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25 (32)
건빵이랑 놀자
18. 추억이 없는 곳, 그리하여 원한도 없는 곳으로 레드는 브룩스의 안타까운 죽음과 앤디의 믿을 수 없는 탈주 사이에서 고민한다. 마트에서 일하다가 “화장실 가도 될까요?”라고 묻는 레드에게 지배인은 말한다. “일일이 묻지 말고 가고 싶을 때 가시라고요.” 레드는 스스로에게 놀란다. “40년 동안은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허가 없인 한 방울도 쌀 수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밖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죠. 일부러 죄를 지어 쇼생크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죠. (……) 내가 원하는 건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두렵지는 않으니까요. 제 발목을 잡은 한 가지는 앤디와의 약속이었습니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주거지를 이탈하여 앤디가 말했던 벅스톤으..
17. 이 책에 구원이 있었소 다음날 쇼생크 감옥 초유의 실종 사건이 일어난다. 앤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가장 피가 마르는 것은 노튼 소장이다. 앤디와 가장 친했던 레드를 붙들고 늘어지는 소장. “늘 같이 있었잖나? 뭔가 말한 게 있을 텐데?” 레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기적이 일어났군. 귀신처럼 사라지다니! 흔적도 없이! 돌 몇 개와 여자 사진만 남겨놓고!” 소장은 길길이 날뛰다가 앤디의 방 여기저기로 돌을 집어던지고 그러다가 라켈 웰치의 멋진 포스터를 맞힌다. 그 순간 아름다운 리타 헤이워드 이후로 앤디의 방을 늘 지키고 있었던 여신의 육체가 숨겨준 비밀의 문이 드러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드디어 앤디의 머릿속에 살고 있던 모차르트를..
16. 절망에 빠진 이의 넋두리? 우리 청각의 한계. ―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 -니체, 안성찬 · 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231쪽. 노튼 소장은 전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앤디를 협박한다. 그는 앤디를 더욱 충실한 개로 만들기 위해 토미를 죽이고도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거짓말을 읊어댄다. “토미 말이야. 출옥이 1년도 안 남은 놈이 탈옥하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었어. 하들리도 쏘며 괴로워했지. 그 문제는 끝났네. 이제 우리 일을 해야지.” 1달 동안의 독방 생활로 걷잡을 수 없이 초췌해진 앤디는 소장의 제안을 거부한다. “난 안 하겠습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노튼은 더욱 잔인한 미소로 앤디를 옥죈다. “끝난 건 없어. 끝나면 넌 살아..
15.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앤디는 비로소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깨닫고 노튼 소장의 마지막 양심에 호소한다. 토미의 증언이 있으면 자신이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이미 앤디를 자신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던 노튼 소장은 앤디의 석방이 곧 자신의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살인자는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던가? 그자가 무릎을 꿇으며 잘못했으니 벌을 대신 받겠다고 할 줄 아나?” 그는 앤디를 설득하려 하지만 앤디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토미의 증언이면 다시 재판 받을 수 있어요.” 노튼 역시 필사적이다. 앤디가 쇼생크를 떠나는 순간 자신의 호시절이 끝날 것이라는 예감에 몸을 떤다. 19년 무고한 감옥 생활 동안 한 번도 분노하지 않았던 앤디는 드디..
14. 억울한 누명의 진실이 밝혀지다 예언자적 인간이 고뇌에 가득 찬 인간이라는 것을 그대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저 그들에게 훌륭한 “재능”이 주어졌으며, 그대들도 이 재능을 가졌으면 하고 생각할 뿐이다. ― 그래서 나는 비유를 통해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한다. 동물들이 대기와 구름의 전기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겠는가! 동물 중의 몇몇 종들은 날씨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례로 원숭이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을 예언자로 만든다는 것은 ― 생각하지 않는다! 강력한 양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구름의 영향으로 인해 음전기로 변하여 날씨의 변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 동물은 마치 적이 다가오고 있..
13. 꿈의 마그마가 뜨겁게 꿈틀대다 앤디는 정말 일주일에 두 번씩 주 의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쇼생크 도서관을 최고의 감옥 도서관으로 만들기 위한 앤디의 ‘허황된’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앤디가 쇼생크에 입성한 지 13년째 되던 1959년, 드디어 주 의회는 200달러만으로는 앤디의 끈질긴 편지 공세를 무마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주 의회는 매년 500달러씩 쇼생크 도서관에 보조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앤디는 주 의회의 생색내기용 일회적 지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인 문화적 지원을 바랐다. 아마 그가 떠나도 쇼생크에 계속 ‘우리 안의 모차짜르트’를 들려줄 DJ가 필요하다고, ‘우리 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불러내 줄 수많은 책이 필요하다고, 그는 상상한 것이 아닐까. 앤디는 여기서 그치..
12. 내 머릿속에는 모차르트가 살고 있다 질투 없는 눈. 그래, 그의 눈에는 질투가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그를 존경하는가? 그는 너희들의 존경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독수리의 눈을 지니고 있다. 그는 너희들을 보지 않는다―그는 별들을, 별들만을 바라본다. -니체, 안성찬 · 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51쪽. 일일 DJ로 활동한 앤디는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듯 편안하게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한다. 소장과 간수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 열어! 열라니까! 경고한다! 꺼라! 넌 이제 죽었어!” 노튼 소장은 믿었던(?) 앤디의 도발에 분노하고, 앤디는 2주간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독방은 사람은 물론 빛도 소리도 책도 없는 ..
11. 노랫소리에서 비릿한 자유의 향기를 맡다 한편 앤디는 6년 동안 주 의회에 도서 기금을 요청했던 편지의 답신을 드디어 받아낸다. “당신의 거듭된 요구에 도서기금을 동봉합니다. 도서기금 200달러와 더불어 지방도서관에서 헌책과 잡동사니를 보냅니다. 이제 만족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으니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마십시오.” 앤디의 편지를 모른 척하고 싶었던 당국은 6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는 앤디의 열정에 항복하고 만다. 간수가 앤디의 성과를 축하하며 6년씩이나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치하하자, 앤디는 말한다. “겨우 6년밖에 안 걸렸어요. 이제는 일주일에 두 통씩 써야겠어요.” 간수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앤디는 주 의회가 보낸 잡동사니 중에서 모차르트의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
10. 벽을 증오하다가, 벽에 길들여지다가, 마침내 벽에 의지하게 되다 형벌. ―기이한 것이다. 우리의 형벌이라는 것은! 그것은 범죄자를 정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속죄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범죄 그 자체보다도 범죄자를 더럽힌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251쪽. 감옥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져 마치 감옥의 벽돌처럼 감옥의 일부가 된 사람들. 그 중에 브룩스가 있었다. 브룩스는 50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기에 감옥을 빼놓고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죄수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독서를 권하는 일은 브룩스를 감옥에 갇힌 ‘죄수’라기보다 더없이 충실한 ‘사서’처럼 보이게 한다. 브룩스의 표정은 언제나 편안하고 만족스러워서 그를 바라보..
9. 성경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 쇼생크의 죄수들은 앤디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하며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한다. “간수가 죄수한테 별 아양을 다 떨더군.” “앤디가 간수들을 아주 가지고 놀았구먼?” 앤디는 털끝만큼도 우쭐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한다. “난 안 그랬어. 그저 재정 자문을 해 주는 죄수일 뿐이야. 귀여운 강아지지.” 죄수들은 세탁소의 고된 잡무에서 벗어난 앤디를 부러워하며 말한다. “귀여운 강아지니까 세탁소에서도 빼준 건가?” 앤디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 이상이지, 도서실을 확장할 거야.” 그는 언제나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의 사용법’을 찾아낸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앤디의 두 눈에는 언제부턴가 은밀한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주..
8.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고통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혹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빨리 없애고자 한다. 고통을 제거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을, 니체는 거부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그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는 고통을 더 높은 강도로, 더 힘겨운 것으로 부풀린다. 주어진 위험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자, 이미 넘쳐나는 고통을 천 배로 부풀리는 자, 그리하여 불행을 기꺼이 짊어진 채 불행을 샅샅이 해부하고 마침내 불행을 영혼의 창조에 이용하는 용기를 지닌 자, 그가 바로 초인이다. 불행을 피하는 데 급급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함,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다. 현재의 불행은 단지 미래의 ..
7. 감옥에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다 대부분의 죄수는 감옥 생활에 다만 ‘적응’하려 한다. 이미 적응된 사람은 적응을 뛰어넘어 감옥 생활에 애착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런데 앤디는 뭐가 그리 바쁜지 머릿속으로 늘 딴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도 그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그는 주어진 노동만 간신히 해내기도 바쁜 다른 죄수들과 달리, 틈만 나면 없는 일도 굳이 만들어낸다. 간수 하들리의 골치 아픈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준 이후로 그는 감옥 안에서 인간 ― 은행이자 인간 ― 세무서가 된다. 하들리의 입소문 마케팅 덕분에 그는 주변 간수들의 모든 세금 환급을 담당해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뿐만 아니라 신참 죄수 토미를 가르쳐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
6. 모든 곳이 감옥이다,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한 그대처럼 정처 없는 자들은 결국 감옥조차도 행복한 곳으로 여기게 된다. 그대는 일찍이 갇혀 있는 범죄자들이 잠자는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그들은 조용히 잠을 잔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안전을 즐기는 것이다.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442쪽. 원룸에서는 숨바꼭질을 할 수 없다. ‘원룸’이라는 현대적 공간의 치명적인 단점은,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침대와 책상(휴식과 노동)을 한 공간에 몰아넣고,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한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밀폐된 동심원적 공간에서는 방 안의 어느 지점에 앉아도 침대와 책상이 동시에 보일 수..
5. 내가 떠나온 세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
4. 강자는 끊임없이 각자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 지으려 한다 보그스는 샤워장에서 앤디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며 추파를 던진다. “이봐, 너 아직 싱싱하지? 아직 아무도 안 건드렸지? 우린 모두 친구가 필요해. 네 친구가 돼줄게. 짜식, 좋으면서 내숭 떨기는!” 앤디는 뱀처럼 감겨오는 보그스의 시선을 무심하게 떨쳐낸다. 그러나 사건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세탁장에서 노역을 하던 앤디는 가루비누가 떨어졌다는 동료의 말에 묵묵히 창고로 발걸음을 향한다. 창고에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듯 보그스 일당들이 앤디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떼 지어 덤벼들어 한 사람을 겁탈하려 한다. 앤디는 가루비누를 움켜쥔 채 “이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어.”라고 위협해보지만 사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러 명의 건장..
3.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 다름은 무엇일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평균적인, 공동의 체험’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길들여온 가장 심각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 속담을 듣는다면 아마도 니체는 치를 떨지 않을까. 모난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 그 ‘정’은 도대체 누가 내려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이 ‘옳다’는 것인가……. 니체는 아마도 수없는 질문을 퍼부으며 모난 돌을 ‘다른 돌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비겁한 권력의 맨 얼굴을 파헤치지 않을까. 니체가 혐오한 약자의 근성은 바로 ‘무리 지어’ 다니며 ‘우리가 표준이야, 우리가 대세야’라 외치는 패거리의 행태였다. 강한 자는 무리 지어 다닐 필요가 없다..
2.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다? 니체는 도덕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인류의 ‘상식’을 의심한다. 니체는 도덕이 인간의 선천적 본성도 아니며 보편적 기질도 아님을 밝혀낸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도덕의 역사적 가변성을 입증하고, 한 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패륜이 될 수도 있음을, 도덕의 가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해왔음을 보여준다. 야스퍼스는 『니체와 기독교』에서 왜 인간이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변모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신의 그림자’에 철저히 길들..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지상에서 영원으로, 초인의 오디세이 1. 형벌은 인간을 길들일 수 있는가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에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악명 높은 독방이 등장한다. 오랜 감방생활에 지친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제임스 카비젤)는 이렇게 항변한다. “제 방에는 72519개의 돌이 있어요. 전 그걸 세 번이나 세어봤다고요!” 10년이 넘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젊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늙은 죄수 아베 파리아(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돌들에 각각의 이름은 지어줘 봤나?”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방에서 죄수들은 ‘자기 계몽’이 아니라 하염없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어떻게 하면 이 저..
14. 하찮은 흔적에서 빛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자, 그는 승리할지니…… “치히로! 뭐 하는 거니? 어서 와.” 엄마, 아빠의 부름으로 센(신화적 자아)은 어느새 치히로(일상적 자아)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는 철없고 나약하기만 하던 센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여신 포스’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서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하쿠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치히로는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서야 터널 저편의 세계, 자신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저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언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치히로의 마음을 아름다운 주제가가 대신해주는 듯하다. 슬픔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히 당신과 만날 수 있어. (……) 살아 있는 신비함. 죽어가는..
13.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다 하쿠와 센은 부푼 가슴을 안고 유바바 온천으로 돌아온다. 유바바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데려왔겠지?” 유바바는 늘 아기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던 수퍼베이비가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혼자 서다니? 언제부터?” 하쿠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왔으니 센을 인간 세계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간단하게는 안돼. 세상엔 룰이 있는 법!” 유바바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수퍼베이비가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 치사한 짓 그만해! 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유바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혹스럽다. “규칙은 규칙인데……. 안 그러면 저주가 안 풀려!” 수퍼베이비는 단호한 표정으로 엄마를 협박한다. ..
12. 너를 찾지 못했다면 나의 존재도 잃었을 걸 캠벨: 우리의 진정한 입문의례는,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
11. ‘너’를 찾으러 떠난 길 끝에서, ‘나’를 만나다 한편, 센은 수퍼베이비와 가오나시를 대동하고 제니바가 살고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던 수퍼베이비는 어느새 센의 도움도 거부하고 뒤뚱뒤뚱 혼자 걸으며 제니바의 집을 향해 행진한다. 다행히도 제니바는 센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뚱보 생쥐가 된 수퍼 베이비는 처음으로 구경하는 바깥세상이 재미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니바의 물레질을 도우며 혼자 신났다. 근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센은 제니바에게 용서를 빈다. “하쿠가 훔친 걸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하쿠를 대신해서 사과 할게요.” 제니바는 저주가 걸린 도장을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은 센이 신기하다. “이거 갖고도 아무렇지 않았어? 엥? 주문이 사라졌잖아!” “도장..
10.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때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99~100쪽.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의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
9. one-way ticket: 돌아올 길이 없음이 겁나지 않는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7쪽 센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려운 길을 택한다. 그 길을 가면 엄청난 영광이나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친구 하나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보장할 수 없는 이익이 전혀 없는데도, 다치거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는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 전 ..
8. one-way ticket: 당신은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떠나겠는가?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단테, 『지옥편』 중에서 원웨이 티켓(편도승차권)이라는 말에는 ‘피할 길을 주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 있다. ‘원웨이 티켓’의 지배적인 뉘앙스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떠나야 하는 절박함’이다. 이 단어가 전해주는 피할 수 없는 절박한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영웅의 비장미이기도 하다. 영웅의 영웅다움이 완성되는 순간, 그 순간은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그의 명예가 하늘을 찔러서도 아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그의 여정이 완성될 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결연함,..
7. 센의 딜레마 vs 유바바의 딜레마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 비판을 미루어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소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386쪽. 센은 하쿠를 구하러 가고 싶지만 수퍼베이비 ‘보’는..
6. 세 친구: 나보다 더 아픈 나와의 만남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3쪽. 난 역시 안 돼, 난 결코 꿈을 이룰 수 없을 거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난 도저히 저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어….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용’이라고 불렀다. ‘늪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양의 용이 때가..
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場) 위에서 춤추다 모이어스: 소년 시절에 『원탁의 기사』를 읽었는데요. 문득 저도 영웅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정말 집을 떠나 용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신화가 오클라호마주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4.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 마라톤 선수의 모습을 보라. 난생 처음으로 경주에 참가한 사람과는 달리, 전문적인 마라톤 선수는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86쪽. 이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온천을 지배한다는 마녀 유바바의 방. 치히로는 유바바가 풍기는 으스스한 첫인상에도 아랑..
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 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54쪽. 만약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 왕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피터팬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포르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안락하게, 이미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자라지 않는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셉 캠벨 바야흐로 ‘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한국형 신조어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압축하는 핵심적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보아-문근영-김연아-원더걸스-소녀시대 등 성인을 압도하는 초특급 스타들로 이루어진 국민 여동생의 계보. 그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키덜트(Kidult)적 감수성이 묻어 있다. 또한 인생의 복잡다단한 통과의례를 10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기간 속성 코스로 끝내버리고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