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앞에서 각 체질별로 가장 타락한 모습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변신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 부분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내용은 인의예지라는 유교의 기본 덕목과 관련된다. 동양적인 가치관에 중점을 두는 독자에게는 인의예지와의 관련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체질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인(仁)과 예(禮)의 충돌
유교에서는 인간의 덕목으로 인의예지를 꼽는다.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가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겠지만, 낮은 경지에서는 좀 다르다. 인(仁)과 예(禮)가, 의(義)와 지(智)가 서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인(仁)은 직관적으로 작용한다. 또 인은 나와 가깝고 멀고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아이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걸 어른이 보면 아무 생각이 필요 없다. 그냥 달려가서 아이를 구한다. 내 아이냐 남의 아이냐를 따지지 않고 자연스레 일어나는 감정이다. 예(禮)는 좀 다르다. 내 부모와 남의 부모에게 대할 예가 다르다. 당연히 달라야 한다. 부모님이 나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이웃 젊은이에게 의존하는 바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예는 경험적이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수양이 낮은 경지에서 인에 너무 치우치면 예를 무시하기가 쉬워진다. 반대로 예에 너무 치우치면 인을 무시하게 된다.
예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을 비인(鄙人)이라고 한다. 비(鄙)는 ‘비열(鄙劣)하다’라고 할 때 쓴다【비열은 ‘비(卑)’로 더 많이 쓰는데 뜻은 비슷하다】. 비(鄙)의 뜻은 더럽다, 인색하다, 어리석다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 흔히 쓰는 말 중에 고르자면 ‘치사하다’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양인이 타락하면 빠지기 쉬운 모습이 바로 비인이다. 자신의 직관대로 행동하는데,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박정희의 변신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가 바로 비열이다. 자기 나름대로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변신이 주변 사람에게 끼칠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가족과의 관계나, 부하를 다루는 면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북에서 협상 차 내려 보낸 밀사를 간첩으로 몰아서 죽이는 경지에 가면 예를 무시하는 것이 아주 두드러진다【그 밀사가 친형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자신의 판단이 가까운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크게 의존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필요로 하면 중시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내친다.
반면에 대국민 이미지는 상당히 신경 쓴다. 농촌에 가서 같이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나 공장 노동자를 격려하는 모습은 무조건 지어낸 모습만은 아니다. 신분을 크게 따지지 않는 소탈함, 대중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바로 농촌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탄압했다. 많은 사람과 소탈하게 어울리되 딱 거기까지다. 진짜로 정을 주거나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예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열함은 항상 남의 앞에 서려고 할 때 더욱 심해진다. 강한 것만을 추구하면 제멋대로 하는 마음이 점점 강해져, 결국은 비열함이 심해지는 것이다. 이때까지 설명한 용어들을 쓰자면, 예를 버린다는 것은 벌심(伐心)이 강해진다는 것이고, 항상 남의 앞에만 서려 한다는 것은 절심(竊心)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사심(邪心)인 벌심(伐心)과 태행(怠行)인 절심(竊心)이 동시에 강해져서 나타난 결과가 비열함이다.
다음은 반대로, 예는 그럭저럭 지키되 인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인을 버리고 심하게 욕심을 부리는 사람을 탐인(貪人)이라 한다. 탐욕(貪慾)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태음인이 타락하면 탐인이 되기 쉽다. 남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다 챙기고 나야 자기 가족을 챙기고, 자기 가족을 다 챙기고 나야 주변 사람을 챙기고, 주변 사람을 다 챙기고 나야 대중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 ‘다’라는 것이 문제다. 어느 정도를 챙겨야 충분한가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당나라 때 원재(元載)라는 탐욕이 심한 관리가 죽었는데, 죽은 뒤 창고를 뒤지니 후추가 팔백 가마가 나왔다고 한다. 후추라는 게 양념으로 조금씩 쓰는 것이니, 가족이 평생을 써도 한 가마를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걸 팔백 가마를 모아두었으니, 한시(漢詩)를 쓰는 사람들이 인간의 욕심이 과연 끝이 없다고 할 때마다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대략 천 년 정도 빈정거림을 당한 셈이다. 전두환, 노태우의 퇴임 시 비자금이 몇 천억이었다던데, 이 이야기는 또 얼마나 오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는지.
욕심은 모든 것을 지키려 할 때 심해진다. 수구성이 강해지면 욕심이 커진다는 것이다. 치심(侈心)의 뿌리가 사실은 지나친 방어심리라고 설명한 바 있다. 남들이 자신을 못 건드리게 하려고 어깨에 필요 없이 힘을 주는 것이 치심(侈心)의 숨은 동기다. 후추를 팔백 가마나 쌓아놓는 심리가 이해가 되는가? 치심(侈心)이 강해지면 도를 넘는 짓을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인을 버린다는 것은 교심(驕心)이다. 두루 넓게 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을 전부라고 우기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지키려 함은 치심(侈心)이다. 교심(驕心)과 치심(侈心)이 모두 심해지면 나타나는 모습이 탐욕이다.
2. 의(義)와 지(智)의 충돌
인과 예가 부딪히듯이 의(義)와 지(智)도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의(義)란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감성적인 면이 있다. 또 결과 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지(智)란 타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고의 영역에 속하고 과정 중시의 측면이 강하다. 의만 따지면 방법을 무시하게 되고, 지만 따지면 남들의 느낌에 관심이 없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의(義)를 주로 ‘옳을 의’로 새긴다. 이 글에서 ‘옳다/그르다’라는 표현은 주로 논리적 판단의 내용에 써왔다. 그러나 의를 말할 때 쓰는 ‘옳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과 관련된 일에서는 여럿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까지가 포함된 개념이다. 즉 의란 근본적으로는 ‘좋다/싫다’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좋고 싫음이 아니라 대중적인 좋고 싫음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대중에게 이롭게 하는 방향이라는 뜻인 것이다.
논리적 ‘옳다/그르다’는 고정된 상황에서는 따지기가 쉽다. 그러나 대중이 같이 처한 문제에서는 각각의 처지나 느낌이 서로 다르다. 이때 논리적인 ‘옳다/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중의 이로움은 논리적으로 따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와 화폐 경제의 영향으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심리적인 부분, 심리적 만족감, 불만이 같이 작용하니까. 그런 심리적 부분과 실리적 부분이 같이 고려되어 나타나는 반응이 ‘좋다/싫다’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문제는 ‘좋다/싫다’를 기준으로 따져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이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역시 옳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어서 의(義)에 ‘옳을의’라는 새김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이라고 말하는 경우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의로운 행동’이라는 표현은 주로 감동을 주는 행위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또 남을 위하고, 대중을 위하는 행동이다.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처한 특수성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의미한다.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목적을 수행해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의로운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 자신의 큰 위험도 감수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 ‘옳다/그르다’를 굳이 논리적 판단의 경우로 국한해서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다. 개인적 판단 또는 기준이 확실한 좁은 영역에서만 적용되어야 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다. 이 작은 영역에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적합한 소음인의 지방(地方)을 맛보는 사고 기능을 ‘옳다/그르다’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를 대중적 상황에서 무리하게 적용하면 문제가 된다. 대중적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소양인의 세회(世會)를 읽는 감성 능력이다. 그런데 이를 같이 옳다/그르다' 로 쓰면 헷갈리게 된다. 또 ‘개인적 옳고 그름’ ‘대중적 옳고 그름’이라고 표현해도 역시 좀 어색하다. 그래서 의(義)에 해당되는 판단은 그 바탕이 되는 ‘좋다/싫다’라는 표현을 끌어와 사용한 것이다.
보충 설명이 좀 길어졌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의를 버리고 구차한 안일을 바라는 사람을 나인(懦人)이라고 한다. 나약(懦弱) 한 사람이다. 소음인이 타락할 때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소음인이 구차하게 안일만을 탐할 때의 모습에 나약함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좀 의문이다. 필자의 한문 실력이 높지 않아 더 적절한 말을 제시하기는 곤란하지만, 나인이라는 표현은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생각이 있다. 나약함이라는 표현은 태양인인 동무(東武)의 눈에 비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인데, 물론 그 근본을 보자면 나약함이 맞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좀 다르다. 그걸 속에 숨어 있는 나약함으로 이야기하면 너무 수준 높은 표현이 아닌가 싶다.
소음인이 긍심(矜心)이 앞서서 의를 버리면 구차하게 안일만을 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나약한 마음은 소음인의 태행(怠行)인 탈심(奪心)이 강할 때 더 심해진다. 동무(東武)는 나약한 마음은 ‘항상 뒤에만 있으려 할 때’ 강해진다고 설명한다. 태양인의 ‘항상 앞에 나서려 한다’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탈심(奪心)이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이다. 뒤에만 있으려 할 때'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을 겁내는 마음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긍심(矜心)과 탈심(奪心)이 동시에 강해진 사람이 남의 말을 잘 들으면서 “네, 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나약하다는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겉으로는 뻣뻣하고 고집 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 옳은 말을 하면 이상하게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긍심(矜心)과 탈심(奪心)이 같이 강해진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나약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소음인이 열심히 생각해서 한번 기준을 세웠는데, 이를 다 허물어버리기가 싫은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다시 기준을 세우는 일이 자신이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인(懦人)의 나약함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자기가 기준을 세운 부분이나 자기가 신경을 쓰는 부분 이외에는 다 무시하는 모습이 하나다. 즉 자신만의 기준이 없는 부분은 아예 ‘그건 나 못해’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나약함이다. 또 하나는, 겉으로는 고집 세고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다. 실제는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근본은 나약함이지만, 전자는 겉으로도 나약해 보이고, 후자는 겉으로는 오히려 강인해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마지막으로 소양인이다. 지를 버리고 사사로이 꾸미는 사람을 박인(薄人)이라고 한다. 야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양인이 타락했을 때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사람에게 야멸차게 대하고, 함부로 사람을 몰아세우고, 조그만 잘못에도 심하게 닦달하는 식으로 주로 나타난다.
다른 체질과 마찬가지로 지(智)를 버리는 것과 과심(誇心)이 심해지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과심(誇心)은 자신의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으면 당연히 더 심해진다. 그런데 감정의 과도한 표현이라는 말이 착각하기 쉽다. 언뜻 생각하면 생생하고 화려한 표현 등이 생각난다. 시적인 표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표현을 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과 ‘야박하다’라는 표현이 잘 안 어울린다. 그런데 그건 과심(誇心)에 대한 오해다. 과심(誇心)은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다. 감정의 과장은 과장인데, 오락형이나 예술형 과장이 아니라, 전투형 과장이라는 것이다.
이 야박함이 겉으로 이기려는 마음이 강해지면 더 심해진다. 태음인의 탐욕이 안으로 지키려는 마음 이 강해질 때 심해진다는 것과 반대가 된다. 그런데 소양인의 태행(怠行)은 나심(懶心)이라고 했다【여기서 나(懶)는 게으르다는 뜻이고, 소음인이 의를 버렸을 때 나타나는 ‘나인(懦人)’은 나약하다는 뜻이다. 글자도 뜻도 다르니 혼동하지 말기를】. 나심(懶心)은 게으르다는 뜻이고, 더 못하겠다고 뒤로 자빠진 상태이다. 겉으로 이기려는 마음과 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나심(懶心)은 포기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으면 나심(懶心)은 발동하지 않는다. 이를 재간(才幹)과 비교해보자. 최초 계획의 목적을 다른 계획으로 만족시키는 능력이 재간(才幹)이다. 완벽한 마무리가 안 될 때 재치 있는 마무리를 하는 것이 재간(才幹)이라고 했다. 즉 최초의 계획을 고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나심(懶心)과 재간(才幹)의 갈림길이다. 체면에 얽매이느냐 얽매이지 않느냐의 차이다. 나심(懶心)이 발동하는 상황은 ‘나는 못하겠다’라고 뒤로 자빠진 상태이지만, ‘그래도 그 일은 원래 계획대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고집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어떻게 될까? 남을 몰아붙이게 된다. 남의 탓을 하고, 남에게 야박해진다. 게다가 과심(誇心)까지 같이 강한 상태니까, 제일 심한 표현만 골라가면서 남을 부리려 든다. 노동자에게 가장 최악의 경영주가 바로 박인(薄人)이다. ‘우리 사장이 박인이다’라고 느껴지면 최대한 빨리 다른 직장을 찾는 것이 좋다. 박인은 차라리 회사가 망하면 망했지 절대 남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에 관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었는데, 약간의 사족을 달아야 할 듯하다. 인의예지의 사상인에 대한 배당은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약간의 이견이 있다. 『동의수세보원』은 심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근본은 의학책으로 씌어진 것이다. 그런데 동무(東武)가 사상서로 쓴 『격치고(格致藁)』라는 책이 있다. 이 『격치고』를 중시하여 동무(東武)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우선하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상인에 대한 인의예지의 배당에 관해서 견해 차가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인과 예의 부딪힘, 의와 지의 부딪힘에 대해서는 명확히 했지만, 사상인에 대한 배당에 대해서는 동무(東武)가 확연하게 정리를 못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런 상황이라 필자도 이 부분을 이 책에 넣을까 말까에 대해서 좀 고심을 했는데, 사심(邪心), 태행(怠行)으로 치달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려면 넣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격치고(格致藁)』의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므로 『동의수세보원』에만 충실한 해석에 따라 인의예지의 사상인에 대한 배당을 위와 같이 한 것이다.
이 부분은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과, 한학을 깊이 공부해서 인의예지에 대해 해박한 분들이 함께 연구해서 정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그렇게 정리된 결과 필자의 해석이 틀렸더라도 사실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 책을 잘 읽고 노력해서 사심(邪心), 태행(怠行)이 심해지는 분들이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어, 비인(鄙人), 박인(薄人), 탐인(貪人), 나인(懦人)이 다 없어지면 위의 내용에 틀린 부분이 있어도 문제될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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