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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30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30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22.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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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문명창시자의 특징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중니는, 요님금과 순임금을 조술(祖述)하셨고, 문왕과 무왕을 헌장(憲章)하셨다. 위로는 천시(天時)를 따르시고, 아래로는 수토(水土)를 습()하셨다.
 
祖述者, 遠宗其道. 憲章者, 近守其法. 律天時者, 法其自然之運. 襲水土者, 因其一定之理, 皆兼內外該本末而言也.
조술(祖述)이라는 것은 멀리는 그 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헌장(憲章)이라는 것은 가까이는 그 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율천시(律天時)라는 것은 그 자연의 운행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습수토(襲水土)라는 것은 일정한 이치를 따랐다는 것이니, 모두 내외를 겸하고 본말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중니 조술요순 헌장문무(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이번 장의 주자주(朱子註)를 보면 조술이라는 것은 먼 곳에서 그 도를 따르는 것이요, 헌장이라는 것은 가까운 데서 그 법을 지키는 것[祖述者, 遠從其道. 憲章者, 近守其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술(祖述)은 시간적으로 좀 멀리 있는 것이 되고 헌장(憲章)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됩니다.

 

공영달의 예기정의(禮記正義)를 보면, ()이라는 것은 법(), 즉 본받는다는 의미로 되어있고, ()이라는 것은 명() 밝게 한다’, 혹은 밝힌다는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헌장(憲章)이라는 것은 본받아서 밝힌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문무(文武)라고 것은, (()과 댓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단순히 일반적 개념의 문()과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을 조술하고 문(()를 헌장 했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이 중용(中庸)의 저자에게는 이미 공자(孔子)라는 사람이 중국 역사에 있어서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주자(朱子)가 말하듯이 도통(道統)적인 관념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율천시 하습수토(上律天時, 下習水土)’

그런데 이 문장 안에 상율천시 하습수토(上律天時, 下習水土)’라는 구가 나오는데 이것은 두 번째 강의에서 말했듯이 텍스트 비평에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말에는 이미 천지론(天地論)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천지지무불지재 무불복주(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幬).’라는 말도 나오고 있고, 다음 약간 앞질러 31을 보면, ‘범유혈기자 막불존친(凡有血氣者, 莫不尊親).’구에 혈기(血氣)’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보면 확실히 이 문장 안에는 이미 천지(天地)론적 세계관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공자(孔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한다면 넌센스라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후대에서 천지론(天地論)화 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시(天時)라는 것은 하늘의 시(), 즉 율령(律令)이나 월령(月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달에는 단오절이 어떤 달에는 추석이 있고 하는 그 월령(月令)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칼렌다 시스템을 뜻하는 것인데, 천시(天時)는 월령(月令)적 세계관, 소위 말해서 천체의 운행에서 오는 계절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토(水土)라는 것은 수(), 즉 물의 세계와 토(), 즉 땅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 바로 다음에 천()은 덮는 것이고, ()는 싣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天地之無不持載]. 그리고 여기 수토(水土)라는 개념에 벌써 혈()의 관념이 들어가 있는 것인데, 31장의 혈기(血氣)’에도 하늘은 기()고 땅은 혈()이라는 천지론(天地論)적 세계관이 들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혈기를 가진 것들은 서로 존경하고 친하지 않음이 없으니 고로 하늘을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凡有血氣者莫不尊親故曰配天].’이라는 말을 볼 때 이미 이 중용(中庸)의 저자는 인체를 볼 적에도, 생명을 볼 적에도 모두 혈기(血氣)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中庸)의 저자는 혈기론(血氣論)적 세계관과 천지론(天地論)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웍(framework) 속에서 공자(孔子)의 사상을 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니 조술요순 헌장문무 상율천시 하습수토(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習水土).’라는 말이 사실 공자(孔子)의 사상을 요약하는 말로서는 넌센스라는 것입니다. 논어(論語)에는 이러한 공자(孔子)가 없습니다. 즉 이것은 한대의 천지론(天地論)적 세계관 속에서 공자(孔子)를 보는 어떠한 틀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문헌비평의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幬;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
이것을 비유한다면 하늘과 땅이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고, 덮지 아니함이 없다. 비유컨대 사시(四時)가 교대하여 운행하니 해와 달이 교대하면서 밝음과 같다.
 
, 猶迭也, 此言聖人之德.
()는 질()과 같으니, 여기선 성인의 덕을 말했다.

 

여기 이 문장에 나오는 착()이라는 것은, 바로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인데, 중용(中庸)이 주역(周易)적 세계관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입니다. ‘사시지착(四時之錯)’이라는 말은, 사시가 교대하면서 운행한다는 의미인데, 주자(朱子)는 이것을 성인(聖人)의 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此言 聖人之德也].

 

 

 

 

 

 

302. 중용의 이상국가론

 

 

萬物, 竝育而不相害; , 竝行而不相悖. 小德, 川流; 大德, 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만물(萬物)이 같이 자라면서, 서로 해치지 않고, 도가 같이 가면서 서로 어그러짐이 없다. 작은 덕은 물의 흐름과 같고 큰 덕은 돈독한 변화 같으니 이것이 천지가 크게 된 까닭이다.
, 猶背也. 天覆地載, 萬物, 並育於其間而不相害; 四時日月, 錯行代明而不相悖. 所以不害不悖者, 小德之川流; 所以並育並行者, 大德之敦化, 小德者, 全體之分; 大德者, 萬殊之本. 川流者, 如川之流, 脈絡分明而往不息也; 敦化者, 敦厚其化, 根本盛大而出無窮也. 此言天地之道, 以見上文取譬之意也.
()는 배반하다란 뜻이다. 하늘은 덮고 땅은 실어줘 만물이 아울러 그 사이에서 길러져 서로 손상시키지 않으며, 사시와 해와 달은 번갈아 운행하고 교대하며 밝아져 서로 어그러뜨리지 않는다. 손상시키지 않고 어그러뜨리지 않는 것은 작은 덕이 시내의 흐름이고, 아울러 길러 아울러 운행하는 것은 큰 덕이 조화롭게 두터워지는 것이니, 작은 덕은 전체의 나누어짐이고, 큰 덕은 만물의 다름이 하나의 근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시내의 흐름이라는 것은 냇물의 흐름과 같아 맥락이 분명하여 흘러감이 쉬지 않는 것이고, 조화가 두터움이라는 것은 그 조화가 돈후하여 근본이 성대하여져 나감이 무궁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의 도를 말하여 윗 문장의 비유를 취한 뜻을 보인 것이다.
 
右第三十章, 言天道也.
여기까지는 제 33장이니, 천도를 말했다.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이 구절이 참으로 멋있고 또 유명한 말입니다. 이것은 중용(中庸)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프레이즈(phrase)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천지(天地)의 세계관이 들어 있죠. 앞의 문장에서의 천시(天時)는 사실 시간적인 것이고 수토(水土)는 공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천()이라는 것은 기()로 운행되는 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라는 것은 혈()로 운행되는, 즉 피로 운행되는 백()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러한 천시(天時)와 수토(水土),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이 세계가 배합되어서 나오는 것, 다시 말해서 덮는 하늘과 싣는 땅이 교합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여기 이 문장의 만물(萬物)입니다. 천지(天地)의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그 무궁한 생성을 우리는 만물(萬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물론 만물(萬物)에서 최령자(最靈者)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만물(萬物)이라는 것은 또 이 중용(中庸)이 그리는 이상적 그림이기도 합니다. 중용(中庸)에서는 이 만물(萬物)’이라는 것이, ‘제각기 서로 자라나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는다[竝育而不相害].’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디밭을 한번 보세요! 잔디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자라나는 것을 보면, 제 나름대로 잘 자라나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습니다. 물론 좀 긴 놈도 있고 짧은 놈도 있기도 해서 긴 놈이 영양분을 더 많이 빨아서 빨리 자라기도 하겠죠. 하지만 이것들이 자라나면서 이 새끼 넌 작으니까 자라나지 마! 하면서 해치거나 다치게 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아주 절묘하고, 이상적인 그림인 것입니다. 나는 사실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竝育而不相害)’ 이 말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대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또 눈물을 흘렸어요.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竝育而不相害)’ 이 구절은 정말 나에게는 굉장히 쇼킹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 정말 인간 세상이 이렇게 될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이 문장에서 다음과 같은 반어적인 의미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세계에서 풀들이 서로 잘 자라고, 나무가 또 다 제각기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서로 해치지 않는다고 표현한 바로 중용(中庸)의 이 말에서.

 

! 우리 인간은~ 얼마나, 이 인간은, 문명이라는 죄업을 짓고 살아가는 이 인간들은 얼마나 서로 싸우고, 해치고, 죽이고 있는가! 인간들은 같이 자라면서도 그저 서로 억누르려고 하고, 끌어 땡길려고 하고, 시기하고, 벼라별 드러운 일들을 하고 있는가! 그 안타까움과 그 절묘한 콘트라스트(contrast)에 북받쳐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잔디밭 하나를 보더라도 자연의 세계는 이 얼마나 위대한가! 평화롭고 제각기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라나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중용(中庸)의 저자는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竝育而不相害)’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인간세의 현실을 볼 때 너무나도 이상적인, 너무나도 이상적인 그림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중용(中庸)은 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길들은, 그 갖가지 길들은 같이 가지만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道竝行而不相悖]!” 달은 달대로 돌고 지구는 지구대로 돌고 있지 않은가? 하늘의 별을 보라! 그 엄청난 별들이 다 길이 있어서 충돌을 하지 않고 운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또 얼마나 절묘한 그림인가! 물론 가끔 공룡이 멸망할 정도로 충돌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웃음) 만물(萬物)은 서로 같이 자라면서도 해치지 않는다! 길은 같이 가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노자(老子)가 말하는 자연(自然)의 세계입니다. 중용(中庸)에서 표현하는 이것을 노자(老子)자연(自然)’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도가(道家)는 자연주의로 가는 것이죠.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이 한마디가 바로 중용(中庸)이 그리는 이상향이요, 이상국가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나 이것은 정말 너무도, 너무나도 목가적인 그림입니다. 자연은 바로 이러한 세계인데, 인간의 사회도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큰 놈은 큰 놈대로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서로 해치지 않고 다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이야기할 때 창의성 운운하는데 그것이 다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서로 눌리지 않고 서로 다 같이 자라나면서도, 또 자기 나름대로 자기주장(claim)을 할 수 있는, 생명으로서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이상 교육론 아닌가요?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竝育而不相害)’ 이 말을 능가하는 이상교육론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병행이불상패(道竝行而不相悖)!’ 모든 각자의 길들이 엄연히 있는데 서로 어긋나고, 충돌되는 데서 자꾸만 이권이 생기고, 그래서 또 쌈박질을 하게 됩니다. “~ 이 새끼야 내 길 가는데 네 길은 죽어야 되 비켜~ , 이 작은 골목길은 폐쇄해버려.” 하면서 서로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길들이 서로 삐까닥 삐까닥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데가 바로 우리 인간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세계, 천지(天地) 같은 세계, 이것이 중용(中庸)이 말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303. 대덕자를 대덕자답게, 소덕자를 소덕자답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작은 덕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듯이 졸졸 흐른다[川流]! 이 골 저 골 흐르는 물들이 다 제각기 제 산수에서, 제 환경에서, 제 모습을 가지고 흐르는 그 모습을 상상하세요. 얼마나 서로 해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잘 흐르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흐름들은 계속 그렇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물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덕(大德)은 모든 것을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 대덕(大德)은 이 소덕(小德)들이 모여서 흐르는 바다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덕(大德)이 가져야 할 것은 천류(川流)가 아니라 바로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는 돈화(敦化)라는 것입니다. 한강에 가서 물을 한바가지 떠서는 야~ 이거는 양수리에서 온 물이구나, 음 이것은 남한강에서 왔군! 하고 알 수 있습니까? 그냥 한강물일 뿐이죠. 돈화(敦化)라는 말은 이렇듯 큰물에서는 다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류(川流)들은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식으로 흐르고 대덕(大德)은 그것들을 돈화(敦化)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 사회에는 이러한 대덕(大德)과 소덕(小德)이라는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러한 대덕(大德)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범인들은 천류(川流), 즉 자기 흐름을 따라서 자기 개울을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원성이 유교(儒敎) 문명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이러한 것이 사회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덕(大德)을 가진 자들은 대덕(大德)을 가진 자답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하고 소덕(小德)을 가진 사람을 소덕(小德)을 가진 자로서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그것이 없이 서로 혼돈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대덕자(大德者)는 대덕자(大德者)로서 우리가 존중해 줘야 합니다.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얼마 전에 한 단체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은, 고등학교를 떨어져 마음 상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에게 모 소설가와 대담하면서 그 학생들을 위로하는 좋은 말씀을 해주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의도가 나쁘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분명히 위로를 받아야 하고 그 행사도 참 좋은 행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꼭 나를 불러야만 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적합한 다른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겠어요?

 

얼마 전 오오에 켄자부로(大江 健三郎, おおえ けんざぶろう, 1935~)가 왔을 때 신문사에서 무슨 대담을 주선한다기에 나에게도 초청장 하나는 날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분과 안면도 있고, 또 상당히 존경하는 분이기에 초청을 해준다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위대한 대담을 한번 하고 싶었는데, 웬걸 초청장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나를 안 부르고 뭐 고등학교 입시 떨어진 학생들에게 위로하는 자리에 나오라니,

 

정말 우리 사회의 사람 보는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체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할 줄을 모르는 사회예요. 사실 이제는 그런 데 대해 원한도 없습니다. 이제는 평범하게 소리 없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러한 나의 설움을 단순하게 개인적 감정의 일단일 뿐이라고 지나치기보다는 조선 문명의 새로운 축을 모색할 때 무얼 고민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심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하고, 소덕자를 소덕자로서 또 존중하는 그러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이 30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이 말은 소덕(小德)의 천류(川流)가 있고, 대덕(大德)의 돈화(敦化)가 공존해야만 천지(天地)가 천지(天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지(天地)에는 작은 법칙이 있는가 하면 또 큰 법칙이 있는 거예요. 생물의 법칙을 지배하는 DNA가 세포마다 있는가 하면 또 가이아처럼 거대한 운행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소위 천지(天地)가 위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를 살펴보고 이 30장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주자(朱子)서로 해치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는 것은 소덕지 천지(小德之 川流)’고 그것을 그렇게 하게끔 병육. 병행 시키는 것을 대덕지 돈화(大德之 敦化)’라 한다[所以不害不悖者, 小德之川流; 所以幷育幷行者, 大德之敦化].”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이기(理氣)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해석입니다. 주자(朱子)는 계속 말하기를 소덕자는 전체를 나누어 가진 것이요, 대덕자는 만 가지가 다를 수 있는 근본이다. 천류(川流)라는 것은 그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요, 자기가 걸어가는 그 골짜기마다의 그 맥락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면서 쉼이 없는 것이다. 돈화자(敦化者)는 그 모든 것을 조화해서 교화시키는 것을 돈독히 하며 근본이 성대해서 그 산출함에 끝이 없다. 이것은 천지(天地)의 도()를 말씀하여 윗 문장辟如天地之 無不持載 無不覆幬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에서 비유를 취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小德者全體之分, 大德者萬殊之本. 川流者, 如川之流脈絡分明而往不息也; 敦化者, 敦厚其化根本盛大而出無窮也. 此言天地之道以見上文取譬之意也].” 주자(朱子)는 이것을 이렇듯 이기론(理氣論)적으로 풀었습니다.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라는 말은 아마도 중용(中庸)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문장이고, 나는 평생 이것을 이상으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노자(老子), 즉 도가(道家)자연(自然)’이라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중용(中庸)의 부분이라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30장도 상당히 중요한 장입니다.

 

21
핵심
내용
천도
(天道)
22 24 26     30 31 32 33
전편
요약
인도
(人道)
23 25 27 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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