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1. 200만년에 걸친 두개골의 진화
중용(中庸)의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이 갑골문과 관련해서 배경으로 알아두어야 할 인간과 문명에 대한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몇 마디 하겠습니다.
프랑스 남부 동굴에서 선사시대 벽화 발견
얼마 전 타임지에서 프랑스 남부의 동굴에서 선사시대의 인간이 그렸다고 추정되는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났었는데 혹시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쇼베(Chauvet)라는 사람이 발견했는데, 그 사람이 우연히 돌무더기를 하나 보았는데, 그곳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뻘건 줄이 2개 그어져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계속 들어가 보니까 그 속은 거대한 동굴이었고 그 안에 엄청난 벽화가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인용 보도 했었는데, 타임지에 실린 그 선명한 사진을 보니까 느껴지는 파워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심미적 수준이라는 것이 형태적인 면에서나 파워에 있어서나 고구려 벽화는 저리 가라예요.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런 동굴들은 스페인 쪽에 많고 프랑스 쪽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번 것이 특히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런 동굴 벽화의 연대는 대개 2만 년 전쯤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개 현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은 3만 년 전으로 봅니다만,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은 상한선을 최고로 잡아도 대개 1만년이나 1만 2천년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실질적 문명이라는 것은 5천년 정도이고 중국은 3천년 정도에 불과해요. 사실 이 1만 2천년이라는 것은 생물의 역사와 비교 한다면 정말 새발의 피 밖에 안 되는 것이고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최근의 사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화할수록 눈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다
발굴되는 두개골(skull) 중에서 우리와 비슷한 것은 대개 40만년전의 것이고, 인간의 조상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상한선을 200만년으로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인데 사실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아프리카 남부에서 발견된 것인데, 오스트레일리아인이 발견해서 약삭빠르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죠. 사실 ‘austro~’ 라는 접두어는 남쪽을 뜻하는데, 이름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비슷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부터 따진다면, 1만 2천 년 전이라는 문명의 발생 시점 거의 전까지는 즉 거의 200만년 동안은 실질적인 문명은 없었다는 말이 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입네하고 폼을 잡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까지의 진화라는 것은 생물의 진화상으로 볼 때 좌우지간 눈부신 것입니다. 어떤 동물의 두개골도 200만년 동안 인간의 경우처럼 이렇게 빠르게 변화되지 못했거든요.
두개골 눈 사이의 거리
그런데 왜 해골이 문제가 되냐 하면, 간을 비롯한 내장들은 전부 썩어서 없어지고 남지 않지만 두개골의 경우는 매우 단단해서 오늘날까지도 보존이 되고 이 두개골에서 중요한 단서들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개골에서 중점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왼쪽에 그려진 것 같은 안구가 박혀있던 구멍 사이의 거리(orbit)입니다. 옛날 동물들일수록 눈 사이가 양쪽으로 벌어져 있는데, 이것은 시야를 넓게 해서 보다 여러 방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합니다. 두꺼비의 경우를 보세요, 눈 사이가 굉장히 넓죠? 그러나 인간은 직립이 되고 진화가 거듭될 수록 이 눈 사이의 거리가 좁아집니다. 그러므로 눈 사이 거리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진화한 놈인지 대강 알 수 있어요. 아무튼 인간의 경우 진화할수록 눈 사이가 좁아지는데, 좁아질수록 원근 감각도 생기고 사물을 좀 더 입체적으로(stereoscopic view)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문명에 필요한 정확한 관찰이 가능하도록 몸의 조건이 변화된 것이죠.
28장 2. 직립과 육식, 그리고 문명
귀와 콧구멍이 두 개인 이유
말이 나온 김에 인체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귀가 왜 두 개인지 아십니까? 하나만 있어도 상관이 없는 건 아닐까요? 귀는 아무 이유도 없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은 반드시 진원이 있습니다. 음파는 윗 사진과 같이 전파되는데, 그러므로 양쪽 귀의 고막에 음파가 닫는 시간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이 시간의 차이(difference)가 바로 소리의 진원을 알게 하는 거예요. 음파가 양쪽 고막에 닫는 작은 시간차를 이용해 뇌가 그 방향을 계산하는 것이죠. 인체는 정말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 같습니다.
콧구멍은 왜 두 개이겠습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면 결국 하나로 되는데, 왜 밖에는 두 개로 뚫려 있을까요? 하나로 그냥 뻥 뚫려 있지 왜 두 개로 돼 있어 가지고 축농증도 생기고 고생을 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이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갈 때 외계의 온도(temperature)와 습도(moist)는 체내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공기가 일상적으로 가장 빠르고 많이 통과하는 통로가 바로 이 콧구멍입니다. 이렇게 공기가 왔다 갔다 할 때, 들어오는 공기를 체내의 온도와 습도로 맞춰야 합니다. 즉 체온에 비해서 뜨거운 공기는 식혀 넣고, 차가운 공기는 덥혀서 넣고, 건조한 공기는 습하게 하고, 습한 공기는 건조하게 해서 체내로 집어넣어야 하는데, 이 짧은 콧구멍이 바로 이러한 라지에이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매우 짧은 시간, 짧은 거리에 모든 외계의 공기의 상태를 36도로 조절하고 습도를 체내와 맞추는 엄청난 장치가 바로 이 콧구멍인 거예요. 그래서 공기와 접촉하는 면적을 최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콧구멍이 두 개가 된 것이고, 엄청난 모세 혈관이 여기에 모여서 점액을 분비합니다. 왜 코피가 잘 터지냐 하면 엄청난 라지에이터 역할을 하기 위해 모세 혈관이 최대한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 하나만 해도 정말 신비로운 것이 한이 없습니다. 냄새를 맡을 때 후각 신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전부 위쪽에 분포합니다. 우리가 냄새 맡을 때는 공기를 위로 보내고 내 쉴 땐 아래쪽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전부 정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한번 자세히 알아보세요. 해부학을 공부하면 인체의 이 기막히게 정교한 디자인과 진화에 경탄을 하면서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직립과 함께 육식생활로 바뀌다
그런데 눈 사이의 거리뿐만 아니라 두개골에서 관찰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빨입니다. 해골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또 이빨인데, 그 이빨의 상태가 진화의 상태를 알 수 있게 하거든요. 송곳니나 어금니의 위치를 보면 육식이냐 초식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개골의 이빨을 관찰해보면 초식이던 인간이 어느 시점부터 육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립과 더불어서 인간에게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식생활의 변화인데, 이 식생활의 최대 변화가 바로 육식을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원숭이는 잡식성이지만 본래 초식(herbivore)이었습니다. 그 사나워 보이는 고릴라도 완전히 초식입니다. 그런데 원숭이에서 진화한 인간은 직립을 하게 되고 손이 땅으로부터 해방되어 도구를 쓰게 되면서, 불을 발견하게 되고 육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육식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주대토(守株待兎)’에 나오는 토끼새끼같이 동물들이 나 잡수슈하고 자발적으로 머리 쳐 박고 죽어 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먹어야 할 놈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헌팅, 즉 사냥이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수렵문화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육식과 인간의 문명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 헌팅이 중요하냐 하면 육식을 하게 되면 단백질(protein)을 섭취하게 되고 그것은 열량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자주 먹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먹는 데 소비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로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식 동물들을 보세요, 이놈들은 하루 종일 쳐먹습니다. 예를 들어 소를 보면, 이놈은 먹었다가 다시 되새기고 하면서 하루 종일 쳐먹잖아요. 다시 말해서 고기의 농축된 고단백질(condensed high protein) 때문에 인간의 문명이 가능케 됐다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문명을 창조한 이유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좀 이상합니다. 호랑이나 사자같은 놈도 육식인데 그놈들은 왜 문명을 창조하지 못했습니까? 설명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매우 유치한 질문인 듯하지만 바로 이 질문에 답하면서 ‘왜 인간만이 문명을 창조하게 되었는가?’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도록 합시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고양이과(cat) 동물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헌팅에 적합합니다.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동물의 왕국 같은 것을 보면, 그들도 얼렁뚱땅 사냥을 하는 것은 아니고 엄청난 계략이 필요하고 또 어려움을 겪지만, 그래도 그들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원래 초식 동물이었던 원숭이에서 진화한 인간은 매우 약해요. 인간은 신체구조상 본래 사냥에 적합한 동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강한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생각! 이 생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매우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혼자만으론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루핑(Grouping)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식을 위해서는 헌팅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 허약한 인간이 헌팅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작전이 필요했고, 바로 이 헌팅을 위한 ‘작전’에서 인류의 사고(思考)라는 것이 최초로 싹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헌팅에서 인간의 사회가 출발했으며 여기서 인류 최초의 문화 형태인 수렵문화가 성립하고 발달했다는 말입니다. 지난번에, 김금화의 굿을 예로 들면서, 굿을 할 때 제사상에 늘 오르는 돼지머리가 바로 돼지 잡는 수렵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죠?
28장 3. 동굴벽화를 그린 이유
이렇게 발생한 인류의 ‘수렵문화’는 약 1만 2천년, 대개 문명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1만 2천년전에 인간에게 있어서 ‘수렵문화’도 끝나고 실질적인 문명이라는 것도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1만 2천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빙하기가 끝나자 인류에게 농경(agriculture)이라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와 더불어 ‘수렵문화’는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굴벽화에 남은 그들의 역사
그러나 빙하기가 풀리기 이전에는 전부 헌팅을 해서 살아야했던 것이죠. 그런데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 인류의 이 ‘수렵문화’는 ‘선사(先史)’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문자의 기록으로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수렵문화는 이백만 년의 엄청난 역사를 가진 것이고, 인류의 역사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문자의 기록으로는 남지 않았지만, 이 시기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료가 지금까지도 몇 가지 남아 있어요.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앞에서 언급하였던 동굴벽화들인 것입니다. 빙하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생존했던 순록이나 들소를 헌팅해서 살았던 것이고, 그것들을 동굴 벽에다 그림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벽화들이 그려진 시기는 대개 2만 년 전인데, 이것은 거의 문명 발생 직전에 해당합니다. 빙하기의 인류들은 헌팅 마지막 단계의 문화를 동굴 속에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죠.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정리한다면, 농경문화 이전에 엄청난 수렵문화가 있었으며 이들에게도 처절한 인간의 생존의 역사(survival record)가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찬란하게 개화된 마지막 증표가 바로 앞에서 말했던 동굴 벽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그 문명의 문화 수준을 대강 알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울주 암각화가 있는데, 이런 것도 전부 수렵문화의 소산입니다.
생존을 위한 사냥
그런데 이 정도의 설명으로 만족하신다면 그것은 참 실망입니다. 이상의 설명들은 빙하기의 인류가 동굴벽화를 그린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컴컴하고 으스스한 동굴 속에, 왜 그런 총천연색 그림(full color painting)을 남겼을까? 그들 중에 화가 지망생이라도 있었던가? 사냥하니깐 단백질을 하도 많이 쳐먹어서 배도 부르고, 그냥 시간도 남으니, 할 일도 없는 마당에 우리가 늘상 먹는 들소나 장난삼아 한번 그리자 하는 의도에서였을까?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단순히 넘기지 말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빙하기 인간들의 유일한 주거 형태는 혈거(穴居, 동굴)주거였습니다.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들판에서 그냥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따로 집을 지을 필요가 없는 동굴이 제일 편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에스키모의 ‘이글루’니 하는 것은 훨씬 나중에 발생한 주거 형태예요. 그런데 동굴 속은 정말 깜깜합니다. 인간이 불을 발명한 것이 정말 획기적인 일인데, 동굴 벽화를 그릴 때도 이미 불은 있었습니다.
동굴 벽화가 있는 그 동굴, 그 깜깜한 데 들어가, 딱 서서, 횃불을 촤악 키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신비롭게 밝아지는 그 동굴과 더불어 어마어마하게 질주하는 들소들의 그 약동하는 모습들이 총천연색으로 눈앞에 쫘악 펼쳐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 나를 압도하는 듯이 강력한 느낌으로 다가서는 들소들의 그 강력한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바로 여기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위대한 상상력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파워풀하고 신비적인 모습을 상상하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하도록 합시다.
이 빙하기 고대인들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바로 동물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좀 먹을 만한 놈들은 자기보다 훨씬 크고 힘도 셉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헌팅을 한다는 것, 이 동물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처음에는 좀 만만한 작은 것을 잡았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효율성이 떨어지니깐, 점점 더 큰 놈을 노리게 되었겠죠. 큰 놈을 잡으면 빙하기라 썩지 않아서 오래 먹을 수 있으므로 여러 번 사냥하는 수고를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보다 정교한 공동 작업이 필요하게 됩니다. 오래 먹을 수 있게 이왕이면 큰 놈을 잡자! 이런 목적에서 그들은 그룹을 형성하고 살다가 가장 편한 동굴에 모여서 같이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헌팅을 지금의 헌팅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빙하기에는 생물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지구는 정말 생물로 만원인 거예요. 빙하기 당시 지구의 생태계에는, 200만 인구를 먹일 정도의 식량(food)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헌팅은 정말 절망적인(desperate) 것이었고 또 엄청난 재수(chance)였던 거예요. 그러므로 이 빙하기의 사람들은 사냥감을 찾아서 엄청난 이동(migration)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헌팅이라는 것은 아무 때나 안 되는 것이고, 이 챈스를 찾아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이동을 그들은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어디나, 중국 북경 어디든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면서 그 챈스를 찾고 또 찾아 헤매면서 헌팅을 했던 거예요. 그들에게 있어서 헌팅은 무서운 일이기도 했고, 엄청난 재수였던 것이고,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8장 4. 수렵문화의 총체인 갑골문
미래를 위한 계획, 인류 문명의 탄생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찾아 헤매면서 이루어지는 이 헌팅의 과정에서, 눈이 빠지게 찾던 그 사냥감이, 바로 그 들소가, 그 무서운 들소가 눈앞에 터억 나타났을 때,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느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놈을 기발한 작전으로 탁 때려잡았을 때!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느낌은 어떻겠어요?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자기들이 애타게 찾던 그 들소! 그 무서운 들소를 잡던 바로 그 순간의 어마어마한 느낌! 그들은 바로 그 응축된 느낌을 동굴의 벽에다 풀컬러로 재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깜깜한 동굴 속에서 불을 켜고 만 가지 느낌으로 그 들소들을 바라보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을 거예요. 야~ 다시 저놈하고 만날 때는 이렇게 해야겠다! 다음에 저놈을 다시 만나면 이런 작전으로 짜식을 이렇게 공격해야지! 쇼베 동굴에서 보이는 그 엄청난 무리의 들소들! 그 엄청난 파워! 그런 놈들이 나에게 질주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에는 물론 종교적인 의식(ritual)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이시여~ 저런 놈들을 한번 만나게 해다오, 저놈들을 잡을 때 나를 보살펴다오, 그리고 내가 실수해서 죽더라도 나를 편안한 곳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고 사냥감들이여 나를 원망 말라~. 아무튼 그 동굴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게 전개된 것입니다. 온갖 미래를 위한 계획, 바로 거기서 인류의 문명은 탄생한 겁니다. 동굴 벽화를 그린 주인공들은 그 벽화를 보면서 “나는 과연 거기서,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고 바로 거기서 인류의 문명은 탄생했던 것입니다.
나는 타임지에 실린 그 벽화의 사진을 보면서 정말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야! 짜식들이 그 엄청난 벽화를 그리면서, 또 그것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또 무슨 상상을 했을까? 여러분들도 신문에 나온 것을 그냥 보고 넘어가는 바보가 되지 마세요! 이런 상상들을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 사진을 못 보신 분들이 있으면 꼭 한 번씩 구해서 보고 또 고민해 보시기 바래요.
갑골문 하나하나가 동굴벽화!
그렇다면 BC 1300년경의 갑골이나 주(周)·은대(殷代)의 문화는 이러한 수렵문화의 장구한 축적을 전제로 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갑골문이라는 것은 바로 이 수많은 동굴벽화가 상징화(symbolized)되고 간략화된 것입니다. 갑골문 하나하나가 바로 동굴 벽화다! 헌팅을 하고 살던 인간들이 수없이 그려본 동굴 벽화가 쌓이고 쌓여서 갑골문이라는 것이 탄생한 거예요. 그냥 갑골문이라는 것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거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오해하듯 갑골문을 문명의 초기에 탄생한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갑골문은 문명의 후기 단계에서나 성립한 것입니다. 갑골문이 탄생할 쯤이면 이미 문명의 타 조건은 만화(滿花)될 대로 만화(滿花)돼 있었거든요. 갑골문 이전에 이미 그 어마어마한 청동 제기가 다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는 문자라는 것은 그 역사가 3000년, 길어야 5000년밖에 안 되는데 이것은 정말 인간 문명의 진화 과정에서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인간을 변화시켰습니다.
현대인, 급속한 문명의 진화
현대인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 정말 특이한 종자가 아닐 수 없어요. 도대체 이렇게, 모짜르트가 나오고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하는 정교한 인종이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특이한 진화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biological evolution)를 최대 200만년으로 잡고 문명의 진화(cultural evolution)를 최고 2만년으로 잡을 때, 시간상으로 이 양자의 비는 그 100대 1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100의 기간 동안 보다는 마지막 1의 기간, 즉 2만년 사이에 인간은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이 김용옥이 나오고 하는 이상한 종자가 된 것입니다. 진화 스피드로 따진다면 양 기간의 속도 차는 1:100도 넘을 거예요. 이것은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이 급속한 문명의 진화(cultural evolution)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각자가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갑골문을 설명하다가 딴 곳으로 많이 흘렀는데, 하여튼 이렇게 인간의 문자가 동일화 되고 하는 이것은 장구한 문명의 진화에서 마지막 단계인 것입니다.
28장 5. 재앙이 닥치는 세 가지 부류
이 28장은 상당히 중요하고 좋은 장입니다.
子曰: “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災及其身者也.” 공자가 말하기를 우(愚)하면서도 자기의 생각을 쓰기 좋아하거나, 천(賤)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거나,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면서 옛날의 도(道)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이러한 자들에게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칠 것이다. 以上孔子之言, 子思引之. 反, 復也. 이상은 공자의 말이니 자사가 그것을 인용했다. 반(反)은 회복한다는 것이다. |
“자왈 우이호자용 천이호자전(子曰 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이 문장은 공자(孔子)의 말로 인용(子曰)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우(愚)’와 ‘천(賤)’이라는 기본적인 대비가 보이고 있는데,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우(愚)와 천(賤)은, 모두 뒤에 나오는 문장들과 연결 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말한다면, 여기서 ‘우(愚)’는 단순히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지위가 있으면서 어리석은 것, 즉 위(位)를 얻었으나 우(愚)한 것이고 ‘천(賤)’은 단순히 우리말의 ‘천박하다’는 뜻이 아니라, 위(位)가 없다, 즉 어떤 지위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연결되는 ‘자용(自用)’은 ‘자기의 생각을 쓴다’는 의미이고 ‘자전(自專)’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전(專)’은 우리가 ‘전제주의(專制主義)’할 때의 전(專)인데, 동사로서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호자용(好自用)’은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즉 자기의 생각으로 관철하려고 한다는 뜻이 되고, ‘호자전(好自專)’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먼저 하나하나 자의(字意)를 살펴봅시다. 여기의 ‘생(生)’은 태어나서 활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보통 사용하는 생활(生活)이라는 단어에서 ‘생(生)’은 탄생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고 ‘활(活)’은 살아가는 과정(life process)을 말하는 것인데 이 구절에서의 ‘생(生)’은 생(生)과 활(活)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反)은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朱子 注: 反復也).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지금에 태어나서 살고 있으면서, 옛날의 도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문장을 확실하게 읽으려면 어떤 구문이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언뜻 보아도 앞에 있는 우(愚)나 천(賤)의 경우는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어요. 공자(孔子)가 이런 행위들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여기서 ‘지금에 태어나서 살면서 옛날의 도(道)로 돌아간다’는 이 말을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한 것이겠습니까,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한 것이겠습니까? 상당히 애매하죠? 공자(孔子)는 매우 복고적인 인물이니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 것 같다고요? 과연 그런가 한번 따져 봅시다.
‘여차자 재급기신자야(如此者 灾及其身者也)’
공자(孔子)는 바로 그 다음에서 ‘그러한 자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如此者 灾及其身者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문을 해결하기 전에 ‘재(灾)’라는 낯선 글자부터 해결하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이 ‘재(灾)’자는 ‘재(災)’자의 옛 형태입니다. 재(災)자를 본 김에 알아두면 좋은 고사성어를 하나 가르쳐 드리지요.
재(災)자도 ‘화(火)’ 변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재앙이라는 것은, 고베지진 때도 그랬듯이, 항상 불이 문제입니다. 혹시 회록지재(回祿之災)라는 말 아세요? 옛날 사람들은 불이 나서 피해를 입는 것을 바로 ‘회록지재(回祿之災)’라고 했습니다. 나에게서 없어져 버린 것이라도, 도둑맞은 경우에는, 도둑놈이 지가 쓰든지 아니면 장물애비에게 팔아 쳐 먹든지 간에 아무튼 세상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불이 나서 타버리면 어떻습니까? 불이 나서 타버리면 그 물건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우리가 쓰는 모든 것들이 결국 자연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불에 탔다는 것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게서 받은 녹(祿)을 자연으로 돌리는(回) 재앙이라 해서 회록지재(回祿之災)라고 하는 것입니다.
멋있는 말이죠? 아는 사람이 화재를 당해서 위로 편지를 쓸 때, ‘불이 나서 얼마나 충격이 크시겠습니까’하고 단순하게만 쓰지 말고, ‘회록지재(回祿之災)를 당해서.’라고 고상한 표현을 좀 써보세요. 얼마나 사람의 감정을 가지런하게 만드는 운치 있는 표현입니까?
28장 6. 유교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여차자 재급기신자야(如此者 灾及其身者也)’ 중에 ‘여차자(如此者)’가 앞의 구 전체를 받는다고 할 때, ‘우이호자용(愚而好自用)’, ‘천이호자전(賤而好自專)’,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이 세 프레이즈(phrase) 전부에 걸쳐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지금 ‘우(愚)하면서 제 생각을 쓰기를 좋아하는 자나, 천(賤)하면서 제 멋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자나, 지금에 태어나서 옛 도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나 전부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이 구문은 굉장히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까 공자(孔子)가 이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당장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아니, 유교(儒敎)는 원래 복고적이지 않은가. 그 시조인 공자(孔子)만 해도 항상 이미 망해가는 주(周)의 문화를 그리워하고, 꿈속에서도 주공(周公)을 만나는 등 매우 복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럴 리 없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고전을 읽을 때는 항상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미리 재단하고서 접근하질 말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사실 나도 이 문제를 두고 옛날에 상당 기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확연합니다. 고전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이 구문은 이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왈 오설하례 기부족징야 오학은례 유송존언 오학주례 금용지 오종주(子曰 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과 연결 지어 해석할 때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29장에 가면 그 의미가 더욱더 명확해져요. 앞으로 다음 29장을 읽을 때 꼭 28장의 이 구문을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 이 구문을 봅시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옛 도(道)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유교(儒敎)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좋을 것 같은데 공자(孔子)는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어떻게 옛날 도(道)로 돌아가냐, 이 미친놈아’하고 공자(孔子)가 엄청나게 까고 있는 거예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결국 지금까지 공자(孔子)나 유교(儒敎)를 잘못 인식 해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공자(孔子)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어요. 명쾌하게 유교(儒敎)에 대한 복고주의적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이 굉장히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지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도, 앞장에서 이야기했듯이, 고(故)를 온(溫)해서 신(新)을지(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고(溫故)는 ‘존덕성(尊德性)’의 문제요 지신(知新)은 ‘도문학(道問學)’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장과 다음 장(29장)에서 유교(儒敎)에 대한 복고주의적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문장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註)를 보면 ‘이상의 말은 공자(孔子)의 말을 자사(子思)가 인용한 것이다[以上 孔子之言 子思引之].’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비천자(非天子)~ ‘에는, ‘이것 이하는 자사(子思)의 말씀이다[此以下 子思之言].’라고 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공자(孔子)의 말의 인용은 여기서 끝나고 ‘비천자(非天子)~’ 이하가 공자(孔子)의 말에 대한 자사(子思)의 해석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공자(孔子)의 말을 두고 자사(子思)가 해설을코멘터리(commentary, 논평)한 것’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28장에는 이런 구조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을 계속 이 첫 번째 문장과 연결 지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8장 7. 문명창조자만이
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 천자(天子)가 아니면, 에(禮)를 의(議)하지 못하고, 도(度)를 제(制)하지 못하고, 문(文)을 고(考)하지 못한다. 此以下, 子思之言. 禮, 親疎貴賤相接之禮也. 度, 品制. 文, 書名. 여기 이하는 자사의 말이다. 예(禮)는 친하고 소원함에, 귀하고 천함에 서로 대하는 예다. 도(度)는 품제다. 문(文)은 서명이다. |
부정사 非와 不
이 문장에는 의례(議禮)ㆍ제도(制度)ㆍ고문(考文)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데, 오늘날 이 말들은 명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문(古文)을 볼 때는 오늘날의 그런 관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을 잘 보면 ‘비(非)A 불(不)B’라는 구조가 보이는데, ‘이것은 A가 아니면 B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관용구예요. 일반적으로 비(非) 다음에는 명사나 형용사적인 것이 오고 불(不) 다음에는 동사적인 것이 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서의 不 다음에도 동사적인 것이 올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본다면 의(議)·제(制)·고(考)가 동사이고, 예(禮)·도(度)·문(文)이 각각의 동사에 대한 목적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천자(天子)가 아니면 예(禮)를 의(議)할 수 없으며 천자(天子)가 아니면 도(度)를 제(制)할 수 없으며 천자(天子)가 아니면 문(文)을 고(考)할 수 없다’로 직역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교(儒敎)적 맥락에서 앞의 동사들(議·制·考)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작(作)’ 즉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작(作)이라는 것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작(作)인데, 그 작(作)의 대상이라는 것을 중용(中庸)에서는 예(禮)·도(度)·문(文) 세 가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 ‘작(作)’의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그 다음에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보도록 합시다.
쉽게 표현한다면 예(禮)는 일종의 의식(ritual)으로서 영어로는 커스텀(Custom, 관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문명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주자의 주를 보면, 주자는 이 ‘예(禮)’를 ‘친소귀천상접지례(親疏貴賤相接之體)’, 즉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이 상호 접하는 예(體)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친소(親疏)라는 것은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고 귀천(貴賤)이라는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체(體)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체통입니다. 즉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이, 그리고 위(位)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서로 대하는 체통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죠.
그리고 도(度)라는 것은 마디마디의 절도가 있고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말로서, 영어로 말하면 일종의 오더(Order)인데, 주자는 이것을 품제(品制)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제도라는 말을 쓰지만 이 도(度)라는 것, 즉 이 제도(制度)라는 것은 일종의 품도(品度)입니다.
마지막으로 문(文)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일종의 서류(documantation)예요. 주자(朱子)는 문(文)을 서명(書名)이라고 하고 있는데, 결국 여기서 문(文)이라는 것은 모든 문명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문자로서 관공서의 서류에서부터 예술적인 문장까지 다 포함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문자의 세계, 즉 영어로 말하면 ‘리터레쳐(literature)’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禮)·도(度)·문(文)을 바로 문명의 3대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결국 이 말은 이 문명의 3대 요소를 제작하는 데는 천자(天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몇 번 인용을 했듯이, 『예기(禮記)』 「악기(樂記)」에는 ‘작(作)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作者謂聖].’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의 천자(天子)는 바로 「악기(樂記)」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을 했듯이, 이 성인(聖人)이니 천자(天子)니 작자(作者)니 등의 말들은 문명의 패러다임을 최초로 시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를 뜻해요. 여기에서는 『예기(禮記)』 「악기(樂記)」의 이야기를 반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천자(天子)가 아니면 문명의 패러다임을 제작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말은 결국 그만큼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전기(轉機)에 특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아무나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해설은 그 다음에 계속되는데 29장에서 가면 더욱 확연해집니다.
28장 8. 중용은 전국초기의 문헌인가 진나라 이후의 문헌인가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오늘날의 천하는, 거(車)의 궤(軌)가 같고, 서(書)하는데 같은 문(文)을 사용하고, 행(行)하는데 륜(倫)이 같다 今, 子思自謂當時也. 軌, 轍迹之度. 倫, 次序之體. 三者皆同, 言天下一統也. 금(今)은 자사가 스스로 일컬은 당시를 말한다. 궤(軌)는 수레바퀴 궤적의 치수다. 륜(倫)은 차례의 례(禮)다. 세 가지가 모두 같으니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말이다. |
이 말은, 거(車)에서는 궤(軌)를 같게 하고, 서(書)하는 데는 문(文)을 같게 하고 행(行)하는 데는 륜(倫)을 같게 했다는 것인데, 언뜻 의미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구체적 의미를 파악하고서 이 문장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먼저 거(車)에서는 궤(軌)를 같게 했다는 말에서, 이 궤(軌)는 옛날 수레에서 두 바퀴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서 거(車)는 본래 수레 모양 그대로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더 수레 같죠? 글자의 좌우에 있는 선이 바퀴인데 궤(軌)라는 것은 이 양쪽 바퀴 사이의 폭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참고로 몇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옛날 갑골문이라는 것은, 최교수님이 말씀하셨던 (
, 車) 자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글자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 때 지금과 같이 횡으로 연결시킨 것만 쓰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장을 쓸 때는 종서를 썼지만 글자의 모양이나 방향은 마음대로였지요. 예를 들면 ‘시(豕)’ 자는 (
)의 형태였던 것이 지금과 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른쪽에 꼬리가 있는데, 짜식이 누우니까 이제 좀 돼지같이 보이죠? 옛날 글자들은 여러분이 지금 접하고 있는 것과 조합 방식이나 방향이 다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특히 동물을 나타낸 글자들은 돼지 시(豕)의 경우와 같이 일어선 예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거동궤(車同軌)’라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의 사이의 길이를 결정했다는 말이 되는 거죠. 옛날에는 수레바퀴의 두께가 좁았기 때문에 죽 달리면 자국이 깊게 남는데, 바퀴사이의 사이즈가 다 다르면 그 수레들이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일로드 같이 생기는 수레바퀴 자국을 같게 했다는 것입니다.
서(書)는 문(文)을 같게 했다는 말에서 서(書)는 쓰는 것, 영어로 하면 ‘라이팅(writing)’입니다. 이 서(書)는 갑골문에서 보면 (
)와 같은 형태인데,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서동문(書同文)’이라는 것은, 쓰는데 문(文)을 같게 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文)이라는 것도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문(文)은 바로 앞에서 설명했던 예(禮)·도(度)·문(文)에서의 문(文)과도 다르고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 즉 쎈텐(Sentence) 개념과도 또 다르거든요. 여기 이 맥락에서 문(文)이라는 것은 고어에서 사용되는 어법으로서, 즉 자형상의 가장 심플한 단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든다면 옛날에는, 호(好)자의 경우 여(女)와 자(子)를 각각 하나의 문(文)이라고 하였고, 호(好) 전체는 자(字)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文字)’라는 단어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다시 말해 여기서 ‘문(文)’은 글자에서 형태학적 최소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동문(書同文)’이라는 것은 모든 글자를 쓸 때 사용하는 형태론적인 자형의 기본 단위를 통일시켰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실 이 글자라는 것이 제멋대로 였습니다. 갑골문의 경우도 점복관이 뼉다귀에다가 글자를 파는데 파는 놈마다 글자가 모두 달랐거든요. 여러분들이 한문 시험을 볼 때, 답안지를 채점하는 사람은 여러분이 쓴 글자가 한 획만 잘못 되도 틀린 것으로 하는데 이것은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갑골문은 쓰는 놈마다 전부 달랐던 것이고, 한자라는 것이 원래는 그렇게 제멋대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역사적으로 변해가는 것도 더 말할 나위 없이 다양합니다. 갑골문 사전이라는 것이 뭔지 아세요? 갑골문 사전이라는 것은 한 의미에 대해서 그 당시 사용되었던 다양한 글자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입니다. 갑골문의 재미라는 것이 이런 다양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동륜(行同倫)! 행동하는 것은 륜(倫)을 같게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원래 륜(倫)이라는 것은 동아리 륜(倫)자입니다. 무언가 그루핑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차서(次序, 차례) 륜(倫)이요 질서 륜(倫)입니다. 동아리에는 항상 위아래가 있고, 선배 후배가 있고 아무튼 질서가 있게 마련이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윤리(倫理)라는 것은 륜(倫)의 이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륜(倫)이라는 것은 차서인데, 행동륜(行同倫)이라는 것은 행동하는 데 있어서 차서를 지키는 것을 다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입이다. 이 동네나 저 동네나 이 차서는 다 같아야 합니다. 이 동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고, 또 저 동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저렇고, 동네마다 다 다르면 안 된다, 즉 륜(倫)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진시황 이후에 성립한 문헌
그런데 주자(朱子) 주(註)를 보면 “금(今)은 자사(子思) 당시이며, 이 3자(車同軌, 書同文, 行同倫)가 모두 같은 것은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것을 말한 것이다[今子思自謂當時也 三者皆同言天下一統也].”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중용(中庸)을 자사(子思)작으로 보아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사(子思)의 당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사(子思)의 당시는 전국 초기에 해당되는데 어떻게 거동궤(車同軌)·서동문(書同文)·행동륜(行同倫)이 가능했겠습니까? 이것은 진시황 통일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이예요. 『사기(史記)』에 유명한 이사(李斯)의 말이 나오는데, 이 중용(中庸)의 문장이 바로 그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인용된 이사(李斯)의 말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中庸은 子思 당시가 아니라 진시황 통일 이후에 성립한 문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이 자사(子思)작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주자(朱子) 당대에 주자(朱子) 제자 중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때 학문 수준이 어땠을 것 같아요? 중국의 학문 수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음에 대한 주자의 답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사서혹문(四書或問)』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은 주자(朱子)가 사서(四書)에 대해 강의한 것 중 의문 나는 사항에 대해 제자가 질문한 것을 주자(朱子)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혹문(或問)』을 보면 우리가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것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이미 다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제자가 “선생님,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 이 사건은 진시황 이후에 있었던 일인데 이런 말이 사용되는 중용(中庸)은 진시황 이후에 쓰여진 것이 아닙니까?”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이 물음에 대해 명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혹문(或問)』에 2군데 나오는데 복잡한 것은 생략하고 핵심만 말한다면, 주자(朱子)는 여러 가지 것을 인용하면서 대답하기를 “흔히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이라고 하는 것은 진시황 이후의 사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만 하더라도 주(周)황실의 정통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지켜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이러한 것에 대안이나 복안은 이미 주(周)나라 주실(周室)에 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사(子思)는 이 말을 통해서, 전국(戰國)시대의 형식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주대(周代) 봉건제의 아이디얼한 이상을 말한 것이다”하고 명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지 이것은 이미 주대(周代)에 이상으로 다 있었던 것이고 진시황 통일 이후에 이사(李斯)가 그것을 실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하일통(天下一統)이라는 문제에서 일통(一統)은 다 되어 있었다, 다만 어지럽혀져 있었던 것이다”라고 주자(朱子)는 말했던 것입니다.
과연 주자(朱子)죠? 주자(朱子)는 그렇게 간단한 학자가 아닙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김용옥은 주자(朱子)의 설을 인정치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주자(朱子)의 말은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말도 역시 일리는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의 설도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결국 이 문장이 하고자 하는 말은 금천하(今天下)의 이러한 것들은 과거에 나누어져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동일화 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바로 앞 문장에서 말한 예(禮)ㆍ도(度)ㆍ문(文)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문장과 연결 짓는다면, 중용(中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천하를 관통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은 천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모든 천자(天子)는 다 예악(禮樂), 즉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가? 다음의 유명한 말에서 그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8장 9. 지위나 덕만으론 문명을 창조할 수 없다
雖有其位, 苟無其德, 不敢作禮樂焉; 雖有其德, 苟無其位, 亦不敢作禮樂焉. 비록 그 위(位)가 있으나, 덕(德)이 없으면 감히 예악(禮樂)을 작(作)하지 못하고, 그 덕(德)이 있으나 그 위(位)가 없으면 역시 예악(禮樂)을 작(作)하지 못한다. 鄭氏曰: “言作禮樂者, 必聖人在天子之位.” 정씨가 “예악(禮樂)을 제정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인으로 천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
중용(中庸)의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어떠한 위(位)는 있지만 내면적으로 덕(德)을 갖고 있지 못하면 감히 예악(禮樂)을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내면적인 덕(德)은 있으나 위(位)가 없으면 감히 예악(禮樂)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악(禮樂)을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愚)와 천(賤)의 구체적인 의미가 뒤에 나온다고 했죠? 여기 위(位)가 있으나 덕(德)이 없는 사람[雖有其位 苟無其德]이 바로 첫 문장에서 사용된 우(愚)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것은 전 시간에 설명했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계열로 본다면 외왕(外王)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덕(德)은 있으나 위(位)가 없는 사람[雖有其德 苟無其位]은 바로 천(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내성(內聖)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이 말들은 천자(天子)라고 해서 다 예악(禮樂)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천자(天子) 중에서도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과 같이 내성외왕(內聖外王)이 전부 갖추어진 사람이라야 예악(禮樂)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악(禮樂)이라는 것은 문명의 시작,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고 한번 만들면 만인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위(位)만을 가지고는 부족하고 내면적으로도 덕성(德性)을 가지고 있어야 예악(禮樂)을 만들 수 있으며, 또 공자(孔子)와 같이 내면적 덕성(德性)을 가진 사람도 그 위(位)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예악(禮樂)을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김용옥도 실력 있고 덕(德)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현재 아무런 위(位)도 없어요. 그래서 이 김용옥도 함부로 작(作)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덕(德)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랄 버츄얼(Moral virtue)가 아니고, 노자(老子)의 도덕(道德)을 설명하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공부(工夫)를 통해 쌓여진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약 이 김용옥이 청와대에 있다면, 그러면 나는 작(作)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타이밍과 모든 상황이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뭐라고 했습니까?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옛것을 술(述)했을 뿐 작(作)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이 ‘작(作)’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가 있습니다. 나도 참 고민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공자(孔子)의 말로 인용되고 있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해석해보도록 합시다.
28장 10. 유교는 현실주의다
子曰: “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夏)나라의 예(禮)를 말할 수 있으나 기(杞)나라에는 그것의 증거가 부족(不足)하다. 나는 은례(殷禮)를 배웠고 그것이 송(宋)나라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주(周)를 배웠고 그것을 지금 사용하고 있으니 나는 주(周)를 따른다. 此又引孔子之言. 杞, 夏之後. 徵, 證也. 宋, 殷之後. 三代之禮, 孔子皆嘗學之而能言其意, 但夏禮旣不可考證, 殷禮雖存, 又非當世之法. 惟周禮乃時王之制, 今日所用. 孔子旣不得位, 則從周而已. 여기서는 또한 공자의 말이다.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이다. 징(徵)은 증명한다는 것이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다. 삼대(三代)의 예는 공자가 모두 일찍이 그것을 배워 뜻을 말할 수 있지만 다만 하나라 예는 이미 고증할 수가 없고 은나라 예는 비록 보존되었으나, 또한 당시의 법은 아니었다. 오직 주나라의 예가 곧 당시 왕의 제도로 오늘날 사용되었다. 공자는 이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니 주나라를 따를 뿐이었다. 右第二十八章. 承上章爲下不倍而言, 亦人道也. 여기까지는 28장이다. 윗장의 ‘아랫자리에 있으면서도 배반치 않는다’를 계승하여 말하였으니, 또한 인도(人道)이다. |
앞에서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의 구체적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고 했죠? 이 구절에서 다시 한 번 유교와 공자에 대한 복고주의적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夏)·은(殷)·주(周)라는 것은 삼왕(三王) 즉 고대 왕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문장이 『논어(論語)』에도 보이는데 중용(中庸)에서는 말이 완결되어 있지 않아요.『논어(論語)』를 살펴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논어(論語)』의 「팔일(八佾)」 편(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夏禮,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杞나라에서 그것을 징험하기는 부족하다. 나는 殷禮,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宋에서 그것을 징험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 진다면, 나는 그것들을 쓸 것이다[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차근차근 풀어가도록 합시다. 이 문장에는 언(言)한다는 것과 징(徵)한다는 것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징(徵)은 구체적으로 징험한다,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 영어로 말한다면 ‘콘크리에이티브(concreative)’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이 기(杞)나라는 하(夏)나라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이고 송(宋)나라는 은(殷)나라의 후예가 살던 나라입니다. 전 시간에 최교수님이 『시경(詩經)』을 강의하면서 은(殷)나라의 후예는 송(宋)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송(宋)나라는 은(殷)나라의 후예가 살던 나라입니다. 송(宋)나라에 미녀가 많다고 하신 것도 기억나십니까?
기나라와 송나라는 망한 나라이기에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쓰임
그런데 참고로 말씀을 드린다면, 이 기(杞)나라나 송(宋)나라나 모두 망한 나라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바보들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 즉 ‘토끼 한마리가 나무 밑둥에 머리를 쳐박고 죽는 것을 보고 또 그런 요행이 일어날까 하고 계속 나무 밑둥만 쳐다 보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의 주인공도 송(宋)나라 사람이고, 『맹자(孟子)』에 나오는 ‘조장(助長)’, 즉 ‘벼가 빨리 안 자라는 것이 답답해서, 그 생장을 돕는답시고 벼를 다 뽑아 올려서 죽였다’는 고사의 주인공도 송(宋)나라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杞)나라와 관련된 고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는데 잘 사용하는 ‘기우(杞憂)’라는 고사가 바로 이 기(杞)나라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기우(杞憂)라는 말은 『열자(列子)』의 유명한 문장에 나오는데, 기(杞)나라 어떤 사람이 항상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미친놈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단순히 웃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천재가 아니면 못하는 대단한 상상입니다. ‘기우(杞憂)’가 나오는 열자의 문장은 과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장이어서, 유명한 조셉 니담(Joseph Needham, 1900~ )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에서도 인용되어, 그 당시 사람들의 천체관을 알려주는 단서로서 치밀하게 분석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우주의 구조에 대한 생각, 즉 천체관이 있어야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 대단한 천문학자였던 거예요.
공자는 복고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
기(杞)나라는 기우(杞憂)의 주인공들이 살던 나라인데, 공자(孔子)는 이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례(夏禮)를 말할 수는 있으나 기(杞)나라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징험해낼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杞)나라에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는 내가 콘크리트하게 하례(夏禮)를 징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기를 “나는 은(殷)나라의 예(禮)를 배웠으니, 은(殷)나라의 후손인 송(宋)나라에 남아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하고 있는데 중용(中庸)에서는 더 이상의 내용이 없고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앞에서 인용한 『논어(論語)』의 문장에서보다 완전한 뜻이 드러나 있어요. 이 『논어(論語)』의 문장과 중용(中庸)의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공자(孔子)는 “송(宋)나라에 하례(殷禮)가 보존되는 바가 있지만, 송(宋)나라에서도 오늘날 의미 있는 것으로 구체화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헌은 오늘날의 문헌과 비슷한 의미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주례(周禮)를 배운다. 그 이유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周를 따른다.” 여기서는 ‘오늘날 여기서 쓰고 있다[今用之].’ 이 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앞의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와 연결시켜보면,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례(周禮)를 따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夏)ㆍ은(殷)의 예(禮)들은 오늘날에 구체화시켜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지만 주(周)나라의 예(禮)는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세의 법칙, 즉 노모스(Nomos, 규칙‧관습‧법률이란 뜻으로 사회제도‧도덕‧종교상의 규정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周)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태어나서 옛으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놈이다[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及其身也].”
이것을 볼 때 공자(孔子)를 주(周)의 문화에 미친 복고주의자라고 하는 해석이 얼마나 넌센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금용지(今用之)’ 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쓰기 때문에, ‘오종주(吾從周)’라 즉 나는 주(周)를 따른다.” 여러분은 왜 고전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것은 많은 성현의 말씀이 살아 있는 것으로 바로 지금 여기서(here & now)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공자(孔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주(周)는 하(夏)ㆍ은(殷) 2대를 비춰주고 있다[監]. 그러므로 그 문물제도가 빛나는구나! 그러므로 나는 주(周)를 따르겠다[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여기 이 말은 주(周)나라의 문물제도에 하(夏)나라 은(殷)나라의 것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주(周)를 따르겠다는 거예요. 여태까지 공자(孔子)에 대해서, 공자(孔子)가 주(周)나라를 따라서 하은(夏殷)을 버리고 주례(周禮)만을 배운 사람이니, 하(夏)파, 은(殷)파, 주(周)파 중 주(周)파니, 주(周)나라의 제도에 미친 사람이니 하고 해왔던 말들은 다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공자(孔子)는 “나는 하(夏)나 은(殷)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헌도 부족하고 그것을 오늘날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구체화시킬 자료가 없으므로, 지금 여기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는 오늘 우리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夏)ㆍ은(殷)의 제도도 다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孔子)의 이 말들은,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서구라파의 계몽주의를 배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인식하는데 문제가 있고 오늘날 우리의 삶과도 여러 가지로 맞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존중했던 유교(儒敎)의 여러 가지 문화들은 많이 어지럽혀지긴 했으나 아직도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려하고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퇴ㆍ율(退栗)의 도(道)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강조하지만 유교(儒敎)가 복고주의니 하는 해석은 공자(孔子)를 잘못 생각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유교(儒敎)는 옛 것을 다시 인식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공자(孔子)가 주례(周禮)를 배우겠다는 것은 복고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공자(孔子)의 생각을 관철하는 것은 바로 금(今), 즉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교(儒敎)의 현실주의입니다. 유교(儒敎)의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신까지 버리고 현실을 냉철하게 탐구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윤리적 규범을 찾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오종주(吾從周)라, 그러므로 나는 주(周)를 따른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의미를 던져 줍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28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다음 29장에서는 28장에 나왔던 예악(禮樂)을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과 유교(儒敎)의 현실주의에 대한 것들이 더욱 깊게 논의되고,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계속 연결 지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중용(中庸) 강의를 들으면 아주 평범하게 지나치던 것도 새롭게 해석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중용(中庸)은 두고두고 집에 앉아서 읽어볼 가치가 있어요. 어떤 분은 내가 번역한 『길과 얻음(道德經)』을 밥상 옆에 놓고 식사하기 전에 한 장씩 한 번 읽고 식사를 하시곤 한다는데(꼭 내가 번역한 것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중용(中庸) 강의를 학생들이 책으로 만들면, 이 중용(中庸)도 계속 읽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전이라는 것은 정말 위대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29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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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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