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1. 자강불식(自强不息)과 무식(無息)
故至誠, 無息. 고로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 旣無虛假, 自無間斷. 이미 헛됨이나 거짓이 없이 스스로 한 순간이라도 끊어짐이 없다. |
캬아! 지극한 성(誠)은 쉼이 없다! 참 대단한 말입니다. 장지연이가 ‘자강불식론(自强不息論)’을 말하였는데, 이 ‘자강불식론(自强不息論)’은 다들 아시다시피 다아윈, 스펜서의 ‘진화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구의 ‘진화론’을 동양에서는 무엇으로 번역하였는가 하면, 『주역(周易)』의 ‘자강불식론’으로 번역했지요【‘자강불식(自强不息)’이란 『주역(周易)』 「대상전」의 ‘건괘(乾卦)’에 나오는 말이다】. 진화의 과정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발전·변화하면서 지금까지 왔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이 세계를 지배해 갑니다. 그 진화의 법칙을 동양 사람들은 목적론적ㆍ발전론적 사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끊임없고 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진다는 ‘자강론(自强論)’을 가지고 해석했고(예컨대, 군자는 항상 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진다), 그것으로써 서양문명에 대처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진화론적 약육강식의 논리에 대해서 중용적(中庸的)·주역적(周易的)인 무식론(無息論)·불식론(不息論)을 가지고 쉼이 없이 노력하고 쉼이 없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 우리 근대개화사상의 근본이 된 것인데, 이것은 진화론적· 자연사론적인 논의였죠.
그러니까 지성무식이란 말은 위대한 말이예요. 천지만물 중에 쉬는 것은 없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항상 노끈을 꼬고 멍석을 삼았습니다. 이 사람은 간디가 항상 물레를 돌렸던 것처럼 항상 멍석을 삼았는데, 멍석재료가 다 떨어지면 멍석을 풀어서 다시 새끼를 꼬고 또다시 멍석을 삼았지요. 제자들이 이 답답한 행태에 대하여 그 까닭을 물으면, 해월선생은 “하늘님은 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근대정신이었던 것이죠. 장지연이가 ‘자강불식론’을 말하기 전에 이미 해월선생은 체득했던 겁니다. 하늘님은 쉼이 없다! 내가 어찌 쉴 수 있는가! 이게 동학정신의 핵심이예요. 집요하게 관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끝내 타협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도망 다녔습니다. 해월이야말로 조선 최대의 도바리꾼(도망자)이었다! 해월은 사형대에서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도바리행각을 끝낼 수 있었던 사람이나, 죽을 때까지 ‘지성무식(至誠無息)’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조직하고 활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근대문명을 만들었던 것이죠. 그는 우리의 근대문명을 만들어 낸 장본인입니다.
원불교는 아직 해월선생 만한 도덕성을 우리의 역사 속에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후대의 종교들이 그래요. 그러나 동학은 가버렸다! 그러고 보면, 원불교인들은 자기들끼리 잘한 것이죠. 나름대로 자기들의 교리를 실천한 거예요. 하지만 사회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아요. 동학은 다릅니다. 해월선생은 박중빈 선생하고 달라요.
26장 2. 쉼 없기에 장구한다
不息則久, 久則徵, 불식(不息)하면 구(久)한다, 쉼이 없으니까 장구할 수 있다. 久, 常於中也. 徵, 驗於外也. 구(久)는 내면에서 떳떳한 것이다. 징(徵)은 외면에서 징험되는 것이다. |
항상 역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을 염두에 두고서 중용(中庸)을 풀이해 들어가십시오. 왕부지(王夫之)의 ‘형질론’으로 볼 때, 우리의 손톱이 그 온전한 형을 유지하게 되는 것은 뿌리에서 다시 생겨나고 끝에서 닳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손톱 하나도 그냥 유지되는 게 아니예요. 뿌리에서 생겨나지 않으면, 점점 닳아서 쪼그라들어요. 새끼손톱이나 새끼발톱에 가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죠? ‘형(形)’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질(質)’이 끊임없이 불식(不息)해야 합니다.
“저 해와 저 달이 저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게 거저 있는 줄 아느냐. 그 질(質)이 끊임없이 불식(不息)하니깐 저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왕부지 선생의 유명한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나의 신체적 조건, 우리의 형체가 유지되는 것은 그 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포들이 불식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세포 하나라도 “아이구! 나는 좀 쉬어야겠다. 도올선생 미안해! 당신 몸 안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난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하면서 나자빠지면, 나는 그냥 황천길로 가는 겁니다. 구(久)할 수가 없어요. 심장세포가 갑자기 “나는 그만 뛰어야겠다, 펌프질 그만하고 잠깐 쉽시다!” 하면 이 짜식이 쉬는 거야 좋겠지만 나는 가는 거죠?<웃음> 불식(不息)해야만 구(久)한다! 이게 생명의 법칙이다!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지극한 誠이) 밖으로 드러나면 유원(悠遠)하고, 유원(悠遠)하면 박후(博厚)하고, 박후(博厚)하면 고명(高明)하다. 此皆以其驗於外者言之. 鄭氏所謂至誠之德著於四方者, 是也. 存諸中者旣久, 則驗於外者益悠遠而無窮矣. 悠遠, 故其積也廣博而深厚. 博厚, 故其發也高大而光明. 이것은 모두 외부로 징험된 것으로 말한 것이다. 정씨가 ‘지극한 성(誠)의 덕은 사방으로 드러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내면에 보존된 것이 이미 오래되면 외부로 징험된 것이 더욱 아득하고 멀어져 무궁해진다. 아득하고 멀기 때문에 쌓인 것이 넓고도 심히 두터워진다. 넓고도 두텁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 높고 크며, 빛이 난다. |
‘고명(高明)’이라는 것은 천(天)의 상징이면서 종적인 것이고, ‘박후(博厚)’라는 것은 지(地)의 상징이면서 횡적인 것이지요. “이 종적인 고명(高明)과 횡적인 박후(博厚)가 얽혀가지고 만물이 이루어지는 프로세스, 이것은 유원(悠遠)하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구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天地)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유한한 거예요. 천기(天氣)든 지기(地氣)든 기(氣)의 양이 유한한 겁니다.
그러나 천(天)의 기(氣)는 고원하고 지(地)의 기(氣)는 박후한데, 이 고원하고 박후한 기(氣)가 만나서 기능하는 만물의 세계, 그 펑션(Function, 작용)의 세계는 무한한 것입니다. 이런 구조를 천지(天地)는 갖고 있어요. 고명, 박후, 유원의 개념은 그 이미지가 형용사적이지만 ‘천지론’을 전제로 한 패러다임에서 ‘천지기능론’으로 구성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용(中庸)은 천지론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 이후의 문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원(悠遠)’은 오늘날 흔히 쓰는 말로 하면 ‘기능론’의 의미를 담고 있죠. 생물학에서 흔히 형태와 기능으로 대립시켜서 말할 때의 그 ‘기능’입니다.
26장 3. 하늘과 땅은 유기체론적 상징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박후(博厚)라는 것은 만물을 싣는 것이요, 고명(高明)이라는 것은 만물을 덮는 것이요, 유구(悠久)라는 것은 만물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悠久, 卽悠遠, 兼內外而言之也. 本以悠遠致高厚, 而高厚又悠久也. 此言聖人與天地同用. 유구(悠久)란 곧 유원(悠遠)함이니 안과 밖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본래의 유원(悠遠)으로 높고 두터움에 이르지만, 높고 두터움은 또한 아득하고 먼 것이다. 여기서는 성인이 천지와 같은 용(用)임을 말했다. |
‘박후(博厚)하다’는 것은 땅이라는 공간성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그것은 만물을 싣는 것입니다. ‘고명(高明)’이라는 것은 하늘이라는 공간성을 말하는데, 만물을 덮는 것이죠. 밑에서 싣고 위에서 덮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천지적 세계관입니다. 땅은 밑에서 떠받치고 하늘을 위에서 덮고 있으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땅이 그것을 받아서 만물을 생성시킨다. 여기서 기(氣)가 서리고 물이 생기고 그러다가 하늘로 올라가면 하늘에서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이것은 유기체론적인 상징론이고, 이러한 상징성이란 것은 그대로 인체에 적용됩니다. 땅을 여자의 자궁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비는 남자의 정액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명한 남자는 사정을 해! 박후한 여자는 그것을 받아서 자궁벽에 부착시키고 거기서 만물을 생성시킨다! 인간과 천지는 같은 구조이죠?
갑자기 한기(寒氣)가 쫙 들 때, 콧물이 나온다거나 재채기를 ‘에취’하는 것은, 인간의 하늘(肺脾)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수증기가 대기를 맴돌다가 한기를 만나면 응결되어 비를 뿌리듯이, 인간의 몸을 맴돌고 있던 수분이 갑자기 한기를 만났을 때 일시적으로 응집되어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곧 재채기인 거예요. 이럴 때 동양의학에서는 인간의 폐기(肺氣)를 다스리는 약을 쓰게 되죠. 이렇듯 인체라는 것도 역시 천지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땅에는 신기(腎氣, Ki of kidney)가 있어요. 인간의 신장이 노폐물을 걸러내어 처리하듯이 대지도 마찬가지로 궂은 것을 걸러내지 않습니까? 동양에서 말하는 신장은 이런 여과기능에 생식기능(reproductive function)을 더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말하는 ‘폐비(肺脾)’는 인간의 몸 위쪽에 있고, 땅을 말하는 ‘간신(肝腎)’은 아래쪽에 있죠. 동무(東武) 이제마의 학설도 항상 ‘비(脾)’와 ‘신(腎)’의 문제입니다(소양인과 소음인의 문제). 신기(腎氣)는 음기(陰氣)이고 비기(脾氣)는 양기(陽氣)지만, 음기(陰氣)는 양화(陽化)되는 능력이 있어야 위로 올라가고 양기(陽氣)는 음화(陰化)되는 능력이 있어야 밑으로 내려옵니다. 밑에 있는 음기(陰氣)는 위에 있는 양기(陽氣)를 받아서 작동을 하고, 위에 있는 양기(陽氣)는 밑에 있는 음기(陰氣)를 받아서 작동하는 것이죠.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서로 엇물려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기(陰氣)가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양화(陽化)되어 올라가고, 올라가면 꼭대기에서 차가운 음기(陰氣)를 만나 음화(陰化)되어서 다시 내려오는 과정의 연속이 내 몸의 질서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마의 학설을 복잡하게 구성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혼동하게 되어 있는데, 언제인가 명쾌하게 정리할 생각입니다. 같은 약이라도 여러 가지 이중적 구조, 즉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는 이 구조가 약리를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박후 소이재물야 고명 소이부물야 유구 소이성물야(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재물(載物)’은 지(地)이고 ‘부물(覆物)’은 천(天)이고 ‘성물(成物)’은 만물의 무궁무진한 연기적·기능적 구조입니다. 내가 대학생 시절 읽으면서 참으로 감격했었던 부분입니다.
26장 4. 사물의 법칙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박후는 땅에 배합(配合)하고 고명은 하늘에 배합(配合)하고 유구는 무강(無疆)이다. 이와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아도 빛나고[章], 동(動)하지 않으면서도 변하고, 함이 없는 데도 성(成)한다. 此言聖人與天地同體.見, 猶視也. 不見而章, 以配地而言也. 不動而變, 以配天而言也. 無爲而成, 以無彊而言也. 여기서는 성인이 천지와 같은 체(體)임을 말했다. 현(見)은 시(視)와 같다. 불현이장(不見而章)은 땅과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부동이변(不動而變)은 하늘과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위이성(無爲而成)은 한계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
‘유구(悠久)’는 보이지 않는 기능이니까 강역(疆域)이 없다! 무진(無盡)하고 무궁(無窮)하다!
여기서 말하는 무위(無爲)라는 것은 노자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와 같은 것입니다. 도가(道家)와 유가(儒家)가 절대로 서로 상치하는 게 아니예요. “천지만물이라는 것은 억지로 인위적인 콘트롤(control)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북한산에 가보면, 이 개새끼들이 자연보호라고 하면서 지랄만 해 놓았어요. 산이라는 것, 자연에 대한 가장 위대한 보호는 ‘무위이성(無爲而成)’,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 겁니다. 건방지게 보호를 한답시고 까불고들 있는데,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지 인간이 잔꾀를 부림으로써 자연을 보호하게 되는 게 아니예요. 깐죽깐죽 함부로 나서지 말고 건들지만 않으면 되요! 다리를 맨들거나 성곽을 보수한답시고 설쳐대는 이런 짓들을 김영삼이가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나라 산천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산적 같은 놈들, 날강도같은 놈들이 산에다가 길을 막아 놓고 돈을 받아 쳐먹으니깐 이 지랄들이거든요. 돈을 안 받으면 아무 짓도 안 할 텐데, 돈을 받으니까 이 나쁜 놈들이 지랄하며 나쁜 짓들을 계속하는 거예요. 기어이 돈을 받는다면 그 돈으로 산에 쓰레기나 치우면 될 일이지, 이놈들이 쓰레기도 치우지 않아요. 짜식들이 비닐봉투나 주면서 되갖고 오면 다음에는 공짜로 들여보내준다고 하질 않나, 요즈음에 그것마저도 하질 않죠? 지들이 치워야지 짜식들이 돈만 받아 쳐먹고는 형편 없는데다가 변소간만 지어 놓고 있어요. 변소간도 보통 변소간이 아니라 일류목재로 엄청난 돈을 들여서 황당하게 지어대는 그런 지랄들만 합니다. 이건 수준 이하의 행태입니다. 뭐든 인위적으로 조작할려고만 드니까 큰 문제인 것이죠.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천지(天地)의 도(道)라는 것은 한 마디로 끝난다. 그것은 바로 성(誠)이다. 그 물(物)됨이 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물(物)의 생(生)함이 헤아림이 없다. 此以下, 復以天地明至誠無息之功用. 天地之道, 可一言而盡, 不過曰誠而已. 不貳, 所以誠也. 誠故不息, 而生物之多, 有莫知其所以然者. 여기서부터 이하는 다시 천지로 지성무식(至誠無息)의 공효를 밝혔다. 천지의 도(道)는 한 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성(誠)’을 지나지 않는다. 불이(不貳)는 성(誠)인 것이다. 성(誠)하기 때문에 쉼이 없고 물건을 생성함이 많아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춘향전 맨 마지막에 춘향이가 이도령한테 하는 말이 “나는 이부(二夫)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니깐, 이도령은 “이씨 남자[李夫]도 섬기지 않느냐?”고 되묻죠? 두 남자를 섬길 수 없다 이거야! “모든 물(物)됨이 불이(不貳)이다, 둘이 아니다.” 법칙이라는 것은 둘이면 안 되죠. 한결같아요. “불이(不貳)하니, 그 마음이 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물(物)의 생(生)함이 끊임이 없다, 헤아림이 없다.”
天地之道: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 천지(天地)의 도(道)는 박야(博也), 후야(厚也), 고야(高也), 명야(明也), 유야(悠也), 구야(久也)라. 言天地之道, 誠一不貳, 故能各極其盛, 而有下文生物之功. 천지의 도(道)가 성(誠)하여 한 마디 말로 할 수 있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 그 성대함을 다 할 수 있고 아랫 문장의 물건을 생성하는 공효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
차아!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냐!
26장 5. 중용적 사고방식의 크기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星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ㆍ鼉ㆍ蛟ㆍ龍ㆍ魚ㆍ鼈生焉 貨財殖焉. 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 하나가 반짝이는 것 같은 밝음이 많을 뿐인데, 그 무궁한 데 이르러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다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을 덮고 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일 뿐인데, 넓고 후박한 데 이르러서는 화악(華嶽)을 등어리에 싣고도 무거운 줄 모르고 하해(河海)를 가슴에 안고도 새지 않는다. 그러니 만물을 실을 만하다. 대저 산이라 하는 것은 한 뭉치의 돌로부터 출발할 뿐이지만, 그것이 광대한 대 이르러서는 초목이 다 거기서 살며, ‘보장(寶藏)’이 많이 나온다. 물이라는 것은 일작(一勺), 한 바가지의 물이 많은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불측(不測)한 데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용, 물고기, 자라 등이 살고, 많은 화재(貨財)가 그 물에서 불어나게 된다. 昭昭, 猶耿耿, 小明也. 此指其一處而言之. 及其無窮,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 蓋擧全體而言也. 振, 收也. 卷, 區也. 此四條,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 然天ㆍ地ㆍ山ㆍ川, 實非由積累而後大, 讀者不以辭害意可也. 소소(昭昭)는 밝디 밝음과 같으니, 작은 밝음이다. 여기서는 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급기무궁(及其無窮)이란 12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면’의 뜻과 같으니, 대체로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진(振)은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권(卷)은 구역이란 것이다. 네 가지 조항은 모두 ‘불이불식(不貳不息)’하여 성대함에 이르러 물건을 생성하는 뜻을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과 산과 냇가는 실제로 쌓이고 누적된 후에 커진 것은 아니니, 읽는 사람은 표현으로 속뜻을 해쳐선 안 된다. |
동양인에게 하늘은 평면의 모습
동양인이 말하는 천(天)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주관으로 말한다면, 태양계의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보이는 모든 우주공간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천(天)을 오늘날처럼 무궁한 우주공간(boundless four dimensional time space)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좌악 펼쳐서 평면화시켜 버렸습니다. 일월성신이 모두 동일한 평면 위에 있다고 본 것이죠.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할 때, 모든 일월성신은 서로 ‘근원지차(近遠之差)’가 없이 한 면에 좌악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주자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옛날 사람들의 우주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중용(中庸)을 처음으로 읽을 때, 이 ‘재화악이부중 진하해이불설(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라는 말을 읽고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라는 것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중용(中庸)의 생각의 스케일! 그건 대단합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화악을 실고도 짜식이 무거운 줄을 모르고, 하해를 가슴에 안고도 하나도 새지가 않아! 야! 이거 스케일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참 멋있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어렸을 때 내 감성을 지극히 자극한 그런 문장이예요. 여러분들은 그런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짜릿한 느낌이 없어요?
‘화악(華嶽)’이라는 것은,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지금 협서성의 동부에 있는 ‘화산(華山)’을 일컫는다는 설도 있고, ‘화산(華山)’ ‘악산(嶽山)’이 따로 따로 있는데 그 중 하나라는 설도 있는데, 협서성 동부의 ‘화산(華山)’일 것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중용(中庸0은 노나라 사람이 쓴 것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도 몇 가지 근거를 대면서 말하였지만, 중용(中庸)은 진시황의 대륙통일 이후의 문장인 게 틀림없습니다.
『중용(中庸)』은 노(魯)나라 같은 시골 어느 구석에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요. 노나라 촌놈이 이 정도까지의 스케일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겁니다. 또한 ‘하해(河海)’의 ‘하(河)’라는 말에서는 『중용(中庸)』의 성립 장소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쯔강 이북의 강에 대해서는 ‘하(河)’라는 명칭을 쓰고, 양쯔강 이남에서는 ‘강(江)’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황하(黃河)’가 그 용례죠. 따라서 ‘하(河)’라는 용법은 중용(中庸)이 북방문화권에서 성립한 문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강(江)의 상고음(上古音)은 ‘가르’이고, 하(河)의 상고음(上古音)은 ‘가람’으로서 우리말 강의 어원과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우리말의 ‘강‘이라는 말은 ‘가르’보다는 ‘가람’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북방계열의 영향을 받은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도올논문집』에 최교수의 논문에 이런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동양인들에게 산(山)과 수(水)는 함께 한다
이 구절 전체의 구조를 보면, 천지(天地)가 나온 다음에 산수(山水)로 나가고 있죠? 이 산수(山水)의 문제는 『석도화론(石濤畵論)』을 읽으면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김용옥, 『석도화론(石濤畵論)』(서울: 통나무, 1992), 100-114쪽, 「산천장제팔(山川章第八)」 참고.】, 우리가 ‘산화(山畵)’ 또는 ‘수화(水畵)’라고 하지 않고 흔히 ‘산수화(山水畵)’라고 하듯이, 동양인들의 공간관으로는 반드시 산(山)과 수(水)가 같이 껴있어야 해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원칙이 산(山)과 수(水)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동여지도는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반도의 산(山)과 수(水)를 그린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대동여지도에는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전부 다 표현이 되어 있는데, 산(山)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그 산들 사이로 계곡이 끼어 있고 그 계곡을 따라서 물이 흐르고 있으면, 반드시 이 산수(山水)가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니깐! 또한 마찬가지로 논리로 아무리 큰 산줄기라 할지라도 수(水)가 가로 막고 있으면 이 물줄기를 건너뛰지 못합니다. 즉, 산줄기는 물이 합쳐지는 합수지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멈추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이 반드시 하나 있지요. 따라서 산줄기의 흐름은 조선 반도 끝에 와서야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일본의 우리나라 지형 왜곡 행태
그런데 요즘의 지도를 보면,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해서 무슨 산맥【재생 註: 일본인들에 의한 우리 강토의 왜곡과 유린은 조선지리학에는 그 족보가 없는 ‘산맥(山脈)’이란 이름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 ‘산맥’이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 해가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의 지리학자 코토오분지로(小藤文次郞)가 붙인 이름이고, 16세기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地圖)』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대간’, ‘정맥’의 용어가 갖고 있는 내력에 비하면 그 역사가 하잘 것 없는 조작용어에 불과하다. ‘대간’, ‘정맥’ 등의 용어가 16세기에 이미 쓰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용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지리 인식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산수(山水)의 지리인식을 일본놈들은 고작 14개월 동안 단 두차례(1900년과 1902년)의 조사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왜곡시켜 놓았고, 우리는 대부분 지금까지도 이 뒤틀려진 지리인식의 지배 아래에서 너무도 무덤덤하게(不仁하게) 살고 있다. 일본인들의 산맥지형도는 땅 위에 실존하는 산과 강에 기초하여 산줄기를 그린 게 아니라,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규정에 의한 산맥선은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선이 아니라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질학적인 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낙동정맥, 한북정맥, 호남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10개의 큰 강에 물을 대는 젖줄이자, 또한 이 강들을 구획하는 울타리이다. 조석필, 『산경표를 찾아서』(서울: 산악문화, 1993) 참고】들이 즐비하게 듬성듬성 금을 그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요. 이런 것은 일본놈들이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산자락 물줄기를 따라서 지도에다가 산줄기를 표시한 게 아니라, 즉 실질적인 자연 형세로 지도에다가 산줄기【여기서 말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산줄기는 등고선으로 나타나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일컫는 게 아니다】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땅 속의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소위 ‘산맥’이라는 것을 마구 그려 놓은 거예요. 그래서 산줄기를 뚝뚝 잘라 놓게 되었죠. 산수(山水)가 흐르는 데 따라서, 백두산에서부터 쭈욱 백두대간이 뻗어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산수(山水)개념입니다.
그런데 묘향산맥, 차령산맥, 태백산맥 이런 식으로 뚝뚝 끊어 놓았어요. 자기네들이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산맥을 마치 사실상의 산줄기인 것처럼 억지로 규정해 버린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인 겁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 민족을 말살시킬려는 음모의 소산이었던 거죠. 완벽하게 땅부터 왜곡을 시켜버렸어요. 일본놈들의 식민지정책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릅니다! 엄청나게 교묘한 짓이었거든요. 도대체 이놈들은 안 해 본 짓이 없어요. 우리 조선땅에 와서 현대 지질학을 핑계로 땅을 마구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우리 산하를 파악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구조와 삶의 공간이라는 걸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 내가 흐르고 있을 때는 그 유수량이 아무리 작은 경우라 하더라도 두 마을 사이에는 어떤 격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산수(山水)를 같이 봐야만 인문지리학이 나오는 거예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훨씬 더 리얼하게 우리 삶의 양식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대동여지도를 안 갖고 다니면서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예요. 나는 반드시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다닙니다. 대동여지도가 현대의 지도보다 훨씬 더 낫거든요. 지세(地勢)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정확해요. 대동여지도를 꼭 사두시고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서 우리 강산에 대한 본래의 인식을 깨닫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산천이 다 망가지기는 했지만, 대동여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놀랍도록 정확하며 진짜 우리의 산수(山水)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사는 이 따님(大地)을 볼 때 반드시 산수(山水)를 같이 봐야 한다!
‘금부산 일권석지다 급기광야 초목생지 금수거지 보장흥언(今夫山 一券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여기서 ‘일권(一券)’은 한 줌, 한 뭉치를 뜻하는데, 한 뭉치의 돌이 흙으로 되는 것이죠. 돌이 흙이 되기까지는 온갖 미생물의 엄청난 수고가 깃들어 있으며, 이외로도 모든 것이 다 작용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돌로부터 시작하여 광대함에 이른 산에서 모든 미네랄과 모든 유기·무기 물질이 나와서 초목이 거기서 살게 되고, 또한 금수(禽獸)가 거기서 살게 되는 거예요. ‘보장(寶藏)’이라는 것은 옥석, 보물들을 말합니다.
‘금부수일작지다 급기불측 원타교룡어별 생언 화재식언(今夫水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 生焉 貨財殖焉)’
주자가 말하기를, “언뜻 보기에 이 글은 작은 데서 비롯하여 만물이 생장하도록 하는 지대한 데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마치 산천(山川)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것들이 쌓여서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 달라”는 재미있는 주(註)를 달고 있습니다. 마치 조그만 것들이 쌓여서 거대하게 된다는 뜻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것은 표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26장 6. 간명한 게 아름답다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하늘의 명(命)이여, 오! 심원하여 그침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하늘된 소이를 말한 것이요, “아!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왕(文王)의 순수함이여!”라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文王)의 문(文)됨을 말한 것으로서 순(純)하여 그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詩, 「周頌維天之命」篇. 於, 歎辭. 穆, 深遠也. 不顯, 猶言豈不顯也. 純, 純一不雜也. 引此以明至誠無息之意. 程子曰: “天道不已, 文王純於天, 道亦不已. 純則無二無雜, 不已則無間斷先後.” 시는 「주송 유천지명」의 편이다. 오(於)는 감탄사다. 목(穆)은 심원하단 것이다. 불현(不顯)은 ‘어찌 나타나지 않으랴?’라는 말과 같다. 순(純)은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인용하여 ‘지성무식(至誠無息)’의 뜻을 밝힌 것이다. 정자가 “하늘의 도가 그치지 않으니 문왕은 하늘에 순수하여 도가 또한 그치지 않았다. 순수하면 둘도 아니고 잡되지 않는다. 그치지 않으면 선후에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다.”라고 말했다. 右第二十六章. 言天道也. 여기까지가 26장이다. 천도(天道)를 말했다. |
유가(儒家)는 문명의 순(純)을 통해 천지로 확장하려 함
여기 『시경(詩經)』의 구절은 「주송 유천지명(周頌 維天之命)」편에 나오는 네 구절인데, 중용(中庸)의 저자는 그 네 구절을 두 구절씩 떼어서 둘로 나눴습니다. 즉, “아! 천지명(天之命)이여, 오! 목불이(穆不已)하여라!” 이것은 하늘이 하늘 된 바의 까닭을 표현한 것이고, “아!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문왕지덕(文王之德)의 순수함이여!” 이 말은 문왕(文王)의 문(文)됨을 나타낸 것이예요.
여기서 ‘순(純)’이라는 말은 ‘잡(雜)’하지 않다는 뜻인데, 송명유가(宋明儒家)에서는 이것 때문에 순(純)·잡(雜) 논쟁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성명론(性命論)’에도 순하다, 잡하다는 논쟁이 많이 나와요. 잡하지 않다는 문왕의 문(文)됨은 뭐냐? 이 ‘문(文)’은 추상적인 의미를 띠는 것으로서, 이 『시경(詩經)』의 네 구절이 ‘천(天)’과 ‘문(文)’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그 뜻을 풀어야 합니다. 즉, 천(天)은 자연세계이고 문(文)은 문명, 문명질서의 세계를 말해요. 천(天)의 세계는 ‘지성무식(至誠無息)’하는 ‘목불이(穆不已)’의 세계, 끊임없는 세계, 끊임없이 천명(天命)을 받는 세계로서, 중용(中庸)의 저자는 ‘이것이 곧 천(天)이 천(天)다운 것’임을 영탄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은 잡하면 안 되고 순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명에서는 순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고, 맑고 그래야 해요.
도가(道家)는 이런 문제에서 문명을 최소화시키는 ‘박(樸)’의 세계, 심플한 세계를 지향했죠? 가장 좋은 문명의 형태는 심플한 것입니다. 모든 물리학의 법칙은 가장 단순한 일반법칙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상대성이론이든 통일장이론이든 뭐가 되었든 물리이론들이 깔고 있고 추구하는 대전제는 가장 단순한 법칙이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중력이 법칙이든 뭐든 원리에 있어서는 가장 단순한 그 무엇인가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거죠. 순해야지 잡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치 문명의 모습이 잡하면 잡할 수록 좋은 걸로만 알고 있는데 이건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적 삶은 가급적 순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대, 서양과 동양을 불문하고 잡하게 살면 안 되요!. 동양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간명한 게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는 겁니다. 단지 크기의 작음(Small is beautiful!)이 문제가 아니라, 단(單)하고 순(純)해야 한다는 것이죠.
조선은 단순함을 존중했으나 1세기 만에 망가졌다
일본놈들은 사이즈에 관심이 많지만, 조선문명은 단순성에 대한 담박(淡泊)한 감각을 추구합니다. 에도 문명과 조선문명의 차이가 여기에 있고, 또한 조선문명의 심플한 맛을 일본문명이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선조 목기(木器)같은 것을 보면, 거기에 깃들어 있는 단순미, 그 단순한 맛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문명도 당해낼 수 없는 ‘맛’이요 ‘멋’이죠【“담박이명지 성근이일신(淡泊以明知, 誠勤以日新)!” 우리 아버지 60 평생의 깨달음이요, 우리 가족 하나하나의 귓전에서 항상 맴돌고 있는 ‘계언(戒言)’이다. 조선문명의 ‘멋’과 ‘맛’은 조선인민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왜곡시켜 버린 그릇된 패러다임에 젖어 있는 탓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단지 못보고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인(仁)하면 이걸 볼 수 있으나, 불인(不仁)하면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사회 주변을 하찮게 생각했다. 뭔가 모자란 듯한 것으로 비하시켜버리는 시선을 고수하게 된다. 인(仁)이란 인간의 신비적 감정(mithtical emotion)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과학적 자세와 방법이자 삶의 실천이다(scientific paradigm, methodology and practice)】. 중국문명을 보면, ‘문왕지도(文王之道)’를 말하면서도 그 잡스러움이 그지 없습니다. 심플한 맛은 조선 문명이 최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잡스러워져 버렸냐? 우리는 단 1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잡스러운 민족으로 둔갑해 버렸는데, 이제 다시 이 심플한 삶의 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27장 첫 머리에, “대재(大哉)라 성인지도(聖人之道), 양양호(洋洋乎)! 카아!” 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26장을 반드시 외워둬야 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이말이요? ‘지성무식(至誠無息)’에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순역불이(純亦不已)’라! 천지자연은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어야 하는 한편, 문명은 순수해야 하고 끊임이 없어야 한다 이겁니다. 맨 끝의 ‘순역불이(純亦不已)’가 맨 앞의 ‘지성무식(至誠無息)’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끝나고 있는데, 이 26장은 맨 처음과 맨 끝이 시종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중용(中庸)이 가지고 있는 자연예찬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예찬, 이 스케일, 그 문학성, 그 상상력 등등 이 모든 것이 곧 중용(中庸)의 맛이고 또한 중용(中庸)의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이 중용(中庸)을 읽을 때, 참으로 격정적으로 감동되어(pacinated) 중용(中庸)에 대해 열광했었어요. 나는 이 정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백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학교 때 이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나의 상상력과 문장력을 키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오늘의 문필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중용(中庸)을 통해서 끊임없이 삶의 예지와 통찰력을 배우도록!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납니다. 중용(中庸)의 맛은 참으로 좋다! 집에 가서 자꾸 반복을 해서 보시도록! 눈으로만 보지 말고 반드시 입으로 낭독을 해 보세요. 입으로 읽으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읽는 소리가 귀로 다시 들어가고 또 선명하게 메모리에 남습니다. 그러니 낭독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29일부터 2월 5일까지는 명절 휴가이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과 이별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김용옥을 일주일 동안 안 보고 살아도 되고 하루에 4시간씩 책상다리하고서 앉아 있지 않아도 되지 참 신나죠? 아주 신날거야! 오늘은 남재하고 같이 점심을 먹겠습니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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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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