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1. 미리 안다는 것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蓍龜, 動乎四體. 禍福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至誠, 如神. 지극히 성(誠)한 도(道)는 미리 알 수 있으니, 국가(國家)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괴스런 일이 있어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고 사체(四體)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화(禍)와 복(福)이 장차 일어나게 되어 있을 때, 좋은 것도 미리 알 수 있고 나쁜 것도 미리 알 수 있다. 고로 지극한 성(誠)이라는 것은 신(神)과 같은 것이다. 禎祥者, 福之兆. 妖孼者, 禍之萌. 蓍, 所以筮. 龜, 所以卜. 四體, 謂動作威儀之間, 如執玉高卑, 其容俯仰之類. 凡此皆理之先見者也. 然唯誠之至極, 而無一毫私僞留於心目之間者, 乃能有以察其幾焉. 神謂鬼神. 정상(禎祥)은 복의 조짐이다. 요얼(妖孼)은 재앙의 싹이다. 시(蓍)은 산대로 점치는 것이다. 구(龜)는 거북껍질로 첨치는 것이다. 사체(四體)란 행동거지와 점치는 의례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니, 주(邾) 은공(隱公)이 노(魯) 정공(定公)에게 조회를 와서 옥을 바칠 때 은공이 옥을 너무 높이 들어 얼굴이 들렸고, 정공이 받을 때 너무 낮게 하여 얼굴이 숙여졌다. 그걸 보고 있던 자공은 “두 군주는 모두 곧 돌아가실 것이다”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옥을 잡음에 높고 낮음과 그 얼굴의 굽힘과 치켜듦의 종류가 바로 이것이다. 무릇 이것이 다 이치가 먼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성(誠)이 지극하여 하나의 터럭만큼도 사사로움과 거짓이 마음과 눈 사이에 머무르지 않으면 곧 그 기미를 살필 수 있다. 신(神)은 귀신을 말한다. 右第二十四章. 言天道也. 여긴 24장이다. 천도(天道)를 말했다. |
‘전지(前知)’
프로그노스티케이션(prognostication)! ‘프로그노시스(prognosis)’니 ‘아그노시스(agnosis)’니 ‘그노시스(gnosis)’니 하는 말은 뭐 어려운 것 같지만 별거 아니예요. 각각 ‘미리 안다’ ‘모른다’ ‘안다’로 간단히 번역해 버려도 무리 없이 의미가 통하는 쉬운 말이죠.
어학공부의 핵심은 어휘능력에 있다
어학을 하는 것은 외국문명을 알자는 것. 이런 류의 용어를 대할 때 철학적인 용어의 냄새가 나는 듯하고 간단히 해석해 버려서는 안 될 듯하기도 하고 도무지 자신이 없는 건 요즘 어학 공부가 잘못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승부는 ‘어휘능력’에 있습니다. 요새 어학이라는 걸 보면, 까불까불하게 말 잘하는 것이 어학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가 왜 외국 언어를 배우는지 그 근본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외국문명’을 알자는 것이죠. 까불까불 말 잘하는 것은 통역관들 시키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큰 사람이 되려면, 어학을 하는 근본을 알아야 해요. 외국문물을 자유자재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독해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문제제기는 요즘의 시류에 비춰보면 반동적인 것인데, 어학이라고 하는 것은 회화가 아니예요. 회화는 어학의 하나의 특수한 분야일 뿐입니다. 회화가 곧 어학으로 아는 그릇된 풍조가 요즈음 만연하고 있는데, 어학에 능하려면 일차적으로 ‘단어’를 풍부하게 습득해야 합니다. 발음이 개판이어도 상관이 없어요. 부지런히 사전을 뒤져서 단어를 많이 습득해야 해요. 어학의 승부는 단어와의 싸움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얄팍하게 말이나 잘하면 어학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무슨 어학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만큼 어학을 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책을 완벽하게 읽어 낼 수 있으니깐. 그게 어학이요! 내가 어학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영어 나부랑이를 잘 지껄여대서가 아니라, 영어책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거야 뜨문뜨문하게라도 내 의사를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아무 때나 됩니다. 나도 미국에 가서 좀 답답한 점을 느끼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답게 문법도 좀 틀리면서 발음도 좀 해괴한 듯하면서 심각한 말을 천천히 고상하게 해내면 그게 더 영어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외국인 영어 아니냐고!
내가 미국에 가서 영어를 하면, 무슨 도사가 와서 방가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나는 말 한마디를 해도 시시하게 하지 않거든요. 얄팍한 영어를 안 해요. 내 영어실력은 전부 사전으로 배워서 쌓은 겁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영어예요. 어학은 단어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나는 대학교 때 4만 단어 정도는 외웠는데, 그때 내 영어실력을 쌓느라고 뒤져댔던 그 사전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몇 십년 쌓아온 단어수준이 있으니깐 내 영어실력이 상당한 수준이겠죠?. 어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회화 잘하는 것을 조금도 부러워할 게 없어요. 외국어 회화에 능한 것을 어학으로 착각하는 데에 홀리지 마십시오. 이거,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전지(前知)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전지(前知)’, 미래를 미리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을 합리적인 구도에 의해서 알아야 하는데, 인간은 월권을 할려고 하죠. 여기서 점복(占卜)이라는 것이 생겨난 겁니다. 탤런트 선우용녀씨를 언제인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보고 자꾸만 사주관상을 봐달라고 그렇게 졸라댔어요.(웃음) 내가 끝까지 거절했더니, 눈을 흘기면서 왜 자기 사주관상을 안 봐주냐고 그렇게 서러워하더라고. 자기 삶의 미래가 되었든, 국가의 미래가 되었든, 미래를 알려는 욕망은 인간에게 강렬한 것이죠.
‘전지(前知)’의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과학입니다. 근세 계몽주의 이래 ‘전지(前知)’에 대한 욕망을 사이언스로 상당한 정도 충족을 시켰기 때문에, 미신과 과학의 차이가 명백해진 거예요. 막스 베버가 근대화를 미신으로부터의 탈출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전지(前知)’의 문제에 대해서, 근대과학적인 해석은 아니지만, 중용(中庸)에서도 이미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라.’ 이것을 “내가 지성(至誠)한 도(道)에 다다르면 앞질러서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에 ‘지(知)’의 목적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지성지도(至誠之道)’를 앞에서 말한 지극히 성실한 천지운행의 법칙이라고만 말한다면, “그 지성(至誠)한 길은 우리가 미리 알 수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지극히 성실한 ‘도(道)’의 세계는(여기서 ‘道’란 길<the way>, 법칙이다. 운행되는 길!) 우리가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단순하게 자연의 법칙(laws of nature)으로 봐버릴 것이냐?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제2권의 제일 마지막 글이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와 ‘네이춰 로우(natural law)’의 차이에 대한 것인데,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자연법칙이고, ‘네이춰 로우(natural law)’는 법학에서 말하는 ‘자연법‘입니다. ‘실정법’에 대한 ‘자연법’이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 양자가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문명에서는 갓(God)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God as legislator)이고, 신이 자연에 대해서 입법한 것을 인간이 알아낸다는 게 자연과학이라는 의미에서 이 자연법칙과 자연법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신이 자연에 대해서 입법한 것을 인간이 알아낸 것 그것이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라는 해석에 비추어 볼 때, 결국 ‘네이춰 로우(natural law)’라고 하는 것은 자연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에 대한 법칙인 셈이라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천부인권설 등 더 본질적인 문제가 여기에 속해요.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인데 이것은 자연사(natural history)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동양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여기서 바로 국가가 나와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도(道)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도(道)를 논하는 데서 문명세계의 도(道), ‘역사지도(歷史之道)’로 막바로 넘어옵니다. 니담의 경우처럼 초월적 입법자(God)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자연법칙과 자연법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생성과정에 있어서는 동본원(同本源)적일 뿐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성실한 천지자연의 도(道)와 문명의 도(道)를 하나의 축으로 ‘콱’ 꿰어 버리는 것이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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