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1. 총명예지한 사람
아!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어젯밤에 오늘 하는 승당례(升堂禮)의 여러 가지 졸업장이나 상장들을 내가 전부 붓으로 썼는데, 그러다보니까 도무지 강의준비를 철저히 할 시간이 부족해져서 오늘 강의에 준비가 좀 부족함을 미리 고백합니다.
오늘 드디어 31장, 32장, 33장을 끝으로 중용(中庸)을 완결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30장에서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竝育而不相害), 도병행이불상패(道竝行而不相悖),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를 봤는데, 26장에서 땅을 이야기할 때, “華嶽을 등에 싣고도 그것을 무거운 줄 모르며, 河海를 가슴에 안고도 새지 않는다[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라는 이 두 구절이 내가 대학에 다니며 중용(中庸)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랬어야만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이 두 구절은 눈물이 줄줄 쏟아지도록 내 의식을 사로잡았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내가 참 감성적인 사람이죠? 여러분들은 중용(中庸)을 통해 과연 무엇을 간직하게 될까요.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임할 수 있고, 관유온유(寬裕溫柔)가 용납할 수 있고 발강강의(發强剛毅)가 잡을 수 있고, 제장중정(齊莊中正)이 공경할 수 있고, 문리밀찰(文理密察)이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聰明睿知, 生知之質. 臨, 謂居上而臨下也. 其下四者, 乃仁ㆍ義ㆍ禮ㆍ智之德. 文, 文章也. 理, 條理也. 密, 詳細也. 察, 明辨也. 충명에지(聰明睿知)는 태어나서 바로 아는 자질이다. 임(臨)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아래로 임한다는 것이다. 이하 네 가지는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의 덕성에 포함된다. 문(文)은 문장이다. 리(理)는 조리다. 밀(密)은 상세함이다. 찰(察)은 밝게 분별함이다. |
31장의 마지막에 주자가 31장에 대한 해설을 한 것을 보면, “윗 장을 이어 소덕(小德)의 천류(川流)를 말하였다[承上章而言小德之川流].”라고 했죠? “역천도야(亦天道也)”라고 해서 천도를 말한 것인데, ‘소덕지천류(小德之川流)‘의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32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한 번 보세요. 어떻게 되었죠? ‘대덕지돈화(大德之敦化)’의 내용이고 이것도 또한 ‘천도(天道)’의 내용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33장에서는 최후의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적 이미지를 여러분이 파악하면서 내용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성인에 대한 의미인 지성(至聖)은 추상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봐야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총명에지(聰明睿知, 보통 사용하는 ‘총명예지’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관유온유(寬裕溫柔), 발강강의(發强剛毅), 제장중정(齊莊中正), 문리밀찰(文理密察)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주자 주를 보면, “총명예지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聰明睿知生知之質].”이라고 하였고, “임(臨)은 위에 있으면서 아래에 임한다[臨謂居上而臨下也].”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덕(至聖)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리더십(그것이 정치적이든, 정신적이든)을 가진 자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왕(王),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가진 총명예지는 주자의 해석으로 보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쌓아진 덕성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의 선천적인(a priori) 영민한 바탕과 자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그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 생득적인 것인데, 이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둔한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어딘가 계속 아둔한 부분이 남아 있어서 총명예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거든요【그러나 앞에서 뭐라고 했지요? 아둔하다고 해도 애써서 알면<困而知之>, 결국 알게 되는 것은 같다고 했죠?】. 여기서의 총명예지란, 예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찍히는 내용과는 관계없이 이미 그 필름이 ASA100, ASA400처럼 그 감광도(感光度, sensitivity)가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것이죠. 지성(至聖)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런 근본적인 총명예지는 전제되어 있어야겠지요.

31장 2. 후천적인 네 가지 덕성
그 다음에 나오는 관유온유9寬裕溫柔), 발강강의(發强剛毅), 제장중정(齊莊中正), 문리밀찰(文理密察)의 이 네 가지 덕성은 총명예지가 선천적인 것(a priori)임에 비해 후천적(a posteriori)으로 얻을 수 있는 덕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유교의 덕목에서 인(仁)·의(義)·예(禮)·지(知)로 말하는 것이죠(주자 주: 其下四者乃仁義禮知之德). 잘 살펴보면 느낌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죠? 관유온유(寬裕溫柔)은 인(仁)이고, 발강강의(發强剛毅)은 의(義)이고, 제장중정(齊莊中正)은 예(禮)이고, 문리밀찰(文理密察)은 지(知)와 연결이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중용(中庸)의 저자는 이미 인(仁)·의(義)·예(禮)·지(知)라는 유교적 개념을 전제로 하고, 선행하는 그 덕목에 맞추어서 이 네 구절을 구성했다고 볼 수가 있어요. 결국 이 구절들은 저자 당대의 인(仁)·의9義)·예(禮)·지(知)에 대한 해석을 내포하는 것이겠지요.
仁 | 寬裕溫柔 |
義 | 發强剛毅 |
禮 | 齊莊中正 |
知 | 文理密察 |
“관유온유 족이유용야(寬裕溫柔 足以有容也)”
인(仁)은 관유온유(寬裕溫柔)와 연결해서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자하다(benevolent)’는 생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내가 말하는 센서티비티는 오히려 총명예지로 올라갑니다. 시대적으로 해석이 변하니까요. 나는 공자의 인(仁)이란 것은 센서티버티란 심미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맥락이 다릅니다. 그래서 ‘족이유용(足而有容)’ 용(容)은 포용력을 말하는 것이겠죠.
“발강강의 족이유집야(發强剛毅 足以有執也)”
발강강의(發强剛毅)란 굳세다, 강하다, 발분하다의 개념이니까, 의(義)의 개념에 가깝게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집(執)할 수 있다[足以有執]”에서 집(執)이란 선(善)을 굳건하게 잡는다는 뜻이예요. 즉, 의(義)를 지키는 사람은 선(善)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뜻인데, 집(執)이란 개념이 불교가 들어옴에 따라 변해 버렸습니다. 불교에서는 고집멸도(苦執滅道)라고 해서, 집(執)을 속세인연의 근본적 원인이나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근원이 되는 부정적 의미로 파악하고 인간의 욕망이나 집착을 말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중국 고전에서는 집(執)이 의(義)를 지킨다는 개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다시 새겨 두면 좋겠습니다.
“제장중정 족이유경야(齊莊中正 足以有敬也)”
계속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제장중정(齊莊中正)이 나오는데, 이것은 경(敬)이라는 말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이것이 예(禮)에 해당됩니다. 제(齊)가 사실은 재(齋)입니다. 이것은 ‘목욕재계’라고 할 때의 재인데, 옛날 사람들은 목욕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재(齋)란 신성한 예식을 치루기 위해 내 몸을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예요.
경(敬)은 지금은 단순히 존경(respect)이란 의미로 쓰고 있지만, 신유학의 해석에서는 재(齋)에서 경(敬)으로 가고 그 경(敬)에서 나오는 게 그 유명한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개념입니다. 이것은, 재(齋)를 거친 사람들은 신성한 예식을 치루기 때문에 귀신과 교통을 해야 하는데, 귀신과 만나야하므로 한 가지에 집중한다[主一]는 것이고, ‘무적(無適)’이란 ‘딴 생각이나 잡념으로 인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이것이 인간을 가장 위대하고 또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데,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독수리가 창공을 ‘쫙∼‘ 유유자적하게 날다가 어느 순간 먹이를 발견하고 그 먹이를 향해 전일(全一)하게 의식을 집중하는 순간! 그 상태가 바로 독수리의 경(敬)인 것입니다. 결국 근세유학에서 굉장히 중요시되는 경(敬)이라는 것은 근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중력(attention power)이라고 볼 수 있어요.
경(敬)하다는 것은 집중이 가능한 상태인데, 공부를 할 때도 책상에 몇 시간 앉아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집중을 잘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죠. 집중 없이 10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집중해서 한 시간 앉아 있는 게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의 시간은 바로 이 집중력으로 결정이 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똑같은 하루 24시간을 산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100시간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장(莊)은 ‘진지하다, 해롱거리지 않는다, 굳건하다’의 개념입니다.
“문리밀찰 족이유별야(文理密察 足以有別也)”
주자 주를 보면, “문 문장야 리 조리야 밀 상세야 찰 명변야(文 文章也 理 條理也 密 詳細也 察 明辨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문리(文理)에서 문(文)은 문(紋)과 통하는 것이고, 리(理)는 옥의 결을 말하는 것이니까, 둘 다 질서의 개념을 말하고 있지요. 그 문리(文理)를 자세히 구분하여 명변하는 게 바로 지(知)라는 거예요. 별(別)은 ‘변별한다’, ‘구별한다’의 뜻입니다. 지(知)는 지혜(wisdom)의 막연한 측면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분별적으로 문(文)과 리(理)를 상세하게 밝히는 것[密察]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잘 알아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31장 3. 이상적인 리더십
溥博淵泉, 而時出也. 두루 넓고 고요하고 깊어서 때에 맞게 나온다. 溥博, 周徧而廣濶也. 淵泉, 靜深而有本也. 出, 發見也. 言五者之德, 充積於中, 而以時發見於外. 부박(溥博)은 두루 퍼져 광활한 것이다. 연천(淵泉)은 고요하고 깊어 근본이 있는 것이다. 출(出)은 발현되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덕이 내면에 충적되어 때에 맞추어 외면으로 발현된다는 말이다. |
‘부박연천(溥博淵泉)’
여기가 참 멋있죠? ‘부박연천(溥博淵泉)’ 부(溥)와 박(博)은 비슷한 개념입니다. 부(溥)가 박(博)에 대해서 삼수변이 들어갔을 뿐이죠. 이 구절이 내가 전에 여러분께 이야기했던 깊이와 넓이에 관한 것인데, 바로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부박(溥博)은 넓이(breadth)의 개념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덕성이나 의식세계의 폭이 넓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연천(淵泉)은 깊이(depth)의 문제로, 의식의 깊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란 표현과 상통하는 것이죠. ‘샘이 깊은 물’이란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현대말로는 거꾸로 ‘물이 깊은 샘’이라고 써야 맞잖아요? 지금은 샘을 우물이란 뜻으로 쓰고 있지만, 옛 말에서 샘이란 최초로 바닥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바로 그곳을 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샘이 깊이 있는 우물이라는 뜻인 것이지요.
주자 주를 보면, “부박(溥博)은 두루하고 넓음이요 연천(淵泉)은 고요하고 깊고 근본이 있은 것이다[溥溥周徧而廣濶也, 淵泉靜深而有本也].”라고 하였는데, 부박(溥博)과 연천(淵泉)은 인간 의식의 동시적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은 놈은 넓을 수 없고, 넓은 놈은 깊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시출지(而時出之)’
주자 주를 보면, “출발현야 언오자지덕 충적어중이이시발현어외(出發見也. 言五者之德, 充積於中而以時發見於外).”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한 다섯 가지의 덕이 뭐죠? 총명예지, 관유온유, 발강강의, 재장중정, 문리밀찰 등 입니다. 시(時)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의 시(時)의 쓰임과 같은 것으로서 때때로(occasionally)라고 번역하지 말고, 때에 맞추어서(timely)로 하는 게 좋겠어요. 공부도 여름에 하는 공부와 겨울에 하는 공부가 다르고, 도올서원에 와서 하는 공부와 학교에서 전공책 붙들고 하는 공부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게 시중(時中)에 해당되지요. 시출(時出)이란 것은 때때로 나온다는 게 아니고, 넓고 깊게 쌓인 인간의 덕이 안에 오래 쌓여 있으면, 그게 때에 맞게 우러나온다는 얘깁니다. 때가 ‘탁’ 되면 그 덕이 ‘척’ 바깥으로 발현되는 것!
溥博如天, 淵泉如淵. 見而民莫不敬, 言而民莫不信, 行而民莫不說. 넓기는 하늘과 같이 넓고 깊기는 못과 같이 깊다. 모습이 드러날 때는 백성들이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할 적에는 백성들이 그 말을 믿지 아니하는 자가 없고, 행할 때에는 백성들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言其充積, 極其盛而發見當其可也. 축적됨을 충만히 하여 성대함을 다하여 발현됨이 올바름에 마땅하다는 말이다. |
연천(淵泉)은 형용사적인 개념이고, ‘여연(如淵)’의 연(淵)은 명사로 샘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見, 여기서는 볼 ‘견’이 아니고 드러날 ‘현’으로 읽음)은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말해요. 이 구절은 왕천하(王天下)하는 리더쉽의 이상적인 모습을 다시 그린 것입니다. 주자 주는 “충적함이 그 성함을 지극히 하고 발하면 항상 옳은 데에 합당하다[言其充積極其盛而發見當其可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31장 4. 지성(至誠)의 덕성은 하늘에까지 이른다
是以聲名洋溢乎中國, 施及蠻貊. 舟車所至, 人力所通, 天之所覆, 地之所載, 日月所照, 霜露所隊, 凡有血氣者, 莫不尊親. 故曰配天. 이 때문에 성명(聲名)이 온 나라에 넘치고 만맥(蠻貊)에까지 뻗쳐서,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과 인력이 통하는 곳과 하늘이 덮는 곳과 땅이 싣는 곳과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의 모든 혈기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존경하고 친히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을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舟車所至以下, 蓋極言之. 配天, 言其德之所及, 廣大如天也. 주거소지(舟車所至) 이하는 극단적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배천(配天)은 그 덕이 미치는 바가 광대하여 하늘과 같다는 말이다. 右第三十一章. 承上章而言小德之川流, 亦天道也. 여기까지는 31장이다. 윗장을 이어 ‘소덕지천류(小德之川流)’는 또한 천도(天道)다. |
‘시이성명양일호중국 이급만맥(是以聲名洋溢乎中國, 施及蠻貊).’
시(施)는 ‘이’로 읽으며, 그 뜻은 연세대학의 연(延)자와 같은 연장하다(extend)입니다. 막맥(蠻貊)은 중국인들이 전국 시대나 한초(漢初)에 가지고 있던 소위 중원중심의 황하문명권에 대한 변두리의 개념입니다. 만(蠻)은 당시의 중국인에겐 남방오랑캐(southern barbarians)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당시 진시황이 광동(廣東)까지 다 개척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기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못했거든요. 여러분은 월남 사람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맥(貊)은 동북방(northeast)으로 우리나라의 함경도 사람을 생각하면 비슷할 거예요. 함경도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거칠죠. 중국의 동북방 문화권과 교류를 했습니다.
예전에는 해상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에 충청도 쪽의 백제 사람들은 산동문화권과 연결이 되었었습니다. 같은 이북 사람이라고 해도 평안도 사람들은 함경도 사람에 비해서 좀 더 세련된(civilized) 편이죠. 덩치도 작고, 말도 고분고분하게 하고 성격도 섬세해요. 함경도 사람들은 욕을 해도 “호랑당 말코같은 새끼!”라고 무지막지하게 합니다. 그게 진짜 맥(貊)이에요, 맥(貊)! 파워가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확실히 야(野)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함경도 사람과 충청도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얘기였어요. 어디를 차별해서가 아니라 먹는 것 하나서부터 풍습 자체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달라서 웬만해서는 같이 못 산다고. 우리나라의 역사에서의 ‘예맥(濊貊)’이라는 개념도 대개 함경도 쪽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 말하는 ‘중국(中國)’이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강택민의 중국이 아니라, 대체로 중원지방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20장에서 본 구경(九經)이 뭐에 대한 것이었습니까? 천하·국·가의 9경이었죠? 벌써 9경이 뭔지 아리송합니까? 20장을 빨리 펴 보라구!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까지가 가(家)의 경(經)이고, 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까지가 국(國)의 경(經)이고, 래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까지가 천하(天下)의 경(經)이죠. 그렇게 세 구절씩 세 묶음으로 가는 거예요, 천하·국·가로. 31장의 시이(是以) 이하는 천하(天下)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家 | 修身, 尊賢, 親親 |
國 |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
天下 | 來百工, 柔遠人, 懷諸侯 |
‘주거소지 인력소통(舟車所至 人力所通)’
인력이 통하는 곳이란 사람의 힘이 미치는 곳이겠죠. 인력이 ‘인력거’라는 뜻은 아닐 테고, ‘땅을 개간한다’는 의미에서 쓴 것 같아요.
‘천지소부 지지소재(天之所覆 地之所載)’
여기에서 뜻이 점점 천지로 나가고 있습니다.
‘일월소조 상로소추(日月所照 霜露所隊)’
대(隊)는 추(墜)와 같은 것입니다. 주거소지(舟車所至) 이하 상로소추(霜露所隊)까지는 군자지덕(君子之德)의 넓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시간관에 비하면 협애한 것이긴 하지만, 공간적 범위의 스케일을 상당히 넓게 잡아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범유혈기자막불존친(凡有血氣者莫不尊親)’
유혈기자(有血氣者)에서 혈기(血氣)라는 말은 『논어(論語)』 「계씨(季氏)」에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사람에게 국한해서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혈기(血氣)란 지난번에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미 천지론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대(漢代)에 이미 천지론은 만물에까지 적용되어서 쓰였기 때문에 이 문장의 해석에서도 ‘살아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주 구체적으로는 인간 세상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존경하고 친히 한다[尊親]의 주체를 반드시 사람만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적 세계관까지 포괄해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군자의 덕[君子之德]은 22장의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贊天地之化育].’는 개념과 31장의 ‘범유혈기자막불존친(凡有血氣者莫不尊親)’의 개념을 함께 포괄하는 것입니다.
‘고왈배천(故曰配天)’
여기서 천(天)은 하늘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지극한 지성(至聖)의 덕성은 배천(配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생태계(eco-system)의 문제까지 포괄시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1장 5. 배천(配天)과 극천(克天)의 문화
문명을 관리하는 것은 결국 인간
지성(至聖)ㆍ왕천하(王天下)·군자(君子)·성인(聖人)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지요? 도가(道家)를 보면, 도가도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그 내용이 풀립니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가치의 근원을 문명을 넘어선 자연(스스로 그러하다)에 두기 때문에, 문명이라는 인위성이나 조작성을 최소화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용(中庸)에는 그런 생각이 없어요. 중용(中庸)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禮)와 악(樂), 즉 문명의 질서를 작(作)하는 문제입니다. ‘작(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심사이기 때문에 중용(中庸)은 작(作)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지성(至聖)에서 배천(配天)까지 유가(儒家)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인간과 문명의 문제입니다.
수신(修身)에서의 신(身) 자체는 자연이지만, 신(身)이 작(作)하는 것은 인위적 문명의 세계예요. 도가(道家)에서는 자연적 존재인 ‘인간의 몸’ 이상은 인정을 안 하지만, 유가(儒家)의 인간관을 보면, 인간을 이미 문명 속에 주어진 존재로 파악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심오한 통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개탄한 것일 수도 있지요.
상당히 파라독시칼(paradoxical)하죠? 인간이 문명에 갇혀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을 관리할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문명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해도 문명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로 가져갔지만, 우리 동양사상에는 그러한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문명을 관리하는 책임을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부과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위탁을 하니까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죠. 문명에 대한 죄업을 인간이 지어내고 또 그 죄업을 인간이 관리하게 되었으니까요.
주자가 노불(老佛)을 까고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노불(老佛)은 이 문제에서 도피해버렸다는 거예요. 윤회의 바퀴를 벗어난다고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문명은 누가 관리하냐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유가(儒家)는 문명을 관리하는 덕성을 인간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인간으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히 문명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천지까지 다 포괄할 수 있는 배천(配天)을 이루어야 한다는 거예요. 배천(配天)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문명을 조작하기만 하는 정도의 인간에게는 관리를 맡길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천지의 화육까지도 도울 수 있는[贊天地之化育], 그러한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기준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이러한 유교적 사상은 섬세한 생태학적 관심(ecological concern)까지도 포괄하고 있지요.
그런데 근세 서구라파 휴머니즘은 배천(配天)이 아니고 극천(克天)입니다. 천하를 극(克)한다는 거예요. 때려 망그러뜨리고 그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천지에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구라파 근세 휴머니즘은 결국 파산에 이른다는 것까지를 중용(中庸)은 예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놀라웁게도 이렇게 거대한 문명의 틀을 만드는 데 일단 성공을 했어요. 동양문명권에서는 수학적 능력이라든가 사이언스에 기초가 되는 것들이 이러한 생각[配天] 때문에 발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배천(配天)하려는 동양의 건축이념
그렇지만 한 번 봅시다. 우리는 건축을 할 때도 그 구도를 기본적으로 ‘배천(配天)’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사대문을 보면 각각 인의예지(仁義禮知)와 연결해서 흥인문(興仁門)·돈의문(敦義門)·숭례문(崇禮門)·창지문(彰智門)이라고 정했거든요. 인의예지를 먼저 선택하고 거기에 따라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만 문명을 설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물을 지어도 무지막지한 것은 안 짓지요. 생각 속에 항상 ‘천지와 짝해서 산다’라는 배천(配天)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옥 구조에도 마찬가지로 배천(配天)의 사고방식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창호지로는 항상 기(氣)가 통하고, 문은 들려서 대청마루를 트이게 할 수 있고, 담은 낮아서 외계가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옛날 담이 어디 가리는 담이었나요? 대자연과 인간 세상의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놓은 약속의 개념이지, 가린다거나 차단을 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담을 자꾸만 벽(wall)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담 안쪽에서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건물과 마당이 각각 실(實)과 허(虛)가 되고, 담을 기준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가 각각 실(實)과 허(虛)인 거예요. 이런 모든 인간의 문명 설정이 예전의 유교문명권에서는 배천(配天)이라는 개념과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던 것입니다.
결국 유교에서는 건축의 구조에서나 인간의 덕성에서도 철저하게 문명에 대한 인식을 지키기는 한편, 동시에 문명의 자연주의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의 극단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지속적으로 중국 문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파워를 발휘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교 문명도 일시에 풍미하는 수준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유교문명처럼 어느 한 문명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배한 문명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서구라파 기독교 문명의 지속성도 놀라운 것이죠). 유교 문명은 앞으로도 절대 간단하게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배천(配天)의 개념을 통해 ‘찬천지지화육(贊天地之化育)’이라는 문구를 현대의 에콜로지 문제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생각하시길 다시 한 번 강조 하면서 32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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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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