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07 (10)
건빵이랑 놀자
30. 사람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다 先君對人談笑, 未嘗不淋漓傾倒, 而若有不可意人, 錯席儳說, 便索然敗意, 雖竟日相對, 更不能酬接一語, 知者多病之. 蓋先君疾惡之性, 根於天得, 凡於人之雷同ㆍ苟悅ㆍ回互ㆍ矯餙之態, 不能黽勉容假, 一以鄕愿鄙夫斷之, 則雖欲强爲款曲, 心口不應也. 嘗自言: “此吾氣質之病, 矯揉之久, 終莫能改. 一生備經險巇, 未嘗不由於此”云. 인용목차유쾌한 시공간
태양인 그와 관련해 『과정록過庭錄』 4권에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만년에 면천군수를 지내던 시절, 성 동문에 올라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眼界稍豁, 可以盪胸]”하며, 밤늦도록 달구경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귀신이 그 동리의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귀신이 그 여자를 통해 말하기를,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 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고 했다.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인을 남편이 붙들어다 관아 문밖에 데려다 놓았는데..
71. 연암의 기에 눌린 귀신 先君嘗登沔城東門, 曰: “眼界稍豁, 可以盪胸.” 遂看月, 侵夜而歸. 其夜, 有鬼降於里中女, 作狂譫田: “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 女遂狂叫亂走, 居然一鬼也. 其夫乃執, 致之官門外, 時値點衙, 先君大聲論事, 女聞而驚㥘, 叫號而走, 病遂良已.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장 젊은 날의 초상 신체적 특징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원제는 『과정록過庭錄』)에는 대략 이런 인상을 풍기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1부 전체의 내용은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힌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략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연암다운’(?) 분위기를 선명하게 포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연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본다면, 그저 절의가 곧고 기상이 드높은 유학자 정도로 기억할 터이다. 그러나 마음을 크게 먹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연암의 신체적 특징 몇 가지가 감지되기는 한다. ‘훤..
유목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
편력② ‘그들’(!)과의 만남 이후 나는 그간 ‘철의 강령’처럼 지니고 다녔던 ‘근대, 민중, 민족’이라는 척도를 놓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문학’이라는 척도까지.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근대주의’라는 목적론의 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그 ‘필드(field)’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뼈아프게 확인해야 했다.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편력이 시작되었다. ‘탈 근대’ 혹은 ‘근대 외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게 되면서 삶과 지식 혁명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위로서 80년대를 통과한 친구들을 만나 집합적 관계를 구성하면서 분과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을 감행..
편력(遍歷)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 20대 시절, 내 사주에는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있다고 어떤 얼치기 점쟁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이후의 내 삶의 여정을 보면 편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의(偏倚) 이른바 ‘클리나멘(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의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
PROLOGUE 여행ㆍ편력ㆍ유목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 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함백 탄광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개정신판을 내며 초판을 낸 지 꼭 10년이 흘렀다. 초판이 나오던 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는 바람에 몹시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4월 하순, 연구실 후배 몇 명과 연암이 갔던 길을 따라 요동벌판에서 북경을 거쳐 열하로 이어지는 코스를 다녀왔다. 요동에선 천지를 뒤흔드는 모래바람을 만났고, 북경에선 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든 ‘사스와의 전쟁’을 목격했다. 그 체험을 『문화일보』에 연재했는데, 그 여행기가 부록으로 첨가되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2012년 여름, 이번엔 OBS팀과 함께 ‘신열하일기’ 다큐 촬영을 위해 다시 한번 연암의 여정을 고스란히 되밟게 되었다. 사스도, 황사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배를 타고 단동에서 출발했다. 덕분에 전혀 다른 중국, 아주 낯선 열하를..
초판 머리말 하나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90퍼센트의 실패를 겪은 뒤에야 10퍼센트의 성취를 이루는 둔재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지닌 원초적 ‘싸늘함’이 체질에 안 맞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이념보단 체질을 더 중시한다. 체질이 훨씬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천재다. 내 지적 범위 내에서는 그 견줄 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매혹시켰다. 다름아닌 그의 유머 때문이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천재인데도 가슴이 따뜻한, 천지간에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천재 가운데 그처럼 유머를 잘 구사한 인물은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