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김시습은 29세에 호남 지방을 두루 보고 나서, 서울로 책을 사러 갔다. 이때 세조는 『연화경(蓮花經)』을 언해(諺解)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內佛堂)에서 역경(譯經) 사업을 돕게 된다. 1463년 가을의 일이다.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산실(山室)을 짓고 칩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이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김시습은 잠시 망설였으나,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 하고서, 날짜를 다투어 상경하였다. 원각사 모임의 찬시(讚詩)도 지으면서, 그는 당대의 현실을 성대(聖代)로서 인정하고자 마음먹었다【송석하(宋錫夏)의 구장본인 필사본 『매월당고(梅月堂藁)』에 보면 이렇게 읊고 있다. “급원(祈園精舍)이 시기에 버려져 있었거늘, 임금님 큰 계획으로 몇만 년을 가게 되었네, 취복(法服)에 까까머리로 부처님 만나는 날이지만, 치건에 단령(團領) 입고 요순시대를 송축하네, 피어오르는 향 연기는 임금님 수레 따라가고, 연속되는 서기는 불상을 감싸네, 은둔하는 자가 여기에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오색 구름 꽃 속에 기꺼이 예법을 차리노라[給園初敝市街前 聖曆鴻圖萬萬年 毳服圓顱逢竺日 緇巾曲領頌堯天 香煙 裊裊隨龍駕 瑞氣緜緜繞佛邊 誰信逸民參盛會 五雲朵裏喜周旋】.
하지만 끝내 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경주 남산으로 향하였다【1465년 4월에 김시습은 서거정을 방문하여 「금오정사제시(金鰲精舍題詩)」를 청하였다. 얼마 뒤 서거정은 시를 지어 주었는데, 『사가집(四佳集)』 「시집』권12에 실려 있다.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진작에 설잠 승려를 알고 있었는데, 만나보지 못한 지 24년이나 되었다. 하루는 나를 방문하고는 이야기 끝에 말하길, ‘내가 계림 남산에 땅을 가려 서너 칸 되는 정사를 짓고 도서를 좌우에 벌여두고는 그 사이에서 소요하고 음영하고 있소이다. 산중 사계절의 맛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라오. 나는 이곳에서 장차 늙을 예정이고, 또 이곳에서 입적할 생각이오. 근자에 천리 멀리 여행길을 떠났다가 서울에 당도하였는데, 내일이면 지팡이를 돌릴 것이오. 부디 선생께서 한 말씀을 해 주셔서 내 정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라고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뒤끝이라 붓을 내던지고 시 읊기도 정지한 지 여러날이 되었으나, 스님의 부탁을 어기기 어려워, 붓을 달려 근체시 여섯 수를 적어서 스님에게 올리는 바이다.”】. 일민(逸民)을 자처하였다. 심지어, 그가 법회에 왔다가 절 뒷간에 스스로 빠지자 승려들이 미쳤다고 여겨 그를 내쫓았다고도 한다.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김시습은 원효(元曉)가 속인의 삶과 승려의 삶을 절충하였다고 보고 그 삶에 동조하였다. 「무쟁비(無諍碑)」는 바로 무쟁대사 원효의 비를 보고 지은 시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김시습은 “우리도 환어(幻語)를 잘하는 무리라서, 환어에 대하여는 대략 아는 편이지만,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뒷짐지고 읽을 뿐, 서쪽서 오는 분(부처)을 보지는 못하누나[我曹亦是善幻徒 其於幻語商略矣 但我好古負手讀 吁嗟不見西來士]라고 하였다. 불법의 이치를 글로 읽어 터득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진정으로 체득하지는 못하였다고 한탄한 것이다.
김시습은 어떤 특정한 종파가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거나 지시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 유교나 불교는 모두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김시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禪)의 이치는 아주 깊어서 다섯 해나 생각해서야 투명하게 깨우쳤다. 이에 비하여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등급이 있어서, 건강한 사람이 사다리를 오를 때 한 발을 들면 곧바로 한 층을 올라가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처럼 돈오해서 상쾌한 즐거움은 없지만, 여유롭게 차츰 젖어드는 맛이 있다.
이것은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포섭한 논리이다. 그로서는 사실 종파적 분별의식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전기소설까지도 인간 삶의 진리를 담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민간의 설화를 수집하고 허구를 가미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렇다고 그는 비분강개의 뜻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것조차 망념(妄念)이라고 인식하면서도 그 망념에 자주 휘둘렸다.
인용
1. 『금오신화』란?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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