고, 이어 1783년 홍대용이 별세했다. 1787년에는 아내와 형님 박희원이, 1790년에는 연행의 기회를 주었던 삼종형 박명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들을 잃은 슬픔을 그저 형식적인 제문이나 묘지명에 담지 않았다. 생의 기쁨과 동경, 쓰라린 좌절 등이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그것들은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보고서이자, 죽음과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레퀴엠이었다.

 

 

본격적인 레퀴엠을 듣기 전에 가벼운 아리아 한 곡조..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每憶先君看我兄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自將巾袂映溪行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연암협 시냇가에서 읊은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燕岩憶先兄]라는 시다. 마치 동시인 듯, 민요인 듯 담백한 말투에 깊은 속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연암의 시를 읽고 두 번 울었다고 했다. 하나는 바로 이 시이고, 또 하나는 연암이 큰누이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이다.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이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이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扁舟從此何時返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送者徒然岸上歸 보내는 이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이 시는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伯姉貞夫人朴氏墓誌銘]에 실려 있다. 떠나는 이는 누이의 상여를 메고 가는 매형을, 보내는 이는 그 매형을 전송하는 연암 자신을 말한다. 연암산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潘南)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중미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孺人十六, 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鵶谷’, 將葬于庚坐之兆.

 

 

여기까지는 고인과 자신의 관계, 가족, 죽음, 장례에 대한 간략한 터치다. 보통 그 다음에 고인의 생애에 대한 상투적인 나열과 덕행의 예찬으로 이어지는데, 연암은 놀랍게도 상여가 떠나는 현장을 생방송처럼 중계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자, 어린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 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伯揆旣喪其賢室, 貧無以爲生, 挈其穉弱婢指十, 鼎鎗箱簏, 浮江入峽, 與喪俱發. 仲美曉送之斗浦舟中, 慟哭而返]’는 식으로.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간 누이가 이 가난한 집안을 꾸리느라 겪었을 온갖 고생살이가 떠올라, 마음이 저으기 애달프다. ‘가장 아닌 가장인 누이가 죽자 매형은 살림살이를 챙겨 산골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살림살이래야 단촐하기 이를 데 없다. 누이를 그토록 고생시킨 매형에 대한 원망이 없다면 거짓일 터, 행간 사이로 그 애환이 아련하게 전해져 온다.

 

그 다음, 통곡하는 연암의 얼굴에 28년 전 누이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버릇없이 드러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이 나서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嗟乎! 姊氏新嫁曉粧, 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𩥇, 效婿語口吃鄭重. 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어린 남동생의 심술과 장난, 그것을 따스하게 받아주는 누이, 비통한 죽음 앞에서 이런 정경을 떠올리는 연암의 마음은 아직도 여덟 살 소년의 그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심술을 부리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눈물과 웃음이 뒤엉켜 가슴이 더욱 미어진다.

 

그럼, 이 대목에서 하필 그 추억이 떠올랐을까? 연암의 해명은 이렇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立馬江上, 遙見丹旐翩然, 檣影逶迤, 至岸轉樹隱不可復見.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江光如鏡, 曉月如眉]’ 같았다고.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했노라고. 하긴 누이가 시집간 뒤에야 누이는 곤궁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느라, 동생인 연암은 연암대로 자기의 길을 가느라 분주했을 터이니, 남매가 오손도손 마주할 기회조차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의 길이 엇갈리던 시집가는 날의 추억이 가장 생생할밖에, 스물여덟 해 전의 추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죽음 앞에서 오롯이 드러내는 그 진솔함이야말로 이 글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비결일 것이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화음으로 구성된 서정적 비가(悲歌)에 속한다면, 평생의 지기 홍대용(洪大容)의 묘지명은 굵직한 터치, 낮은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홍덕보묘지명은 여러 방식의 언표 배치가 중첩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덕보(홍대용)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사신 행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으니,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洲)이다[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연암이 바로 전해 북경에 들어갔을 때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인물이다. 연암은 중국 가는 사람 편에 홍대용의 중국인 친구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금년 1023일 유시에 갑자기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원은 통곡 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여 대신 자신이 글을 올리니 부디 절강(浙江)에 두루 알려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이 없게 해달라고.

 

왜 절강인가? 이미 밝혔듯이 거기는 바로 홍대용(洪大容)의 세 친구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연암에 앞서 숙부를 따라 중국기행을 다녀왔다. 그때 유리창(琉璃廠)에서 육비, 엄성, 반정균 등을 만나 수 만 마디의 필담을 나누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 단 한 번의 만남이었음에도 이들의 정은 말할 수 없이 돈독하여 그간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10여 권에 달하였다.

 

담담하게 친구의 죽음을 전하던 연암의 필치는 이들과의 교유를 다루면서 더 한층 웅숭깊어진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홍대용과 엄성의 기이한 인연에 대한 것이다. 홍대용은 세 선비 가운데 특히 엄성과 의기투합하여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엄성은 복건(福建)에서 병이 위독하게 되자, 홍대용이 준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의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다투어서 시문을 찬술했다 한다. 반정균이 그 부고를 홍대용에게 알렸고, 홍대용은 이에 제문과 향을 부쳤는데, 그것이 도착한 날이 마침 엄성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대상(大祥)날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면서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라고 하였다. 지극히 사랑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렇듯 연암은 그의 삶을 이 세 친구들과의 국경을 넘는 우정으로 압축한 것이다. 족보니, 관직이니, 덕행이니 하는 따위는 그저 껍데기요. 지리한 나열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일까. 어떻든 이 묘지명 또한 연암산문의 정수이자 18세기가 낳은 명문이다.

 

그러나 연암의 묘지명들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시대의 통념과 충돌했다. 연암의 처남이자 벗이었던 이재성(李在誠)은 연암의 큰누이 묘지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라! 이 작품은 옛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緣情爲至禮, 寫境爲眞文. 文何甞有定法哉? 此篇以古人之文讀之, 則當無異辭, 而以今人之文讀之, 故不能無疑, 願秘之巾衍].’

 

이건 또 웬 봉창 두드리는소린가? 참된 문장이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니! 요컨대 연암의 묘지명들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불온한것이었다.

 

잠깐 덧붙일 사항 하나. 연암처럼 태생적으로 밝고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을 썼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하는 법, 니체의 아포리즘(aphorizm)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다.

 

과연 그렇다. 앞서도 음미했듯이, 그의 묘지명들은 슬픔을 과장하지도 생경하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그리는 그의 목소리는 때론 경쾌하고 때론 느긋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그 여운은 깊은 울림으로 삶과 사유를 변환시킨다. 그런 역설이야말로 그의 원초적 명랑성이 지닌 저력이다. 다시 니체 식으로 말하면, ‘심해(深海)를 항해하고 돌아온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강철 같은 명랑함’, 바로 그것이 아닐지.

 

 

 

 

인용

목차 / 박지원

열하일기 / 문체반정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높고 쓸쓸하게

나는 너고, 너는 나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