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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시안론: 일자사 이야기 - 1. 한 글자를 찾아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시안론: 일자사 이야기 - 1. 한 글자를 찾아서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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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시안론(詩眼論): 일자사(一字師) 이야기

 

 

1. 한 글자를 찾아서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무릇 시는 묘()가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 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凡詩妙在一字, 古人以一字爲師].”고 하였고, 호자(胡仔)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서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자연히 빼어나게 되니, 마치 한 낱의 영단(靈丹)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매(袁枚)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판이한데,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딘가에 있을 꼭 맞는 딱 한 글자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京口瓜洲一水間 경구(京口)와 과주(瓜洲)는 강물 하나 사이요
鍾山只隔數重山 종산(鍾山)은 몇 겹 산을 격하여 서있도다.
春風又綠江南岸 봄바람 강남 언덕에 또 다시 푸르른데
明月何時照我還 밝은 달은 그 언제나 돌아갈 날 비추려나.

 

왕안석(王安石)이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인 박선과주(泊船瓜洲). 홍매(洪邁)가 오() 나라 한 사인가(士人家)에 전해오던 그 초고를 보니, 3구의 우록강남안(又綠江南岸)’은 처음엔 우도강남안(又到江南岸)’으로 되어 있었다. 왕안석(王安石)()’자 위에 불호(不好)’라고 주를 달고는 ()’자로 고치고, 다시 ()’자로 고쳤다가 그 다음엔 (滿)’자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 차례나 한 끝에 겨우 ()’자로 결정하였다. 봄바람의 빛깔을 초록으로 해놓고 보니, 다른 글자의 밋밋한 것과는 과연 한 맛이 다르다. 용재속필(容齋續筆)에 보인다.

 

그 사이의 고심참담(苦心慘憺)을 두고 왕건(王建)시구를 단련타가 머리 온통 다 셋네[煉精詩句一頭霜].”라 하였고, 방간(方干)다섯 자 시구를 읊조리자니, 몇 오라기 수염이 또 희어졌네[才吟五字句, 又白幾莖髭].”라 하였으며, 관휴(貫休)시구를 찾느라 멍청히 앉아, 찬 서리 몰아쳐도 아지 못하네[覓句如頑坐, 嚴霜打不知].”라 하였다. 고인(古人)이 시구의 연마에 어떤 공력을 들였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도 두시(杜詩)새 시를 고쳐 놓고 혼자 길게 읊조리네[新詩改罷自長吟].”의 기쁨이 있기에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구양수(歐陽修)육일시화(六一詩話)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종이(陳從易)란 이가 우연히 구본(舊本)두보(杜甫) 시집(詩集)을 구했는데, 글자가 빠진 곳이 많았다. 그 중 송채도위시(送蔡都尉詩)의 제 7구에 신경일조(身輕一鳥)”라 하였는데 마지막 한 글자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진종이(陳從易)는 좌중의 여러 손님에게 각기 빈 곳의 한 글자를 채우게 하였다. 어떤 이는 ()’자를, 어떤 이는 ()’자를 빈칸에 채웠다. ‘()’자라고도 하고 ()’자라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뒤에 선본(善本)을 얻어 확인해 보니 ()’자였다. 위 구절은 채도위(蔡都尉)의 위풍을 묘사한 대목으로 몸은 민첩하기 새 한 마리 지나는 듯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진종이(陳從易)는 탄복하며 비록 한 글자이지만 그대들이 또한 능히 미치지 못했구려.”라 하였다.

 

양신(楊愼)승암시화(升庵詩話)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맹호연(孟浩然)과고인장(過故人庄)78구에 중양절(重陽節) 오기를 기다려서는 다시 와 국화 앞에 나아가리라[待到重陽日, 還來就菊花].”라 한 구절이 있는데, 각본(刻本)에는 ()’자가 탈락되고 없었다. 이를 채우려 하니 ()’라 하는 이도 있고, ‘()’이라는 이도 있고, ‘()’이라 하기도 하고, ‘()’라야 한다고 하기도 해 의논이 분분하였다. 뒤에 선본(善本)을 얻어 보니 ()’자였다. 과연 다른 글자들은 의경(意境)이 바로 노출되거나 요란스러워, ‘()’자의 온건함에는 능히 미치지 못한다.

 

 

 

한 글자를 지워 언어감각을 키우다

 

송나라 때 어느 원벽(院壁)두보(杜甫)곡강대우(曲江對雨)시가 적혀 있었는데, “숲속 꽃잎 비 맞아 연지가 젖었구나[林花着雨臙脂濕].”라 한 구절의 마지막 ()’자가 떨어져 나갔다.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과 진관(秦觀)과 불인(佛印) 등이 제각기 ()’()’, ‘()’()’으로 채웠으나, 원시의 ()’이 주는 선명하고 촉촉한 느낌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듯 보인다.

 

소동파(蘇東坡)가 일찍이 병학(病鶴)시를 지었는데 석 자 되는 긴 다리에 마른 몸을 얹었네[三尺長脛閣瘦軀]”란 구절이 있었다. 하루는 소동파(蘇東坡)()’자를 가리고서 임덕장(任德章) 등에게 적당한 글자로 채워 넣게 하였으나 끝내 알맞은 글자를 찾지 못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천천히 그 원고를 꺼내 보여주는데 ()’자가 써 있었다. ‘()’이란 놓아두다는 뜻인데, 이 글자가 놓이고 보니 가뜩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긴 다리에 병들어 수척한 몸뚱이를 얹어 놓고 힘에 겨워하는 병든 학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온다.

 

청대(淸代) 매증량(梅曾亮)의 문집을 보면 시미(詩謎) 또는 시보(詩寶)ㆍ시조(詩條)라고도 불리는 유희에 대해 말한 대목이 있다. 시미(詩謎)란 위에서 본 예처럼 옛 시인의 시집에서 한 구절을 따다가 그 가운데 안자(眼字)가 되는 한 글자를 지워버리고, 원래 있던 글자 외에 그럴듯한 네 글자를 늘어놓아 제 글자를 찾아 맞추는 놀이를 말한다. 말하자면 오지선다형이다. 시미(詩謎) 유희는 뒷날 시를 배우는 한 방편으로 널리 성행하였는데, 위 네 예화 같은 것이 바로 이 놀이의 연원이 된 것이다. 현대시에서도 이런 놀이가 가능할까.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언어의 감각을 키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글자의 고심과 모자 고르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놀이는 행해졌던 듯하다. 심의(沈義)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에 나오는 다음 삽화가 그 예증이다. 이 작품은 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데, 심의(沈義)가 잠깐 꿈속 문장(文章) 왕국(王國)에 들어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현세에서의 갈등을 마음껏 해소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 한 삽화로, 몽중(夢中) 문장왕국(文章王國)의 천자 최치원(崔致遠)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風敲夜子送潮沙].”라 한 구절을 놓고 ()’자가 마음에 안 든다 하여 신하들에게 고치게 하니, 진화(陳澕)()’자를, 정지상(鄭知常)()’자를, 주인공인 심의(沈義)()’자를 각각 올렸는데, 천자는 ()’에 낙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필자가 최치원(崔致遠)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뒤져 보니 위 구절은 석상왜송(石上矮松)이란 시의 제 4구로 본래부터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구었도다[風敲夜子落潮沙].”라 한 구절이 멀쩡하게 실려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시미(詩謎) 놀이의 한 가지임을 알았다.

 

이 경우 여러 사람이 내놓은 글자들을 차례로 원시에 대입시켜 보면 의경(意境)의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언어의 질량을 저울질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상승의 경계에 진입한 자일 터이다.

 

風敲夜子送潮沙 (최치원)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
風敲夜子過潮沙 (진화)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지나네.
風敲夜子集潮沙 (정지상)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모으네.
風敲夜子落潮沙 (심의)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어뜨리네.

 

()의 사진(謝榛)은 시인이 알맞은 한 글자의 선택을 위해 심혈을 쏟는 것을 모자 고르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히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 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詩眼)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인용

목차

1. 한 글자를 찾아서

2. 뼈대와 힘줄

3. 한 글자의 스승

4. 일자사(一字師)의 미감원리

5. 시안(詩眼)과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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