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자사(一字師)의 미감(美感) 원리(原理)
중복된 의미를 피하라
이상 살펴본 일자사(一字師)의 예화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한 글자를 놓고 무게를 되는 미묘한 저울질이 있다. 글자가 바뀌면서 미감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 차이를 범주화할 수 있다면 여기서 한시의 미감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법하다.
일자사(一字師)가 환기시키는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진관(秦觀)의 소사(小詞) 가운데, “두견새 울음 속에 봄날 해가 저물고[杜鵑聲裏斜陽暮].”라 한 구절을 들고, 이미 ‘서양(斜陽)’을 말해 놓고 ‘모(暮)’자를 다시 썼으니 뜻이 중첩되었다고 지적하였고, 또 이인로(李仁老)의 「어양(漁陽)」시의 첫 구절에서 “무궁화 꽃 나직히 푸른 산봉우리에 비치네[槿花低映碧山峯].”라 한 것을 두고 이미 ‘벽산(碧山)’이라 하고서 다시 ‘봉(峯)’을 말하니 중첩됨을 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가(詩家)의 구법(句法)은 중복을 꺼린다[句法不當重疊]. 언어를 다잡아 한 글자도 차거나 넘치는 일을 용납지 않아야 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韓愈)는 이렇게 말한다. “할 말을 다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할 말만 했는데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는다[豊而不餘一字, 約而不失一辭].” 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한 글자를 전체 맥락에서 바꿔야 한다
시어(詩語) 상 의미의 중첩을 바로 잡은 일자사(一字師)의 몇 예화를 들어본다.
地濕厭聞天竺雨 | 땅 적시는 천축(天竺)의 비 질리도록 들리더니 |
月明來聽景陽鐘 | 달 밝자 경양(景陽) 종소리 해맑게 들려오네. |
종일 싫증나도록 땅을 적시며 질척대던 비가 밤이 이슥해서야 개인 것이다. 달이 떠오르고 달마중이라도 하듯 종소리는 허공 속에 푸르게 부서진다. 해맑은 경계이다. 살천석(薩天錫)의 시인데, 우도원(虞道園)이란 이가 1구의 ‘문(聞)’과 2구의 ‘청(聽)’ 두 글자가 중복된다 하여 ‘문(聞)’자를 ‘간(看)’자로 고쳤다. 번역 상으로도 ‘들리더니’ ‘들려오네’의 중복보다는 ‘보았는데’ ‘들려오네’의 조합이 훨씬 정채로워 보인다.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도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사룡(鄭士龍)이 중국 사신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이 썼다.
鰈海秦城餘萬里 | 조선과 중국은 만리 길도 더 되니 |
幾重雲樹隔烟微 | 몇 겹의 구름 나무 자욱한 안개를 사이했나. |
라 하였는데, 후배인 권응인(權應仁)이 지적하기를, “이미 ‘운(雲)’자를 써 놓고 또 ‘연(烟)’자를 쓰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운(雲)’자는 ‘춘(春)’자로 고침이 어떨런지요[旣着雲, 又着烟, 恐未隱也. 改雲爲春, 何如]?”하였다. 그러자 정사룡(鄭士龍)은 “네 말이 과연 옳구나[汝言, 果爲是也].”하고는 바로 고쳤다. ‘구름 낀 나무’라 해놓고 다시 ‘자욱한 안개’를 말함은 중첩의 뜻이 있으니 ‘봄 나무’의 온건한 맛과는 거리가 없지 않다.
뒤에 권응인(權應仁)이 이 일을 가지고 친구들에게 자랑 삼아 이야기 하자, 동료 가운데 유항(柳沆)이란 이가, “자네가 또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네 그려. ‘춘수(春樹)’ 밑에는 ‘운(雲)’자를 붙여야 하니 ‘연(烟)’자는 본색의 말이 아님일세[爾亦未之思也. 春樹之下, 着雲字, 可也, 烟則非本色語也].”라 하였다. 그의 말대로 고치면 두 번째 구는 “몇 겹의 봄 나무 자욱한 구름을 사이 했나[幾重春樹隔雲微].”가 된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바꿀 때마다 달라지는 의경(意境)의 맛이 참으로 미묘하다. 여기에 한시의 한 멋이 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지나친 것은 언제나 병통이 된다. 명나라 때 사진이 사조(謝脁)의 “맑은 강 깨끗하기 흰 비단 같네[澄江淨如練].”란 구절을 놓고, ‘징(澄)’과 ‘정(淨)’은 의미가 중첩되니, ‘징강(澄江)’은 ‘추강(秋江)’으로 고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한 기록이 있다. 과연 이렇게 고치고 보니 의미의 중첩은 덜었으나, 그는 정작 이 시가 봄날 쓰여진 시인 줄은 몰랐다. 뒷 구절에 “새들은 시끄럽게 봄 모래톱 덮었네[喧鳥覆春洲].”라 한 것이 있는 것이다. 중첩을 피한다는 것이 더 큰 병통을 낳았다.
태평을 한스럽게 여기다?
일자사(一字師)의 두번째 미감 원리는 시사(詩思)의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直說)보다는 에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온건한 맛이 더 깊고,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獨恨太平無一事 | 홀로 태평하여 일 없음을 한하니 |
江南閑殺老尙書 | 강남 땅서 한가로운 늙은 상서(尙書)로다. |
장괴애(張乖崖)란 이가 늙마의 한가로움을 이렇게 읊자, 소초재(蕭楚材)가 못마땅한 낯빛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고, 공의 공명과 지위가 높고 중한데, 홀로 태평함을 한스러워한다 함은 무엇입니까?”하고는 한 글자를 고쳤다. 무슨 글자였을까? 첫 구의 ‘한(恨)’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행(幸)’자를 써 넣었다. 언뜻 읽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고치고 보니 두터운 맛이 한결 다르다. 태평하여 아무 일 없는 것이 ‘한(恨)’스럽다하는 것과, 다행스럽다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전자가 뭔 일이 안 일어나나 하고 기다리는 형국이라면, 후자는 한가로운 만년을 보내는 ‘노상서(老尙書)’의 노경(老境)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보인다.
부정적 시선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꾸다
이와 비슷한 예화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하나 더 있다. 판서 오상(吳祥)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羲皇樂俗今如掃 | 희황(羲皇) 적 즐거운 풍속 쓸어낸 듯 사라지니 |
只在春風杯酒間 | 봄바람 술 잔 사이에만 남아 있을 뿐일세. |
상진(尙震)이 읽더니, “말을 어찌 이리도 박절하게 하는가[何言之薄耶]?”하며 나무라고는 이렇게 고쳤다.
羲皇樂俗今猶在 | 희황(羲皇) 적 즐거운 풍속 지금껏 남았으니 |
看取春風杯酒間 | 봄바람 술 잔 사이를 살펴보게나. |
한 사람은 상고의 즐거운 풍속이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길이 없어 봄바람 맞으며 술 마시는 속에서 겨우 그 남은 즐거움을 찾노라 했고, 한 사람은 그 즐거움은 지금도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봄날의 즐거운 술자리가 바로 그 증거라고 하였다. 과연 몇 글자의 차이 속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인생관이 뚜렷한 편폭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可)와 만(滿)의 분위기 차이
일자사(一字師)의 세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餘韻)을 남기되 앞뒤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餘韻)은 딱 부러지게 규정하지 않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겨난다. 시가(詩家)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상식에 절은 타성을 거부한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어내는 의경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명징한 장면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는데 묘한 맛이 있다. 그렇지만 의경(意境)의 일관된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다음은 엽몽득(葉夢得)의 「금릉오제(金陵五題)」 중 한 수이다.
生公說法鬼神聽 | 생전의 공의 설법 귀신도 들었거니 |
身後空堂夜不扃 | 죽은 뒤 빈 집은 밤에도 걸지 않네. |
猊座寂廖塵漠漠 | 불좌(佛座)는 적막하고 먼지만 자옥한데 |
一方明月可中庭 | 둥두렷한 밝은 달은 뜰 가운데 쯤이로다. |
어떤 이가 소동파(蘇東坡)에게 왜 끝구를 ‘만(滿)’이라 하지 않고 ‘가(可)’라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소동파(蘇東坡)는 픽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웃은 이유는 무엇일까? ‘만중정(滿中庭)’이라 하면 ‘밝은 달이 뜰 가운데 가득찼다’는 뜻이 된다. 이래서는 윗 구절의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해친다. 또 ‘명월(明月)’이라 해놓고 다시 ‘만(滿)’을 말하면 중복되어 의경도 천근(淺近)해진다. ‘가(可)’는 ‘쯤’의 의미다. 밝은 달이 뜰 가운데쯤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두텁다.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 보인다.
한 풀 꺾인 감정을 담다
두보(杜甫)의 「곡강대주(曲江對酒)」 시 3ㆍ4구에 다음과 같이 썼다.
桃花細逐楊花落 | 복사꽃 버들꽃 좇아 가녀리게 떨어지고 |
黃鳥時兼白鳥飛 | 꾀꼬리는 해오라비 따라 이따금 난다. |
한 사대부의 집에 두보(杜甫)가 직접 쓴 친필(親筆)의 초고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3구를 “복사꽃은 버들꽃과 함께 말을 나누려 하고[桃花欲共楊花語].”라 되어 있었다. 그것을 엷은 먹으로 세 글자를 고쳐 위와 같이 만들었다. 이 시를 지을 당시 두보(杜甫)는 장안(長安)에서 습유(拾遺)에 임명되어 한때 희망에 부풀었으나, 희망은 곧이어 좌절과 무력감으로 바뀌어 그는 다만 강가에 앉아 하릴 없이 꽃 지고 새 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견디기 힘든 적막과 무료를 토로하던 터였다. 이러한 때 복사꽃과 버들꽃이 다정히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고 한 처음의 의경은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 보면 마땅치 않다. 이제 세 글자를 고침으로써 두보는 한풀 꺾인 자신의 현재 심경을 적실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14글자 중 두 글자를 바꿔 의미를 강화하다
증길보(曾吉甫)의 「증왕언장(贈王彦章)」 시에 다음과 같이 썼다.
白玉堂中曾草詔 | 백옥당(白玉堂) 가운데서 조서(詔書)를 초 잡았고 |
水晶宮裏近題詩 | 수정궁(水晶宮) 안에서는 시 짓기를 가까이 했네. |
한자창(韓子蒼)이 읽더니 ‘중(中)’을 ‘심(深)’으로, ‘리(裏)’를 ‘냉(冷)’으로 바꾸었다. ‘중(中)’과 ‘리(裏)’는 아무래도 단순하고 엷은데, ‘백옥당(白玉堂) 깊은 곳에서’와 ‘수정궁(水晶宮) 서늘한데’로 바꾸고 나니, 천근(淺近)하던 표현에 심원(深遠)한 기운이 감돈다.
白玉堂深曾草詔 | 백옥당(白玉堂) 깊은 데서 조서(詔書)를 초 잡았고 |
水晶宮冷近題詩 | 수정궁(水晶宮) 서늘한데도 시 짓기를 가까이 했네. |
또 고려 때 이첨(李詹)이 정이오(鄭以吾)와 더불어 시를 논하다가 시구를 다음과 같이 얻었다.
烟橫杜子秦淮夜 | 안개 낌은 두목지(杜牧之)의 진회(秦淮)의 밤과 같고 |
月白坡仙赤壁秋 | 달 밝음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의 가을일세. |
정이오(鄭以吾)가 두 번 세 번 읊조리다가 ‘횡(橫)’은 ‘롱(籠)’으로, ‘백(白)’을 ‘소(小)’로 바꿀 것을 말하니, 이첨(李詹)이 처음엔 긍정하지 않다가 마침내 인정하였다. ‘롱(籠)’이라 함은 에워쌌다는 것이니 ‘횡(橫)’보다 강하고, ‘소(小)’는 ‘백(白)’에 비해 약하니, 쥐었다 놓았다 하는 미묘한 줄다리기가 있어 먼저 번보다 정채(精彩)로움이 백배 더하다. 서거정(徐居正)이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한 말이다.
烟籠杜子秦淮夜 | 안개 에워쌈은 두목지(杜牧之)의 진회(秦淮)의 밤과 같고 |
月小坡仙赤壁秋 | 달빛 적음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의 가을일세. |
김부식과 정지상의 원한 관계에 빗댄 일화
다음은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실려 전하는 일화이다. 정지상(鄭知常)의 재주를 시기한 김부식(金富軾)은 그를 죄로 얽어 죽였다. 하루는 김부식(金富軾)이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 버들은 천 실이 푸른 빛이요 복사꽃은 만 점이나 붉게 피었네. |
그러자 공중에서 홀연 정지상(鄭知常)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金富軾)의 뺨을 치며 “천사(千絲)와 만점(萬點)은 누가 세어 보았더냐. 어찌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도다[千絲萬點, 有孰數之也? 何不曰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라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 경우 과연 ‘천(千)’과 ‘만(萬)’으로 규정함보다 ‘사사(絲絲)’와 ‘점점(點點)’의 모호가 낫지 않은가. 실실이 푸른빛을 머금고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와, 온 산을 점점이 찍어 붉게 물들인 복사꽃의 정취는 ‘천(千)’과 ‘만(萬)’으로 한정 지웠을 때보다 한결 생생하다.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 버들은 실마다 푸른 빛이요 복사꽃은 점마다 붉게 피었네. |
잠시 이야기는 곁가지로 나가지만, 시화(詩話)에 전하는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의 불화(不和)의 시말은 이러하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산사(山寺)를 찾아 놀 때 정지상(鄭知常)이 다음 시구를 읊었다.
琳宮梵語罷 山色淨琉璃 | 절에서 독경(讀經)소리 끝나자마자 하늘은 유리처럼 깨끗해지네. |
청아한 독경(讀經) 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지자, 그 소리에 씻긴 듯 하늘빛이 유리처럼 맑아지더라는 이야기다. 독경(讀經) 소리에 쇄락해진 마음을 맑아진 하늘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교감적 심상의 교묘한 결합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이 시구를 좋아하여 자기 것으로 해달라고 했으나 정지상(鄭知常)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부식(金富軾)이 사건을 꾸며서 급기야 정지상(鄭知常)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이 어떤 절에 가서 해수각(解愁閣)에 앉아 용변을 보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정지상(鄭知常)의 귀신이 음낭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네 얼굴빛이 어찌 그리 붉은가[不飮酒何面紅]?” 지기 싫어하는 김부식(金富軾)은 곧 죽어도 “건너편 언덕의 단풍이 얼굴에 비쳐서 붉다[隔岸丹楓照面紅].”고 대답했다. 이에 음낭을 더욱 세게 움켜쥐자 그만 김부식(金富軾)은 죽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장난이었을까? 두 사람을 라이벌로 설정한 양상도 그렇고, 시 한 수, 아니 한 글자를 두고도 티격태격하는 그 모습에 담긴 뒷사람의 장난끼도 꽤나 고약하다.
의미를 풍성하게 해주는 글자
너무나도 유명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제 3ㆍ4구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결 보태나니[大洞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는 원래 ‘첨록파(添綠波)’가 아니라 ‘첨작파(添作波)’였다. 이를 뒤에 홍재(洪載)란 이가 옮겨 적으면서 다시 ‘창록파(漲綠波)’로 바꾸었다. ‘첨작파(添作波)’가 ‘보태어져 물결이 된다’의 뜻이라면 ‘창록파(漲綠波)’는 ‘푸른 물결로 넘쳐 흐른다’가 된다. 이별의 눈물이 물결을 일으킨다는 것은 작위적 느낌을 주고, 푸른 물결로 넘실댄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거슬린다. 이에 이제현(李齊賢)은 지적하기를, “‘작(作)’이나 ‘창(漲)’ 두 글자는 다 원만치 않다. 마땅히 ‘첨록파(添綠波)’일 뿐이다”라 하여 마침내 이것을 정론으로 삼는다. 푸르게 흘러가는 강 물결 위에 이별의 눈물이 그저 가세할 뿐이라는 것이다. 온자(蘊藉)한 맛이 있다. 이 이야기는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다.
또 매천 황현(黃玹)의 「압강도중(鴨江途中)」시의 3ㆍ4구는 원래 다음과 같다.
微有天風驢更快 | 바람이 건듯 부니 나귀 걸음 빨라지고 |
一經春雨鳥皆姸 | 봄비를 맞고 나니 새는 모두 고웁구나. |
김택영(金澤榮)과 이건창(李建昌)이 이를 보고 ‘개(皆)’를 ‘증(增)’으로 고치게 하였다. ‘증(增)’이라 하면 ‘새가 더욱 고웁구나’가 되어 위 구의 ‘경(更)’과 잘 어울리는 대구가 된다. 나귀의 걸음이 산들바람에 더욱 경쾌해졌다면 한 번 봄비를 맞아 깨끗하게 씻겨진 새는 더욱 고울 것이 당연하다. 이 모두 봄날 상쾌한 바람과 대지를 적시는 봄비 속에서 새삼 느끼는 생명의 약동을 경쾌한 리듬으로 포착한 것이다.
微有天風驢更快 | 바람이 건듯 부니 나귀 걸음 빨라지고 |
一經春雨鳥增姸 | 봄비를 맞고 나니 새는 더욱 고웁구나. |
일자사(一字師) 이야기가 보여주는 한시(漢詩)의 미감 원리는 물론 이 세 가지만으로 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계에는 더 많은 변주들이 존재한다.
인용
1. 한 글자를 찾아서
3. 한 글자의 스승
5. 시안(詩眼)과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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