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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체의 실체 그럼 과연 연암체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암의 문장에 대해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rhizome)’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은 덩이줄기라는 뜻으로, 수목(樹木)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이 수목이라면, 리좀은 뿌리라는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암의 문체적 특이성을 이 개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흔히 연암의 문장론에 대해 다음의 글을 주목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 하늘과 땅..
4장 ‘연암체’ 소문의 회오리 물론 고문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국왕이 나서서 치른 공공연한 대결의 장이었다 치더라도, 미시적 차원에서의 충돌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처남 이재성이 쓴 연암의 제문에는 그런 정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病世爲文 痴矜自古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麤疏是襲 漓餲不吐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自附純質 乃極冗腐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公所醫俗 反招嗔怒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如人病胃, 色難濃旨, 如目羞明, 惡..
壬戌冬,遷空章簡公墓于抱川,遭愈氏山變,初286)先君自287) 丁亥事變,倉288)皇權厝,恒289)有占山移空之計,290)至是買山於抱川機池里,先遷奉章簡公墓,既而愈漢售291)陰激其從弟漢寧,潛往掘墓,吾 家要訟:“此有愈氏墳墓乎?”漢烏曰:“無有”“此有家舍乎?”曰:“無 有”“此是愈氏之土地乎?”曰:“非也。”“然則掘墓之義何居?”漢焦乃稱 其先祖所築讀禮窩舊址在其下,先君曰:“然則是非曲直,聽訟者存,先 祖遺址猶足據以為證,則如之何不事訟辦,而遵作悖舉也?”漢曰: “吾不知訟與法,但知掘字”吾家就認識伯,則漢焦乃復抵書畿伯,言皆 悖理,於是,人皆謂:“汝成,六十年讀書士也,如之何一朝有此事也? 且以兩家世好,而忍掘其墓也?是可疑也”是時,愈氏之宗子冬焕,早 而無後,漢焦欺其老母孀婦,潛使人往發其嫁,孀婦慟哭,喻指血為書訟 冤,而不為之止也,竟取其極,移置於吾家墓後尺許地,..
작은 것들의 향연 이처럼 이덕무(李德懋)나 이옥(李鈺)의 문장들은 짧은 건 두세 줄, 길어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소품들이지만,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뜨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등 ‘소수적인’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처럼 한편으론 기존의 중심적 가치를 전복해버리고, 다른 한편으론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즉 중세적 표상 외부에 있는 사물들을 문득 솟구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품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소품문은 ‘잃어버린 사건들’, ‘봉쇄되었던 목소리들’이 각축하는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품은 길이가 짧다는 것뿐 ..
이옥과 이덕무 작품으로 본 소품체의 특이성 그 가운데서도 대표주자라면, 단연 이옥(李鈺)과 이덕무(李德懋)가 ‘일순위’로 꼽힐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뒤쪽은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깔깔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째서 어두워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선귤당농소』 小孩兒窺鏡, 啞然而笑, 明知透底. 而然急看鏡背, 背黝矣. 又啞然而笑, 不問其何明何暗. 妙哉無礙, 堪爲師. 문인이나 시인이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시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구치고, 읊조리는 눈동자에 물결이 일어난다.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향기가 일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
3장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소품문의 정의와 특징 我見世人之 譽人文章者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文必擬兩漢 詩則盛唐也 문은 꼭 양한(兩漢)을 본떴다 하고 시(詩)는 꼭 성당(盛唐)을 본떴다 하네 曰似已非眞 漢唐豈有且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한당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중략)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밀 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연암이 지은 「좌소산인에게 주다(증좌소산인, 贈左蘇山人)」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양한은 사마천(司馬遷)..
소품과 소설과 고증학 그런데 이 견고한 장치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말청초의 문집이 유입되면서 고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품문(小品文), 소설(小說), 고증학(考證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 일찍이 소품의 해는 사학(邪學)보다 심하다 했으나 사람들은 정말 그런지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사학을 물리쳐야 하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품이란 문묵(文墨) 필연(筆硯) 사이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소하고 식견이 천박하며 재예가 있는 자들은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므로 서로 다투어 모방하여 어느 틈엔가 음성(淫聲) 사색(邪色)이 사람의 심술을 고혹시키게 되는 것이..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反正)’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184권 100책에 이르는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단적인 증거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섭렵 및 주도면밀한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뿐더러, 왕실 아카데미인 규..
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의 이런 공세적 조처에 대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가 올려졌다. 소론 출신인 그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남인의 서학까지 문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즉,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과 이가환(李家煥)을 겨냥하면서, 남인들의 학문 또한 대부분 이단사설이고 문장 역시 패사소품을 숭상할 뿐이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정조는 이가환이 ‘초아의 신세’로 불쌍하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감싸주면서 이동직의 상소를 기각했다.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
문체 전향서 그러던 중 급기야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신앙의 강도가 한층 고조된 것이다. 두 장본인을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불사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때문일까? 이번에도 명청문집을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회적인 엄포로 넘어가지 않았다. 10월 19일 서곡이 울린 이후 문체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권력의 한복판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이 시기를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반정의 총지휘자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과 대사성(大司成)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寶庫)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영조, 정조가 이끌었던 18세기는 조선사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새로운 기운이 만개했었다. 그것이 두 왕의 영도력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할 터이지만, 어쨌든 18세기는 천재들이 각축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장이었다. 19세기는 그와 달라서 모순과 갈등은 폭발하였지만 한없이 메마르고 노쇠한 징후가 두드러진다. 안동김씨 세력이 세도를 잡으면서 시파(時派)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이 시작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이 벌어지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18세기를 특이한 연대로 만드는 데 있어 연암은 독보적 위상을 점한다. 연암이 없는 18세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19세기가 되면서 연암..
높고 쓸쓸하게 연암은 쉰을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 감역,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낸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그럴 리가! 사실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더욱 쓸쓸하다.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 좋아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고 그의 만년이 궁상맞은 건 결코 아니다. 가난이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비록 외부자로 떠돌았지만 마음가는 대로 살았으니 가슴속에 새삼 울울함이나 회한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쓸쓸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시절의 주요장면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안의현감 시절 낮잠을 자다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
40. 송덕비를 세우겠다는 안의 현민을 말리다 丙辰春, 遞付京職. 時以嶺南宣召人李萬運之親老不仕也, 有命道內瓜近邑作窠除送, 而先君瓜期最近, 遂以軍啣遞付焉. 先君爲政, 不以喣喣小惠, 惟務大體, 以不擾民存遠慮爲主. 故莅邑時, 官民相忘, 若固有之, 不知何者爲德政. 及解官歸, 父老鬚白者十餘人 ,隨行至境外, 垂淚拜別曰: “愚民不知也, 久當益思” 及後幾年, 吏有上書告曰: “民間方謀鑄銅爲碑.” 先君答書喻之曰: “此不知吾本意, 况有朝禁! 汝輩必欲爲之, 吾當專送家奴, 推碎理之, 訴營門首謀者抵罪.” 碑議遂止焉. ○ 後三十年, 甲申夏, 有一丐媼, 入桂山草堂曰: “異哉! 堂之制度, 何其與吾邑官亭相似也?” 不肖方坐堂中, 呼而試問之, 果安義人也. 不肖曰: “汝邑官亭, 誰所作也?” 媼曰: “朴府君在任時所建也, 制度與此一般.” 問: ..
19. 백성 구휼을 축제의 장으로 及設賑饋粥也, 先君以爲愍恤之中, 宜存體貌, 饋響之前, 當養廉恥, 制度不立而能不棼亂者, 未之有也. 先於庭中, 劃地塡沙以辨位次, 排位設席以分坊里, 男女分席, 長幼異坐, 士族置前, 庶甿居下, 先君臨軒而坐, 先供一器粥, 器用賑器, 不設盤桌, 輒吸盡無餘曰: “此主人之禮也.” 於是, 饋粥分穀, 肅然無譁. 士民之有識者以爲: “賑庭苟如此, 則吾輩仰哺, 亦何足恥哉!” 後與鄰宰論賑政曰: “惟賑可以用禮.” 有長牘在文集中, 讀者以爲有朱文典則. 後又見鄰倅書, 疲於賑濟, 有憂惱不堪之色, 答書解之曰: “吾輩厚蒙天恩, 忽作富家翁, 庭列數十大鼎, 招倈一千四百餘口顑頷顚連之同胞, 月三與之湛樂, 樂莫樂兮, 何樂如之, 如之何其歎到身命, 自作苦况哉?” 畢賑而餘穀尙有五十餘包, 先君初欲因此設爲社倉, 以備後日歉荒,..
5. 면천군의 서학쟁이들을 다스리는 법 時西洋耶蘇之學, 大行域中, 家染戶漬, 實有深憂, 先君之除是郡也, 歷辭籌司提擧南公(公敵), 南公從容言曰: “是除, 上意也. 此去, 擔負不小也.” 先君驚問其故, 南公沈吟: “往當自知之.” 及莅任也, 邑瘼民弊, 無甚難治, 惟邪敎大熾, 殆無一里不染, 畧已現發, 自監兵營, 隨卽推治, 則蚩蠢無識之民, 看作守義立節, 抵死不服, 雖殺之無悔也. 先君曰: “是不可但以刑威先之也.” 乃報巡使書, 畧曰: “大抵自古異端, 其始也, 何嘗自命爲邪學哉? 民之秉彝, 莫不有樂善好賢之心, 而惟其擇之不精, 辨之不早, 仁義之差而爲楊墨, 其無父無君之禍, 已驗於釋氏矣. 今之禁邪者, 縛致愚民而庭跪之, 直以椼楊臨之, 曰: ‘爾胡爲邪學也?’ 彼以片言遮截曰: ‘小人曾莫之邪學也.’ 爲長吏者, 旣不識其學之所以爲邪, 則..
60. 죽은 친구들이 그리워 술상을 차리다 先君之在嶺邑也, 一日午睡罷, 有愀然之色, 命於竹裏幽靜處掃地設席, 具一大壺酒魚肉菓脯, 盛備爲酒所. 以杖履往, 親自引觴, 滿斟而進之, 默然靜坐久之, 愴然而起, 命撤去, 饋諸在直吏奴焉. 不肯心異之, 後竊稟問, 先君曰: “吾疇昔夢見城西舊遊幾人, 來語余曰: ‘君作宰好山水, 盍設酒飮吾輩?’ 覺而檢之, 皆已死者也. 甚愴然, 遂有一酹之擧. 然此, 無於禮, 特意設耳, 不必說.”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③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화음으로 구성된 서정적 비가(悲歌)에 속한다면, 평생의 지기 홍대용(洪大容)의 묘지명은 굵직한 터치, 낮은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홍덕보묘지명」은 여러 방식의 언표 배치가 중첩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덕보(홍대용)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사신 행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으니,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洲)이다[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연암이 바로 전해 북경에 들어갔을 때 방문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② 본격적인 ‘레퀴엠‘을 듣기 전에 가벼운 아리아 한 곡조..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每憶先君看我兄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自將巾袂映溪行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연암협 시냇가에서 읊은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燕岩憶先兄)」라는 시다. 마치 동시인 듯, 민요인 듯 담백한 말투에 깊은 속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연암의 시를 읽고 두 번 울었다고 했다. 하나는 바로 이 시이고, 또 하나는 연암이 큰누이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이다.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이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연암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야 한 젊은 연암연구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참 신기했다. 아니, 그 사실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나를 포함하여)이 더 이상했다. 이런 대가한테 묘지명이 없다니. 권력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한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명망에 질려 감히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원인이 뭐든 ‘묘지명의 부재 혹은 실종(?)’은 연암의 일대기 속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미스터리 목록에 추가될 항목임에 틀림없다. 주지하듯이, 연암은 묘지명의 달인이다. 그가 쓴 묘지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 어..
소문의 회오리②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촛불사건은 사실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열하일기』는 언제나 소문의 회오리를 몰고 다닌다. ‘오랑캐의 연호를 썼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유희했다’, ‘패관기서로 고문을 망쳐버렸다‘ 등등. 그 하이라이트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웬만큼 세상의 시시비비에 단련된 연암도 이렇게 한탄했을 정도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
소문의 회오리 연암은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3년여에 걸쳐 『열하일기』를 퇴고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초고가 나돌아 문인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여기 『열하일기』를 말할 때면 언제나 따라다니는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뛰어난 문인이자 고위관료였던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에 실린 삽화. 내 일찍이 연암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에 모였을 적에, 이덕무와 박제가(朴齊家)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과 차수(次修) 박제가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이제부터 고문이 진흥되지 않..
웬 열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전의 중국 기행문은 모두 연기(燕記),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린다. 유독 박지원의 것만이 『열하일기』라는 좀 괴상한(?)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연행록이 아니고 『열하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열하? 그러고 보면 이 이름은 또 얼마나 낯선지. 중국기행이 국내여행보다 흔해빠진 요즘에도 열하를 여행 코스로 삼는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열하는 여전히 낯설고도 이질적인 공간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열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
마침내 중원으로!② 열하로의 여행은 이런 그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행운이었다.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고 있던 차,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건륭황제(乾隆皇帝)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1780년 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고, 곧이어 열하로 갔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게 되는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인조 15년(1637년) 이후 조선조 말에 이르는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사행(使行)이 청국을 다녀왔고, 그 결과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연행록이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연행 붐이 일었던 것이다. ‘한류’ ..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회우기(會友記)」를 보냅니다. 제가 평상시 중원을 대단히 흠모해왔지만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는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는 얼굴 씻는 것을 잊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느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 땅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이고 서호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활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里數)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며 수천 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중원의 존재를 알 수 있..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③ 이후 연암은 연암협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데, 이 시절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자료가 있다. 먼저 제자 이서구가 쓴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5월 그믐밤 이서구가 연암댁을 찾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집 들창을 살펴보니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서자,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이서구가 온 것을 보고서는 옷을 고쳐 입고 앉은 뒤, “고금의 치란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논했다. 밤은 삼경을 지나고 은하수가 등불에 흔들리는 속에서..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② 1778년 연암은 전의감동에서의 빛나는 ‘밴드’ 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연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날의 유쾌한 유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주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삼종형 박재원(朴在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면서,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편의 ‘드라마’다. 『과정록(過庭錄)』 1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국영 ..
31. 학문의 즐거움을 연암협에서 전수하다 松京, 以勝國舊都, 爲俗所鄙棄, 居人多以殖貨爲業, 其門地稍淸者, 雖有意文學, 聞見昧陋, 所習不出功令帖括. 及先君之寓琴鶴也, 士人李賢謙ㆍ李行綽ㆍ梁尙晦ㆍ韓錫祜, 日來請業, 及復入燕峽, 皆負笈而從, 跨歲忘歸. 李賢謙, 最以文學名於鄕, 韓錫祜, 性能領悟, 至其子在濂, 以才士稱, 其餘總皆有志槩, 不碌碌, 賢謙嘗言: “吾鄕貿貿士, 不知經史爲何語. 及聞先生敎誨, 始知功合之外, 有文章, 文章之上, 有學術, 學術不可但以句讀訓詁爲也.” 又曰: “先生曾言: ‘諸君所讀, 非不勤也, 於文義理致, 不能透入者, 無他. 以素學功令之習, 不離於紙上口頭, 不復致思於其間故也. 諸君苟欲從我學, 須定一課程, 每日經書一章, 綱目一段, 不要疾讀熟誦, 只細諷精思, 討論辨難, 可也.’ 於是, 諸人遵先生指學..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 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申光蘊)이 나란히 말을 타고 와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고 허락했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23. ‘연암’으로 자호를 삼은 사연 遊松京, 得燕嚴洞, 白君(東脩)·童傔(金五福)從. 燕嚴, 時屬海西之金川郡, 地距松京三十里絕峽也. 勝國時, 牧隱·益齋諸賢居之, 後遂荒廢無居者. 先君初登華藏寺, 朝日東望, 有峰揷天, 意有別區, 與白君聯袂而往, 艸木蒙密無徑可由, 只溯溪流而行, 得異境焉. 崗平麓嫩, 石白沙明, 蒼壁削立, 如開画障, 溪流澄澈, 盤石平鋪, 而中有平蕪閑曠, 可以卜築. 有永矢考槃之意, 遂以燕岩爲號. 인용목차유쾌한 시공간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②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벗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박제가(朴齊家)가 쓴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는 당시 연암의 풍모 및 이 그룹의 분위기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己丑)년 어름 내 나이 18, 9세 나던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李卓吾), 연암 ——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정의 철학자’, 20대의 맑스가 박사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옮김)에서 재조명한 에피쿠로스는 ‘우정의 정원’으로 유명하고,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적 초월론을 전복한 스피노자 역시 우정과 연대를 윤리적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명말 양명좌파(左派)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연암에게 있어서도 ..
‘연암그룹’③ 앞에 나온 박제가(朴齊家)와 이덕무(李德懋)는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모두 서얼 출신으로, 연암의 친구이자 학인들이다. 정조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세운 아카데미인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두 정조가 끔찍이 싫어했던 소품문을 유려하게 구사한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덕무(李德懋)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아포리즘(aphorizm)의 명인’이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와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청언소품(淸言小品)’들로 흘러넘친다. 서얼 출신인 데다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부를 정도로 책벌레였던 그는 가난과 질병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유득공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터,..
‘연암그룹’② 먼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보다 여섯 살 위지만 평생 누구보다 도타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 또한 과거를 폐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갔는데, 특히 과학과 철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연암은 「홍덕보(홍대용의 자字)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율력에 조예가 깊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생각을 거듭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하니, 그 학설이 오묘하고 자세하여 깊은 이치에 닿아 있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其說渺微玄奧. 홍대..
‘연암그룹’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과정록(過庭錄)』 4권에 나오는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암의 일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
57. 사람과 밥먹기를 좋아하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분열자② 연암은 단지 제도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벗어나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 후회막심해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이미 십대 후반 입신양명의 문턱에서 ‘과거알레르기 증후군’을 앓았던 그로서는 체질적 거부반응이 한층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설령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 해도,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바로 그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분열자 청년기의 우울증을 거쳐 30대, 젊음의 뒤안길을 통과하면서 연암은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을 보면, 연암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려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에 대한 염증이 그 원인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선뜻 납득되지는 않는다. 소인배 없는 시절이 어디 있었으며, 당파 싸움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닌 바에야, 그 정도로 아예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면 좀 지나친 결벽증 아닌가. 좀더 무게가 실리는 건 정국(政局)에 대한 심각한 회의다.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처숙(妻叔) 이양천이, 영의정에 소론계 인물이 임명된 조치에 항의하다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고, 또 벗 이희천(李羲天)이 왕실을..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미스터리(mistery) 從古文章恨橘鰣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幾人看見燕岩詩 연암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曇花一現龍圖笑 우담바라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正是先生覔句時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이 시는 ‘연암그룹’의 일원인 박제가(朴齊家)의 「연암이 율시를 지은 걸 축하하며(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라는 시이다. 3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包靑天), 본명은 포증(包拯), 송나라 때 유명한 판관이다. 한때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박제가는 연암의 시짓기를 우담바..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② 그런 점에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일종의 마이너(minor)들의 보고서다. 민옹과 김신선은 특히 ‘튀는’ 인물들이고, 그 밖의 경우도 대략 유사한 계열에 속한다. 「마장전(馬駔傳)」에 나오는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 등은 거리를 떠도는 ‘광사’들이고, 「광문자전(廣文者傳)」의 주인공 광문이는 비렁뱅이이며,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의 주인공 엄항수(嚴行首)는 서울 변두리에서 똥을 져다주면서 먹고사는 분뇨장수, 「우상전(虞裳傳)」의 주인공인 우상 이언진(李彦眞)은 역관 신분인 탓에 국내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불우한 문장가다. 직업도 신분도 다르지만, 이들은 주류(major)에서 벗어난 ‘소수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명의를 찾아 몸을 의탁하거나 약이나 침, 혹은 특별한 양생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아 요양을 하거나.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택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글로 옮기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 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내막을 좀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가 「민옹전..
우울증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박사유(朴師愈)와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뒷날 집안 사람이 어느 북경의 점쟁이에게 그의 사주를 물었더니, “이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에 속한다.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此命磨蝎宮, 韓昌黎ㆍ蘇文忠以此故窮, 班ㆍ馬文章, 無事致謗](『과정록過庭錄』 1권).”고 했다나. 소급해서 적용해보자면, 이 사주풀이는 비교적 적중한 편이다. 한유와 소식, 반고와 사마천에 견줄 만한 불후의 문장가가 되었고, 명성에 비례하여(?) 갖은 구설수와 비난에 시달렸으니. 그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