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삼국지 이야기
책이 좀 어려워도 마지막이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사상인의 심리연구’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잘 따라와 준 독자분들에 대한 보답으로 마지막에는 재미있는 삼국지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진짜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방법이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소설을 통해 가공된 인물 쪽이 오히려 공부거리가 된다. 소설가들이 마구 인물을 만드는 것 같아도 인물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려다보면 사상인 중의 한 모습을 묘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존 인물보다는 소설 속에서 약간 가공되어 나오는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사상기운을 느끼기에 더 쉽다. 어쨌든 소설에 묘사된 인물들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니, 사실은 어떻고 사료에는 어떻다는 식의 반론은 사양한다.
삼국지의 분석은 일단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준으로 하되, 부분적으로는 『삼국지연의』에 대한 고우영 씨의 인물 해석을 많이 참조했다. 고우영 씨의 『만화 삼국지』에 보면 삼국지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 재미있는 해석들이 좀 있다. 특히 관우와 제갈량이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아주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 부분부터 시작해보자.
1. 관우는 왜 형주에서 죽어야만 했나
왕위계승의 문제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소음인이다.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가히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 병법을 쓰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동요되거나 들뜨는 일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 타인의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이해한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은 늘 고요하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이용할 줄 안다. 또 남만정벌에서 보면, 새로운 환경에 당황하지 않고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바로 창안한다. 전술로 안 되면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것은 식견(識見)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여기까지는 장점이다.
소음인이 갖는 한계도 조금 드러난다. 모든 것을 구조화해서 안정적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지나치다. 평시라면 문제될 일이 없겠지만, 당시가 전란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과연 안정성만을 고집하는 것이 옳았는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갈량(諸葛亮, 181~234)과 관우 사이의 충돌이다. 이런 해석은 기존의 책에는 없다. 필자가 최초로 주장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어차피 소설 속의 이야기니까 편하게 읽어주기 바란다.
유비(劉備, 161~223)의 왕통을 이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넷이었다. 우선, 처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했으며 인품으로도 가장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관우(關羽, ?~219), 두 번째는, 비록 양자이기는 하나 맏아들이고 많은 전쟁을 함께 치른 유봉, 세 번째는, 적자인 유선, 네 번째는, 국가 경영 능력에서 가장 앞선 제갈량(諸葛亮, 181~234).
문제는 유비에서부터 나온다. 태음인은 결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는 경향이 있다. 유비 역시 태음인답게 왕통의 문제를 일찍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국력이 약한 상황, 생사고락을 함께해 와서 서로에게 신뢰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좋을 수도 있다. 서로가 큰 욕심을 가지고 좀더 노력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국가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그 문제는 정리를 해야 했다. 아마 촉을 손에 넣었을 때 정도가 적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때까지도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다.
유비가 촉(蜀)을 손에 넣었을 때, 형주, 양양, 강릉의 삼군은 관우에게 맡겨진다【형주, 양양, 강릉의 삼군은 적벽대전의 결과로 얻은 장강 유역의 군들로서, 위, 촉, 오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한동안 이 삼군은 촉의 영토라기보다는 관우의 영지처럼 다스려진다. 물론 촉과 형주 사이의 거리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유비가 관우를 믿는 마음도 있고 관우의 인품이 워낙 주민의 존경을 받는 부분도 있어서 아예 전권을 주어버린 것이다.
유비가 황족이라서 맏형이 되지만, 실제 나이는 관우가 위라고 나온다. 게다가 학식, 인품, 무예, 모든 면에서 관우는 유비를 앞선다. 다만 난세에 어울리는 노련함이 부족하다. 너무 인의를 숭상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보자. 유비가 조금씩 명성을 얻게 되자, 조조가 유비를 견제하려고 허창(許昌)으로 부른다. 겉으로는 한나라 조정의 일을 맡기는 듯하지만, 실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잡아두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관료와 장수들이 나선 사냥터에서 승상인 조조가 황제를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조조가 황제의 활로 사슴을 쏘아 맞히자, 사람들은 황제의 표시가 있는 화살만을 보고 황제가 사슴을 잡았다고 환호를 지른다. 그러자 조조가 앞에 나서며 “사슴을 잡은 것은 황제가 아니라 나 조조다”라고 외친다.
관우의 손이 반사적으로 칼집으로 간다. 유비가 이를 보고 얼른 앞을 가리며 만류한다. 깊은 수양 때문에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관우의 기본 성향은 확실히 급하고 직선적인 면이 있다. 그 부분이 태양인 관우가 수양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는 한계다.
조조가 유비를 놓아줄 것 같지 않으니까, 유비는 느닷없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나는 욕심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다”라고 위장하는 것이다. 조조가 유비를 떠보려고 와서 같이 술을 마신다. 중간에 천둥이 치자 유비는 놀라서 술상 밑으로 숨는다. 철저히 위장하는 것이다. 함께 인질 형편인 관우를 볼까? 관우는 여전히 무예를 연마하고, 책을 읽는다. 군자의 모습에 흐트러짐이 없다. 관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비와 같은 위장은 못한다. 그게 태양인 관우와 태음인 유비의 차이다. 관우로서는, 난세의 군주가 되기에 부족했던 단 한 가지 요소다.
관우가 그런 인물이기에 유비로서도 장비처럼 편하게 아랫사람으로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비는 하나의 목표로 밀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태음인답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다. 천하통일이 안 되어 촉만 그냥 지키고 있는 상황이 길어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어떤 것이 최선일까? 형주, 양양, 강릉의 삼군은 아예 관우에게 주어 독립시키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자신보다 명망이 더 높은 부하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일까? 게다가 아랫사람으로 마구 부리기도 어렵고, 공로는 막대한 사람이다. 한곳을 떼어주어 독립시켜주는 것이 백성들의 평판도 잃지 않고 부담도 줄이는 최선이 아닐까?
관우 입장은 어떨까? 물론 명분이나 인의를 중시하지만, 그 같은 난세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이 어느 것이냐를 역시 고민한다. 자신이 독립하여 형주, 양양, 강릉을 지키는 것이 촉에 유리하고 백성들에게 유리하다면 관우는 받아들인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연연하지 않는 태양인다운 사고방식이다.
유비와 관우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서로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정적 국가 구조를 생각하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생각은 좀 다르다. 관우의 독립은 다른 장수의 독립을 부를 수 있다. 관우가 독립하면 마초는 서량왕이 되어야 마땅하다. 장비나 조자룡이라고 불만이 없으란 법이 없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다.
또 모든 것을 확실히 해서 아예 일찍 독립해버리면 차라리 낫다. 문제는 관우가 형주를 자기 영지처럼 지배함으로써 명성이나 백성들의 기대가 높아진 상태에서 유비가 갑자기 죽는 경우다. 형주는 당연히 관우의 땅이 되려니와, 촉마저도 왕권이 관우에게로 승계되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많아질 수 있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생각으로는, 왕권은 무조건 유선에게 이어져야 한다. 적장자 승계라는 확실한 원칙이 있어야 왕권 다툼으로 인한 나라의 혼란이 없다. 그런데 그 계승자가 왕에 오를 만한 재목이 못 된다면? 그건 관료시스템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국가 관료시스템의 정비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아주 소음적인 접근 방법이다.
화용도(華容道)
마지막에 가장 첨예해진 것이 형주 처리 문제이고, 이것이 왕권 문제와도 연관되기에 그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관우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코드가 맞지 않는 부분은 처음부터 나타난다. 관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난세에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고초를 겪으면 당연히 나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비에 대한 존경 때문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따라가지만, 속이 썩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 탐구에만 매달려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을 굳이 찾아간다는 일이.
제갈량 쪽에서도 관우가 그리 편하지는 않다. 각각 자신이 맡은 일을 차질 없이 행해서 구조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선호하는 소음인의 관점에서 볼 때, 관우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유비진영은 큰일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화용도(華容道)에서 나타난 것이다【화용도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가 후퇴하다가 관우의 복병을 만났던 곳이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유비에게, 아직은 조조의 운세가 다하지 않아서 죽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관우를 보냈다고 한다.
조조가 어차피 살 형편이라면 관우가 조조에게 입은 은공을 씻어서 빚이 없게 만들어주려고 관우를 보냈다는 것이다【관우는 한때 조조의 포로가 된 적이 있다.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의 조정에 항복하는 것이며, 유비의 거처(居處)를 알면 언제라도 다시 가겠다는 조건으로, 결사 항전을 포기하고 조조의 포로가 된다. 조조는 관우를 극진히 대접하며, 관우가 떠나려 하자 정말 관우를 아무 조건 없이 보내준다】. 그런데 제갈량의 그 주장이 진심일까?
제갈량은 조조를 죽일 생각이 없다. 조조를 죽인다는 것은 유비가 대신 조조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천하 경영에 나선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비 진영은 아직 그럴 만한 역량이 안 된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오(吳)의 밥이 될 뿐이다. 적벽대전의 와중에 확보한 형주, 양양, 강릉의 세 군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 당시 유비의 역량에 맞는 최대한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조와 손권의 대립구조가 유지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조를 살려 보내야 한다. 그러나 죽일 수가 없어서 살려 보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공적인 일을 맡은 장수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죽일 수 있는 조조를 살려주었다는 식이 가장 최선의 처리다. 그 악역을 누가 담당해야 할까? 그걸 관우에게 시킨 것이다.
관우는 유비 진영의 장수 중에 조조를 죽일 수 없는 유일한 장수다. 조조에게 입은 은혜 때문에 죽이지 못한다? 관우가 공과 사를 구분 못할 그런 작은 그릇은 아니다. 또 의를 지키기 위해 조조를 죽이고, 역량이 안 되어 오의 밥이 된다면 흔쾌히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우의 고민은 그것이 아니다. 조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 중원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고 각지의 영주가 다 다시 봉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의 고통이 뻔히 눈에 보인다. 조조 이상의 역량이 되기 전에는,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릴 역량이 되기 전에는, 조조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나마 조조의 영지 내에서는 안정적 삶을 살고 있는 민중을 다시 전란에 내모는 일이다. 민중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그걸 아는 유일한 인물인 관우를 화용도로 보내 조조를 살리게 하는 제갈량.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조를 못 죽이면 자기 목을 내놓겠다는 맹세를 하고 화용도로 떠나는 관우, 그 상황에서 제갈량과 관우 사이에는 이미 넘기 힘든 선이 그어졌다고 생각한다.
형주에 남겨진 사석(捨石)
결국 유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조조와 손권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형주에 관우를 남겨놓고 촉을 정벌하러 떠난다. 처음에 제갈량은 형주에 남고 유비와 방통이 황충, 위연과 함께 촉으로 간다. 그러나 낙봉파에서 방통이 죽게 되자 장비, 조자룡 등을 다 끌고 제갈양이 촉으로 간다. 관우가 무장치고는 지략이 높기는 하지만, 주유, 사마의, 육손, 여몽 같은 전문적인 지략가의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관우 옆에 아무도 남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지역을 잘 아는 방통을 관우 옆에 남기고, 자신이 촉으로 유비를 따라갔다면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장수 역시 거의 남은 사람이 없다. 요화야 산도적 출신이고, 미방은 장사꾼 출신이다. 관우의 아들들을 제외하면 주창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물론 촉을 확보하는 것이 급했지만, 촉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마자 장비, 조자룡, 황충 중에 한 명만 형주로 보냈다면 과연 관우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을까? 위연은 처음 보자마자 반골임을 알았던 제갈량이 부사인이나 미방은 궁지에 몰리면 관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관우는 애당초 형주 같은 요충지를 수비하기에 적합한 장수가 아니다. 수비보다는 공격에서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수다. 수비형 장수로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다. 요충지를 수비하는 장수는 전황이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바로 원군부터 청해야 한다. 그러나 관우는 즉각 원군이 오지 않으면 전멸할 만한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관우 성격이 그런 것이야 제갈량도 뻔히 아는 것이고, 이를 대비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형주가 공격을 받아 촉의 본국으로 사자가 오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상용이다. 상용에 성격이 불같고 그 이름만으로도 적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장비가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형주의 위기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갔을 것이며, 관우는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상용에 배치된 장수는 유봉과 맹달이었다.
유봉이나 맹달이라면 유비와 공명이 있는 성도에 어찌할까를 물을 수밖에 없다. 상용을 비운 채 형주로 달려갈 배짱이 있는 장수들이 아니다. 원군은 도착하지 않고, 관우는 죽는다. 유봉은 관우에게 즉각 원군을 보내지 않은 이유로 유비의 불신을 사게 된다. 그 불신이 결국 유봉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왕통 문제는 자연스레 유선으로 정리된다.
관우에게 맡겨진 임무를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새로 얻은 촉이 안정될 때까지 조조와 손권의 주력부대를 형주 주변에 묶어두는 일이었다. 유비는 관우를 믿었을 것이다. 관우라면 능히 지켜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갈량의 구도에서는, 관우는 형주에 남겨진 사석(捨石)인 것이다. 최소의 병력으로 최대한 적을 괴롭히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제갈량의 구도 속의 관우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흔히 말해지는 것만큼 훌륭한 전략가는 아니었을까? 관우조차 품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에 불과했을까? 아니다. 제갈량이 옳았다. 그건 그 상황에서 촉한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이며, 구사 가능한 유일한 전략이었다. 천하를 삼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형주에 침착한 수비형 장수를 남긴다면, 조조나 손권 역시 형주 주변에 주력부대를 남기지 않는다. 촉에서 유장이나 장로와 싸우고 있는 유비의 뒤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형주에 남은 것이 관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비를 어설프게 했다가는 언제 관우가 치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관우를 제거할 때까지는 주력부대가 거기에 묶이는 것이다. 유비와 제갈량은 촉을 손에 넣고 안정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결국 형주에 관우를 남긴 것은 촉이 당시의 국력으로 촉을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다만 촉이 확보되자마자 형주를 포기하고 관우를 불러들였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촉도 확보하고 관우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형주를 계속 지키는 것은 어차피 당시 촉의 국력으로는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나라의 사기가 문제가 된다. 멀쩡한 영토를 내주고 온다는 것이. 또 자존심 강한 관우가 철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일지도 의문이고, 결국 형주에 혼자 남겨진 순간 관우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형주가 공격받을 때 어설프게 원군을 보냈다가 원군까지 같이 전멸당하면 그때는 촉도 함께 무너지는 상황이었으니까.
촉의 비운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유비나 장비가 제갈량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촉의 비극이었다. 유비나 장비가 냉정하고 침착했다면, 촉을 바탕으로 촉한이 삼국을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관우의 죽음이 오히려 촉의 병사들을 분발시킬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우의 죽음은 장비와 유비를 무너뜨린다.
소양인 장비는 바로 겉으로 드러나게 무너져버린다. 뒤에서 다시 설명되겠지만, 장비는 재간(才幹)도 뛰어나고 도량(度量)도 제법 보여주는 소양인이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가 죽자 한순간에 무너진다. 관우가 존경받던 무장이었으니, 촉의 전체 장병들이 어느 정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생각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급 장교나 일반 병사의 마음이 장비의 마음 같기야 했을까? 그런 상황에서는 도량(度量)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수준에 맞추거나, 재간(才幹)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복수심을 더 끌어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심리적 타격이 그 모든 능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도량(度量)과 재간(才幹)이 사라진 자리를 나심(懶心)과 과심(誇心)이 차지한 것이다. 결국 박인의 모습이 되어 부하들을 닦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가 처벌을 두려워한 범강과 장달에 의한 장비의 암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출전조차 못하고 출전 준비 중에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태음인 유비는 겉으로는 꿋꿋이 버텨내지만 속으로 입은 내상은 감당 못한다. 태음인다운 느긋함과 신중함을 잃어버리고 무리하게 오를 공격하다가, 결국 75만의 대병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유비가 죽은 뒤 제갈량이 몇 번의 중원 공략을 시도한다. 그때 끌고 가는 병력이 최대로 준비했을 때가 34만이라고 나온다. 마지막에는 10~20만의 병력으로 싸우게 된다. 유비가 75만의 병력을 잃은 것은 신생국 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력보다 더 큰 손실은 그로 인해 유비가 낙담하여 일찍 죽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명과 유비 사이에 내정과 전쟁 수행의 역할 분담이 불가능해진다.
제갈량은 자신이 위의 정벌에 나섰을 때 내정을 맡아 줄 사람으로 징완, 비위, 등지 등을 발굴해서 열심히 키운다. 하지만 실무 능력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정벌에 나선 군대를 후방에서 확실히 지원하려면 신하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왕이나 승상이 필요하다. 공명이 내정을 부탁한 인물들은, 실무 능력은 확실하지만 몇몇 공신들이 삐딱하게 나갈 때 이를 제어할 만한 카리스마가 없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된다. 제갈량은 몇 번의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유리한 상황에 놓이지만, 후방 지원이 흔들리면서 철수하게 된다.
식견(識見)과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한 소음인 제갈량의 계획은 정교하고 뛰어났다. 그러나 소음인이었기에 감정의 이해에서 한계를 보인다. 관우의 죽음이 유비와 장비를 어느 정도까지 무너뜨릴지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것이 큰 뜻이 꺾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 장판파 전투와 적벽대전
장비와 조자룡
관우의 죽음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면서 체질의 특성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유비, 관우,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각각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의 전형도 아니고, 또 앞의 이야기는 소양인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 이것으로 끝내기는 좀 아쉽다. 이왕 삼국지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시간 순서를 쫓아가면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도 좀더 하도록 하자. 장판교 전투에서 소음인 조자룡과 소양인 장비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있으니 그 장면을 한번 짚어보자.
먼저 장비와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알아보자. 장비(張飛, ?~221)는 언뜻 보기에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성격도 급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의외로 재간(才幹)이 뛰어나다. 원래 장비는 유비의 첫 부인이 된 부용아씨의 집안인 홍씨 집의 무인이었다. 그런데 장비가 외부에 일을 보고 오는 동안에 집안에 황건적이 들어와 전 가족이 몰살당하고 외동딸인 부용아씨는 행방불명된다. 장비의 무모함은 승산이 있을 때만 드러나는 무모함이다. 혼자 황건적과 싸워야 승산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무모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장비는 신분을 숨기고 황건적의 일당이 되어 정보를 수집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러다가 황건적에 붙잡힌 유비의 도망을 돕게 되는 것이 유비와 장비의 첫 만남이다. 그 외에도 삼국지를 차분히 읽어보면 장비가 잔꾀를 쓰는 장면이 의외로 많이 나온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장비를 쓰는 것을 보아도, 순간적인 재치가 요구되거나 기세로 몰아붙여야 할 곳에 배치한다. 소양 기운이 필요한 곳에 쓰는 것이다. 그런데 정해진 기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해야 하는 경우에는 장비에게 시키지 않는다. 그때는 항상 조자룡에게 일을 맡긴다.
좀 뒤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유비가 형주, 강릉, 양양을 손에 넣자 오나라에서 오와 한의 동맹을 위해 손권의 동생과 유비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은 유비를 불러 암살시키기 위해 주유가 짜낸 계략이다. 제갈량은 계략인 줄 태연히 알면서도 유비를 오나라로 보낸다. 오와의 동맹이 당시 상황으로는 한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암살을 피하는 방법부터 탈출하는 요령까지 모든 것을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다. 문제는 유비를 따라가 그 계획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수행할 사람이다. 제갈량의 선택은 조자룡이었고, 조자룡은 자신의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 없이 제갈량의 뜻대로 무사히 유비와 새 왕후를 모시고 귀국한다. 그 외에도 거짓 후퇴로 적군을 끌어들이는 일 같은 것을 맡기면 조자룡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 없이 제갈량의 의도대로 확실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확실한 일은 확실하게 해낸다. 또 조자룡의 그런 능력을 제갈량은 절대적으로 신임한다. 이유가 있다. 같은 소음인끼리 코드가 맞는 것이다.
조자룡은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다. 그러나 공손찬의 그릇이 크지 않음을 알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한다. 그때는 유비도 자리를 잡기 전이라,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리가 잡히면 부르겠다고 한다. 조자룡은 그 약속 하나를 잊지 않고 유비가 서주에 자리를 잡자마자 달려간다. 매사가 확실하고,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 무장의 표본 같은 사람이다.
인물 설명이 어느 정도 되었으니 장판교 전투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유비가 신야에 자리를 잡고 제갈량이 가세해 점점 세력을 키우는 상황에서, 조조가 50만의 병력을 끌고 쳐들어온다. 제갈량의 계략으로 몇 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하지만, 워낙 병력이 열세인지라 결국 은 신야를 버리고 번성으로, 다시 번성을 버리고 강릉으로 후퇴한다. 문제는 번성에서 강릉으로 후퇴하는 도중 장판파라는 벌판에서 벌어진다.
조자룡이 맡은 임무는 유비의 가족을 호위하여 후퇴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후퇴 도중 황후와 공자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조자룡은 바로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돌아간다. 소음인은 여유가 있을 때는 깊고 끈질기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유가 없을 때는 자기가 아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밀고 간다. 피해 가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조자룡이 아는 단 하나의 방법, 앞을 막는 병사는 베어내며 전진하는 방법이다.
결국 황후를 구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아두 공자는 구해낸다. 공자를 품에 안고, 창 한 자루를 손에 들고서, 앞을 막는 적군은 무찔러가며 조조의 30만 대군 사이를 무인지경인 양 헤쳐 나온다. 아무 잡생각 없이 머리를 비웠을 때만 보여줄 수 있는 소음인의 집중력, 그 집중력이 발휘될 때 나오는 괴력의 표본이다. 소음인의 락성(樂性)이 가지는 무서움이다.
조자룡이 30만 대군을 뚫고 장판파를 지나 장판교에 다다르자 장비가 이를 맞이한다. 조자룡을 보내고는 부하들에게는 숲속에 숨어 있으라고 한다.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매달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먼지를 피우라고 한다. 그러고는 혼자 다리 앞에 서서 적의 30만 대군을 맞이한다. 소양인 재간(才幹)의 극치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조조군은 이미 조자룡의 무예에 기가 꺾인 상태다. 그런데 한 수 더 뜬다는 장비가 앞을 막고 있다. 게다가 이미 제갈량의 전술에 여러 번 당해본 입장이다. 복병이 있는 듯한 기미가 있는데, 장비의 잔꾀인지 제갈량의 전술인지 알 수가 없다. 장비는 혼자서 30만 대군을 앞에 놓고 잔뜩 호기를 부린다. 상대가 겁먹은 것을 읽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결국 30만 대군이 주춤주춤하는 동안 유비의 본대는 여유 있게 퇴각하고, 장비는 그 사이 다리를 불사르고 본대에 합류한다. 제갈량의 계략처럼 확실하게 수를 읽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인 결단력, 상대방 감정의 동요를 읽는 능력이 그런 재간(才幹)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소음인의 집중력과 소양인의 재치가 조화를 이루며 병력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공자도 구하고 성공적인 후퇴도 가능케 한 멋진 장면이다.
조조
삼국지 이야기를 한다면서 삼국지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라는 적벽대전을 빼놓기는 아쉽다. 또 인물 분석이 촉한 위주로 되어 조조, 주유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쉬우니, 적벽대전의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자. 먼저 조조를 조금 이야기하고 가도록 하자.
조조는 소양인으로 보인다. 은근히 태양 기운도 강해서 소양인인지 태양인인지 좀 헷갈리지만, 말년에 동작대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을 보면 소양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백성은 동작대 같은 것으로 위엄을 보여주어야 존경심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대중 심리의 파악에 뛰어난 모습을 여러 번 보인다. 특히 패전 후에 부하를 추스르는 방법들을 보면 감정을 움직이는 데 아주 능하다. 어쨌든 소양인이라도 태양 기운 또한 강하기에, 관우를 이해하고 존경한다. 관우와 코드가 맞는 것이다. 일단 솔직하고 직선적이라는 면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반면에 또 태양 기운이 잘못 작동할 때 나오는 비인의 모습도 종종 보인다. 조조가 젊은 시절에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치는 장면부터 이야기해보자.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치다가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숨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여백사가 외출한 동안 하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는다. 조조가 방안에 있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꼭꼭 묶어라, 칼을 잘 갈아라”라는 말을 듣고 오해를 한다. 하인들이 현상금을 노리고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뛰쳐나가 하인들을 죽이고 나서야 돼지를 잡으려 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 할 수 없이 다시 도망을 간다. 이런 경솔함이 소양인의 과심(誇心)의 발로다.
여기까지는 수배당한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오해라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망치다가 다시 돌아와 뒤늦게 돌아온 여백사까지 전 가족을 몰살시키는 장면에 이르면, 이건 좀 심하다. 자신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인데, 이런 것이 바로 비인(鄙人)의 모습이다. 그렇게 아버지 친구까지 죽이고 살아남아 산산이 갈라진 나라를 통일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면 결과적으로는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인간은 비열한 인간이다. 꼭 태양인이 아니더라도 선천적으로 태양 기운이 어느 정도 섞여 있는 사람이 예를 무시하면 비인이 될 수 있다는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삼국지 전체로는 조조 역시 수양이 깊은 쪽의 모습을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모습이 적벽대전에서 보인다. 소양인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 약하다. 이를 조조가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적벽대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적벽대전
손권과 유비의 동맹이 확실해지자, 조조는 더 이상 적들이 크기 전에 확실하게 정벌하려고 한다. 대병을 이끌고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양자강이다. 위의 병사는 대부분 북쪽 출신이라 수전에 약하다. 일단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선단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된다. 동맹군이 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제갈량(諸葛亮, 181~234)과 주유가 생각한 방법은 화공이다. 그런데 화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배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화공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더 큰 문제는 그 시기가 바람이 오의 진영 쪽으로 부는 계절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방통(龐統, 179~214)이다. 제갈량과 더불어 복룡과 봉추라고 불리며 병법가로 쌍벽을 이루는 명성을 얻던 그 방통이다. 방통은 오나라에 숨어들었다가 탈출하는 위나라의 간첩을 우연히 만난 것으로 가장하고, 그 간첩의 소개로 조조를 만나게 된다. 방통은 위의 군사들이 배 위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건강을 다치는 병사가 많을 것이라고 하면서, 배들을 쇠고리로 서로 엮어 큰 구조물처럼 만들면 파도에 훨씬 덜 흔들리며 멀미를 하는 병사가 훨씬 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주유와 방통이 먼저 짠 계략이며, 조조는 이에 넘어가 모든 배를 연결시킨다. 방통 이야기는 나중에 나올 이야기 때문에 해둔 것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자.
두 번째 문제인 바람 이야기가 유명한 이야기인데, 소설에는 제갈량이 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빌어서 동남풍을 불러 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진짜로 귀신을 불렀을까? 물론 아니다. 제갈량은 어린시절을 그 지역에서 보낸 적이 있다. 또 그때부터 천기(天機)를 관찰하곤 했었다. 즉 가끔씩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귀신을 부르는 흉내를 냈을까? 주유가 소양인이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주유는 소양인답게 명예를 중시하고, 자존심을 중시한다. 또 임기응변에 능하고, 결단력이 뛰어나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부르는 것을 보고 주유는 바로 제갈량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다. 귀신까지 부리는 능력자를 적으로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리 생각하고 준비했으면 모를까, 순간적으로 동맹국의 2인자를 죽이겠다는 것은 대단한 배짱이다. 음인(陰人)으로서는 도저히 나오기 힘든 결단력이다. 다만 문제는 주유가 그렇게 판단할 것이라는 걸 제갈량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주유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죽이기 위한 준비를 왜 미리 철저하게 하지 못했을까? 보편에 대한 중시에서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제갈량이 “내가 관찰했더니 동남풍이 부는 경우가 있더라. 그때 공격하면 된다”라고 말을 했으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제갈량은 제단을 쌓고 귀신을 불러서 자신이 동남풍을 부르겠다고 했다. 주유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된다. 절대로 실패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제갈량이 귀신까지 부린다는 것을 감성적으로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이 소양인의 한계다. 자신이 도저히 인정하기 싫은 부분에 부딪히면 과심(誇心)이 떠버리는 것이다. 제갈량이 실패할 것이 확실하니 실패를 빌미 삼아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갈량은 그걸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주유의 과심(誇心)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방심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주유가 방심에서 놀람으로, 놀람에서 결단으로 바뀌는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탈출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서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탈출 준비는? 물론 확실히 믿는 조자룡에게 시킨다.
뭐, 황개의 고육책 이야기며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지만 대충 생략하자. 어쨌든 화공은 멋지게 성공을 거두고 조조는 비참하게 퇴각한다. 그 퇴각 과정마다 계속 복병을 만나 모진 고생을 겪는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조조의 진가가 드러난다. 조조가 복병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복병을 만나기 전에는 꼭 “이렇게 복병을 숨기기 좋은 곳에 복병이 없는 것을 보니, 제갈량이나 주유도 별로 대단하지 않다”라고 큰소리를 친다. 소설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복병의 등장을 극적으로 만들고, 조조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작은 조작이다. 그런데 꼭 그럴까? 조조의 큰소리는 단순한 허풍일까?
비참한 패배, 계속되는 복병. 나심(懶心)이 발동하기 쉬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포자기(自暴自棄)에 빠진다. 더군다나 패배에 쉽게 자존심이 상하는 소양인은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의 나심(懶心)과 끝까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격려하고,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스스로와 부하들의 기분을 바꾸고자 결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앞에서 말한 화용도에서 관우와 부딪히는 장면이다. 이는 관우와 제갈량의 갈등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이지만, 조조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이가 타국의 일개 무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빈다. 같은 소양인인 주유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장비라면 어땠을까? 나심(懶心)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온 조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조는 돌아와 며칠 만에 패배의 상처에서 벗어난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패배의 책임을 부하에게 돌리는 짓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졌지만, 우리는 가장 대국이니 일승일패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조조가 살아 있는 한 여러분은 사기가 꺾일 이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 나라를 추스른다.
소양인은 승부에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조조와 주유가 매번 제갈량에게 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든 제갈량과의 머리싸움에서 이기려 드는데, 제갈량은 조조나 주유가 호승심(好勝心)이 매우 강한 인물이라는 것까지 미리 계산에 넣고 전략을 짜니 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서로 다르다. 주유는 제갈량과의 지략 경쟁에서 계속 지자 결국은 화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 조조는 수양의 깊이에 있어 주유보다는 한 수 위다. 패배에서 아주 빨리 벗어나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다. 소양인의 재간(才幹)의 표본으로 연구할 만한 대상이다.
적벽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이 남았다. 만일 상대가 평소에 존경하던 관우가 아니었더라도 조조가 무릎을 꿇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수양이 깊고 나심(懶心)을 잘 극복한다 하더라도 역시 조조는 소양인이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목숨을 비는 것은 쉽지 않다. 전국의 상황을 고려하던, 민중의 삶을 생각하던 조조가 끝까지 저항하면 결국은 죽일 수밖에 없다. 결국 화용도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관우밖에 없었다. 적벽대전이 유비가 세력을 확대하게 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지만, 제갈량과 관우 사이는 결정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3. 방통과 사마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라는 적벽대전까지 이야기가 끝났으니 마무리를 해도 되지만, 태음인 이야기가 너무 적은 것이 유감이다. 유비가 어느 정도 언급되었지만, 태음인 중에도 우유부단함이 좀 지나친 편에 속해서 태음인의 전형으로 보기는 좀 그렇다. 방통과 사마의의 이야기를 조금 해서 균형을 잡도록 하자. 이 둘은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방통(龐統, 179~214)을 굳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음인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가 방통에게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같은 은둔자라도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유비의 삼고초려 전에는 산속에 확실히 숨어 있었다. 세상에 나가면 확실히 나가고 아니면 아예 마는 것이다. 소음인다운 태도다. 그러나 방통은 은근히 자신을 드러낸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배를 묶은 연환계를 성공시킨 일이 그런 예다.
방통은 사실상 적벽대전의 중요 공로자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성과는 대부분 유비에게 주어지고 오는 별로 얻은 것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주유 편에서 일한 방통은 굳이 공을 내세워 작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은둔자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주유가 화병으로 죽자 제갈량이 주유의 문상을 위해 오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방통은 은근히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자신의 뜻을 밝히지는 않는다. 제갈량이 강하게 권고하자 못 이기는 척하고 유비에게로 간다.
이런 부분이 태음인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의 전형이다. 주도권을 잡으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면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끌려 다니는 경우도 많다.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에 끌려가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잡아끌어서 마지못해 참여하는 형태로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있는 부분,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에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과물이 나올 때쯤이면 상대에 대한 파악도 끝나 있게 된다. 어느새 주도권이 태음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유비에게 가서도 자신을 크게 내세우지 않는다. 제갈량의 추천서도 내보이지 않는다. 같이 있다 보면 구체적인 증거로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방통의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 유비가 내양현이라는 시골의 조그만 촌 하나를 맡기자, 아무 불평 없이 내려간다. 가서는 마을 사람의 불만이 쌓이도록, 술만 마시고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장비가 이를 확인하러 가자, 장비를 앞에 놓고 은근히 수작을 부린다. 소설에는 몇 달 동안 쌓인 일을 하루 만에 다 해결하여 장비를 놀라게 하는 것으로 나온다. 방통이 진짜 정무를 다 팽개치고 있다가 장비 앞에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다 처리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이미 개요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몰래 서류들을 보아두었든, 아니면 시중에 떠도는 말을 은근히 들어두었든, 미리 다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뭐 꼭 비열한 사기라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장난기 많은 태음인,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태음인이 이런 짓을 가끔 한다. 자신도 재미있고, 씩씩대며 찾아온 장비에게 감동도 주고, 재미있지 않은가? 삼국지 등장인물 중에 친구로 삼을 만한 재미있는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필자는 방통을 꼽고 싶다.
방통이 촉을 공격하다가 낙봉파에서 죽은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제갈량이 천문을 보고 운이 흉하니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전갈을 보내지만, 방통은 그냥 진격하자고 주장한다. 그 장면을 보통은 방통이 제갈량에 대해서 라이벌 의식을 느껴서 판단이 흐려진 것으로 묘사한다. 꼭 그럴까? 유비 진영의 촉 공략은 마냥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조와 손권의 주력부대를 형주 주변에 묶어두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태음인의 교심(驕心)이 발동되기 가장 쉬운 상황이 속도의 재촉을 받는 상황이다. 촉 정벌을 서둘러야 하는데, 유비는 민심이니 도리니하는 것들을 따지며 쉽게 촉을 접수할 기회를 마냥 놓치고 시간을 끌었고, 그 초초감이 교심(驕心)을 부르고, 그 교심(驕心)이 결국 방통을 죽인 것이다.
최후의 승자
사마의(司馬懿, 179~251)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그가 사실상 삼국지 이야기의 최후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조조가 죽은 뒤 조씨 형제끼리의 왕권 다툼으로 위는 왕권의 권위가 떨어진다. 삼국지 후반부에 이르면 사마의가 왕권에 욕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왕을 불신하면서 사마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히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황제인 조예가 사람을 보내 사마의를 떠보려 하자, 병을 가장하고 속여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귀도 어두워지고 치매 기운도 시작된 듯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내는데,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 아닌지? 유비가 천둥이 치자 상 밑으로 숨으며 조조를 속여 넘기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다. 아주 태음인다운 대처방식이다. 그렇게 조예를 방심시킨 사마의는 기회를 잡아 반란을 일으켜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며, 결국은 사마의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위의 시대를 끝내고 진을 개국하게 된다.
사마의가 좀더 젊었을 때로 돌아가보자. 사마의가 제갈량을 대하는 방법은 조심, 조심, 또 조심이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싸움을 보면 마치 임해봉(林海峰, 1942~)과 조치훈(趙治勳, 1956~)의 바둑을 보는 느낌이 든다. 임해봉의 바둑은 한곳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상대가 앞서 가면 앞서 가는 대로 끈질기게 한 발 뒤에서 따라간다. 결국 상대는 제풀에 지쳐서 떨어진다. 임해봉이 수를 읽는 것을 보면 별의별 경우들을 다 생각한다. 그 수많은 변화도 중에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한다. 조치훈은 다양하게 수를 읽는 스타일은 아니다. 몇 가지 변화에 대해서만 수를 읽는다. 하지만 그 수읽기가 수십 수에 이른다. 수십 수를 내다보고 승부를 결정지으러 가면, 상대는 그 깊이에 말려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다. 설마 거기에서 수가 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조치훈과 임해봉의 대국 성적은 조치훈이 앞서지만, 그것은 조치훈이 전성기를 맞았을 때 임해봉은 이미 연령적으로 전성기가 어느 정도 지난 뒤였기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연령이 비슷해서 같이 전성기에 부딪혔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일본 바둑계에는 타이틀전 결승에서 3연패 뒤 4연승이라는 기록을 남겨 끈기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기사가 딱 두 명 있다. 그 둘이 임해봉과 조치훈인데 다른 기사는 평생에 한 번도 못할 일을 임해봉은 두 번, 조치훈은 세 번을 보여준다. 그런데 임해봉의 두번째 기록이 바로 조치훈을 상대로 한 것이다.
사마의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에게 끊임없이 당한다. 그러나 위의 국력이 흔들릴 정도의 결정적인 타격은 절대 입지 않는다. 기본 국력에서 위가 촉을 앞선다는 것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전략을 짜는 것이다. 져도 결정적 타격을 입지 않는 선까지만 싸우고 그 선을 넘었다 싶으면 무조건 수비 전략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면 촉의 본국에 첩자를 풀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촉의 조정을 이간질해서 제갈량에게 가는 지원을 끊어놓는다.
제갈량이 후퇴할 때 사마의의 추적에 당할 방법이 없으니, 성을 비우고 망루에 올라가 칠현금을 연주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서성 전투에서의 일이다. 사마의는 무언가 계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비군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주저하며 추격을 늦춘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당한 것인데, 사마의의 진가는 그 뒤에 나타난다. 결국 뒤늦게 성을 접수한 사마의가 주민을 불러 그 당시 성의 상황을 물어보고 진짜로 성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았구나’라며 화를 낼 것이다. ‘다시는 안 속겠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고, 조조와 주유가 제갈량에게 계속 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에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
‘과연 제갈량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심리전에 있어 자기보다 능하다는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촉은 조정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기본 국력에 있어서도 위가 더 강하다. 우리는 우리의 장점을 이용하면 될 일이지, 제갈량과의 머리싸움에서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마의는 공성지계에 몇 번을 속지만 그래도 끝까지 조심한다. 제갈량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어떠한 상황도 거부하지 않고, 상황은 상황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태음인의 희성(喜性)이다. 삼국지에서 그 희성(喜性)의 강점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마의다. 교심(驕心)이 억제된 태음인의 무서움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싸우면 제갈량이 이기는데, 사마의가 안 싸우고 이기는 방법을 택하니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버티는 방법으로 승자가 된다. 촉에만 이기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결국은 위의 왕권까지 손에 넣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세심하게 준비하고, 서두르지 않고, 작은 것은 내어주며 끈질기게 버텨서 이기는 태음적인 전략가의 대표가 바로 사마의다. 바둑 좋아하는 독자들은 임해봉의 바둑, 특히 사까다 에이오(坂田榮男)와 싸운 바둑의 기보를 놓아보면 사마의의 체취를 그대로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승부를 서두르지 않고 상대가 무너질 때까지 한 발 뒤에서 끈질기게 쫓아가는 임해봉의 바둑이 바로 사마의의 전술과 완전히 같은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마초, 위연, 마속, 강유, 영류왕(헌제), 동탁, 여포, 노숙, 장송, 맹획 등등 사상인의 특성과 박통(博通), 독행(獨行), 사심(邪心), 태행(怠行)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이 아주 많은데,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더 깊게 공부할 분을 위해서 다른 책을 하나 더 추천하도록 하자. 등장인물의 성격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는 소설로 좋은 것이 있다. 태양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태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소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부딪히는 『대망(大望)』이라는 소설이 공부할 만하다. 그런데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필자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책을 구할 수도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못하는 게 아쉽다. 어릴 때 읽은 기억 속의 내용만으로 보아도 체질에 따른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많은 소설인데, 혹시 구할 수 있으면 꼭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특히 조조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다. 귀족 출신과 천민 출신이라는 성장 환경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몇 가지 차이점은 분명히 있지만, 천성이 밝은 소양인, 재간(才幹)이 뛰어난 소양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하를 다루는 방식, 구사하는 전술 등을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다. 다만 조조는 제갈량이라는 당대의 천재를 상대해야 되었다는 점에서 운이 좀 나빴다.
삼국지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삼국지의 내용을 자세히 쓰고 필자의 해석을 덧붙였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분량상의 문제로 원본의 내용을 간략하게 해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지를 다시 한 번 읽고 다시 이 글을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왔지만, 각 단원이 설명하는 개별적인 부분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국지 부분에서는 각각의 인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전달하여 체질에 따른 종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필자의 의도대로 체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또, 혹시 필자의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있었더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실존 인물을 예로 들 때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앞의 내용들을 쓰면서 그런 조심스러움으로 억제되었던 반작용이 소설 속의 인물을 대상으로 마음껏 펼쳐진 것이라고 이해해주시기를.
그럼 마지막의 삼국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각자 알아서 챙기기 바란다. 마지막에 머리 식히는 의미로 붙인 글, 정확성보다는 재미에 더 치중한 글조차 교훈으로 끝을 맺을 만큼, 필자가 그렇게 운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마치 더 할 이야기가 남은 듯이, 약간 여운이 남는 듯이, 독자들 마음의 연못에 작은 돌을 하나 던진 기분으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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