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1. 미리 안다는 것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蓍龜, 動乎四體. 禍福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至誠, 如神. 지극히 성(誠)한 도(道)는 미리 알 수 있으니, 국가(國家)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괴스런 일이 있어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고 사체(四體)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화(禍)와 복(福)이 장차 일어나게 되어 있을 때, 좋은 것도 미리 알 수 있고 나쁜 것도 미리 알 수 있다. 고로 지극한 성(誠)이라는 것은 신(神)과 같은 것이다. 禎祥者, 福之兆. 妖孼者, 禍之萌. 蓍, 所以筮. 龜, 所以卜. 四體, 謂動作威儀之間, 如執玉高卑, 其容俯仰之類. 凡此皆理之先見者也. 然唯誠之至極, 而無一毫私僞留於心目之間者, 乃能有以察其幾焉. 神謂鬼神. 정상(禎祥)은 복의 조짐이다. 요얼(妖孼)은 재앙의 싹이다. 시(蓍)은 산대로 점치는 것이다. 구(龜)는 거북껍질로 첨치는 것이다. 사체(四體)란 행동거지와 점치는 의례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니, 주(邾) 은공(隱公)이 노(魯) 정공(定公)에게 조회를 와서 옥을 바칠 때 은공이 옥을 너무 높이 들어 얼굴이 들렸고, 정공이 받을 때 너무 낮게 하여 얼굴이 숙여졌다. 그걸 보고 있던 자공은 “두 군주는 모두 곧 돌아가실 것이다”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옥을 잡음에 높고 낮음과 그 얼굴의 굽힘과 치켜듦의 종류가 바로 이것이다. 무릇 이것이 다 이치가 먼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성(誠)이 지극하여 하나의 터럭만큼도 사사로움과 거짓이 마음과 눈 사이에 머무르지 않으면 곧 그 기미를 살필 수 있다. 신(神)은 귀신을 말한다. 右第二十四章. 言天道也. 여긴 24장이다. 천도(天道)를 말했다. |
‘전지(前知)’
프로그노스티케이션(prognostication)! ‘프로그노시스(prognosis)’니 ‘아그노시스(agnosis)’니 ‘그노시스(gnosis)’니 하는 말은 뭐 어려운 것 같지만 별거 아니예요. 각각 ‘미리 안다’ ‘모른다’ ‘안다’로 간단히 번역해 버려도 무리 없이 의미가 통하는 쉬운 말이죠.
어학공부의 핵심은 어휘능력에 있다
어학을 하는 것은 외국문명을 알자는 것. 이런 류의 용어를 대할 때 철학적인 용어의 냄새가 나는 듯하고 간단히 해석해 버려서는 안 될 듯하기도 하고 도무지 자신이 없는 건 요즘 어학 공부가 잘못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승부는 ‘어휘능력’에 있습니다. 요새 어학이라는 걸 보면, 까불까불하게 말 잘하는 것이 어학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가 왜 외국 언어를 배우는지 그 근본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외국문명’을 알자는 것이죠. 까불까불 말 잘하는 것은 통역관들 시키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큰 사람이 되려면, 어학을 하는 근본을 알아야 해요. 외국문물을 자유자재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독해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문제제기는 요즘의 시류에 비춰보면 반동적인 것인데, 어학이라고 하는 것은 회화가 아니예요. 회화는 어학의 하나의 특수한 분야일 뿐입니다. 회화가 곧 어학으로 아는 그릇된 풍조가 요즈음 만연하고 있는데, 어학에 능하려면 일차적으로 ‘단어’를 풍부하게 습득해야 합니다. 발음이 개판이어도 상관이 없어요. 부지런히 사전을 뒤져서 단어를 많이 습득해야 해요. 어학의 승부는 단어와의 싸움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얄팍하게 말이나 잘하면 어학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무슨 어학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만큼 어학을 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책을 완벽하게 읽어 낼 수 있으니깐. 그게 어학이요! 내가 어학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영어 나부랑이를 잘 지껄여대서가 아니라, 영어책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거야 뜨문뜨문하게라도 내 의사를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아무 때나 됩니다. 나도 미국에 가서 좀 답답한 점을 느끼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답게 문법도 좀 틀리면서 발음도 좀 해괴한 듯하면서 심각한 말을 천천히 고상하게 해내면 그게 더 영어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외국인 영어 아니냐고!
내가 미국에 가서 영어를 하면, 무슨 도사가 와서 방가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나는 말 한마디를 해도 시시하게 하지 않거든요. 얄팍한 영어를 안 해요. 내 영어실력은 전부 사전으로 배워서 쌓은 겁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영어예요. 어학은 단어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나는 대학교 때 4만 단어 정도는 외웠는데, 그때 내 영어실력을 쌓느라고 뒤져댔던 그 사전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몇 십년 쌓아온 단어수준이 있으니깐 내 영어실력이 상당한 수준이겠죠?. 어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회화 잘하는 것을 조금도 부러워할 게 없어요. 외국어 회화에 능한 것을 어학으로 착각하는 데에 홀리지 마십시오. 이거,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전지(前知)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전지(前知)’, 미래를 미리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을 합리적인 구도에 의해서 알아야 하는데, 인간은 월권을 할려고 하죠. 여기서 점복(占卜)이라는 것이 생겨난 겁니다. 탤런트 선우용녀씨를 언제인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보고 자꾸만 사주관상을 봐달라고 그렇게 졸라댔어요.(웃음) 내가 끝까지 거절했더니, 눈을 흘기면서 왜 자기 사주관상을 안 봐주냐고 그렇게 서러워하더라고. 자기 삶의 미래가 되었든, 국가의 미래가 되었든, 미래를 알려는 욕망은 인간에게 강렬한 것이죠.
‘전지(前知)’의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과학입니다. 근세 계몽주의 이래 ‘전지(前知)’에 대한 욕망을 사이언스로 상당한 정도 충족을 시켰기 때문에, 미신과 과학의 차이가 명백해진 거예요. 막스 베버가 근대화를 미신으로부터의 탈출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전지(前知)’의 문제에 대해서, 근대과학적인 해석은 아니지만, 중용(中庸)에서도 이미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라.’ 이것을 “내가 지성(至誠)한 도(道)에 다다르면 앞질러서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에 ‘지(知)’의 목적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지성지도(至誠之道)’를 앞에서 말한 지극히 성실한 천지운행의 법칙이라고만 말한다면, “그 지성(至誠)한 길은 우리가 미리 알 수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지극히 성실한 ‘도(道)’의 세계는(여기서 ‘道’란 길<the way>, 법칙이다. 운행되는 길!) 우리가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단순하게 자연의 법칙(laws of nature)으로 봐버릴 것이냐?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제2권의 제일 마지막 글이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와 ‘네이춰 로우(natural law)’의 차이에 대한 것인데,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자연법칙이고, ‘네이춰 로우(natural law)’는 법학에서 말하는 ‘자연법‘입니다. ‘실정법’에 대한 ‘자연법’이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 양자가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문명에서는 갓(God)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God as legislator)이고, 신이 자연에 대해서 입법한 것을 인간이 알아낸다는 게 자연과학이라는 의미에서 이 자연법칙과 자연법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신이 자연에 대해서 입법한 것을 인간이 알아낸 것 그것이 ‘로우스 오브 네이춰(laws of nature)’라는 해석에 비추어 볼 때, 결국 ‘네이춰 로우(natural law)’라고 하는 것은 자연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에 대한 법칙인 셈이라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천부인권설 등 더 본질적인 문제가 여기에 속해요. ‘지성지도(至誠之道)’는 ‘가이전지(可以前知)’인데 이것은 자연사(natural history)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동양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여기서 바로 국가가 나와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도(道)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도(道)를 논하는 데서 문명세계의 도(道), ‘역사지도(歷史之道)’로 막바로 넘어옵니다. 니담의 경우처럼 초월적 입법자(God)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자연법칙과 자연법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생성과정에 있어서는 동본원(同本源)적일 뿐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성실한 천지자연의 도(道)와 문명의 도(道)를 하나의 축으로 ‘콱’ 꿰어 버리는 것이죠.
24장 2. 중풍과 당뇨는 업보
‘국가장흥 필유정상(國家將興 必有禎祥)’
여기서 ‘정(禎)’이라는 것은 ‘정(貞)’이고 이것은 점친다는 말입니다. 지난 여름 2림(林)때 최교수의 갑골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이 맥락을 잘 이해할 거예요. 주자에게는 갑골에 대한 정보가 확실히 없었으니까. 정확한 번역을 하지 못했을 텐데, 이 ‘정(貞)’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장망 필유요얼(國家將亡 必有妖孼)’
이것은 분명하죠? 도올서원이 일어날려고 하면, 이곳에 좋은 학생들이 모여서 상서로운 조짐이 돌아야 제대로 될 것이고, 도올서원이 망하려고 한다면 요괴스러운 현상이 많이 일어나서 망합니다. 인간 세상사라는 것은 명백한 거예요. 이것은 ‘지성지도(至誠之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미리 알 수 있어요. 너무도 명백한 코스를 밟아가는 역사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죠. 이 말은 상당히 역사론적이죠?
‘현호시구 동호사체(見乎蓍龜 動乎四體)’
주자 주(註)를 보면, “시(蓍)는 소이서(所以筮)요, 귀(龜)는 소이복야(所以卜也)”라고 했는데, 여기서 ‘시(蓍)’라는 것은 정확하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강가의 풀이라고 해요. ‘시(蓍)’라는 풀이 있는 모양인데 옛날에는 이 시초(蓍草)를 가지고 점을 쳤대요. ‘구(龜)는 소이복(所以卜)’ 최영애 교수의 강의에 나왔죠? 거북이 껍대기를 파서 태운다고 했어요. ‘복(卜)’자는 거북이 뱃대기판의 안쪽을 파서 태운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도올서원의 용어로써 기존에 나왔던 사람들은 ‘기림(旣林)’, 새로운 참여자는 ‘신림(新林)’이라고 구분해서 불러야겠어요. 부르기에 불편을 더는 의미뿐입니다. 기림들이 신림들에게 기존의 강의성과물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어떤 통로가 있으면 좋겠어요. 꼭 출판을 하지는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복사물을 만들든지 해서 서로 나눠 갖도록 하는 식으로 중요한 내용들은 정리를 해뒀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황병기 선생님이나 최영애 교수 같은 분들의 강의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니까, 신림들이 기림들이 배운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주자 주(註)를 보면, “四體 謂動作威儀之間 如執玉高卑 其容俯仰之類”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 옥(玉)을 받들어 든 것이 높고 낮음에 그 얼굴을 숙이고 쳐드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이다[如執玉高卑 其容俯仰之類].’는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정공(定公) 15년조(條)에 나오는 고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어요. 주나라 은공(隱公)이 노나라로 조회를 갔을 때 자공(子貢)이 이것을 구경하였는데, 은공은 예물인 옥(玉)을 잡아 올림에 너무 높게 하여서 얼굴을 너무 쳐들었고, 정공(定公)은 옥(玉)을 받음에 너무 낮게 하여 얼굴이 너무 숙여졌답니다. 자공이 이걸 보고는 두 나라 군주가 모두 사망할 조짐이 있다고 예언했는데 그 후 그 예견이 맞아들었다는 거예요.
“요얼(妖孼)이나 정상(禎祥)이라는 것은 현호시구(見乎蓍龜)하고 동호사체(動乎四體)이다.” 여기서 ‘사체(四體)’는 인간의 사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센 바람이 불면 그 가지가 부러지게 되죠? 인간이 중풍에 걸린다는 것은 뭐냐, 이거는 뇌혈관이 다쳤다는 거 아닙니까? 뇌혈관이 막혀가지고 그 영역이 썩어서 작동을 안 하니까, 그 뇌영역에 따르는 운동기능이 마비되는 현상이잖아요? 그러니까 중풍이라는 것은 나무의 가지가 꺾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의학에서 간(肝)은 목기(木氣)인데, 간풍뇌동(肝風腦動)한 거예요. 풍이라는 것은 밖에서 들어와서 때리는 건데, 여기가 잘리는 거죠. 중풍이라는 것은 ‘풍(風)’에 ‘중(中)’, 풍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중풍에 걸리는 것을 벼락 맞는 것처럼 천벌 받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체(四體)에 나타납니다.
요새는 너무 비옥한 음식을 많이 먹어가지고 사람들이 대개 늙어서 풍(風)에 잘 맞습니다. 나는 절대로 중풍에 걸려서 죽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에 중풍에 걸린다면, 내가 잘못 살은 거지요. 고량진미를 많이 먹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중풍에 걸린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이런 거예요. 전에 말하기를 피가 땅이라고 했죠? 여러분이 먹는 땅의 산물은 결국 피로 갑니다. 땅이 변하는 거죠. 피라는 것은 물의 형태로 가는 것이예요(뒤에 나온다). 그런데 결국은 뭐냐, 피가 끈적끈적하게 점도가 높으면(sticky) 자연적으로 그 흐름이 느려지고 혈관벽에 눌러 붙을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쉽게 생각해서 피의 점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중풍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모세혈관 같은 데서 딱 멕혀버려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살면서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피를 맑게 관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한다는 거예요. 피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순환(circulation)을 자주 시키고 잘 시켜야 합니다. 한번 순환하는 것과 두 번 순환하는 것은 다릅니다. 자꾸 순환시키세요. 그리고 고량후미를 많이 먹지 말아야 합니다. 맛이 후미한 음식을 먹을수록 에너지는 많이 산출되지만 피가 끈끈해져요. 고기를 계속 많이 먹으면 결국 중풍에 안 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피를 맑게 하는 거예요. 청혈(淸血)! 살아가면서 자기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청탁을 시각적으로 상상하여 항상 깨끗하게 흐르는 피의 이미지를 그리고 사세요. 그러면 그 이미지에 따라서 여러분 스스로가 피의 맑고 탁함을 조절하게 되고 절대 혈압이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이 들어서 걸리는 중풍, 당뇨, 고혈압 등등은 젊어서 평소에 잘못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죄업(罪業)입니다. 업보(業報)라고.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갑자기 당뇨에 걸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요. 그건 업보거든요.
사실 뒈질 사람은 뒈져야 합니다. 의사들이 죽을 사람을 억지로 살릴려고, 죽음의 시기를 고작 몇 달 연장시켜 주는 것으로 돈 버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의사들이 못 고칠 병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고칠 수 있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집에 가서 빨리빨리 죽으라고 해주는 게 낫지, 생명을 조금 연장시켜 준다고 돈 받고 이러는 건 좋은 게 아니예요.
서양의학이 하는 짓이란, 한 백일 정도 살 사람을 백오십일 살게 해준다고, 오십일 생명 연장시켜 주는 걸로 돈 받아먹는 게 우리나라 의료비의 한 90% 정도를 차지할 것입니다. 개자식들이다! 그게 무슨 놈에 의료냐! 물론 가족들은 50일이나 더 살았으니까 이것은 의학의 진보 덕분이고 여기에 돈 들인 부담은 효도한 걸로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사실 의사들이 사기쳐먹는 거라고,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앞으로 개업하면 내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 중에서 죽을 사람에게는 “당신 죽으쇼! 빨리빨리!” 할 거예요. <웃음> “나는 당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걸로 돈 벌 생각 없으니까, 빨리 죽으쇼!”
문제는 살 사람을 건강하게 관리해주는 게 더 중요한 의술이라는 겁니다. 모든 의학은 예방의학이 되어야 해요. 미리 병에 안 걸리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게 예방의학입니다. 치료의학이라는 것은 한계가 매우 뚜렷하죠. 치료의학에 호소할 정도의 지경에 되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죽게 되어 있는 몸의 조건에 다다른 거예요. 그놈에 생명 연장한다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인구도 많은데 갈 놈은 빨리빨리 가야지! 나도 내가 갈 만하면 유감없이 가요. 나는 수술하고 그러면서 생명 연장한다고 구질구질하게 안 살아. 내 잘못을 인정하고, “자! 안 된 일이지만 빨리 가야겠다!”<웃음> 잘못을 인정하고 가면 되는 겁니다. 구차하게 의사한테 매달릴 필요가 없어요. 세상에 내가 제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삽니다… 그런데 감기는 지독해!<웃음> 그런 걸 조심하라고. 큰 병보다는 잔병에서 스믈스믈 골아 버리면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사체(四體)에 나타난다.” 중풍에 걸리든 뭐에 걸리든 거동에서부터 나타난다. 나도 이제 감기가 나을 만하니까 거동이 다르잖습니까? 벌써 걷는 거나 말하는 게 달라요. 목이 칼칼하지 않으니깐 오늘 이야기하는 게 씩씩하게 잘 된단 말입니다. 이게 몸철학이요!
24장 3. 유교의 합리주의
‘화복장지 선필선지지 불선필선지지(禍福將至 善必先知之 不善必先知之)’
여기서 선(善)이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선(善)의 반대말은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이다!
동양에는 선(善)ㆍ악(惡)의 이원론이 없다! 악(惡)은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 선(善)에 미달한 것입니다.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며, 모든 악(惡)은 불선(不善)일뿐이예요. 선(善)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불선(不善)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善)과 악(惡), 즉 선(善)과 불선(不善)이라는 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선(善)은 ‘좋을 선’자로 번역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좋은 것도 미리 알 수 있는 것이고, 좋지 않은 것도 미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고지성 여신(故至誠 如神)’
주자 주(註)에 ‘신위귀신(神謂鬼神)’이라고 했습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을 보면, ‘남이 나에게 사기를 친다고 의심해서 미리 억측하지 않는다. 미리 억측하고 못미더워하지 말라[子曰 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라고 했는데, ‘역(逆)’이라는 것은 거꾸로 간다, 미리 안다는 것으로서 ‘전지(前知)’와 마찬가지이고, ‘사(詐)’라는 것은 사기 치는 거죠.
공자의 합리주의라는 것은 뭐냐? 사람이 점을 치는 것은 불안감 때문인데, 공자에 의하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가 나한테 해를 입히지나 않을까,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은 아닌가 하는 작은 데에 혹해가지고 점을 치는 등의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공자의 합리주이예요. “이런 구질구질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연히 미리 느낄 수 있다, 그게 현자다!” 점을 치고 이 세상 작은 일을 먼저 알려고 하고 그런 잔꾀를 부리지 말라 이거야! 도(道)를 닦어 두면 그러한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연히 스스로 먼저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유교에는 점괘에 대해서 반대하는 합리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고 하는 것도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정신과 비교해 볼 적에 자질구레한 짓거리들을 먼저 알려고 하는 점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지성지도(至誠之道)’를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스스로 먼저 깨닫게 되어 있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신(神)입니다. ‘지성(至誠)’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차원, 어떤 신(神)적인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해요. 디바인(Divine)한 경지에 가면 자연히 미리 알게 되어 있는데, 그걸 점쟁이한테 가서 묻고 앉았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죠. 점쟁이한테 “내 운명이 어떻겠습니까?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고 다닌다는 건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뭐 몇 월 며칠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다 어쩐다, 개자식! 그런 사기꾼들 때문에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책을 찍어대는 출판사들이 먹고 사는 거라고. 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어떠한 역사의 법칙에 따라서, 대세에 따라서 망하는 것이지 어떻게 몇 월 며칠 망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또 그건 알아서 뭣하냐?! 인간이 그렇게 어리석어요! 자연적인 대세에 의해서 조짐이 일어나든 뭐하든 미리 다 알 수 있는 건데, 날짜를 정해 놓고 망한다 어쩐다니 그 날짜에 이 세상이 폭삭 망하기를 기다릴 거냐 뭐냐?
오히려, 우리는 유교의 합리주의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는 신성한 경지라는 것은 지극한 성(誠)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능한 것입니다. 이걸 못 깨닫고 점쟁이가 뭐 어쩌고 저쨌다느니, 노스트라다무스가 이러고 저러고 했다느니… 참 유치하다 그 말이지! 중용(中庸)의 저자는 그 당시에 이미 이런 유치한 짓거리들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는 말을 평생토록 가슴에 명백히 새겨 두세요!
약을 쓸데도 뭐? 무슨 운기(運氣)가 어쩌고, 이런 지랄 개자식들! 무슨 놈에 운기(運氣)를 모르면 한의학을 모르는 것처럼 을러대니, 순 엉터리 같으니라고! 『운기칠편(運氣七篇)』이라고 하는 것은 당(唐) 이후에 성립한 위서(僞書)인데, 그걸 모르고 운기(運氣)가 마치 한의학에 대단한 법칙인 양 잘못 알아서 운기(運氣) 운운해 가며 사람의 생·년·월·일만 알면 약을 어떻게 써야 할 지 다 나온다 뭐 어쩐다 하는데 그게 다 잘못된 거예요. 운기(運氣) 가지고 사람을 다 고치고, 지지고 볶고, 웃기는 일이지. 그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문명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사로 펼쳐나가는 행위라는 게 얼마나 다양한데, 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런 행위와 관련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상황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운기 운운하며 획일적으로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미신에 사로 잡혀 있는 한의사들이 많아요. 그런 사기를 쳐가면서 먹고 사는 놈들이 무슨 한의사라고, 참으로 대단한 사기입니다. 우리 주석원군이 한의학에는 아주 문제가 많다고 했는데 잘 본 거예요. 요즘 한의학이 크게 잘못 가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 24장도 굉장히 중요한 장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도록!
주자 주에 24장도 ‘언천도야(言天道也)’라고 했고. 25장은 ‘언인도야(言人道也)’라고 했죠. 계속 이런 프레임웍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26장은 천도(天道)이고, 27장은 인도(人道)이고. 주자는 계속해서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이거를 풀어나가는 걸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편명을 ‘천도(天道)’, ‘인도(人道)’로 나눈 거예요. 주자에게는 중용(中庸)을 해석하는 상당히 치밀한 구조가 있습니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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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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