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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서론 - 맹자제사(孟子題辭)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서론 - 맹자제사(孟子題辭)

건방진방랑자 2022. 12.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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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제사(孟子題辭)

 

 

조기(趙岐)

 

 

여기 맹자제사라고 하는 것은 맹자라는 책의 본말(本末)전체 구조ㆍ지의(指義)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의미ㆍ문사(文辭)문장과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를 제호(題號)하기 위한 서문에 해당되는 하나의 또 다른 표현이다.
孟子題辭者, 所以題號孟子之書本末指義文辭之表也.
 
()’이라는 것은 성()이다. ‘()’라고 하는 것은 남자의 통칭이다. 이 책은 맹자가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총칭하여 맹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편목(篇目)에는 각자 편명이 원래 붙어 있었다.
, 姓也. 子者, 男子之通稱也. 此書, 孟子之所作也, 故總謂之孟子. 其篇目, 則各自有名.

 

송나라 때 사람으로 십삼경주소본의 맹자()를 쓴 손석(孫奭, 962~1033)에 의하면 맹자제사(孟子題辭)’는 단순히 맹자라는 책의 를 일컬은 말일 뿐이라고 한다. 장일(張鎰)이 이 구절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맹자제사라는 것은 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조기의 주는 색다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라고 말하지 않고, ‘제사(題辭)’라고 말한 것이다[正義曰: 此敍孟子題辭爲孟子書之序也. 張鎰云: 孟子題辭卽序也. 趙注尙異, 故不謂之序而謂之題辭].

 

()’ 앞에 있는 ()’소이(所以)’로부터 시작한 문장 전체를 받는 것이다. ‘문사지표(文辭之表)’를 따로 떼어, 붙여 읽으면 안 된다. ‘이름정도에 해당되는 말이다.

 

조기(趙岐, C.108~201)가 이 제사를 쓴 것은 대강 후한(後漢)이 저물어 가는 AD 160년경이다. 그 당시 이미 조기가 접한 책은 그 총제목이 맹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각 편으로 분립되어 있었으며, 그 편마다 이미 편 제목이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뒤에 다시 해설하겠지만 조기가 접한 맹자는 내편이 7, 외편이 4, 도합 11편짜리 맹자이며, 이것은 유향(劉向)ㆍ유흠(劉歆)이 본 맹자와 일치한다. 그러나 조기는 외서(外書)’로 간주되는 4편의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편 7편만을 맹자(孟子)라는 역사적 인물의 저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7편을 모두 상ㆍ하 두 편으로 갈라 장구(章句)를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양혜왕상편, 하편이라 하여, 14편으로 부르는 것은 조기의 편집체계를 따른 것이다. 조기 이전에는 상ㆍ하편이 나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편명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논어(論語)의 편명처럼 그 편이 시작하는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맹자는 추()나라 사람이다. 그 명()을 가()라고 하는데, 그 자인즉슨 알려진 바 없다.
孟子, 鄒人也. 名軻, 字則未聞也.

 

맹자의 성이 ()’이라는 사실이 곧 그가 노나라의 기세등등한 삼환(三桓) 가문 중의 하나인 맹손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맹이라는 성은 얼마든지 다른 이유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따라서 조기는 맹자가 맹손씨의 후예라는 설을 혹왈(或日)’로써 처리하고 있다. 매우 객관적으로 사태를 기술하려는 태도가 조기에게는 있는 것이다.

 

맹자의 이름[]()’라는 것은 모든 역사기록이 일치한다. 그러니까 명()은 가()로서 확실하게 알려져 있었다. 맹자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라고 부르는 장면이 맹자라는 서물에 두 번 나온다. 만장(萬章)2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 대략을 들었노라[然而軻也, 嘗聞其略也].’라고 했고, 고자(告子)4에는 내 청컨대 그 자세한 것은 묻지 않겠으나 그 근본취지를 듣기 원하오이다[軻也請無問其詳, 願聞其指……라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양혜왕(梁惠王)16에는 악정자(樂正子)가 노나라 평공(平公)에게 어찌하여 인군께서는 맹가를 만나보지 않으셨습니까[君奚爲不見孟軻也]?”라고 말한다.

 

()’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민담 같은 이야기로서는 맹자 어머니 장씨가 만삭이었을 때 추나라의 신령한 산인 역산(嶧山)’에 기도 드리러 갔다가 진통을 느껴 돌아오는 길에 수레 속에서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맹가(孟軻, 맹수레)’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레를 타고 열국을 주유하는 맹자의 생애를 예견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총자(孔叢子)라는 책에는 맹자가 어린 시절에 자사(子思)를 뵙기를 청하는 장면이 잡훈(雜訓)6에 실려있다. 그 장면에는 맹자의 이름이 맹자거(孟子車)’로 되어있다. 그런데 송함(宋咸)이 주()를 달기를, ‘맹자거(孟子車)’는 보통 맹자거(孟子居)’로 쓰며, 그것은 맹가(孟軻)의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의 뜻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맹가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빈곤 속에 거()하였다. 그리고 감가(坎軻)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 명()을 가()라 하였고 자()를 자거(子居)라 한 것이다[孟子車, 一作子居, 卽孟軻也. 蓋軻常師子思焉. 言孟軻嘗居貧, 坎軻, 故名曰軻, 字子居.]”

 

여기 감가(坎軻)’라는 표현은 감가(坎坷)’라고도 쓰는데, 때를 얻지 못해 불우하고, 또 평탄치 못한 험난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명()()’는 불우하다는 뜻이고, 그 자()자거(子居)’는 그 명과 관련된 것으로 거빈(居貧, 빈곤에 거함)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맹자의 명()인 가()를 수레의 뜻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고난과 간난(艱難)의 뜻으로 푸는 것이다. 그러나 송함(宋咸)은 북송 건주 건양인(建陽人)으로 인종(仁宗) 천성(天聖) 2(1024)에 진사가 된 사람이므로 그의 해설은 후대의 일설일 뿐이다. 위나라 때의 왕숙(王肅, 195~256)은 그의 성증론(聖證論)속에서 맹자의 자를 자거(子車)’라 하였고, ()나라 사람 부현(傅玄, 217-278)은 그의 저서 부자(傅子)속에서 맹자의 자를 자여(子輿)’라고 하였다. 이를 모두가 ()’에서 수레의 의미를 취하여 자()를 날조해낸 것이다. 따라서 후한의 조기가 맹자의 명()은 확실히 ()’이지만 그 자에 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정직하고 정확한 발언이다. ‘미문(未聞)’이라는 표현은 자기가 듣지 못했다는 뜻도 되지만, 알려진 바 없다. 전해내려오는 바가 없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한 대까지만 해도 맹자의 청년시절에 관한 신빙할 만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라는 본시 춘추(春秋)에 언급되고 있는 ()’라고 불리는 자작 급의 나라인데 맹자시대에 이르러 그 이름을 바꾸어 추()라고 불렀다. 이 추나라는 노나라에 가깝고, 후에는 노나라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는 초()나라에 병합된 바는 있었어도 노나라에 병합된 적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여튼 지금의(후한 말 기준) 추현(鄒縣)이 바로 이 추나라 지역이다.
鄒本春秋邾子之國, 至孟子時改曰鄒矣. 國近魯, 後爲魯所幷, 又言邾爲楚所幷, 非魯也. 今鄒縣是也.
 
그런데 또 혹자는 이와 같은 설을 펴기도 한다: “맹자는 본래 노나라의 공족(公族)인 맹손씨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벼슬은 제나라에서 했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장례를 노나라에 돌아와 치른 것이다. 그 기세등등한 삼환(三桓) 중의 하나인 맹손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쇠미하게 되면 갈라져 나와 노나라가 아닌 딴 나라에 가서 곁살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或曰: “孟子, 魯公族孟孫之後, 故孟子仕於齊, 喪母而歸葬於魯也. 三桓子孫旣以衰微, 分適他國.”

 

춘추(春秋)라는 경전은 은공(隱公)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은공 원년(元年, BC 722) 3월조에 은공은 주()나라의 의보(儀父)와 멸()이라는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三月公及邾儀父盟于蔑].’라는 기사가 있다. ()나라는 주()의 무왕(武王)이 전욱(顓頊)의 자손이라는 사람에게 봉한 작은 나라였다. 원래는 작위(爵位)가 없었는데 나중에 자작(子爵)이 되었다. 주나라가 제후국으로서 정확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나라의 은공과 주나라의 의보(儀父)가 멸() 땅에서 ()’을 했다는 춘추의 기사로 미루어보아 BC 8세기부터 주나라는 노()나라에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고 있었던 나라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란 실제로 대적가능한 나라 사이에서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이다.

 

하여튼 이 주()나라가 맹자 시대에는 추()나라로 불린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자열전에서는 이 추()가 모두 ()’로 표기되고 있다. 조기는 이 추나라가 노나라에 병합되었다는 설과 초나라에 병합되었다는 설, 두 가지 이견을 객관적으로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추나라가 끊임없이 노나라와 각축전을 벌이기는 했어도 노나라에 병합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초나라 세력권에 있으면서 독자적인 아이텐티티를 지킨 노나라 변방의 소국으로서 추나라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공(文公) 13(BC 614)조에 주()나라 문공(文公)이 역으로 도읍을 옮기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기 ()’이란 역산(嶧山)’의 남쪽 기슭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노나라 곡부 부근에 주()나라의 수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현재 추현(鄒縣) 동남쪽 역산 남록(南麓)으로 천도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귀갑(龜甲)의 복점을 쳤는데 복사가 말하기를, “백성에게는 이로우나 임금님께는 불리하옵니다[利於民而不利於君].”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주문공(邾文公)이 말한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웁다면, 그건 곧 나의 이로움인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군주를 세움은 곧 백성에게 이로웁게 하라는 것이 그 근본 소이연이다. 백성에게 이로움이 있다면야, 나는 반드시 그 이로움과 더불어 할 뿐이로다[苟利於民, 孤之利也. 天生民而樹之君, 以利之也. 民旣利矣, 孤必與爲].”

그러자 좌우의 신하들이 주문공을 만류하여 말한다: “도읍을 옮기지 않으시면 임금님의 수명이 길어질 터인데 어찌 그걸 원치 않으시옵나이까[命可長也, 君何弗爲]?”

이에 주문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은 오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잘 기르라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의 길고 짧음은 시운일 뿐이다. 백성들에게 실로 이로움다면, 옮기리라. ()함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없는 것이로다[命在養民, 死生之短長, 時也. 民苟利矣, 遷也. 吉莫如之].”

그리하여 천도가 감행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에 주문공은 세상을 떴다. 세상의 군자들이 그를 가리켜, ‘천명을 안 인물이었다[知命].’라고 했다.

 

이러한 고사로 보아, 맹자에게 전해내려오는 민본사상의 분위기가 이미 맹자가 태어난 추나라에 젖어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역산(嶧山)’은 해발 550m의 산이지만 너른 평원에 홀로 우뚝 서있기 때문에 매우 고대(高大)하며 웅기(雄奇)하고, 험준(險峻)하게 보인다. 맹자의 고고(孤高)한 일생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남록(南麓)에 지금도 부정형의 구형(矩形)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28년조에는, ‘진시황이 동쪽으로 군현을 순무하던 중에 추()나라 역산(嶧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 땅의 유생들과 상의하여 비석에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하는 내용을 새겼으며, 봉선과 여러 산천에 대한 망제(望祭)의 일을 논의하였다[始皇東行郡縣, 上鄒嶧山. 立石, 與魯諸儒生議, 刻石頌秦德, 議封禪望祭山川之事].’라는 기사가 있다.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제를 지내러 가던 중에 먼저 추나라의 역산(嶧山)’에 들러 비석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역산각석(嶧山刻石)’의 고사인데, 이사(李斯)가 글을 짓고 직접 글을 썼다고 전하여진다. 이 역산각석은 당나라 때 산불로 훼손되었는데 그 정확한 모본(墓本)이 제작되어 오늘까지 총 7종의 모본이 전한다. 그 중 송나라 때 번각(飜刻)한 장안본(長安本)을 제일로 치는데, 현재 서안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탁본이 2008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염약거(閻若璩)는 말한다: “지금 맹모의 묘비를 고찰하건대, 그 묘는 추현(鄒縣) 북쪽 20리 마안산(馬鞍山)의 남쪽에 있다. 그곳이 노나라 땅은 아니나, 옛날에는 노나라 땅이었을 수도 있다[然考今孟母墓碑, 墓在鄒縣北二十里馬鞍山陽, 又非魯地, 疑古爲魯地].’ 많은 고증가들이 맹자가 결코 자기 어머니를 노나라 땅에 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자기 고향인 추나라 땅에 묻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어머니를 동심의 추억 서린 모국의 땅에 묻는 것이 옳다. ‘역산(嶧山)’의 북쪽으로 아산(牙山)이 있고, 아산의 북쪽으로 당구산(唐口山)이 있으며, 당구산의 북쪽에 양성(陽城)이 있는데, 이 양성의 북쪽에 맹가(孟軻)의 무덤이 있다. 맹모의 무덤과 맹가의 무덤은 30리 내외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맹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 자질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려서는 인자한 어머니의 그 유명한 삼천(三遷)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孟子生有淑質, 夙喪其父, 幼被慈母三遷之敎.

 

우선 맹자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세상에 전하는 맹씨보(孟氏譜)라는 서물에 맹자는 주나라 정왕(定王) 3742일에 태어났으며, 난왕(赧王) 26년 정월 15일에 졸()하였으며 그때 나이가 84세였다고 적혀있다. 이 애매한 족보의 내력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주나라에 공ㆍ맹 즈음의 시대에는 정왕(定王)이라는 임금은 존재하질 않는다. 가능성이 있다면 정정왕(貞定王)을 대신 들 수 있겠으나, 정정왕은 맹자의 시대일 수가 없고 재위기간도 그렇게 길지 않다.

 

그래서 맹자의 몰년(沒年)인 난왕(赧王) 26(BC 289)84세라는 나이로부터 역산(曆算)해 올라가면 열왕(烈王) 4(BC 372)이라는 생년(生年)을 얻게 된다. 이 서물에 근거하여 맹자의 생몰연대를 보통 BC 372~289년으로 잡는데, 맹씨보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연대가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치엔 무(錢穆)선진제자계년고변(先秦諸子繫年考辨』 「맹자생년고(孟子生年考)에서 이 맹씨보의 연대를 세밀히 반박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BC 390~305(86)를 제시하고 있으나, 그의 논거도 추측일 뿐 별다른 신빙성이 없다. 나는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BC 372~289설이 전국(戰國)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설을 수용한다.

 

춘추연공도(春秋演孔圖), 궐리지(闕里志)등의 책에 맹가의 아버지의 이름이 격()이며 자()가 공의(公宜)이고 어머니의 친정 성씨가 장()이라고 한다. 이것도 물론 근거가 없는 무계지담(無稽之淡)이다. 그러나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맹자의 아버지를 맹격(孟激), 혹은 맹손격(孟孫激)으로, 맹자의 어머니를 장씨(仉氏)로 말한다 해서 크게 잘못될 일은 없다.

 

여기 상기부(喪其父)’라는 말과 관련하여 궐리지(闕里志)』 『사서인물고(四書人物考)등에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이야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 어머니가 과부로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데 교육자로서 심혈을 기울인 간난의 역정을 표출한 갸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말하기를, 이 삼천(三遷)의 고사가 실린 유향(劉向, BC 79~8 혹은 BC 77~6)열녀전(列女傳)에는 맹가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이야기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또 같이 실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이야기 중에 맹모가 하는 말이 베짜는 일을 중도에 폐하고 그만둔다면, 어찌 남편과 자식을 입히고, 오래도록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積織而食, 中道廢而不爲, 寧能衣其夫子, 而長不乏糧食哉]!’라고 되어있음을 들어, 맹자의 아버지는 결코 죽지 않았으며, 삼천단기(三遷斷機)의 고사는 단지 아버지가 오랫동안 출유(出遊)하고 있는 동안 자모(慈母)가 엄부(嚴父)를 대신하여 맹자를 교육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증가들의 번쇄(煩瑣)한 논의가 이미 맹자의 생애에 관하여 확증적인 정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기의 논의가 가장 신빙성 있는 당대의 풍문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맹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각박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대의(大義)와 우환(憂患)의 사명감을 지닌 엄모의 슬하에서 고독하면서도 고매한 이상을 추구하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난 인간이었다는 대의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맹모고사에 관하여 우리가 문헌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최초의 근거는 한영(韓嬰)이 쓴 한시외전(韓詩外傳)이다. 그런데 외전에는, ‘삼천(三遷)’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단기(斷機[其母引刀裂其織])’고사의 매우 소략한 형태가 실려있고, 열녀전에 없는 매동가돈육(買東家豚肉)’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린 소년 맹자가 동쪽의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무엇에 쓰려고 저렇게 돼지를 잡습니까?” 하고 여쭈었는데, 엄마가 무심결에 너에게 주려는 게지하고 빈말을 날렸다가, 엄마가 허튼소리를 했음을 깨닫고 얼른 그 동쪽 집의 돼지고기를 사다가 맹자에게 먹이면서 한순간이라도 사람을 속이는 빈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자식에게 주는, 일상생활의 엄훈(嚴訓)이 담긴 아름다운 고사이다.

 

그리고 한시외전열녀전에 맹자가 부인의 무례가 오히려 자신의 무례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아내를 내쫓는 망상을 버렸다는 맹자자책 불감거부(孟子自責, 不敢去婦)’의 고사는 공통으로 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열녀전에는 외전에 없는 고사로서, 맹자가 출세를 한 후 거취문제로 고민할 때,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독자적 삶을 추구한다는 결연한 의지의 노모 이야기가 실려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영의 한시외전의 산만한 이야기가 유향의 열녀전에는 매우 정리된 형태로 다듬어져 있다.

 

우리는 열녀전이라고 하면, 퍼뜩 열녀(烈女)’라는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류의 그릇된 이미지 때문에 열녀전가치를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가 쉽다. 열녀전열녀(列女)’라고 쓰며 그것은 매울 렬 자 열녀(烈女)’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사마천 사기(史記)열전(列傳)’에 비견할 수 있는 것으로 여성열전이라는 뜻이다. ‘()’은 복수의 뜻으로 개별적 전기를 병풍처럼 펼쳐 놓았다는 뜻이다. 이미 BC 1세기에 중국문화의 형성에 기여한 106명의 여성들(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숫자의 여성이 묘사되고 있다)의 바이오그라피를 한군데 모아놓았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 인문문명의 수준의 고도성을 가늠질 할 수 있으며, 여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편견이 파기되는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Parallel Lives)보다도 더 뛰어난,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여성열전의 상들이 선ㆍ악을 가리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현녀뿐만 아니라 악녀들도 상술하여 놓았다. 유향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동력의 계기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맹모단기의 이야기를 후대 호사가들의 날조라고 혐기(嫌忌)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가 서한ㆍ동한을 통하여 자식의 교육에 헌신하는 자모(慈母)의 프로토타입으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역사적 가치로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서한 초기와 맹자시대는 연접해 있다. 우리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하는 정도의 시대적 거리감밖에는 없다. 맹모삼천ㆍ맹모단기의 이야기는 맹자라는 서물 전체의 철학적 영향력을 뛰어넘을 만큼, 실제로 민중적 가치관의 아키타입(archetype, 원형)을 형성한 것이다. 맹모단기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는 한석봉 엄마의 자식교육 이야기로 변양(變樣)을 일으키며 재현되고 있다.

 

여자는 결혼을 한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가장 흔한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모자의 관계는 가장 밀착되어 있다. 자라나는 아이의 슈퍼이고는 근친상간의 판타지인 비열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도덕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엄마의 순간순간 시시각각 시비의 판단이 아이의 도덕적 가치관의 아키타입을 형성하는 것이다. 한자문명권에서는, 그 아키타입의 형성에 맹모의 추상적 형상처럼 깊은 영향을 준 가치체계는 없다. 서한 초의 한영, 서한 말의 유향, 동한 말의 조기로 이어지는 맹모상의 언급은 결코 묵과될 수 없는 맹자상의 한 본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 말의 학자 임춘부(林春溥)맹자시사연표(孟子時事年表)에 의하면, 맹자 3살 때 맹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슬하에서 자라났으며, 삼천의 고사는 4세 때의 일로 비정한다. 그리고 단기의 고사는 15세 때 노나라에서 공부하다가 엄마에게 돌아온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을 내치려다 엄마의 가르침으로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잘못임을 깨달은 고사는 30세 때의 일이라고 한다.

 

3 4 15 30
부친 죽음 孟母三遷 孟母斷機 不敢去婦

 

 

장성하여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스승으로 모시었고, 유가 학술의 핵심적 길을 닦고 익혔다. 오경(五經)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長師孔子之孫子思, 治儒術之道, 五經, 尤長於詩書.

 

여기 조기는 맹자가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가능성은 없다. 이 논의 또한 유향의 열녀전단기의 고사 끝, 이에 맹자가 두렵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배워 쉼이 없었다. 자사를 스승으로서 섬기어 마침내 천하에 이름난 대학자가 되었다[孟子懼, 旦夕勤學不息, 師事子思, 遂成天下之名儒].’라고 언급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혹자는 자사의 몰년을 내려잡고자사가 노나라 목공(穆公)을 섬겼다는 근거 위에서 맹자의 생년을 위로 끌어올려 두 사람의 랑데부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있으나, 그것은 연표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사태이다.

 

이미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맹가는 추나라 사람인데,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을 받았다[孟軻, 騶人也. 受業子思之門人]’라고 명기되어 있다. 맹자는 자사에게서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자사의 문인(門人, 제자)’에게서 배운 것이다. 자사의 문인 중에서도 일대 문인이 아니라 이대 문인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자사의 제자의 제자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이루22나는 직접 공자의 문도(門徒)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공자의 유택(遺澤)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사숙(私淑)하였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라는 맹자 본인의 명료한 언급이 있다. 여기 우리가 지금도 사숙(私淑)’이라고 보통 쓰고 있는 말이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가장 통용되는 해석은 사사로이 잘 익혔다라는 것이며, 이것은 몸으로 직접 배우지는 못했고 간접적으로 사사로이 그 풍도를 익혔다는 뜻이다. 여기 사숙저인(私淑諸人)’에서 ()’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만 보아도,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적계(嫡系) 자손이 아닌 사람에게서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여튼 맹자는 자사계열의 학인으로서 당대에 알려져 있었고, 맹자보다 약간 뒤늦게 태어난 동시대인 순자(荀子)는 그의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서 자사(子思)와 맹가(孟軻)’를 싸잡아 하나의 학파로 분류하고 있는데 최근 발굴된 간백자료들의 연구성과로 볼 때에 이러한 분류는 매우 리얼한 당대의 통념과 실제적 사상흐름을 적확히 잡아낸 것이다. 더구나 순자가 자사의 저작으로 지시하고 있는 오행(五行)이 현실적 문헌으로 그 온전한 모습이 드러남으로써 사맹학파(思孟學派)의 윤곽이 매우 뚜렷해졌다. 그리고 곽점간(郭店簡) 성자명출(性自命出)의 출현 또한 중용(中庸)에서 맹자로 이르게 되는 사상적 경로에 대한 구체적 그림을 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 통오경(通五經)’이라 한 것은 맹자 시대의 관념이 아닌 한대의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오경(五經)’한무제 건원(建元) 5(BC 136) ‘오경박사제도를 둠으로써 일반화된 관념으로서, ‘육경(六經)’중에서 ()’을 제외한 역()ㆍ서()ㆍ시()ㆍ예()ㆍ춘추(春秋)를 가리킨다. 맹자가 이 오경 중에서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고 말한 것은 역시 곡부 주변에서 가르쳤던 유술(儒術)의 핵심 커리큘럼이 시()ㆍ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맹자에게 특기해야 할 것은 시()ㆍ서() 외로 춘추(春秋)의 학문에 능했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자공(子貢)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나라의 유교 일파, 즉 제학(齊學)을 접하면서 춘추의 해석학을 깊게 체득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가 접한 춘추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의거하는 자세한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경문의 철학적 의미를 묻는 역사철학적 해석학이었다. 그러한 해석학의 조형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다. 공양전의 저자는 공양고(公羊高)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하(子夏)의 문인으로서 제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맹자는 공양고나 공양고 계열의 사람에게서 공양학을 몸에 익혔을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켰다. 맹자의 사상과 공양전의 사상에는 공통점이 많다. 역사는 인간의 행위의 서술이며, 그 행위를 지배하는 인간의 실존적 의지야말로 서술의 핵심이다.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기보다는 동기를 중시한다. 군신(君臣)과 같은 제도적 관계보다는 친친(親親)과 같은 순결한 인간적 내면관계를 우위에 둔다. 민생의 안정을 정치의 제1의로 생각하며, 무력혁명을 시인한다. 역사적 사건의 실존적 의미를 끊임없이 반문하는 맹자의 삶의 자세는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묻는 공양학의 기풍이 서려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주왕실이 쇠미해진 말기, 전국시대에 이르게 되면, 싸우는 나라[戰國]들이 합종(合縱) 아니면 연횡(連橫)의 계책을 아니 쓸 수 없었고, 병력을 강화하여 강대국이 될 것만을 경쟁하며 서로를 침탈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인재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권모술수에 능한 자를 우선시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현인을 숭상한다고 생각했다.
周衰之末, 戰國縱橫, 用兵爭强, 以相侵奪. 當世取士, 務先權謀, 以爲上賢.
 
이리하여 중국문명의 기강을 세운 선왕(先王)들의 대도(大道)가 점점 쇠락하여 휴폐(隳廢)되어 버리고 마니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특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방탕(放蕩)스러운 언설은 시대를 희롱하고 대중을 미혹케 하는 사태가 한두 건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先王大道, 陵遲墮廢. 異端並起, 若楊朱墨翟放蕩之言, 以干時惑衆者非一.

 

간결하지만 맹자의 생애의 모든 것을 추상적으로, 요약적으로 표현한 명문이라 할 것이다. 전국시대란 주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모두가 칭왕(稱王)하기 시작한 패도(覇道)의 시대였다. 사실 너무도 많은 인민 다중이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사태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하여 왕권이라는 것은 종교적 제도, 그리고 그 신성한 권위와 결탁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왕이라는 것은 일체의 종교적 권위의 백업이 없이 순결하게 무력의 실력만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는 인문세계의 한 상징이었다.

 

전국시대가 중앙집권의 권위가 무너진 어지러운 난세라고 하지만 근원적으로 종교적 신화가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백화노방(百花怒放)의 위대한 르네상스 시기였다. 과거의 도시국가가 이제 거대한 영토국가로 병합되면서, 군현제가 탄생하고 상비군이 필요하게 되며, 그에 따라 새로운 세제(稅制)와 시장경제가 생겨난다. 그리고 철기문명의 발흥은 무기의 변화뿐 아니라 농기구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대규모 개간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수반하여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정신문화의 신국면은 패자들에 의한 인재의 등용이다. 우리가 말하는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것은 이러한 인재등용의 현실적, 시대적 요구가 빚어낸 역사의 파노라마인 것이다. 그 파노라마의 출발점이 공자의 주유천하(周遊天下)였던 것이다.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유세객들 중에서 가장 시대에 절실했던 인재의 전형은 여기서 말하는 종횡(縱橫)’의 주역인 소진(蘇秦)장의(張儀)라 말할 수 있다. 사마천도 이 두 사람의 소진열전(蘇秦列傳)장의열전(張儀列傳)에 엄청난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이 두 사람 다 맹자와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다. 장의(張儀)는 맹자 본인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등문공2), 맹자는 종횡가들이 소기하는 바 술책에 의한 정치를 소인배들의 꼼수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의 최강자였다. 전국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그 자체였다. 전쟁에 가장 피해가 큰 것은 민중의 삶이었다. 민중은 전쟁이 사라진 화평(和平)유토피아를 꿈꾸었고, 그것은 대일통(大一統)’의 꿈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구실로 삼아 패자들은 통일천하(統一天下)의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맹자라는 서물의 최초에 등장하는 양혜왕(梁惠王)은 위()나라의 왕이다. 위나라가 진()의 동진(東進)에 패하여 항거할 힘이 없었으므로 도읍을 고도인 안습(安邑)으로부터 대량(大梁)으로 옮긴 후부터 위나라는 양나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BC 361). 그러나 위나라는 어디까지나 중원의 최강자였다. 소진(蘇秦)의 합종책(合縱策)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육국(六國)이 위나라 중심으로 뭉쳐서 진()에 대항하자는 종적 연맹을 의미한다. 여기 종적이라는 말은 6국의 지리적 분포에 따라 생긴 개념일 뿐이다. 이에 대하여 장의(張儀)의 연형책(連衡策)連衡이라 써놓고 연횡이라고도 읽는다. ‘連衡연횡連橫과 같은 의미이다이라는 것은 진() 나라가 횡적으로 6국의 한 나라, 한 나라씩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 6국의 단합을 깨트리는 계책이다.

 

6국의 연합이 더 쉬울 것 같지만, 연합이란 항상 내분의 틈새가 있고, 또 이권으로 뭉친 연합은 통일 후의 몫에 대한 계산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항상 분열의 조짐이 있다. 장의(張儀)소진(蘇秦)은 둘 다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는 스승에게서 배운 쌍벽이었는데, 소진이 먼저 출세를 했지만, 소진 본인도 자기보다 장의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방연(龐涓)과 손빈(孫臏)의 관계와도 비슷한 데가 있다. 손빈을 몰라보고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마릉(馬陵)에서 대패한 위나라의 임금이 바로 양혜왕이다. 마릉에서 위가 대패함으로써 양혜왕의 패업(霸業)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이것이 바로 BC 341년의 사건이고 우리의 연표로 보자면 맹자가 32세 때의 일이다.

 

하여튼 맹자가 사회적으로 활약하던 보다 느지막한 시기는 대체적으로 연횡책이 합종책을 이겨가는 추세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연횡책이 합종책보다 우수해서라기보다는, 장의(張儀)라는 인간이 소진(蘇秦)이라는 인간보다는 한 차원 높은 술책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소진은 제 명을 못 살고 제나라에서 암살당하지만, 장의는 자기 목을 원하는 적진 초나라에 자기 발로 걸어들어가는 태연함을 보이면서도 오묘한 술수의 화양(和樣)을 부리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천수를 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의는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굴원은 합종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것이다. 굴원이 초나라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자신의 품에 돌을 껴안고 멱라(汨羅)에 투신하기까지 그 역사무대의 배후에는 장의(張儀)의 연횡책이 계속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나라의 멸망이 우리에게 초사(楚辭)라는 굴원의 위대한 문학을 우리에게 선사했지만 하여튼 참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절실한 환경 속에서 맹자는 요임금ㆍ순임금ㆍ탕왕ㆍ문왕ㆍ주공ㆍ공자의 위대한 업적이 장차 인멸하여 쇠미해지고, 정도(正道)가 막혀버리고, 인의(仁義)가 황태(荒怠)하여지고, 입만 살아있는 위선자들의 사기술이 치빙(馳騁)하고, 애매한 간색인 불그스레한 자색(紫色)이 정색인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는 것을 깊게 연민하였다.
孟子閔悼堯孔之業將遂湮微, 正塗壅底, 仁義荒怠, 佞僞馳騁, 紅紫亂朱.
 
이에 맹자는 중니께서 시세(時世)를 우려하여 천하를 주류(周流)하신 그 심정을 사모하여, 마침내 유교의 정도를 표방하면서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천하의 민중인 사민(斯民)을 구원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작은 소절[小節]을 굽혀서 대의(大義)를 신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 타협 없는 기질의 사나이였기에, 당시의 군주들은 모두 그를 일러 시사(時事)에 우활(迂闊)한 사람이라 평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종내 그의 학설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於是則慕仲尼周流憂世, 遂以儒道遊於諸侯, 思濟斯民;然由不肯枉尺直尋, 時君咸謂之迂闊於事, 終莫能聽納其說.

 

이토록 연횡과 합종의 외교전술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바로 맹자가 중니(仲尼)의 유도(儒道)를 제후들에게 펼치려고 했다는 이 아이러니칼한 시대상황을 조기는 잘 서술하고 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시기도 양나라가 연횡파와 합종파로써 분열된 어지러운 시기였다.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와 같은 종횡가들은 철저한 시대감각과 외교감각을 통해 일체의 도의적 명분에 구애됨이 없이 천하통일의 꿈을 달성하려 했다. 그것은 패도(覇道)의 극치였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개인적 공명이나 치부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라고 가볍게 말해버릴 수는 없다.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깡을 지니고, 지략의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걸 줄 아는 특이한 예술가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들은 중원대륙이라는 광활한 캔버스 위에 세계상을 제멋대로 그려보는 행위예술에 심취해서 산 멋쟁이들이라고 평가해줄 만한 것이다. 그들은 놀라운 균형감각과 시대와 공간 그 전체를 볼 줄 아는 전관(全觀)의 형안(炯眼)을 지녔다. ‘연형(連衡)’()’밸런싱(balancing)’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리얼리스트들의 균형감각에 비하면 맹자의 아이디얼리즘( Idealism, 이상주의)은 참으로 무모한 것이다. 맹자는 이들의 패도(覇道)에 대하여 왕도(王道)를 주장한다. 왕도(王道)라는 것은 인의(仁義)의 실현이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국운의 쇠미기에, 서바이벌을 위해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점쳐야 할 긴박한 시기에, 어느 철인이 나타나 인정(仁政)을 외친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맹자는 중국의 동키호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키호테는 픽션이나 신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만, 맹자가 돌진하는 세계는 완벽한 넌픽션이다. 맹자에게는 모든 아이디얼리즘이 리얼한 현실이다. 그가 신봉하는 이상적 가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종횡가는 물론 무력에 의한 중국의 물리적 대일통(大一統)을 지향했다. 맹자가 꿈꾼 정치이상의 궁극이 과연 진시황의 통일과도 같은 그런 무력통일이었을까? 맹자도 분명 천하통일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칠 때 맹자는 침공을 적극 권유했다.(양혜왕1011, BC 314), 민중들의 갈망은 평화에 대한 염원이었다. 과연 천하통일로써 민중에게 평화가 찾아왔는가? 하여튼 이런 거창한 역사철학의 문제는 여기 거론할 계제는 아니다. 패권군주의 통일에 대한 야심과 민중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서로 다른 그림이었지만 그 양자를 소통시키는 방법이 맹자에게는 인의(仁義)의 왕도였다. 패권 아닌 도덕이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있다. 송나라의 양공(襄公)이 초나라의 군대와 전쟁을 함에 있어서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 군대가 아직 군진형을 갖추지 못한 불리한 형국에 있을 때 치는 것은 인하지 못하다고 하여 초나라 군대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가 대패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좌전희공僖公 22, BC 638).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일 뿐이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일 뿐이다. 아무리 내가 왕도(王道)를 실천한다 해도 주변의 모든 나라가 패도에 광분해 있다고 한다면 나의 왕도는 곧 패도의 홍수에 덮쳐버리고 만다. 어느 나라의 군주가 맹자의 말을 듣고, 부국강병책을 폐기하고 인정을 실천하며, 군비를 축소하여 민생에 힘쓴다 한들, 과연 그러한 왕도가 버티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내가 지금 답을 할 필요는 없다. 독자들과 내가 맹자본문을 읽어나가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상황으로 남겨놓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조기는 맹자의 이러한 왕도에 관한 발상이 당시의 모든 군주들에게 우활(迂闊)’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받아들여질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쿨하게 지적해놓고 있다. 여기 우활어사(迂闊於事)’라는 표현은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에 있는 견이위우원이활어사정(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이라는 표현에서 왔다는 것을 지적해 놓는다. ‘홍자란주(紅紫亂朱)’논어(論語)』 「양화18에서 왔다. 그리고 그것은 또 맹자』 「진심37에도 나오고 있다.

 

 

맹자 또한 주나라 희씨 왕실의 운명이 끝나갈 무렵, 그리고 또 아직 위대한 한나라 유씨 왕실이 발흥하기 이전의 쇠락기에 처하여, 정치판에 나아가본들 요임금ㆍ순임금 시대의 따사롭고 밝은 평화를 도와 일으킬 길도 없고, 물러나 민간에서 활약해본들 하ㆍ은ㆍ주 삼대의 남아있는 미풍을 진작시킬 길도 없다는 처절한 현실을 스스로 깨달아, 자기가 죽고 나면 자기가 추구했던 이상이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말들을 골라 적어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긴 것이다.
孟子亦自知遭蒼姬之訖錄, 値炎劉之未奮, 進不得佐興唐虞雍熙之和, 退不能信三代之餘風, 恥沒世而無聞焉, 是故垂憲言以詒後人.
 
공자도 춘추를 지을 적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처음에는 추상적이고도 집약적 언어에 의탁하려 하였으나, 결국 그것은 구체적 일을 실행하는 과정을 기술하는 것의 심절(深切)하고 저명(著明)한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맹자는 세상에서 물러나 고제(高第)의 제자(弟子)인 공손추(公孫丑)ㆍ만장(萬章)의 무리들과 더불어 의문되는 것을 캐어묻고 질문에 답한 것을 논집(論集)하고, 또 스스로 법도(法度)가 될 만한 자신의 말들을 골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7, 261, 34,685글자에 이른다.
仲尼有云: “我欲託之空言, 不如載之行事之深切著明也.” 於是退而論集所與高第弟子公孫丑萬章之徒難疑答問, 又自撰其法度之言, 著書七篇, 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그 책의 내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포라(包羅)하고, 만물의 이치를 규서(揆敍, 헤아려 서술)하니, 인의도덕과 성명화복(性命禍福)이 찬연(粲然)하게 실려있지 아니 한 바가 없다. 제왕, 공후(公侯)가 이 책에 실린 바에 따라 행하면 융평(隆平)의 시대를 이룩할 수 있고, 문왕의 덕을 찬양하는 청묘(淸廟)의 시를 노래할 수 있으리라. 경 ㆍ대부ㆍ사가 이를 실천하면 임금과 지아비를 존엄케 할 수 있고, 충절과 신의를 세울 수 있다. 뜻을 지키고 지조에 매진하는 자가 이를 본받으면 드높은 절개를 더욱 드높게 할 수 있고 부운(浮雲)과도 같은 세상의 권력에 항거할 수 있으리라.
包羅天地, 揆敍萬類, 仁義道德, 性命禍福, 粲然靡所不載. 帝王公侯遵之, 則可以致隆平, 淸廟;卿大夫士蹈之, 則可以尊君父, 立忠信;守志厲操者儀之, 則可以崇高節, 抗浮雲.
 
이 책의 문체는 풍인(風人, 시인)이 사물에 의탁하여 읊은 것과도 같은 깊은 맛이 있으며, 시경대아(大雅)ㆍ소아(小雅)에 나오는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우러나오는 정언(正言)의 느낌이 있다. 맹자야말로 곧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휠 줄 알면서도 정조를 굽히지 아니 하니, 이 세상에 그 이름 드높은, 성인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위대한 재목이라 말할 만하다.
有風人之託物, 二雅之正言, 可謂直而不倨, 曲而不屈, 命世亞聖之大才者也.

 

주나라 왕실은 희성(姬姓)이다. 그런데 목덕(木德)으로써 왕이 되었기 때문에 창희(蒼姬)’라고 말한다. ()은 유성(劉姓)이다. 화덕(火德)으로써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염류(炎劉)’라고 말한다. ‘치몰세이무문(恥沒世而無聞)’이라는 표현은 논어(論語)』 「위령공19에 나오는 유사한 공자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군자는 이 세상의 삶을 끝낼 때까지 그 이름이 한 번도 값있게 불려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그리고 그 다음에 인용된 공자의 말씀은 논어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 공자의 말씀으로서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인용되어 있다. “我欲載之空言, 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 사기색은(索隱)에는 이 공자의 말이 춘추위(春秋緯)에 보인다고 해놓았다.

 

맹자라는 서물이 7편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러나 장수와 글자수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으나 대차가 없다. 주희(朱熹)의 장구로 보면 260장이다. 초순(焦循)맹자음의(孟子音義)로 보면 259장이라고 했다. 글자수도 현재 우리가 보는 맹자35,382자이다양 뿨쥔楊伯峻35,370여 자라고 말했다. 하여튼 맹자는 중국역사에 살아남은 선진텍스트 중에서는 매우 안정적인 텍스트이다.

 

조기가 여기 맹자를 이미 아성(亞聖)’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획기적인 표현이다. 중국역사를 통해서 맹자는 결코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인기가 높지 않았다. 맹자는 제자(諸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으며 우리가 보통 공맹(孔孟)’이라고 합칭하는 어법은 송대(宋代) 이후에나 생겨난 말이다. 그 전에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를 합칭하여 주공(周孔)’이라 부르거나 제자 안회(顔回)와 합칭하여 공안(孔顔)’이라 불렀을 뿐이다. 여기 조기가 쓴 아성(亞聖)’이라는 말도 보통 개념화된 표현으로서는 안회에 해당되었을 뿐이다. 원대(元代)에 맹자존숭이 극치에 달했는데 문종(文宗) 때에 와서 맹자에게 아성(亞聖)’이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1330), 그때까지 아성으로 불리던 안회가 복성(復聖)’으로 개칭되고, 아성의 칭호는 맹자의 전유물이 된 것이다. 여기 아성(亞聖)’이라는 표현은 아성공(亞聖公)’이라는 개념화된 명사적 표현이 아니라, ‘성인에 버금간다는 술어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지만 후한 말에 조기가 이미 맹자에게 명세아성지대재(命世亞聖之大才)’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매우 획기적인 존숭의 사실이다. ‘명세(命世)’명세(名世)’와 같다.

 

 

공자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로 음악이 바르게 되었고, ()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너무 많았던 노래들을 정리하여 오늘의 시경의 형태로 만들었고, 옛 성왕들의 조칙(詔勅)서경을 교정(校定)하고, 주역에 날개를 매달고(계사전등의 십익을 짓다), 노나라 역사의 기술인 춘추를 지었다.
孔子自衛反魯, 然後樂正, 』『各得其所, 乃刪, 周易, 春秋.
 
맹자 또한 제나라와 양나라로부터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면서 옛 성인 요임금ㆍ순임금의 도()를 술회하여 7편의 책을 저작하였다. 이 책은 대현(大賢)인 맹자가 성인인 공자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 맹자에 앞서는 시대에 이미 육예(六藝)에 통달한 공문의 고제(高弟) 70인의 동아리들이 공부자(孔夫子)께서 말씀하신 바를 회집(會集)하여 논어(論語)라는 책을 지었다. 논어야말로 오경의 관할(錧鎋)이요, 육예(六藝)의 후금(喉衿)이다. 맹자의 책은 이 논어를 기준으로 하여 본뜬 것이다.
孟子退自齊, 述堯舜之道而著作焉, 此大賢擬聖人而作者也. 七十子之疇, 會集夫子所言, 以爲論語. 論語, 五經之錧鎋, 六藝之喉衿也. 孟子之書, 則而象之.
 
위나라의 영공(靈公)이 공자에게 군사일인 진법(陳法)에 관하여 물었다. 근원적으로 관심의 초점이 맞질 않는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조두(俎豆)에 관한 일들은 제가 일찍이 공부 좀 했습니다만, 군대에 관한 일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맹자 역시 마찬가지다. 양나라의 혜왕이 어떻게 자기의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냐는 것을 물었을 때, 맹자는 대놓고 말하기를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다.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答以俎豆;梁惠王問利國, 孟子對以仁義.
 
송나라의 환퇴(桓魋)라는 자가 공자를 죽이려고 했을 때도,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으니, 환퇴인들 감히 나를 어찌하랴[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하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맹자 역시, 노나라의 간신인 장창(臧倉)이 노나라 평공으로 하여금 맹자를 못 만나게 훼방하였을 때,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천운일 뿐, 어찌 하찮은 장씨 녀석이 나로 하여금 못 만나게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을 뿐이다. 공자와 맹자의 지의(旨意)가 일치한다. 이와 같음이 실로 한둘이 아니다.
宋桓魋欲害孔子, 孔子稱: “天生德於予.”魯臧倉毁鬲孟子, 孟子曰: “臧氏之子, 焉能使予不遇哉?”旨意合同, 若此者衆.

 

공자자위반로(孔子自衛反魯)’의 문장은 논어(論語)』 「자한14에 있다. 공자가 귀로(歸魯)한 것은 애공(哀公) 11(BC 484) 겨울이다.

 

산시(刪詩)’ 운운한 것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서술에 의거했을 것이다.

 

관할(錧鎋)’이란 보통 관할(輨轄)’이라고 쓴다. ‘()’은 수레바퀴 중앙의 곡(, 바퀴통)을 휘두른 휘갑쇠를 말하며, ‘()’은 바퀴통이 바퀴축[]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빗장이다. 이 관할은 수레의 운전에 있어서 결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빗대어 이것은 사물의 추요(樞要)라는 뜻으로 쓰인다. ‘관할(輨轄)’관건(輨鍵)’과도 같은 뜻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건(關鍵)’이라 쓰는 것도 같은 뜻이다. 노자(老子)27에도 선폐무관건이불가개(善閉無關楗而不可開)’라는 말이 있다. 문을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았는데도 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 쇠금 변 대신 나무목 변으로 되어있다.

 

후금(喉衿)’은 목과 옷깃으로 급소(急所)나 요해지(要害地)를 말한다. 모두 중요한 핵심의 뜻을 지니고 있다.

 

논어(論語)야말로 오경의 관할이며 육예(六藝)의 후금이라 표현한 것은 실로 논어라는 서물의 가치를 극도로 높인 것이다. 그만큼 맹자라는 서물의 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위령공문진(衛靈公問陳)’의 이야기는 논어(論語)』 「위령공1에 나온다. 양혜왕의 물음은 맹자첫 편의 수장(首章)에 나온다. 환퇴(桓魋) 이야기는 논어』 「술이(述而)22에 나온다.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루는 폐인(嬖人) 장창(臧倉)의 이야기는 맹자』 「양혜왕16에 나온다.

 

 

또한 맹자7편 외로도 맹자외서(孟子外書)4편이 더 있으니, 이는 곧 성선(性善), 변문(辯文), 설효경(說孝經), 위정(爲正)편이다. 그 문장이 내편 7편이 웅대하고 심원한 것에는 영 미치지 못하니, 내편과 같은 수준의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맹자 본인이 쓴 진품이 아닌 듯하며, 후세의 사람들이 맹자의 흉내를 내어 그 이름을 맹자에 기탁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又有外書四篇:性善辯文說孝經爲政. 其文不能弘深, 不與內篇相似, 似非孟子本眞, 後世依放而託之者也.

 

맹자라는 서물에 외서(外書)4편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했다. 조기가 맹자7편을 내편(內篇)’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외서4편은 외편(外篇)’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기가 이것을 명료하게 편명을 밝혀놓고 그 4편의 문체나 내용의 가치가 내편에 비하여 현저하게 떨어지므로 위작으로 간주하여 맹자라는 서물에서 삭제해버렸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조기가 접한 맹자는 실로 11편 체제의 서물이었다는 사실과, 조기의 장구편집으로 인하여 외서4편이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애석한 사실을 조기의 제사(題辭)로 인하여 우리는 확증할 수 있다. 조기가 외서4편을 삭제해버렸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주한 맹자의 장구체제가 단순히 기존의 7편을 그냥 답습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체제상의 변형이나 내용의 편집을 행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의심은 맹자라는 오늘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문헌비판의 한 시좌(視座)가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조기 이전에는 맹자라는 서물이 모두 외서를 포함한 11편 짜리 책이었을까? 사기(史記)』 「맹순열전에는 이와 같이 쓰여져 있다. ‘맹자는 고향으로 은퇴하여 만장의 무리들과 함께 를 편찬하여 중니가 뜻하는 바의 정신을 조술하였고, 맹자7편을 지었다[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분명히 사마천이 본 맹자7편짜리 체제였다. 그런데 반고(班固)한서』 「예문지에는 유가자류(儒家者流) 속에 맹자11(孟子十一篇)’이 저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조기가 본 내편ㆍ외편 11편 체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는 유향(劉向)ㆍ유흠(劉歆) 부자의 노력에 의하여 성립한 칠략(七略)을 요점정리한 것이다. 유흠이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칠략을 완성한 것은 애제(哀帝)의 시기(BC 6~BC 1)였으므로 칠략BC세기가 끝나갈 즈음 성립한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한무제 태시(太始) 4(BC 93) 경에는 거의 완성된 작품이다. 그렇다면 외서라는 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작품이 아니라, BC 93년부터 BC 1년까지, 대략 100년 사이에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졌거나, 발굴되어 첨가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시기야말로 고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였으므로 외서는 새롭게 누군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 때문에 조기도 외서라는 이름으로 구분지어 불렀던 것이다. 조기의 외서배척으로 외서는 소멸되어 갔다.

 

고염무(顧炎武)일지록에서 말하기를, 사기(史記)』 『법언(法言)』 『염철론(鹽鐵論)등의 문헌에서 맹자를 인용하는 구문이 지금의 맹자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구문은 사라진 외서의 내용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하여튼 조기가 외서를 배제시킨 것은 유감이다. 아무리 위서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인멸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든지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외의 것은 다 가짜라고 주장하는 엣센시알리즘(essentialism)적 사고는 위험하다.

 

성선변문설효경위정(性善辯文說孝經爲正)’을 끊는 방식도 성선변(性善辯)ㆍ문설(文說)효경(孝經)ㆍ위정(爲正)’이 될 수도 있다(북송의 손석孫奭, 962~1033이 끊는 방식이다). 그런데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본성편(本性篇)에는 맹자작성선지편(孟子作性善之篇)’이라는 언급이 있다. 맹자가 지은 성선(性善)이라는 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선ㆍ변문ㆍ설효경ㆍ위정으로 끊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구독방식은 아니다.

 

남송의 손혁(孫奕)시아편(示兒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전에 나는 전배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관각 중에 맹자외서4편이 있는 것을 친히 보았다고[昔嘗聞前輩有云, 親見館閣中有孟子外書四篇]” 동한 말에서 남송까지 거의 1천 년 동안 맹자외서의 완본이 궁중도서관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신빙할 수가 없다. 여기 전배(前輩)’가 한 말이라고 애매하게 인용한 것은 전배들에게서 직접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용담이나 뺑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남송 때의 유창시(劉昌詩)寧宗 開禧元年 1205 進士가 쓴 노포필기(蘆浦筆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의 고향 신유 사씨의 고택에는 고서가 잔뜩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성선변(性善辯)한 질이 있었다[予鄕新喩謝氏多藏古書, 有性善辯一帙].’ 유창시는 분명 친히 성선변한 질을 보았다고 했으나, 그 또한 그것이 조기가 본 4편 중의 하나인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남기고 있질 않다. 현재 맹자외서(孟子外書)라 이름하는 4편의 책이 전하고는 있는 데 이것은 명나라 말기의 사람으로서 진한 이래의 유문(遺文)을 수집하는 데 일생을 바친 요사린(姚士粦)의 작품인데, 보통 위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청나라 때의 오건(吳騫)이 이것을 간행했는데 그때 주광업(周廣業)은 이것을 가리켜, ‘명백하게 위탁에 속한다[顯屬僞託]’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걸(丁杰)소유산방집(小酉山房集)에서 매우 자세히, 그것이 위작임을 한 줄 한 줄 따져서 밝히고 있다. 양계초(梁啓超)한서예문지제자략고석(漢書藝文志諸子略考釋)에서 위작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위작[僞中出僞]’이라고 평하고 있다. 하여튼 오늘 전하는 맹자외서는 조기가 본 외서와는 무관하는 것이 정설이다.

 

맹자라는 서물의 저작과정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그런데 이 저작성(authenticity)에 관한 논의는 결국 두 갈래로 집약된다. 그 하나는 맹자가 맹가(孟軻)라는 역사적 인물의 생전 저작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맹가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나, 우리는 이 두 설을 종합할 수밖에 없다. 맹자의 상당부분이 맹가의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편찬된 것이 분명하며, 또 상당부분이 사후에 제자들에 의하여 보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모든 언설이 쌩으로 날조된 것은 별로 없으며 역사적 맹가 본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진문헌 중에서 맹자처럼 역사적 진실이 반영되어 있는 생생한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국시대의 리얼한 진실을 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맹자가 이 세상을 뜬 후에, 그가 주장했던 인의의 대도는 결국 그 뜻이 펼쳐지지 못하고 쇠락하고 만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진 나라에 이르러 경술(經術)의 책들을 불살라 회멸해버리고, 유생(儒生)들을 산 채로 묻어 도륙하였기에, 맹자를 따르는 도당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맹자라는 책은 경학이 아닌 제자의 책으로 호명되어, 다행스럽게도 그 편적(篇籍)이 민절(泯絶)되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孟子旣沒之後, 大道遂絀, 逮至亡秦, 焚滅經術, 坑戮儒生, 孟子徒黨盡矣!其書號爲諸子, 故篇籍得不泯絶.

 

분서갱유(焚書坑儒)에 관한 자세한 시말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34년조와 35년조를 참고할 것이다. 34년조에 보면 태우지 않아도 되는 책으로 거론된 것은,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3종뿐이며 제자(諸子)의 책은 들어가 있지 않다. 오히려 태우라고 명한 것이 ()ㆍ서()ㆍ백가어(百家語)’라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제자백가의 책은 태움의 대상으로 분류되었음즉 하다. 그러나 조기의 이 언급은 사마천의 기록과는 또 다른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실황을 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제자(諸子)의 서는 소멸(燒滅)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하여튼 맹자라는 서물이 분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 같다.

 

분서갱유에 관하여 다양한 역사학적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사건은 진나라를 멸망케 하는 직접원인의 하나였다. 언로(言路)를 폐쇄하는 문명은 필망한다. 분서갱유는 이사(李斯)가 주동한 짓이나 그의 죽음 또한 분서갱유의 업보라 말할 수 있다. 통일제국의 획일주의적 질서감각에 위배되는 고루한 유생들을 죽인다는 명분이었지만, 결국 이사는 환관 조고(趙高)의 모함 하나를 돌파하지 못하고 천여 번의 매질에 허위자백을 하고 함양의 시장바닥에서 허리가 잘리는 요참(腰斬)의 형을 받고 죽는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같이 투옥된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한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언설은 우리를 서글프게 만든다(李斯列傳).

 

 

내가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우리 시골 누런 개를 끌고서 고향 상채(上蔡)의 동쪽 변두리로 나가 토끼사냥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구나!

吾欲與若複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免, 豈可得乎

 

 

태사공의 말대로 이사의 영민한 지혜로 말하자면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업적을 남길 만한 인물이었는데, 언로를 폐쇄하고 개방적 정치를 행하지 않다보니 결국 군주에게 아부하고 구차하게 영합하여 대의를 그르치게 된 것이다.

 

 

한나라가 흥하고 진나라의 포학(暴虐)한 금령(禁令)들이 하나씩 다 제거되고 도덕(道德)의 세상을 새롭게 열어 펼치게 되었다. 이에 효문황제(孝文皇帝, 한문제)께서는 학생들이 수도에 나와 유학할 수 있는 길을 넓히고자 하여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 이아(爾雅)를 교수하는 박사(博士) 관직제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 후 효무황제(한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제자(諸子)나 전설(傳說) 같은 것을 전공으로 하는 전기박사(傳記博士)제도는 폐기해버리고, 오직 오경을 전공하는 박사제도만을 설치하였으니 맹자박사제도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뭇 경서의 해석에 있어서 맹자를 인용함으로써 사리를 밝히는 일이 가능하였으니, 맹자야말로 학문의 도를 넓히는 박문(博文)의 공이 크다고 일컬을 만하다.
漢興, 除秦虐禁, 開延道德, 孝文皇帝欲廣遊學之路, 論語孝經孟子爾雅皆置博士, 後罷轉記博士, 獨立五經而已. 訖今諸經通義, 得引孟子以明事, 謂之博文.

 

박사(博士)’라는 호칭은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있었으나 직관제도로서 나타나는 것은 전국말기 때부터이다. 진시황 때도 박사라는 직책이 70여 명이 있었다. 지금 박사(Doctor of Philosophy)’라는 것은 하나의 자격증 같은 것이지만 중국고대의 박사는 직관(職官)이니까 국가기관의 전임교수정도의 의미에 가깝다. 봉록이 400석 정도로서 높지는 않았지만 그 직위는 매우 존엄한 대접을 받았다. 조기는 서한 효문제 때 맹자박사(맹자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직위)’가 있었다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효문제 때의 박사제도는 제자(諸子)ㆍ유경(儒經)ㆍ술수(術數)ㆍ방기(方伎) 등 폭넓은 주제에 걸쳐 있었는데, 무제 때에 와서 오경박사(五經博士)()ㆍ시()ㆍ서()ㆍ예()ㆍ춘추(春秋)의 전공 박사로 좁혀지면서 맹자박사는 사라지게 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맹자박사는 약 40년간 존속되었다문제의 시기로부터 무제 건원(建元) 5, BC 136년까지. 40년은 중국역사를 통하여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맹자가 대접받은 유일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덕분에 그나마 조기의 맹자장구가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비유를 들어 사리를 설명하는 데 특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사람들에게 별로 박절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그 말하고자 하는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그가 한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저 시()를 말하고자 하는 자는, 지엽적인 한 글자를 가지고서 전체 문장의 뜻을 그르치면 아니 된다. 그리고 또 문장의 뜻을 가지고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주제를 그르치면 아니 된다. 그 시를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를 가지고서 직접 시인의 주제와 만나게 될 때에 비로소 시()는 바르게 해석되는 것이다.”
孟子長於譬喩, 事不迫切, 而意以獨至, 其言曰: “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以意逆志, 爲得之矣.”
 
맹자의 이 말은 후세의 학인들로 하여금 문장 배후의 의()를 깊게 깊게 탐구하여 그 문()해체시키게 하는 사려깊은 언설인데, 이러한 언설은 비단 시()를 해석하는 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즈음 맹자를 주해하는 사람들이 왕왕 일자일구(一字一句)에 구애되어 해석함으로써 그 전체 진의를 놓치게 된다. 그 설들이 서로 어그러져 제각기 이설(異說)을 말할 뿐 공통의 주제의식이 없다. 맹자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맹자를 전하는 사람도 오늘까지 수없이 많다.
斯言殆欲使後人深求其意, 以解其文, 不但施於說. 今諸解者, 往往摭取而說之, 其說又多乖異不同. 孟子以來五百餘載, 傳之者亦已衆多.

 

괄호 안의 설시자(說詩者)’ 운운한 내용은 만장4에 나온다.

 

 

나 조기는 서경西京(경조京兆 장릉長陵)에서 태어났다. 세세로 천자의 어위(御位)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나의 집안의 내력이 실로 거기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조나라의 령왕(靈王)5대조이고, 그 시원을 더듬으면 제전욱(帝顓頊)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어려서 부모님의 엄격하고 방정(方正)한 가정교육을 받았고, 경전과 문학의 문헌을 넓게 섭렵하였다. 50세가 되었을 때 경조(京兆)의 장관 당현(唐玹)의 잘못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 원망이 하늘에까지 사무칠 거대한 슬픔을 당하였으니(대소가가 모두 몰살을 당함), 그 냉가슴의 쓰라림과 억울함 속에서 성()을 속이고 둔신(遁身)하며 온천지 사방을 떠돌며 편력한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형체가 피폐해질 때로 해지니 어떠한 곤요로움이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余生西京, 世尋丕祚, 有自來矣. 少蒙義方訓涉典文. 知命之際, 嬰戚于天, 遘屯離蹇, 詭姓遁身, 經營八紘之內, 十有餘年, 心勦形瘵, 何勤如焉
 
제수(濟水)와 태산(泰山) 사이산동성의 북해군(北海郡) 지방에서 어깨를 쉬게 하려 짐을 내려놓고 있을 때이때 조기는 실제로 시장에서 어깨에 편단(扁担)을 메고 떡장수를 하면서 연명했다, 때마침 그 지역의 온고(溫故)하면서도 지신(知新)할 줄 아는 아덕군자(雅德君子)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안구(安邱)의 손숭(孫嵩)이라는 은인을 만나게 된다. 나의 초췌하여 병든 몸을 긍휼히 여기고, 백발이 성성한 나에게 따사로운 온정을 베풀고, 왔다갔다 하면서 대화를 나누며 옛 성현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 어지러운 현세에 대한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를 대도(大道)로써 하였다. 당시 나는 너무도 곤궁한 가운데 있었고, 정신은 표유하여 흔들렸고, 지력을 한 군데로 집중시킬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료한 심사를 달래며 한가롭게 의지를 한묵(翰墨)에 적시어 어지러운 사념들을 다스리고, 늙어가는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쳤다.
嘗息肩弛擔於濟岱之間, 或有溫故知新, 雅德君子, 矜我劬瘁, 眷我皓首, 訪論稽古, 慰以大道, 余困吝之中, 精神遐漂, 靡所濟集, 聊欲係志於翰墨, 得以亂思遺老也.
 
대저 육경의 학문은 선각(先覺)의 선비들이 해석하고 분변한 것이 이미 상세하다. 그 많은 유가의 책들 중에서 오직 맹자만이 웅대하고 심원하여 미묘한 아취가 있으니, 실로 그 숨겨진 오묘한 뜻은 깨닫기가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맹자야말로 더욱 마땅히 조리있게 훈석해야만 하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이미 내가 들어 알고 있는 것을 술하고, 경서와 경서를 해석한 주석들로써 증거를 대고, 장구(章句)를 만들어 본문을 빠짐없이 실었다. 그리하여 각 장마다 그것이 소기하는 취지를 명료히 하고 7편을 모두 상ㆍ하로 나누어 모두 14권을 지었다.
惟六籍之學, 先覺之士釋而辯之者既已詳矣. 儒家惟有孟子閎遠微妙, 縕奧難見, 宜在條理之科. 於是乃述己所聞, 證以經傳, 爲之章句, 具載本文, 章別其旨, 分爲上, 凡十四卷.
 
엄격히 말하자면, 나의 이러한 작업은 학문이 상달한 사람들에게는 감히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이나, 초학자들에게 활용된다면 의심을 깨치고 깨닫거나 의혹을 명료히 분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나의 작업이 정말 바른 것인지 바르지 못한 것인지를 명백하게 말할 수 없다. 후세에 이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그 잘못된 점을 간파하여 그것을 고쳐 바로잡아 준다면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究而言之, 不敢以當達者, 施於新學, 可以寤疑辯惑. 愚亦未能審於是非, 後之明者見其違闕, 儻改而正諸, 不亦宜乎.

 

마지막 단은 조기의 인생에 대한 정보가 없이는 해독하기 어렵다. 세부적인 주석을 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대체적 흐름을 파악하는 것으로 족하다.

 

 

 

 

인용

목차 / 맹자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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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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