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안론(詩眼論): 일자사(一字師) 이야기
1. 한 글자를 찾아서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무릇 시는 묘(妙)가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 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凡詩妙在一字, 古人以一字爲師].”고 하였고, 호자(胡仔)는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서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자연히 빼어나게 되니, 마치 한 낱의 영단(靈丹)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매(袁枚)가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판이한데,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딘가에 있을 꼭 맞는 딱 한 글자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京口瓜洲一水間 | 경구(京口)와 과주(瓜洲)는 강물 하나 사이요 |
鍾山只隔數重山 | 종산(鍾山)은 몇 겹 산을 격하여 서있도다. |
春風又綠江南岸 | 봄바람 강남 언덕에 또 다시 푸르른데 |
明月何時照我還 | 밝은 달은 그 언제나 돌아갈 날 비추려나. |
왕안석(王安石)이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인 「박선과주(泊船瓜洲)」다. 홍매(洪邁)가 오(吳) 나라 한 사인가(士人家)에 전해오던 그 초고를 보니, 3구의 ‘우록강남안(又綠江南岸)’은 처음엔 ‘우도강남안(又到江南岸)’으로 되어 있었다. 왕안석(王安石)은 ‘도(到)’자 위에 ‘불호(不好)’라고 주를 달고는 ‘과(過)’자로 고치고, 다시 ‘입(入)’자로 고쳤다가 그 다음엔 ‘만(滿)’자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 차례나 한 끝에 겨우 ‘녹(綠)’자로 결정하였다. 봄바람의 빛깔을 초록으로 해놓고 보니, 다른 글자의 밋밋한 것과는 과연 한 맛이 다르다. 『용재속필(容齋續筆)』에 보인다.
그 사이의 고심참담(苦心慘憺)을 두고 왕건(王建)은 “시구를 단련타가 머리 온통 다 셋네[煉精詩句一頭霜].”라 하였고, 방간(方干)은 “다섯 자 시구를 읊조리자니, 몇 오라기 수염이 또 희어졌네[才吟五字句, 又白幾莖髭].”라 하였으며, 관휴(貫休)는 “시구를 찾느라 멍청히 앉아, 찬 서리 몰아쳐도 아지 못하네[覓句如頑坐, 嚴霜打不知].”라 하였다. 고인(古人)이 시구의 연마에 어떤 공력을 들였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도 두시(杜詩)에 “새 시를 고쳐 놓고 혼자 길게 읊조리네[新詩改罷自長吟].”의 기쁨이 있기에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구양수(歐陽修)의 『육일시화(六一詩話)』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종이(陳從易)란 이가 우연히 구본(舊本)의 두보(杜甫) 시집(詩集)을 구했는데, 글자가 빠진 곳이 많았다. 그 중 「송채도위시(送蔡都尉詩)」의 제 7구에 “신경일조(身輕一鳥)”라 하였는데 마지막 한 글자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진종이(陳從易)는 좌중의 여러 손님에게 각기 빈 곳의 한 글자를 채우게 하였다. 어떤 이는 ‘질(疾)’자를, 어떤 이는 ‘락(落)’자를 빈칸에 채웠다. ‘기(起)’자라고도 하고 ‘하(下)’자라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뒤에 선본(善本)을 얻어 확인해 보니 ‘과(過)’자였다. 위 구절은 채도위(蔡都尉)의 위풍을 묘사한 대목으로 “몸은 민첩하기 새 한 마리 지나는 듯”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진종이(陳從易)는 탄복하며 “비록 한 글자이지만 그대들이 또한 능히 미치지 못했구려.”라 하였다.
양신(楊愼)의 『승암시화(升庵詩話)』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맹호연(孟浩然)의 「과고인장(過故人庄)」의 7ㆍ8구에 “중양절(重陽節) 오기를 기다려서는 다시 와 국화 앞에 나아가리라[待到重陽日, 還來就菊花].”라 한 구절이 있는데, 각본(刻本)에는 ‘취(就)’자가 탈락되고 없었다. 이를 채우려 하니 ‘취(醉)’라 하는 이도 있고, ‘상(賞)’이라는 이도 있고, ‘범(泛)’이라 하기도 하고, ‘대(對)’라야 한다고 하기도 해 의논이 분분하였다. 뒤에 선본(善本)을 얻어 보니 ‘취(就)’자였다. 과연 다른 글자들은 의경(意境)이 바로 노출되거나 요란스러워, ‘취(就)’자의 온건함에는 능히 미치지 못한다.
한 글자를 지워 언어감각을 키우다
송나라 때 어느 원벽(院壁)에 두보(杜甫)의 「곡강대우(曲江對雨)」 시가 적혀 있었는데, “숲속 꽃잎 비 맞아 연지가 젖었구나[林花着雨臙脂濕].”라 한 구절의 마지막 ‘습(濕)’자가 떨어져 나갔다.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과 진관(秦觀)과 불인(佛印) 등이 제각기 ‘윤(潤)’과 ‘노(老)’, ‘눈(嫩)’과 ‘락(落)’으로 채웠으나, 원시의 ‘습(濕)’이 주는 선명하고 촉촉한 느낌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듯 보인다.
또 소동파(蘇東坡)가 일찍이 「병학(病鶴)」시를 지었는데 “석 자 되는 긴 다리에 마른 몸을 얹었네[三尺長脛閣瘦軀]”란 구절이 있었다. 하루는 소동파(蘇東坡)가 ‘각(閣)’자를 가리고서 임덕장(任德章) 등에게 적당한 글자로 채워 넣게 하였으나 끝내 알맞은 글자를 찾지 못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천천히 그 원고를 꺼내 보여주는데 ‘각(閣)’자가 써 있었다. ‘각(閣)’이란 ‘놓아두다’는 뜻인데, 이 글자가 놓이고 보니 가뜩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긴 다리에 병들어 수척한 몸뚱이를 얹어 놓고 힘에 겨워하는 병든 학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온다.
청대(淸代) 매증량(梅曾亮)의 문집을 보면 시미(詩謎) 또는 시보(詩寶)ㆍ시조(詩條)라고도 불리는 유희에 대해 말한 대목이 있다. 시미(詩謎)란 위에서 본 예처럼 옛 시인의 시집에서 한 구절을 따다가 그 가운데 안자(眼字)가 되는 한 글자를 지워버리고, 원래 있던 글자 외에 그럴듯한 네 글자를 늘어놓아 제 글자를 찾아 맞추는 놀이를 말한다. 말하자면 오지선다형이다. 시미(詩謎) 유희는 뒷날 시를 배우는 한 방편으로 널리 성행하였는데, 위 네 예화 같은 것이 바로 이 놀이의 연원이 된 것이다. 현대시에서도 이런 놀이가 가능할까.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언어의 감각을 키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글자의 고심과 모자 고르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놀이는 행해졌던 듯하다. 심의(沈義)의 「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에 나오는 다음 삽화가 그 예증이다. 이 작품은 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데, 심의(沈義)가 잠깐 꿈속 문장(文章) 왕국(王國)에 들어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현세에서의 갈등을 마음껏 해소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 한 삽화로, 몽중(夢中) 문장왕국(文章王國)의 천자 최치원(崔致遠)이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風敲夜子送潮沙].”라 한 구절을 놓고 ‘송(送)’자가 마음에 안 든다 하여 신하들에게 고치게 하니, 진화(陳澕)는 ‘과(過)’자를, 정지상(鄭知常)은 ‘집(集)’자를, 주인공인 심의(沈義)는 ‘낙(落)’자를 각각 올렸는데, 천자는 ‘낙(落)’에 낙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필자가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뒤져 보니 위 구절은 「석상왜송(石上矮松)」이란 시의 제 4구로 본래부터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구었도다[風敲夜子落潮沙].”라 한 구절이 멀쩡하게 실려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시미(詩謎) 놀이의 한 가지임을 알았다.
이 경우 여러 사람이 내놓은 글자들을 차례로 원시에 대입시켜 보면 의경(意境)의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언어의 질량을 저울질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상승의 경계에 진입한 자일 터이다.
風敲夜子送潮沙 | (최치원)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 |
風敲夜子過潮沙 | (진화)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지나네. |
風敲夜子集潮沙 | (정지상)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모으네. |
風敲夜子落潮沙 | (심의)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어뜨리네. |
명(明)의 사진(謝榛)은 시인이 알맞은 한 글자의 선택을 위해 심혈을 쏟는 것을 모자 고르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히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 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詩眼)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인용
1. 한 글자를 찾아서
3. 한 글자의 스승
5. 시안(詩眼)과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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