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암협에 살던 연암이 서울로 온 이유
이 글을 읽은 뒤 박지원도 여기에 답장하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의 제목은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이다. 읽기에 따라 씁쓸하기도 했을 제자의 글을 받아본 뒤 막상 연암은 머쓱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은 형식으로 답장을 했다. 오늘의 눈에는 무의미한 장난 글로 비치겠으나, 그 글 한 줄 한 줄에 살가운 정이 담겨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멋이 깃든 줄을 알겠다.
6월 어느 날,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연암 어른을 찾아가니 어른은 사흘이나 굶고 계셨다. 탕건도 벗고 맨발로 방 창턱에 발을 걸치고 누워 행랑채의 아랫것과 서로 문답하고 계셨다.” 소위 연암燕巖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금천협金川峽에 살므로 사람들이 인하여 이를 호로 삼은 것이다. 내 집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에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하는 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 새 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 오곤 했다. 서울 집은 비록 몹시 습하고 좁지만 모기나 개구리, 푸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云: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所謂燕巖者, 卽不侫金川峽居, 而人因以號之也. 不侫眷屬, 時在廣陵. 不侫素肥苦暑, 且患草樹蒸鬱, 夏夜蚊蠅, 水田蛙鳴, 晝夜不息以故, 每當夏月, 常避暑京舍. 京舍雖甚湫隘, 而無蚊蛙草樹之苦. |
당시 연암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에 살고 있었는데, 한 여름에는 물 것들과 더위를 피해 서울 집으로 혼자 와 있곤 했다.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버려 밥 지어줄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저도 또한 일 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는지라 노비와 같았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속에 두지 않았다. 때로 시골 편지를 받으면, 단지 평안하단 글자나 살펴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慶弔事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이야기 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남들이 그 우활하여 마땅함이 없고 지리하여 싫어할만 함을 책망해도 또한 그만둠을 알지 못하였다. 또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 사는 것을 나무람이 있어도, 더욱 편안하여 바야흐로 한 가지 일도 없음을 가지고 자득自得하며 지내었다. 獨有一婢守舍, 忽病眼, 狂呼棄主去, 無供飯者. 遂寄食廊曲, 自然款狎, 彼亦不憚使役, 如奴婢.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人或讓其迂濶無當, 支離可厭, 而亦不知止也. 又有譏其在家爲客, 有妻如僧者, 益晏然, 方以無一事爲自得. |
당시 가족들은 광릉에 있고, 자신만 혼자 서울 집에 머물던 사정을 길게 이야기 한 후, 그나마 집을 지키던 계집종마저 눈병 끝에 발광하여 집을 나가버리고, 정거무념靜居無念의 상태로 세상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던 이런 저런 정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찾아온 사람 무안하게 침묵으로 어깃장을 놓다가도, 말귀도 못 알아들을 참외 장수, 땔감 장수 앞에서는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일장 강의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어차피 효제충신孝悌忠信이니 예의염치禮義廉恥니 하는 것은 이미 사대부에게서는 빛을 잃은 것들이거니와 더불어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전문
인용
4. 연암의 호기로움
5-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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