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02 (15)
건빵이랑 놀자
3.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장자의 탁월한 점은 충효라는 유가적 이념이 비록 꿈과 같이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서는 현실적인 물리력을 갖는다는 것을 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다. 충효가 삶의 규칙인 공동체에서 충효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공동체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우리는 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2. 타자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러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는 물이나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지만, 물 바깥에 나와서는 물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고기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동체와 조우해야만 한다. 문제는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에 병적으로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애국자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애국자와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동시적..
3. 공동체에서의 삶 1. 비합리적으로 보이던 타공동체의 풍속들 공동체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들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봉건시대에서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악으로 그리고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 선이고, 여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한 규정들과는 달리 모든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공유하고, 이 구조에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부르던 내용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모든 공동체들의 규칙은 내용은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보면 모든 공동체의 선/악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
3.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아이가 더 자라게 되면, 이제 이유식을 떼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김치 등의 음식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불쾌하겠는가? 그럼에도 그 아이는 먹게 된다. 왜냐하면 김치를 먹는 자신을 어머니는 “우리 아기 이쁘구나, 김치도 잘 먹고!”하면서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타자를 통해 그 타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자신을 욕망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공부 잘하는 자신으로 만들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억지로하지 않는 것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자가 욕망한다고 상상한 것에..
2.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내면화하게 되었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그것이 우리에게 가해진 공동체의 폭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주체로서 탄생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규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선악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과연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자아를 기존의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인간이란 동물의 자기 배려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가 아니면 삶..
2. 나는 누구인가? 1. 주체란 초자아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한다 어느 여성이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거울 속의 모습=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3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
5. 장자의 회의주의는 합리적 철학의 허구성을 비판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장자는 근본적 회의주의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표면적 평가는, ‘깨어난 후에야 자신의 인식이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장자의 말에서, 여지없이 부서진다. 장자는 깨어남[覺]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자기충족적인 언어와 인식의 닫힌 체계로부터,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단서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장자가 권고하는 깨어난 상태는 맑은 연못[淸淵]과도 같은 마음, ‘나는 나다’는 생각을 제거한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렇다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장자의 회의주의는 하나의 학설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치료적(therapeutic)인 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
4. 반성적 인식의 한계 다음으로 반성적 인식과 근본적 회의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자세하게 인식하고 있는 척하며 ‘왕이시여!’ ‘하인들아!’라고 말하는데, ..
3. 객관적인 옳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는 남자들..
2. 세 가지 인식론을 비판하다 합리적 철학에 대한 장자의 비판이 가장 분명하게 전개되어 있는 편이 바로 「제물론(齊物論)」편이다. 그가 얼마나 합리적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설결(齧缺)이 스승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同是]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子知子之所不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然則物無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
1. 보편적 앎에 대한 장자의 비판 1. 나를 대상화하는 문제점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explanation)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description)하려는 철학이다. 앞으로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우리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아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이다.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인용 목차 장자 원문
3.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맺음은 맑은 연못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외부가 있다는, 즉 자신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뒤의 깨달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소통이 우리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혼탁한 물[濁水]로 비유되는 마음과 맑은 연못[淸淵]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
2.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 가운데 장자철학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조릉(雕陵)이라는 사냥터에서 장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산목(山水)」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다. 장주(莊周)가 조릉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는 남쪽에서 온, 날개의 폭이 일곱 자이고 눈의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1. 장주(莊周)와 장자(莊子) 장자는 관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때 태어나서 어느 때 죽었는지, 혹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자』에는 장자에 대한 많은 우화들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화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두 명의 장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장자(莊子)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장주(莊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장주는 바로 우리가 다루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의 실명을 지칭하고 있다. 반면 장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장 선생님이라는 경칭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