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립된 사내 주(紂)를 죽이다
1b-8. 제선왕이 물어 말하였다: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하나라의 걸(桀) 임금을 추방하고,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紂) 임금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1b-8. 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맹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헌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孟子對曰: “於傳有之.” 말한다: “그런데 신하된 자로서 그의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曰: “臣弑其君可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일컫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일컫습니다. 잔적(殘賊)한 인간은 ‘한 또라이 새끼[一夫]’라고 일컫지 임금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왕이 한 또라이 새끼 주(紂)를 주살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으나,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나이다.”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
맹자시대에도 ‘나꼼수’는 있었다. 오늘날의 ‘나꼼수’는 방송을 타고 간접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맹자시대의 나꼼수는 왕의 면전에게 곧바로 이루어졌다. 피할 수 없는 직언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나꼼수가 신랄한 것 같지만 맹자의 나꼼수는 더욱 신랄하다. 오늘날의 나꼼수는 대통령이라도 인의(仁義)를 해치면 민중이 주살(誅殺)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꼼수 방송의 한 사람은 억울하게 영어(囹圄, 정봉주)의 몸이 되었다. 맹자가 나꼼수를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면전에서 묵묵히 듣고 앉아있는 제선왕 ‘가카’, 그 제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오늘날의 정치판도보다는 더 관용이 있는 것 같다. 대인들의 게임이다. 맹자는 이런 얘기를 통치자를 아끼는 ‘친구’의 입장에서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맹자가 왕의 고문으로서 가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채용하여 실행할 것. 둘째, 가슴속으로부터 존경심을 가지고 경청하며 예의를 차릴 것. 셋째, 자기 집단에 대한 접대ㆍ증여 등을 후하게 하고 의식주를 여유있게 보증할 것. 이 세 가지 조건이 어느 정도 관철되는 정도에 따라 진퇴거취를 선언하고, 세 조건이 모두 거부될 때에는 빈객 되기를 거부하고 그 나라를 떠난다.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맹자가 7년을 제나라에 머물렀다는 것은 제선왕의 인품이나,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우정이 그래도 깊이가 있었다는 행간의 분위기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맹자의 신념이었다.
그런데 과연 과거 제왕들이 이 『맹자』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물론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맹자』는 읽히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주희의 『사서집주』 이전에는 실제로 『맹자』의 존재성은 대륙에서도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희 이후의 군주 중에도 『맹자』를 혐오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음험하기로 유명했던 독재군주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었다. 주원장은 『맹자』를 읽고 군왕에 대한 불경을 괘씸하게 느낀 나머지, “요 간교한 놈!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내가 볼기를 치리라!”라고 말했으며, 맹자의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유곤손으로 하여금 『맹자절문(孟子節文)』이라는 책을 쓰게 하여 전제군주의 구미에 맞지 않는 부분은 전부 삭제케 했다. 나중에 유곤손이 과거의 부정사건에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유곤손(劉昆孫)이 『맹자절문』을 만든 업으로 저렇게 죽는다고 수군거리곤 했다.
일본만 해도 『맹자』는 금단의 책이었다. 일본의 통치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명나라의 사조제(謝肇淛, 1564~1642)가 쓴 『오잡조(五雜祖)」【천(天)ㆍ지(地)ㆍ인(人)ㆍ물(物)ㆍ사(事)에 대한 잡고】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왜놈[倭奴]들도 역시 유서(儒書)를 중히 여기고 불법(佛法)을 신(信)한다. 대저 중국의 경서(經書)란 책은 모조리 비싼 값으로 그것을 사들인다. 그런데 『맹자』는 사지 않는다. 들려오는 풍설에 의하면, 그 책을 휴대하고 돌아가는 배는 모조리 전복되어 침몰한다고 한다.’ 『맹자』를 싫어하는 지배계급의 논리가 이렇게 중국에서까지 신기하게 회자될 정도로 풍미했던 것이다. 이 침몰이야기는 칸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우월물어(雨月物語)』에도 실려있고, 청초의 시인 왕어양(王漁洋)의 수필, 『고부우정잡록(古夫于亭雜錄)』에도 나온다. 일본에서 『맹자』라는 서물이 배척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명나라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에도, 에도 중ㆍ후기의 고증학자인 후지이 사다모토(藤井貞幹, 1732~97)의 『호고목록(好古目錄)』에도 나오고 있다. 또 에도 중ㆍ후기의 란가쿠(蘭學) 학자인 카쯔라가와 츄우료오(桂川中良, 1754~1808)의 『계림만록(桂林漫錄)』에는, ‘『맹자』는 썩 훌륭한 책이지만 일본(日本)의 카미(神)의 미코코로(御意)에는 잘 맞지 않는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러한 정황은 일본 쇼오군 치세의 전제체제의 경직성과 『맹자』라는 서물의 과격성이 동시에 잘 부각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맹자』는 일본인의 입에 잘 오르락거리지 않는다. 이에 비한다면 조선은 『맹자』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막연하게 고려 후기에 송학(宋學), 즉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왔다고 알고 있으나 실상 그 충격적인 핵심은 『맹자』의 유입이었다. 우리는 예로부터 『맹자』라는 서물이 있었고, 고려말에 안향(安珦, 1243~1306)으로부터 비롯하여 그를 계승한 학자군에 의하여 중국경서에 관한 주자의 해석이 들어온 것처럼 착각하는데, 『맹자』의 경우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인류지성 사에 『맹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원효(元曉) 대사가 『논어(論語)』나 『시경』, 그리고 『노자』나 『장자(莊子)』는 충분히 숙독했지마는 『맹자』라는 것은 읽어본 적이 없다. 읽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도무지 맹자라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예를 들면 통일 신라시대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도 『맹자』라는 커리큘럼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맹자』의 가치를 처음으로 숙지한 사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였다. 그리고 포은은 이 충격적인 신 문헌, 『맹자』를 약간 후배인 친구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에게 보낸다. 삼봉은 21세(공민왕 1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왕의 비서직에까지 이르렀는데 25세 때에 부친상ㆍ모친상을 함께 당하여 고향인 영주(榮州)에 내려가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伊山面) 신암리에 가면 삼봉의 부모를 합장한 묘소가 있고 그가 3년간 시묘살이를 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 동네의 고졸한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친구로부터 서적이 도착했다. 펼쳐보니 『맹자』였다.
이미 진사시를 합격한 그는 『맹자』라는 신천지를 자유롭게 헤맬 수 있는 한문실력이 있었다. 몇 줄 읽어보았을 때 이미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제선왕과의 대화에 당도했을 때, 그의 가슴은 혁명의 꿈으로 메어터질 듯, 그 벅찬 신진사류 젊은 날의 개혁의지를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삼봉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친구 포은이 보내 준 책을 읽은 지 며칠 내에 발견했을 것이다. 고려는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 대형교회보다 더 큰 불교 사찰의 농간에 썩었고, 미제국주의보다 더 오래되고 강력한 원나라 식민지 타성으로 썩어 문드러졌고, 식민지체제에 빌붙어 착취만을 일삼는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의하여 국민들의 민생은 처참하게 황폐화되었다. 도대체 이 젊은 나 삼봉! 너 그대 혁명을 안 일으키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트로츠키는 혁명을 광적 영감(mad inspiration)이라고 했다. 신암리의 고즈넉한 산하 그 전체가 광적 영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말한다: 신암리에서 삼봉과 맹자가 만난 사건이 이미 조선왕조의 탄생을 숙명 지었다! 이론적 무장이 없는 정치혁명은 성공하지 않는다. 삼봉은 성공한 혁명가이다. 맑스의 혁명은 불과 1세기만에 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삼봉의 혁명은 5백 년을 갔다. 삼봉은 맑스의 냉정과 레닌의 열정을 한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한계나 역사정칙주의(歷史定則主義, historicism)의 빈곤을 초월하는 따사로운 맹학(孟學)의 민사상의 인간론이 그의 혁명론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었다. 혁명이야말로 참다운 사람의 길이었다.
삼봉 정도전은 3년 동안 하루에 한 장 또는 반 장씩 정독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두 남동생 도존(道存)과 도복(道復), 그리고 지역의 자제들과 집회를 만들어 강학 세미나를 했다. 자세한 의론은 회피하겠으나, 정도전이 구상한 조선왕조는 왕권보다 신권이 강화된 재상중심제(宰相中心制)의 국가였다. 이것은 맹자의 혁명정신을 철저히 구현키 위함이었다. 물론 이것은 혁명 초기에 절대적 왕권을 확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원(芳遠)의 구상과는 대치되는 발상이었다. 결국 정도전은 정안군(靖安君, 방원)에게 참살 당하고 만다. 그가 방원의 칼을 맞은 장소가 지금은 높은 빌딩이 들어서있는 옛 한국일보 자리, 바로 그곳 어디이다. 최근에 인기를 모은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세종의 한글반포의 갈등을 드라마타이즈하기 위하여 ‘밀본(密本)’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그것을 정도전과 관련지었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그것이 전혀 허구적 장치라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크게 보자면 오히려 정도전의 구상을 방원은 수용하였고, 정적은 무 참히 제거했으나 왕권을 제약하는 제도적 골격은 남겨두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귀족정치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다양한 장치들이 활성화 되었다. 사림의 등장도 『맹자』라는 민본사상의 존중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의 정맥이 모두 『맹자』를 골격으로 한 것이다. 정암의 지치주의의 순결성, 그러니까 그의 정치적 좌절은 그의 이념을 도덕적으로 순선(純善) 인간의 표상으로 이상화시켰고, 이러한 이상주의를 계승한 것이 바로 퇴계(退溪)의 리(理)의 능동적 자발성을 인정하는 특이한 성리학적체계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ㆍ칠정논쟁이 결국 맹학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논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 철학적 우주론(cosmology)을 심성론적 구조로서 심화시킨 이들의 논쟁은 결국 맹자가 말하는 ‘성선(性善)’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인간의 마음정서 속에서 확보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한말에 태동한 동학(東學) 역시 맹자의 혁명사상이 없이는, 맹자의 호연지기론이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사상이다. 그리고 20세기를 줄기차게 추동하며 진행된 신학문 학생들의 항거와 봉기, 혁명의 역사는 인류사상 유례가 없는 활력의 표출이며, 이 활력은 맹자의 민본사상을 고려치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재확인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나꼼수현상도 조선민중에게 축적된 맹자의 깡다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ㆍ중ㆍ일 동방삼국 중에서도 『맹자』가 이렇게 존숭된 나라는 없다. 조선의 왕들은 예외 없이 동궁시절부터 서연(書筵)을 통해 사부로부터 『맹자』의 세뇌를 받았고, 또 홍문관 학사들과 경연을 벌이면서 항상 『맹자』를 토론했다. 일반 촌부의 집까지 『맹자』는 가장 흔한 책 중의 하나였다. 조선은 『맹자』의 나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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