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趙岐), 그는 누구인가?
맹자에 대한 논란과 고주가 실리기까지
『맹자』는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제자(諸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으며, 그것도 매우 인기 없는 한 사상가이었을 뿐이었다. 후한 말 채옹(蔡邕, AD133~192)의 희평석경(熹平石經)에 이미 『논어(論語)』는 들어가 있지만 『맹자』는 없다. 당나라의 그 유명한 ‘개성석경(開成石經, 837)’에도 오늘날 우리가 13경이라 부르는 경전이 다 수록되어 있으나 오직 『맹자』만 빠져있다. 그러니까 12경석경인 것이다. 당나라의 『육전(六典)』에도 『논어』는 태학의 교과목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맹자』는 들어있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13경이 성립한 것은 송대 이후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 변경(汴京)의 태학에 세워진 석경 속에는 『맹자』가 수록되어 있다.
양송(兩宋)에 이르러서야 『맹자』는 자부(子部)에서 경부(經部)로 그 지위를 바꾼 것이다. 『맹자』를 6경의 다음에 위치하는 경언으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상가가 아마도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 773~819)일 것이다. 그러나 『맹자』 존숭의 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인물은 유종원과 같이 고문운동을 힘쓴 한퇴지(韓退之, 768~824)였다. 한퇴지는 그의 걸작 「원도(原道)」에서 배불도(排佛道) 주체회복운동을 주창하면서 사문의 도통론을 펼쳤고 그 도통전수의 마지막 핵심에다가 맹자를 놓았던 것이다.
이 도[斯道]라는 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말하는 도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도교나 불교가 말하는 도(道)가 아니다. 요임금은 이것을 순임금에게 전했고, 순임금은 이것을 우임금에게 전했고, 우임금은 이것을 탕임금에게 전했고, 탕임금은 이것을 문왕ㆍ무왕ㆍ주공에게 전했고, 문왕ㆍ무왕ㆍ주공은 이것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이것을 맹가에게 전했는데, 맹가가 죽자 이 전함은 끊어지게 되었다.
斯吾所謂道也. 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맹자를 유문 도통의 최후의 자이언트로 규정함에 따라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ㆍ주공ㆍ공자의 반열에서 그들의 모든 권위를 한 몸에 구현한 인물로서 부상되었던 것이다. 한유(韓愈)로 인하여 『맹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뒤 북송의 범중엄(范仲淹, 989~1052),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손복(孫復, 992~1057), 석개(石介, 1005~1045)와 같은 이들은 한유의 도통정신을 이어받아 맹자를 극도로 존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사상적 노력이지 정치제도적인 실제영향을 끼치는 사태는 아니었다.
맹자 승격운동을 조정의 지지 속에서 제도사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다. 왕안석은 그의 신법 개혁사상의 정신적 정초로서 『맹자』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맹자』를 과거과목으로 편입시키고, 맹자상을 조정 내에 건립하며, 역사적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맹자를 공묘에 배향케 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왕안석의 맹자존숭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신법을 반대한 구법당의 영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의맹(疑孟)」이라는 책을 지어 맹자를 비판하였으나, 그의 비판은 결코 맹자사유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질 못하다. 사마광은 맹자의 말일 수 없는 것들이 『맹자」라는 텍스트 속에 찬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마광을 존숭하고 추종하는 구법당의 사상가 조설지(晁說之, 1059~112)는 왕안석(王安石)의 신학(新學)을 공격하며 삼강오상(三綱五常)을 절멸(絶滅)시킨다고 하였고, 또한 『유언(儒言)』을 지어 『맹자』를 치열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맹자』를 과거시험과목에서 제거해버릴 것과 황태자 『맹자』 송독(誦讀)과 임금의 『맹자』 강연을 반대하였다. 하여튼 북송시대에서조차 『맹자』는 끊임없는 찬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남송의 주희(朱熹)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낸 후로부터 비로소 『맹자』의 권위는 확고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 이전에 성립한 맹자의 주석서로서 알려진 것으로는, 후한의 정증(程曾)의 『맹자장구(孟子章句)』, 정현(鄭玄)의 『맹자주(孟子註)」, 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 고유(高誘)의 『맹자장구(孟子章句)』, 유희(劉熙)의 『맹자주(孟子註)』, 진나라 기무수(綦毋邃)의 『맹자주(孟子註)」, 당나라 육선경(陸善經)의 『맹자주(孟子註)」, 장일(張鎰)과 정공저(丁公著)의 『맹자음의(孟子音義)』 등등을 들 수가 있으나, 조기의 『맹자장구』 1종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다. 『맹자』에 관한 한 고주(古注)로서는 조기의 『맹자장구』가 유일한 것이며, 다음으로는 곧바로 신주(新注)로서 주희(朱熹)의 『맹자집주』를 든다.
13경주소본에 실려있는 조기의 주는 송나라의 손석(孫奭, 962~1033)이 소(疏)를 달았는데, 그 소가 매우 조잡하여 북송의 경학자인 손석의 작품이 아니라, 소무(邵武)의 한 사인(士人)에 의해 가탁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기의 주도 그 온전한 형태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당 나라의 육선경(陸善經)이 조기의 주의 일부만을 취하고 번중(繁重)한 것은 모두 산거(剛去)해버렸고 송나라의 손석 또한 같은 짓을 했다.
일본에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고본 『맹자』와 아시카가본(足利本) 『맹자(孟子)』가 비교적 조기 주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에도 중기의 유학자이며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제자인 야마노이 테이(山井鼎, 1690~1728)【야마노이 콘론(山井崑崙)이라고도 한다】가 그 고판본들에 의거하여 『칠경맹자고문(七經孟子考文)』을 지었다. 이것은 중국에 전래되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고 건륭시대의 교감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나의 동경대학 지도교수인 고 야마노이 유(山井湧) 선생은 야마노이 테이 가문의 종손이다. 나는 선생님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에서 보기 드문 품격 높은 대저택의 아취를 흠끽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야마노이 테이는 에도유학 교감학의 제1 인자로 정평 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조기가 살던 시기에 무르익은 문화 역량
우리의 가슴에 뜨거운 맹자의 마음을 전해주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조기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조기는 자(字)를 빈경(邠卿)이라하는데, 경조(京兆) 장릉(長陵) 사람이다. 원래 태어날 때의 이름은 가(嘉)였고, 그는 어사대(御史臺)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字)도 대경(臺卿)이라 하였다. 그러나 후에 일신에 밀어닥친 환난을 피해 둔신하며 도망다닐 적에 이름과 자를 모두 갈았다. 이름은 가(嘉)에서 기(岐)로 갈고, 자는 대경(臺卿)에서 빈경(邠卿)으로 바꾼 것이다.
어사대라는 기관은 동한(東漢)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최고감찰기구였는데, 그가 어사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집안이 대대로 성세 있는 어사 벼슬을 한 명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릉(長陵)은 한고조의 능이 있는 지역이며 섬서성 서안 부근 함양현(咸陽縣) 동북부 40리에 있다. 이 지역은 본시 주나라문명의 발흥지라고도 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 며 『맹자』 「양혜왕」 하14ㆍ15에 보면 태왕이 빈(邠) 땅에 거할 때 적인(狄人)이 침략하자 빈 땅을 떠나 기산(岐山)의 아래로 가서 새롭게 거주를 마련하였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빈(邠)과 기(岐)가 모두 조기가 태어난 곳 부근의 지명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조기(趙岐)라고, 또 자를 빈경(邠卿)이라고 고친 것도 유서 깊은 고향땅에 대한 깊은 프라이드를 나타낸 것이다.
조기는 어려서부터 깊은 역사의식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에 힘입어 경서(經書)에 능통하였고 재예(才藝)가 뛰어났다. 그는 부풍(扶風) 출신의 마융(馬融, 79-166)【당대 경학의 대석학, 통유(通儒)라 불림, 그 문하에서 정현이 배출됨】의 형 마돈(馬敦)의 딸과 결혼했다. 마융의 외척이 당대 기세등등한 권문이었기에, 마융이 조기집에 놀러와도 그를 비천하게 여기고 잘 상대하질 않았다. 단지 경전상 궁금한 것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조기는 매우 염직(廉直)한 성질이었고 사회악을 극도로 미워하고 타협을 몰랐다.
조기가 태어난 해는 AD 108년이다(혹은 109년). 그리고 AD 201년에 죽었다. 그러니까 그는 94세의 장수를 누렸다. 그런데 그가 산 시대는 경학의 대가 정현(鄭玄, AD 127~200)이 산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중국사에서는 황건기의(黃巾起義)라고 부름】을 생각하거나, 관우ㆍ장비ㆍ유현덕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연상한다.
그러나 나는 조기의 『맹자장구』를 생각하며 동시에 안세고(安世高)의 방대한 불교역경사업을 생각한다. 안식국(安息國) 태자인 안세고가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중국에 온 것은 대략 환제(桓帝) 초년(147)의 일이며 그 뒤로 그가 중국에서 역경사업을 벌이며 활약한 것이 약 40년 좌우이므로 그의 활동 시기는 정확하게 조기와 정현의 활약시기와 겹친다. 우리는 불교 하면 위진남북조시대에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하여 수ㆍ당대에 꽃을 피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미 동한말에 안세고가 벌인 역경사업의 규모를 생각하면 도무지 그 질과 양의 충격적인 실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양(梁)나라 승우(僧佑, 445~518)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은 『도안록(道安錄)』의 기재에 의거하여 안세고가 전부 34부 40권을 번역해 놓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현존하는 『대정장경』에서만 해도 안세고 이름이 붙은 경전을 55종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중에서 최소한 17종은 아주 확실한 안세고의 역저로 꼽힌다.
하여튼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아직 불교라는 개념이 정착하지도 않았고 불교의 술어들이 약속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거의 최초로 이루어진 역경사업의 규모가 수당불학의 위용에 비추어보아도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라는 엄연한 팩트이다. 나는 최근에 한국의 현존하는 최고령의 학승인 월운(月雲) 스님께서 번역하신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동국대학교출판부, 2011)』을 서(序)할 기회가 있어 『대정』에 실려있는 안세고의 작품을 대강 훑어보았는데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선관(禪觀)ㆍ아함(阿含)ㆍ아비담학(阿毘曇學)에 관한 모든 원초적 개념들이 충실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오히려 후대의 도식적인 언어를 파기하는 원시불교의 참신함이 느껴지는 걸작들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음지입경(陰持入經)』,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은 중국철학 전공학도들에게는 필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동시대에 대월씨국(大月氏國) 출신의 승려인 지루가참(支婁迦讖, Lokakṣema)에 의하여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아축불국경(阿閦佛國經)』,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14부 대승경전이 번역되었다는 것도 같이 기억해야 한다. 『도행반야경』은 『반야경』의 최초의 번역이며, 『반주삼매경』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국에 소개되는 최초의 계기이다. 그리고 『무량청정평등각경』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하나인 『무량수경』의 이역(異譯)이다.
소승ㆍ대승경전의 본격적인 이론 틀이 이미 AD 2세기에 중국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파불교의 이론과 반야사상이 동시에 쏟아져 들어왔고 그러한 유입을 소화할 수 있는 언어적 틀이 이미 2세기에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정현의 경전해 석학의 방법론이 이미 불교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현이 죽은 후 불과 26년만에 천재적 사상가 왕필(王弼, 226-249 이 태어나 ‘정시풍(正始風)’을 개척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기가 산 시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양한(兩漢)의 축적된 문화적 역량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 그러한 창조적 시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문화적 역량 속에서 『삼국지』를 수놓는 영웅들의 지략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모의 대가 조조(曹操)도 조기의 지혜를 빌기 위하여 수백 리 병사를 끌고나와 조기를 봉영(奉迎)한 적이 있다.
뜨겁던 사내의 한 평생기
조기는 30여 세가 되었을 때 아주 몹쓸 중병을 앓게 되었다. 7년 동안이나 욕창이 나도록 병석에 누워있었으나, 도무지 일어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형의 아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유령(遺令)을 내렸다.
“대장부(大丈夫)가 금세에 태어나 숨어산들 허유(許有)의 고결함도 이루지 못하고, 출사(出仕)해본들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尙)의 공훈을 세우지도 못했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니 내 또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 묘지 앞에 둥근 비석을 하나 세우고 그곳에 이 16글자만 새겨다오: ‘한나라에 초일하게 산 사나이가 있었으니 성은 조였고 이름은 가(嘉)였다. 뜻은 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했다. 천운이 그러하니 어찌할 바 없다[漢有逸人, 姓趙名嘉. 有志無時, 命也奈何]!’”
그러나 그 후 신기하게도 그의 중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좀 코믹하기도 하지만 그의 생애를 잘 표현해주는 재미있는 고사이다. 영흥(永興) 2년(154), 조기의 나이 47세 때부터 뒤늦게 사공연(司空掾)이 되어 벼슬길에 오른다. 그의 정책이 어느 것은 조정에서 채택되기도 하고 어느 것은 채납(採納)되지 않기도 한다. 그는 대장군(大將軍) 양기(梁冀)의 참모가 되기도 하였고,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피씨(皮氏)【강주(絳州) 용문현(龍門縣) 서(西)】의 장(長)이 된다. 그는 강탈을 부리는 자들을 억누르고 간신들을 토벌하고 학교를 크게 일으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때마침 하동(河東)의 태수 유우(劉祐)가 사직하고 중상시(中常侍, 황제를 항상 모시는 고급 환관) 좌관(左悺)의 형 좌승(左勝)이 태수직을 대신하니, 조기는 자기 상관이 환관이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고 당일로 피씨장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조윤(京兆尹, 한대에는 경기도 지사에 해당) 연독(延篤)이 그를 다시 불러들여 공조(功曹) 장관을 삼았다.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중상시 당형(唐衡)의 형인 당현(唐玹)이 경조 호아도위(虎牙都尉)로 있었는데 군인(郡人)들이 그가 자기 실력으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 중상시의 빽으로 앉은 것임을 알아 모두 모멸하였다. 조기와 조기의 종형 조습(趙襲)은 수차에 걸쳐 당현을 폄의(貶議)하였다. 그러자 당현은 가슴에 독한(毒恨)을 품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환제(桓帝) 연희(延熹) 원년(AD 158), 그러니까 조기가 51세 때에 당현이 경조윤에 임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조기는 들이닥칠 사태를 예감하고 조카인 조전(趙戩)을 데리고 도망갔다. 아니나 다를까, 당현은 조기의 가속과 종친을 중죄에 몰아넣어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의 차형 조무기(趙無忌)도 하동종사(河東從事)였는데 살해되고 만다.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다. 「제사(題辭)」에서 ‘영척우천(嬰戚于天, 하늘에 원망을 매달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바로 이 불운한 사건을 지칭한 것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이 빚어낸 억울하고도 또 억울한 재난이었다.
조기는 이에 사방으로 도망다녔는데, 양자강[江]ㆍ회수[淮]ㆍ북해[海]ㆍ태산[岱] 지역을 거치지 아니 한 곳이 없었다. 조기는 성명(姓名)을 숨기고 다니며 북해(北海)【산동 청주부(靑州府) 동부, 내주부(萊州府) 서부 지역】의 시장에서 떡을 팔면서 연명하였다. 이때에 안구(安邱) 사람, 손숭(孫嵩)이 나이가 불과 20여 세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시장에 놀러 나왔다가, 조기를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리고 수레를 세우고 조기에게 손짓하여 올라타라고 하고 곧바로 집으로 모셔갔다. 그리고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리고 그를 이중벽 사이의 방에다가 숨겨 주었다. 조기는 이곳에서 수년을 머물렀다. 이 조그만 방에서 『액준가(戹屯歌)』23장을 썼다고 했는데, ‘액(戹)’이라는 글자에는 작은 창문의 뜻도 있고 재난(災難)의 뜻도 있고, 곤혹스러움, 고통과 번민의 뜻도 있다. ‘준(屯)’ 역시 억울함으로 고통받는다는 뜻이다. 『액준가』는 조그만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복벽의 방 속에서 고통의 심정을 읊은 노래였을 것이다. 이 『액준가』를 쓸 즈음에 그는 『맹자장구』를 쓴 것이다. 맹자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후에 당현 일가가 모두 사멸해버려 조기는 구출된다. 조정 삼부(三府)는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지만, 그는 사도(司徒) 호광(胡廣)의 간청에야 비로소 벼슬에 응한다. 연희 9년(166)의 일이다. 그는 남흉노(南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을 흔들자 그는 발탁되어 병주자사(幷州刺史)가 된다. 그리고 또 당사(黨事)에 연루되어 면직되자 물러나 그의 경험을 살려 『어구론(禦寇論)』을 집필하였다. 이후의 자세한 내력은 내가 소개하지 않는다. 『후한서』 권94, 「열전」 제54에 조기의 열전이 실려있다. 조기는 동한 왕조 마지막 황제 헌제, 군웅할거의 시절에 한실(漢室)의 보전을 위해 진력을 다하였으며 천수를 다하고 태상(太常)으로 죽었다. 그의 삶에는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잘 알고 있는 동탁(董卓), 원소(袁紹), 조조(曹操), 공손찬(公孫瓚), 동승(董承), 유표(劉表)와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건안(建安) 6년(201), 그가 죽었을 때도 그는 재미난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는 죽기 전에 이미 그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그의 무덤의 벽에다가 그림을 그렸는데 고대의 현인 계찰(季札), 자산(子産), 안영(晏嬰), 숙향(叔向), 4사람을 빈객의 위치[賓位]에 그려넣고, 자기를 주인의 위치에 그려넣고, 매 그림마다 찬송(贊頌)을 썼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부하였다: “내가 죽는 그날 당일로 묘실 한가운데 모래를 두둑하게 올려 쌓아 침상을 만들고, 댓자리 위 시체는 흰옷을 입히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그 위에 한 겹의 천만을 덮어라. 죽은 당일로 무덤에 넣고 봉해버려라.” 아마도 그는 지금까지도 저승에서 현인들과 재미있는 대화를 즐기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조기의 저술은 대단히 많았으나, 오직 『맹자장구』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
'고전 > 맹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자한글역주, 양혜왕장구 상 - 1. 하필 이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까 (0) | 2022.12.15 |
---|---|
맹자한글역주, 서론 - 범례 (0) | 2022.12.15 |
맹자한글역주, 서론 - 맹자제사(孟子題辭) (0) | 2022.12.15 |
맹자한글역주 - 서문 (0) | 2022.12.15 |
맹자 - 목차 (0) | 2022.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