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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25장 - 1. 성실함과 생이불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5장 - 1. 성실함과 생이불유

건방진방랑자 2021. 9. 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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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성실함과 생이불유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는 스스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言誠者物之所以自成, 而道者人之所當自行也. , 以心言, 本也; , 以理言, 用也.
()은 물건이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도()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은 심()으로 말하였으니 본()이고 도()는 리()로 말하였으니, ()이다.

 

! 얼마나 멋있어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재미난 게 여기서도 펀(Pun, 언어유희)이 나타나고 있죠? ()과 성()이 같은 발음이고 도()와 도(, )가 같은 발음이죠? ()이라는 것은 ()’ 변이 빠지면 스스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성야(自誠也)’라고 하는 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는 말입니다. ‘자성(自成)’자연(自然)’, ‘스스로 이룬다스스로 그러하다는 똑같은(exactly same) 말이예요. 주자 주를 보면, “성 이심언 본야 도 이리언 용야(, 以心言, 本也; , 以理言, 用也).”라고 했는데, 주자는 성()이라는 것을 인간의 내재적인 마음의 문제로 보고, ()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의 도()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이라는 것은 내외를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심()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입니다.

 

DNA의 법칙체계 같은 것, 그 발생학적인 과정을 보면 자성(自成)이예요.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면 수정란(fertilized egg)은 세포분열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자성 도자도(誠者自成, 道自道).” 이것은 유전공학에서 하듯이 인간이 함부로 조작할 수 없는 거예요.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인데 말이지. 짜식들이 함부로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은 물()의 시()와 종()이니, 성실하지 못하면 물()이 없다. 따라서 군자는 성()하려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天下之物, 皆實理之所爲. 故必得是理, 然後有是物. 所得之理旣盡, 則是物亦盡而無有矣. 故人之心一有不實, 則雖有所爲, 亦如無有, 而君子必以誠爲貴也. 蓋人之心能無不實, 乃爲有以自成, 而道之在我者亦無不行矣.
천하의 물건은 모두 실재하는 리()의 행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이치를 터득한 후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다. 터득한 이치가 이미 다하면 이 사물 또한 다하여 있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마음에 하나라도 실재하지 않음이 있으면 비록 행하는 것이 있더라도 또한 있지 않은 것과 같으니, 군자는 반드시 성()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마음은 실재하지 않음이 없으니 곧 함이 스스로 이룸에 있고 길이란 나에게 있으니, 또한 행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니까 성자물지시종(誠者物之始終)’이라고 했거든? 주자 주를 보면, “천하의 물()이라는 게 모두 실제적인 이치의 산물이다[天下之物 皆實理之所爲].”라고 했는데, DNA라는 게 하나의 리(), 이치죠? 이건 어떤 물건이 아니잖아요? 하나의 리()요 정보요 암호요 싸인일 뿐인 거예요. 그냥 허령한 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자의 말이 실리지소위(實理之所爲)’라는 겁니다. “만물은 실제로 그 리()가 있어 가지고 그러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각기 DNA, 그 정보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 허령한 리()가 있어서 그 모습이 제 모습인 것이다이거야.

 

우리가 나무라든가 우리 몸의 세포를 보면, 다 같은 세포예요. 그러니까 만물이 일체라는 것, 생물이 하나의 단세포에서 진화되었을 거라는 주장은 세포학설이 나오면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모든 생물을 보면, 다 세포로 되어 있고 그 세포의 기본구조는 다 같거든요. 나무나 우리나 세포로 보면 그리 멀지 않아요. 사돈의 팔촌보다 더 가깝다고. 나무의 세포에는 세포벽이 있지만, 우리 몸의 세포에는 세포벽이 없고 세포막만 있다는 차이 말고는, 즉 동물세포에는 식물세포에서와 같이 세포벽이 없다는 것 이외의 조건은 대개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세포의 조합이 하나는 나무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되고, 뭐 말미잘이 되고. 이것은 DNA의 정보체계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분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주자는 이런 것을 몰랐지만, DNA의 정보체계에 따라서 만물이 각기의 모습을 갖는다는 것과 그 리()가 제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예요.

 

그 리()를 얻은 연후에야 반드시 그 물()이 있는 것이니, 그러니까 이 리()가 없어지면 이 물() 또한 없어지는 거 아니냐[故必得是理然後, 有是物. 所得之理旣盡, 則是物亦盡而無有矣]” 그러니까 무성(無誠), 불성(不誠), 무물(無物)이라 그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선 한자용어의 독특한 속성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게, 동양의 말에는 장단(長短)’이라고 하지만, 서양 말에는 리듬(Rhythm)’이라고 합니다. 박자라는 말은 실체론적으로 꼬집어 말한 것이고, 장단이라는 말은 관계론적으로 나타낸 말이예요. 한문에는 크기라는 말이 없고 대소(大小)’라 하고. ‘부피다소(多少)’로 표현하죠? 한자용어들이 전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까 집기양단(執其兩端)’이라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동양의 언어는 그 양단을 나타냄으로써 그 실체를 나타낸다 이 말입니다. 장단! “-, -, 단단, 단단, 단단.” 이런 식으로 관계에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높이고저(高低)’로 표현되고, ‘시종(始終)’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특징적인 속성과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시종(始終)’이라는 말자체가 동양적 용법에서는 처음과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 처음에서 끝까지의 그 과정 전체를 뜻합니다. 한문을 읽을 적에 이런 점에 유의하고, 지금 흔히 사용하는 뜻처럼 여겨서 혼동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처음에서 끝까지, 이를테면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그 전체 프로세스가 성()이예요. ()이라는 것은 그 프로세스 전체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발생학(embriology)적으로 봐도 태아의 발생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그 과정 전체[始終]DNA의 프로그래밍이 지배하는 것이죠?

 

거기에 오류가 생기면, 즉 불성(不誠)하면, 결국 기형아가 되는 것처럼 무물(無物)이지. 그러면 그 물()이 안 되요. 발생학적으로 만약에 그 과정이 교란되어 버리면,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이 올챙이를 날 수도 있는 거예요. 태아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계통발생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올챙이와 같은 모양에서 사람 같은 모양으로 변화하는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 과정을 조작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사람이 애를 뱄다가 올챙이를 날 수도 있는 거라고. 그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발생학적 단계를 성실하게 끝까지 나가는 그것이 그 물()을 형성시킨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불성(不誠)하면 무물(無物)이다!” 불성(不誠)하면 물()이 없어! 있을 수 없지!

 

그래서 노자는 그런 말을 했거든,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했어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보면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하는 말이 몇 군데 나오는데(2, 10, 51),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나무가 요만큼 자라났다고 하는 것은 생()하지만 그 생()한 것을 자기가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자랄 수 있는 것이죠. 그 생겨난 결과를 소유하지 않기에 또 나가고 더 나아가고 하는 것입니다.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성실한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것을 자꾸만 소유해버리면 그 물()은 끝나지요. 쉽게 완결이 되어 버립니다. 노자는 그것을 생이불유(生而不有)’라고 표현했고, 중용(中庸)에서는 ()’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물()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 ()’이요, 성실함이 없으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군자는 성지(誠之)’, 성실한 그 시종(始終)의 과정을 귀하게 여긴다.”

 

 

2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信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은 지어지면서도 잔소리 아니 하고, 낳으면서도 가지려 아니 하고, 하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살 생각 아니 한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 생각을 아니 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老子-길과 얻음pp. 15-16.

 

10

生之 畜之 生而不有 謂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길은 생겨나고, 덕은 쌓아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지배하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는 것일쎄.” 老子-길과 얻음pp.31-32.

 

51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 育之 亭之 毒之 養之 覆之 生而不有 謂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그러므로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요, 덕이란 얻어 쌓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길은 온갖 것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가 하면, 멈추게도 하고 또 독을 주기도 한다. 또 길러 주고 덮어감싸 주는 것이다.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아니 하고, 되게 해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지 아니 하며,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老子-길과 얻음pp. 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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