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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3장 - 1. 문명과 문화의 차이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3장 - 1. 문명과 문화의 차이

건방진방랑자 2021. 9. 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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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문명과 문화의 차이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 唯天下至誠爲能化.
그 다음은 지극히 작은 것에 곡진함이니, 이 작은 일에 지극한 것으로도 성()할 수 있다. 성실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더욱 확연해지고, 확연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하면 화()할 수 있으나. 오직 천하에 지극한 성()이라야 이 궁극적인 화()를 이룰 수 있다.
 
其次, 通大賢以下凡誠有未至者而言也. , 推致也. , 一偏也. 形者, 積中而發外. , 則又加顯矣. , 則又有光輝發越之誠也. 動者, 誠能動物.變者, 物從而變. , 則有不知其所以然者. 蓋人之性無不同, 而氣則有異, 故惟聖人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 其次, 則必自其善端發見之偏, 而悉推致之, 以各造其極也. 曲無不致, 則德無不實, 而形變之功自不能已. 積而至於能化, 則其至誠之妙, 亦不異於聖人矣.
기차(其次)는 큰 현인 이하의 무릇 성()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는 미루어 극진히 한다는 것이다. ()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은 중심이 꽉 차 밖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는 또한 드러나는 것이다. ()은 또한 빛이 나서 드러나고 뛰어넘는 성대함이라는 것이다. ()은 성()이 사물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은 사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는 그러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본성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는 같지 않기 때문에 오직 성인만이 그 본성의 전체를 들어 극진히 한다. 그 다음의 현인 이하의 사람들은 반드시 선한 단서가 발현된 치우침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극진히 하여 각각 그 극진한 곳에 나아가는 것이다. 치우친 한 부분의 극진하지 않음이 없으면 덕이 실존하지 않음이 없어 나타나고, 드러나며, 움직이고, 변화하는 공효가 스스로 그칠 수가 없다. 채워져 교화함에 이르면 지성의 오묘함이 또한 성인과 차이가 없다.
 
右第二十三章. 言人道也.
여기까지가 제23장이다. 인도(人道)를 말했다.

 

기차 치곡(其次 致曲)’

여기서는 거꾸로 자명성(自明誠)’의 구조입니다. ‘()’이라는 것은 일곡(一曲)’, 한 귀퉁이, 한 부분이죠. 제 아무리 거대한 문명이라고 해도 하나의 귀퉁이와 같은 지극히 작은 덕성(꽁푸)으로부터, 학습(learning)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문명의 작은 구석에서도 성실함, 이 우주의 성실함과 같은 그 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야지 또 그 문명이 유지되는 거예요. 앞에서는 유천하지성(唯天下至誠)’으로부터 시작하여 천지지화육(天地之化育)’까지 전개되었지만, 여기서는 치곡(致曲)’, 아주 작고 세밀한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으로부터 시작해요. 작은 덕성을 이루어, 집에서 이불 개고 청소하는 등의 허드렛일도 잘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등 작은 것 하나부터 이루어나가는 겁니다.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도올서원에 나온 이후부터 부모님께서 무척 좋아라 하신다고 하더군요. 도올서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이전과는 다르게 이불도 스스로 개키고 자기 방 청소도 손수하고 등등 생활이 아주 부지런해졌기 때문에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곡능유성(曲能有誠)’

아주 하찮은 듯이 보이는 작은 데서도 이 우주의 성실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겁니다.

 

 

성즉형(誠則形)’

()’이라는 것은 어떤 모습을 뜻하기도 하고 동사로 쓰일 때는 그 모습을 가지고 드러난다는 뜻을 갖습니다. 대개 한자는 이런 이중적 의미를 갖죠.

 

 

형즉저(形則著)’

주자 주()를 보면, ‘저즉우가현(著則又加顯)’이라고 했는데,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서 더욱 뚜렷이 빛난다는 겁니다. ‘()’하고 ()’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달라요. ‘()‘이라는 것은 처음에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고, ‘()’라는 것은 그 모습이 갖춰진 게 두드러지게 빛나는 것입니다.

 

 

저즉명(著則明)’

문명의 세계가 오는 것이죠.

 

 

명즉동(明則動)’

움직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에서 예를 든 학생의 경우처럼 주변에 사람을 감동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동즉변(動則變)’

 

 

변즉화(變則化)’

그러다 보면 결국 ()’하게 됩니다. ‘()’()’의 관계처럼 ()’에서 ()’, 완전히 교화(敎化, transform)된다는 겁니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서 본 것처럼, 화민성속(化民成俗)! ‘변즉화(變則化)’에서 ()’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 최후적 변화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걸 알아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하고 ()’, 문명(文明)하고 문화(文化)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데,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밝음의 전체적 체계입니다. 조선문명은 조선사람이 사는 밝은 코스모스예요. 그런데 문화라는 것은 반드시 변화(transformation)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문화라는 것, ‘()’라는 것은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예요. 따라서 문화는 문명의 초기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 같은 촌놈들이 문명(civilization)은 물질적 토대이고, 문화(kult)는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개똥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어요. 이걸 보면 서양놈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죠. 어떻게 그런 식으로 물질이니 정신이니 하면서 문명과 문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은 정신적 토대이고, 컬트(kult)는 정신적 토대이고 하면서, 독일놈의 20세기 역사학은 전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과 컬트(kult)이원론법입니다. 그런 거 가지고는 안 되요.

 

그들이 말하는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과 컬트(kult)를 다 합해야 문명인 겁니다. 그게 밝음의 체계이죠. 문화(文化)라는 것은 항상 문명(文明)의 패러다임을 쉬프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라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낳습니다. 그러고서 그 문명 안에서도 문화는 다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거예요. 문명만 있으면, 밝음만 있으면, 그 고정된 밝음의 체계 안에 갇혀서 죽습니다. 반드시 ()’가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문명과 문화가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으로 해석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중용(中庸)에 다 이런 문제가 들어가 있어요. 문명(文明)과 문화(文化)! 문화의 창조자(‘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가 되라는 말은 뭐냐, ‘화민성속(化民成俗)’하는 그런 배움을 가진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화민성속(化民成俗)’은 배움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君子如欲化民成俗 其必由學乎!]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히 하는 것으로는 안 되요. 도올서원에서 강조하는 것도 변화, 문화를 창조하고 일으키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잠깐 유명해지는 데 현혹되거나 졸개가 되지 말고, 변화!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룩하는 그런 자이언트들이 되라는 거예요. 시시하게 자기 인생을 규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야 말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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