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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20. 인함과 지혜로움에 대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20. 인함과 지혜로움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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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인함과 지혜로움에 대해

 

 

6-20. 번지가 앎()에 관하여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백성의 마땅한 바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6-20.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번지가 또 인()에 관하여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한 사람은 항상 어려운 큰 일을 먼저 도모하고, 자신을 위하여 얻는 일은 뒤로 한다. 그리하면 가히 인하다 말할 수 있다.”
問仁. :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번지에 관해서는 위정(爲政)5에서 충분히 해설하였다. 번지는 46세 연하의 말년 제자로서 수레몰이를 하며 공자의 측근에 있었던 제자다. 요즈음의 언어로 말하면 공자의 쇼파 노릇을 했던 당돌한 20대의 젊은이다. 분명 이 대화도 귀로 후의 달관한 노경의 공자에게 어떤 근원적인 삶의 지혜를 묻는 장면의 한 기록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번지의 특징이 거창한 질문을 곧바로 쉽게 던진다는 데 있다. 그만큼 당돌하고 호기심이 많고 저돌적이며, 또 상황을 잘못 가리는 주책맞은 구석도 있는, 하여튼 심심치 않은 친구다. 안연(顔淵)22에도 번지문인(樊遲問仁)’으로 시작되는 질문이 있고, 자로19에도 번지문인(樊遲問仁)’으로 시작되는 질문이 실려있다. 우리는 그래도 이 저돌적인 친구 때문에 만고에 빛나는 공자의 명언을 가슴에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의 공자의 말씀을 어려서부터 가슴에 새겨왔다. 그리고 이 장의 말씀 하나만으로도 양천여년(兩千餘年)의 서양철학사조를 뒤엎어버릴 수 있는 호연지기를 양()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그 함의는 막중하고 거대하다.

 

()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인식론적 성찰(epistemological reflection)을 배제할 수가 없다. 어떻게 아는가를 묻는다면 인식론적 성찰이 주가 되고, 안다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가치론적 테마가 될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인식론과 가치론이 분리되질 않는다.

 

공자의 학단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배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모두 앎의 확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아는 것이요, 물가를 파악하는 것도 아는 것이요, 동ㆍ식물의 이름 아는 것도 아는 것이요, 정가의 소식을 듣는 것도 아는 것이요, 노래를 외워 부르는 것도 아는 것이다. 이 모든 앎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앎일까? 인간은 과연 무엇을 알고 행할 때 가장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이런 등등의 질문이 번지의 뇌리에는 있었을 것이다.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갑자기 종교론적 테마를 제시한다. 갑자기 귀신을 테마로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차원을 배제하고는 논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등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세계, 신성의 세계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정일치적인 고대사회의 상식적 구조 속에서 공자가 귀신을 멀리할 때만이 인간의 참다운 앎이 성립할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테제를 제시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며 가히 혁명적이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할 줄 알면 가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여기 귀신(鬼神)이라는 말은 다신론(polytheism)이냐 유일신론(monotheism)이냐를 가릴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유일신론은 다신론적 환경 속에서, 한 인간공동체와 특정한 신과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특별한 계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주는 야훼 자신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종교로서 유일신론이 존재해본 적이 없다. 진정한 유일신은 언어를 초월하며, 그것은 절대적 타자이며, 절대적 추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교적 제도와는 양립할 수가 없다. 진정한 유일신론은 언어를 초월하는 신비주의의 영역일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지구상의 제도화된 종교가 신봉하는 유일신은 잡신 중의 만신(萬神: 가장 쌘 신)일 뿐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귀신은 디비니티(Divinity), 즉 신성 일반을 가리키는 대명사일 뿐이며 다신ㆍ일신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이러한 신성의 문제에 대하여 공자는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무신과 유신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신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부정한다는 것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부정한다는 나의 행위는 이미 부정하는 대상을 실체화시키고 있다. 구체적 사례에 있어서는 긍정ㆍ부정이 가능하고 또 유용하지만, 신성의 존재에 관한 사태는 전혀 긍정과 부정이라는 인간의 인식적 행위가 크나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한국의 대형교회에 미쳐있는 한 신도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 명제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공자가 당면한 세계는 귀신이 모든 예악의 주체가 되어있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서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공경하되 멀리하라!

 

경이원지(敬而遠之)! 그 얼마나 슬기로운 대답인가? 우리가 알아가고 있는 세계의 주체가 신()이라구요? 하나님이 계시다구요? ! 하나님을 잘 섬기세요!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세요. 하나님을 멀리할 때만 우리는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ㆍ니체의 생의 철학의 절규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쳐야만 했는가? 왜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외쳐야만 했는가? 러셀의 기술이론이 과연 왜 나온 것인가? 황금산을 없애기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없애기 위한 것인가? 왜 논리실증주의가 그토록 존재론의 오류를 반박했어야만 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이 과연 무엇인가? 사실 매우 정교하게 보이는 모든 컨템퍼러리한 철학논쟁도 신학적 ㆍ형이상학적 존재론(ontology)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질 못하다. 그만큼 종교의 질곡이 현실적으로 막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는 공자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멀리하라!

 

사실 당시의 이 한 메시지는 19세기 말의 니체의 절규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다. 신을 살해한 니체보다 신을 공경한 공자가 니체가 소기한 것보다 더 래디칼한 소득을 인류문명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신을 가까이 하는 자는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에게서 믿는다고 하는 신앙의 명제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앎의 명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을 멀리함 =

 

신을 가까이 하는 자는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는 참으로 아는 자가 될 수 없다. 현세의 위로나 사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냉철한 삶의 앎을 얻을 수는 없다. 공자는 귀신의 세계를 부정하거나 혁파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모든 종교적 신앙의 문제를 인간과 신의 거리감(Distancing)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과 인간이 거리를 두면 둘수록 신은 신다워지고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의 배경에는 이미 오랫동안 꾸준히 진행되어온 주나라의 인문전통이 있다. 공자가 주공(周公)을 그의 삶의 패러곤으로 존숭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인문주 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경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이르기를.

 

倬彼雲漢 장엄하고 높게 떠있는 하늘의 시내
昭回于天 밝은 빛따라 하늘을 휘감도다
王曰於乎 왕이 말씀하기를 아~ ~
何辜今之人 지금 이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나이까?
天降喪亂 하늘이 죽음과 어지러움만 내리시고
饑饉薦臻 기근만 거듭 거듭 이어지니
靡愛斯牲 좋은 희생 아낌없이 바쳤건만
圭璧旣卒 훌륭한 옥의 규와 벽을 다 올렸거늘
寧莫我聽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 하시는고!

 

旱旣大甚 가뭄이 너무 너무 심하여
蘊隆蟲蟲 열기가 푹푹 쌓여 아지랑이만 가득
不殄禋祀 연기 피우는 인제사를 그치지 아니 하며
自郊徂宮 교제로부터 종묘제사에 이르기까지
上下奠瘞 하늘 땅 제신께 공물을 올리고 땅에 묻고
靡神不宗 신이라는 신은 높이지 아니 함이 없건만
后稷不克 우리의 시조 후직도 당해내지 못하는구나
上帝不臨 최고 신 상제는 임하지 아니 하고
耗斁下土 이 땅만 팽겨쳐지고 낭패 보고 마는구나
寧丁我躬 어찌하여 선량한 이 내 몸에 이 처사가 웬 말이냐!

 

이 시에는 하느님이 도무지 소용없는 존재라고 하는 절망감, 하느님의 불공평과 무능력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 인간적 절규가 처절하게 이어진다.

 

昊天上帝 호천상제여!
則不我遺 나를 이 땅에 남기지 않고 파멸시키려느뇨?

 

昊天上帝 호천상제여!
寧俾我遯 나를 도망치지 않을 수 없도록 휘몰아가는구나!

 

여기서도 다신론적인 제신관(神觀)과 유일신론적인 호천상제(昊天上帝)는 병치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리 인간으로서의 성의를 다해도 그들은 무심한 존재요, 정당한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심판할 눈귀가 없는 존재라고 하는 회의와 원망이 처절하게 서려있다. 시경은 고대인들의 사유체계의 가장 리얼한 기록이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불신감은 도처에 깔려있다.

 

如何昊天 어찌된 일이냐? 호천 하느님이여!
辟言不信 인간의 법도 있는 좋은 말을 듣지도 않으니(소아 우무정(雨無正))

 

 

昊天不傭 호천 하느님이 균평하지 못하여
降此鞠訩 더없이 이 모진 난을 내렸도다
昊天不惠 호천 하느님이 은혜로운 마음이 없어
降此大戾 이 끔찍한 대란을 내렸도다

 

昊天不平 호천 하느님이 공평하지 못하여
我王不寧 선량한 우리 왕이 편치 못하다
不懲其心 악한 이의 마음을 징벌치 아니 하고
覆怨其正 도리어 악한 자를 바로잡으려는 선인을 원망하나니(소아 절남산(節南山)

 

이러한 신의 부조리에 대하여 인간은 몽매한 복종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체념적 개탄만을 일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상서(尙書)』 「강고(康誥)를 한번 보자! ()의 대상이 위나라에 분봉된 강숙(康叔)임에 틀림이 없으나 고()의 주체인 왕()이 누구냐에 관하여는 이설이 있다. 무왕설ㆍ성왕설ㆍ주공설이 있으나 대체로 이것은 성왕의 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서경집전(書經集傳)의 저자 채침(蔡沈)은 무왕설을 견지한다. 성왕(成王)이 관()ㆍ채()의 난을 평정한 후, 강숙으로 하여금 은나라의 유민을 이끌고 위나라 봉지로 가게 할 때 내린 고유이다.

 

 

성왕께서 말씀하시었다: “오호라! 소자봉(은 강숙의 이름)이여! 네 몸에 있는 병을 앓는 것처럼 너의 백성에게도 공경한 자세를 취하라! 하느님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이나 인간의 정성을 도울 뿐이니, 백성들의 마음은 명명백백히 드러나니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소인배들은 어차피 다스리기 어려우니 무시하거라. 가서 네 마음의 정성을 다하고, 편안하게 안일한 삶을 도모치 아니 하면 백성은 스스로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내 들으니, ‘백성들의 원망은 큰 데 있지도 아니 하고, 작은 데 있지도 아니 하다라고 하였다. 오직 네가 순리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 부지런히 힘쓰냐 힘쓰지 않느냐 함에 달려있을 뿐이로다. ~ , 그대 소자여! 네가 행하여야 할 일은 오직 왕의 덕을 넓혀 은나라 유민들을 화합케하고 보호하며 또한 왕을 도와, 하느님의 명령(天命)을 변덕스럽지 않게 만들어 오직 백성들을 진작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王曰: “嗚呼! 小子封! 恫瘝乃身, 敬哉! 天畏棐性, 民情大可見. 小人難保. 往盡乃心, 無康好逸豫, 乃其父民. 我聞, : ‘怨不在大, 亦不在小.’ 惠不惠, 懋不懋. , 汝惟小子! 乃服惟弘王, 應保殷民. 亦惟助王. 宅天命, 作新民.”

 

 

이러한 유()의 사유(思惟)서경전반에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보다는, 인간의 정성과 근면, 노력, 백성의 고통을 내 몸속의 질병과 같이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민의를 파악하는 현실적 감각에 치국(治國)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서경에 이미 인본주의적 사유가 배태되고 있는 것이다. 천명(天命)이란 작신민(作新民, 백성을 진작시키고 새롭게 하다)’의 도구적 위치밖에 차지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천명의 소이연은 오로지 작신민에 있다. 이러한 사상은 춘추시대에 내려오면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있게 인본위(本位)로 심화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장공(莊公) 32년 가을 7월 기사를 한번 펴보자! 주나라 천자 혜왕(惠王)이 내사(內史)인 과(, 꾸어, Guo)에게 괵() 땅 신()에 신이 강림했으니, 그곳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자, 내사 과는 나라가 정치는 잘못하면서 하느님께 빌기만 한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괵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는 학정을 베풀고 거창한 제사만 지내며 신의 소리만을 들으려 하다니!

虢必亡矣! 虐而聽於神!

 

 

막상 나라의 제사를 집례하는 대사(大史) ()마저도 다음과 같이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 제사는 망국의 제사로다! 나라는 반드시 망할진저! 내가 들으니 나라가 흥하려 할 때에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에는 신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虢其亡乎! 吾聞之, 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

 

 

참으로 용기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소공(昭公) 18년조에 공자도 존경의 염을 아끼지 않았던(5-15) 정자산(鄭子産: 정나라의 공자 산)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정나라에 큰 불이 일어날 것이라고 비조(裨竈)아마도 당시 정 나라의 세도 있는 만신박수였을 것이다가 예언을 하자, 나라가 망할 것이니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보물을 바쳐 큰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모두가 대소동을 벌였다. 이미 부근의 여러 나라에서 대화재가 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자산은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천도(하늘의 길)는 멀기 그지없고

인도(사람의 길)는 가깝기 그지없다.

먼 천도는 너무 멀어 우리가 미칠 바 아니니 그것을 도대체 어찌 알리오?

비조가 어찌 천도를 안단 말인가!

天道遠, 人道通. 非所及也, 何以知之? 裨竈焉知天道!

 

 

보물을 내어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고, 화재도 나지 않았다. 정공(定公) 원년에는, 주나라의 성()을 쌓는데 제후국들이 그 역()을 할당받는 문제로 서로 다투는 장면이 있다. ()나라와 설()나라가 서로 부역을 피하려고 종주권을 주장하는데 송나라의 대표 중기(仲幾)가 종교적인 핑계를 대어 헛소리를 하자, 강국 진()나라의 집정관 사미모(士彌牟)가 열을 받아 다음과 이야기한다.

 

 

설나라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로써 증거를 대려고 하는데 송나라는 귀신에게 증험을 구하니, 송나라의 죄가 크다.

薛徵於人, 宋徵於鬼, 宋罪大矣.

 

 

사미모는 송나라의 중기를 체포해버렸다. 환공(桓公) 6년조에 대국 초()나라의 계략에 빠져 수()호북성 동북부 수현 부근의 대국나라의 군주가 병을 일으켜 초나라를 치려 하자, 그 충신 계량(季梁)이 군주를 말리면서 하는 간언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대저 사람이 하느님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성왕은 반드시 사람의 일을 먼저 이루고 그 후에야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夫民, 神之主也. 是以聖王先成民, 而後治力於神.

 

 

마지막으로 양공(襄公) 14년조를 한번 펼쳐보자! 진나라의 악사인 사광(師曠: 춘추시대의 저명한 현자賢者)이 진나라의 군주(晋侯)를 모시고 있었는데, 진나라의 군주가 위나라사람들이 그들의 군주를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 좀 심하지 않냐고 사랑에게 묻자,사광이 이에 대답하는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대저 나라의 군주는 하느님의 주인이며, 백성들의 바램이옵니다. 만약 군주가 민생을 곤요롭게 만들고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소홀케 만들어, 백성들의 희망이 끊어지고, 사직에는 주인이 없어진다면 그 따위 군주를 어디다 쓰오리까? 그렇다면 제거해버리지 않고 무엇하리오?

하느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심은 아주 지극하옵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개 하나의 사람으로 하여금 만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며, 음탕한 부정을 마음대로 저지르고, 백성들이 하늘과 땅으로부터 받는 본래의 모습을 버리도록 하오리까? 반드시 그렇지 않으오리이다.

夫君, 神之主, 而民之望也. 若困民之生, 匱神之祀, 百姓絕望, 社稷無主, 將安用之, 弗去何爲? 天之愛民甚矣. 豈其使一人肆於民上, 以從其淫, 而棄天地之性? 必不然矣.

 

 

이 사광의 말에서 우리는 맹자의 방벌론(放伐論)까지 읽어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공자의 경이원지(敬而遠之)’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공자의 입에서 갑자기 떨어진 명언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56세기의 세월을 거치면서, 중원문명이 자체적으로 탈종교적이고 탈주술적인 사유를 거듭하고 인문주의적 토대를 쌓아올린 결과의 한 결정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타문명의 드라마틱한 유입이 없이 자체의 합리적 사유의 개발을 통해, 뮈토스적 세계의 환상을 거부하고, 정치권력과 결탁된 종교의 기미로부터 해방되어 간 그 중원문화의 위대성에 대하여 우리는 경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장의 공자 메시지의 위대성은 단지 신과 인간의 거리둠(Distancing)’의 탈주술적ㆍ탈신화적 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또 다시 메꾸는 장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모든 과학적 사유나 인류의 근대적 사유의 기초가 이 거리감에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거리를 메꾸는 작업은 바로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되고 있는 것이다.

 

무민지의(務民之義).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도 고주와 신주가 엇갈린다. 고주는 ()’백성으로 해석하여 그 사회적 맥락을 강조한다.

 

 

백성을 교화시키고 바르게 인도하는 그 까닭의 의로움을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務所以化導民之義也.

 

 

이에 반하여 신주는 ()’을 보편적인 추상체인 ()’으로 해석한다. 즉 사회적 맥락보다는 인간으로서 해야할 도리를 힘써야 한다는 내면적 덕성의 의미로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신ㆍ구의 의미에 대차가 없으나, 나는 일단 신주보다는 고주의 의미맥락을 중시한다. 번지가 물은 것은 지()였다. 즉 인식론적 맥락이었다. 거기에 공자는 경이원지(敬而遠之)’라는 신학적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56백 년 이상 진행되어온 중원문명의 인문학적 성과의 개가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거리의 공백에 또 다시 사회과학적 맥락을 제시하는 것이 다: ‘백성의 마땅한 바를 힘쓸지어다.’ ‘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의 귀신의 의미가 바로 무민지의(務民之義)’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귀신은 곧 만백성의 마땅함으로 화()해야 한다. 공자는 사실 귀신 그 자체를 예악화() 해버렸다. 귀신이 곧 예요 악인 것이다. 귀신은 곧 예와 악으로서 백성의 의로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백성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정의로운 가치이다. 사실 이러한 사상은 예수에게도 동일하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자였다. 예수는 신을 존재로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예수에게 신(하나님)은 오직 그가 선포하는 천국의 주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천국은 천당이 아니라 땅의 새로운 질서였다. 이 새로운 질서는 과거의 모든 종교의 율법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질서였다. 그것은 야훼와의 계약이 아닌 보편적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이었다. 천국에는 반드시 새로운 계약조건으로서의 새로운 계명이 필요하다. 그 계명은 무엇이었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12:31).

 

과거의 모든 계명은 신에 대한 계명이었다. 인간과의 관계도 모두 신에게 종속되는 관계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천국을 선포하면서 과거의 모든 율법적 계명을 파기해버린다.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더 이상 군더더기가 필요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아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 몸의 사랑에는 하등의 논리가 개입되지 않는다. 아프면 아야소리를 지를 뿐이다. 내 몸과 같 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몸 그 자체를 이웃에게로 연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웃이 나의 몸으로부터 소외되고 객화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의 일부로서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아집(我執)ㆍ아상(我相)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불교적 무아(無我)는 기독교에서는 절대적 자아의 포기, 희생, 헌신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곧 신의 사랑이요, 신에 대한 사랑이다.

 

번지는 지()에 관하여 묻고 연이어 인()에 관하여 묻는다. ‘인자선난이후획(仁者先難而後獲)’에 관하여서도 신ㆍ고의 입장이 엇갈린다. 고주는 선난(先難)’()’을 본동사로 본다: ‘인한 자는 먼저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그 후에야 공을 얻는다[先勞苦乃後得功]’. 그러나 신주는 ()’()’를 대비시키면서, 선과 후를 모두 본동사로 본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쉽게 얻는 일은 뒤로 한다.’ 사실 양자의 의미에 그리 대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공자가 경이원지(敬而遠之)’를 말한 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또 다시 우리민족의 역사는 공자 이전의 몽매한 시절로 후퇴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국민이 모든 광신적 사유에 대하여 경이원지(敬而遠之)’할 줄을 모르고 경이근지(敬而近之)’만 하려드는 것이다. 아무리 조선유학이 주자학의 도통적 권위주의에 짓눌려 본래의 정신을 상실했다 할지라도 선말(鮮末)의 지식인들의 행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기껏해야 미신적 형태의 말엽적 기독교를 놓고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에서 방황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과 같은 선말을 대표하는 지적 거물조차 그러한 갈림길을 초월하는 확고한 새로운 제3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유학의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버림받은 민중 속에서 동학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 솟았으나 고등한 문화 속에서 이러한 사조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의 광신적 기독교형태가 이 세태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논어를 읽으면서 개탄과 함께 아쉬움의 정취만 답답한 가슴에 맴돌 뿐이다.

 

 

()’()’은 모두 거성이다. ()’은 또한 보편적 인간이다. ‘()’은 얻는다는 것을 일컫는다. 오로지 인도(人道)의 마땅한 바를 힘쓰고, 불가지의 대상인 귀신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일이다. 매사에 있어서 그 어려운 것을 먼저 해내고, 효과(이익)를 얻는 일은 뒤로 하는 것이 인자(仁者)의 마음이다. 이것은 분명 번지의 인격적 취약함에 따라 고유해주신 말씀일 것이다.

, , 皆去聲. , 亦人也. 專用力於人道之所宜, 而不惑於鬼神之不可知, 知者之事也. , 謂得也. 先其事之所難, 而後其效之所得, 仁者之心也. 此必因樊遲之失而告之.

 

정이천이 말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데, 이것은 미혹한 짓이다. 그런데 또 하느님을 안 믿는 자들은 공경한 삶의 자세가 없어서 또 문제이다. 그러나 능히 공경할 줄 알면서 멀리할 줄 안다면 그것은 정말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程子曰: “人多信鬼神, 惑也. 而不信者又不能敬, 能敬能遠, 可謂知矣.”

 

정명도가 또 말하였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한다는 것은 극기(克己)이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하면서 얻을 이익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인()이다.”

又曰: “先難, 克己也. 以所難爲先, 而不計所獲, 仁也.”

 

여여숙(呂與叔)이 말하였다: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불가지의 귀신 같은 것을 신앙하지 않으며, 자기가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을 힘써 행하며, 하기 어려운 일을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呂氏曰: “當務爲急, 不求所難知; 力行所知, 不憚所難爲.”

 

 

17에서 직()한 삶의 그대로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18에서 지()ㆍ호()ㆍ낙()의 일체감을 말하였다. 그리고 18장에서부터 21장까지는 지()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의 해석의 상당부분이 나의 고려대학교 철학과 학부시절 이상은(李相殷, 1905~1976) 교수의 중국철학사강의의 노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은 선생은 함경남도 정평 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유학을 떠나 북경의 안후에이(安徽)중학, 천진의 난카이(南開)중학을 거쳐 1927년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당대의 천재로서, 근세유학의 거봉인 머우 쫑산(牟宗三)과 함께 수학하였다. 하바드대학의 철학자 뚜 웨이밍(杜維明)이 언젠가 나를 만났을 때 자기 마음속에 남아있는 가장 존경스러운 석학이 이상은 선생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젊은 시절에 머우 쫑산 선생의 소개로 일부러 방한하여 이상은 선생을 찾아 뵈었던 것이다. 한여름 자택에서 빳빳한 한 산모시 적삼에 붓글씨를 쓰고 계신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이것이 진짜 유자의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이 서렸었다고 했다. 지금 내가 대학교 시절에 깨알 같이 써 놓은 노트를 펼쳐놓고 보니 선생의 육성이 한순간 한순간 다 살아나는 듯하다. 꼬장꼬장한 인품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질타하시면서 유교의 인문정신만이 인류의 살길이라고, 나 보고도 도ㆍ불에조차 크게 관심을 가질 것 없다고 충고하시던 순순(諄諄)한 그 어조(語調)가 귓가에 쟁쟁하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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