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26 (14)
건빵이랑 놀자
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
13. 무한미디어, 사회를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
12. 낭만적 환상에만 만족하는, 뉴랜드의 순수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11.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한, 뉴랜드의 순수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과 ‘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
9.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
8. 메이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 1921년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종주의가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황인종의 이민이 홍수를 이루자 미국인들은 이것을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 선포한다. 188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을 합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남부 유럽인들도 ‘반몽고인’이기 때문에 중국인과 똑같은 법을 적용해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백인들은 황인종의 카테고리에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피부색이 옅은 흑인, 유태인, 폴란드 인, 헝가리 인, 이탈리아 인, 아일랜드 인까지 포괄하여 ‘다인종사회의 위협’을 가시화..
7. 몸의 속삭임에 굴복한 마음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 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
6. 너는 우리와 달라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5. 아비투스의 딜레마,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 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
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
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 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 귀족문화의 퍼레이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현한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은 지금의 뉴요커와 판이하게 다른 패션과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있다. 199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영화의 명성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빈틈없이 기획된 드레스와 분장, 소품과 인테리어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옷은 단지 ‘날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은 걸릴 듯한 ‘그들만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저 옷을 입고 화장실엔 어떻게 갈까’라는 관객의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1. ‘구별짓기’의 디스토피아: 짝퉁에도 등급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던 창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떨쳐입고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프리티 우먼』), 감옥의 죄수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난생처음 예술의 감동을 만끽할 때(『쇼생크 탈출』), 우리는 왜 달콤한 해방감을 느낄까. 영국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의 야코를 납작하게 만든 후 총리 관사를 휘저으며 막춤을 추고(『러브 액츄얼리』),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평범한 서점 직원과 사랑에 빠져 눈물 흘릴 때(『노팅 힐』),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까.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런 파격적인 ‘계급 배반’의 환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현되는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