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13 (26)
건빵이랑 놀자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의 이해 이제 우리는 3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혜(慧)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혜는 의역이고(선진경전에서 ‘慧’는 특별한 의미가 없던 글자였다), 그 음역이 바로 ‘반야(般若)’라는 것이죠. 반야란 무엇인가 바로 이 주제가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자아!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반야경’이라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반야사상을 표방한 경전들을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히카타 류우쇼오(干潟龍祥, 1892~1991, 동경제대 철학과 졸업. 구주제대九州帝大교수. 일본의 인도철학자)는 의미 있는 중요한 반야경으로서 27경을 꼽고,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반야경연구 전문가, 에드워드 콘체(Ed..
삼학과 삼장, 성묵과 법담 계ㆍ정ㆍ혜는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지요. 달타가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 앉기까지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계(戒)였습니다. 그리고 보리수(핍팔라나무) 밑에서 선정에 들어갔지요. 그것이 바로 정입니다. 그리고 정을 통하여 아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합니다. 그러니까 싯달타의 계를 담은 것이 율장이고, 싯달타의 정(定)을 담은 것이 경장이고, 싯달타의 혜를 담아놓은 것이 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약간의 디테일한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는 율장과 경장만이 있었다. 논장은 후대에 성립한 것이다). 삼학 三學 계(戒) 율장(律藏) 대장경 大藏經 tri-piṭaka 정(定) 경장(經藏) 혜(慧) 논장(論藏) 싯달타는 어려서..
득도와 화두 생각해보세요! 여기 스님이 한 분 있다고 합시다. 왜 이 사람을 스님이라고 우리가 존경을 할까요? 우선 스님이 됐다고 하는 것은 ‘수계(受戒)’를 의미합니다. 즉 계를 받아야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좋아하고 올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을 양보할 수 없는 인생의 도락으로 엔죠이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참기 어려운 쾌락의 향유를 근원적으로 포기한다, 왜 그럴까요? 득도를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여튼 보통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운 매우 근원적인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 그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님이나 신부를, 비구니나 수녀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죠. 스님이 색이나 밝히고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존경해야 할까요? 계..
지눌의 정혜쌍수 보조(普照) 지눌(知訥, 1158~1210)도 무신정권이 발흥하여 대고려제국의 정치체제와 결탁된, 축적된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선불교의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격외성(格外性, 교외별전敎外別傳)이 고려불교 그 자체를 뒤흔들고 있던 시대에, 선(禪)과 교(敎)는 본질적으로 대립되어야 할 양대세력이나 이론체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융합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통불교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해나갔던 탁월한 사상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도통을 전수받을 만한 스승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선이라는 것이 깊게 이해된 상태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독자적인 문학(問學)의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결사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사운동의 핵이 ‘정혜결사(定慧結社)’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계ㆍ정ㆍ혜 삼학의 본래정..
팔정도와 삼학 그런데 4번째의 도제는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엄청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수행자들의 생활규칙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라는 뜻일 텐데, 이 팔정도야말로 원시불교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죠(우리나라에서는 ‘원시’가 ‘원시인’처럼 ‘primitive’하다는 뉘앙스가 있어 싫어한다. 그리고 초기 불교라고 한다. 나는 불타가 살아있을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부르고, 적멸 후 한 150년간, 부파불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를 원초적이라는 의미에서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양자를 합쳐서 ‘초기불교’라 불러도 무방하다).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 바른 소견),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
삼학,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자아! 이제 ‘삼법인’과 함께 ‘삼학(三學)’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근본불교시대(역사적 싯달타가 활약하던 가장 근원적인 시기)에 싯달타를 따르는 자들이 선생님이 제시하는 이상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데 필연적으로 지켜야만 했던 세 측면의 수행덕목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그 깨달음을 쉽게 일반대중에게 전하기 위해서 설파했다고 하는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성제는 4가지 성스러운 진리(catur-ārya-satya)라는 뜻이죠. 싯달..
심리학과 무신론, 그리고 무아의 종교 여기 이 4명제에 관해 정리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어요. 내가 하바드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미국학생이 나에게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일종의 심리학입니까?” 나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어요. “아~ 그렇죠. 그렇구말구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이 불교를 제대로 못 배우는 것만이 제 한이죠.” 제가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어요. 목사후보생인 대학원 학생이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무신론입니까? 4법인에 신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군요.” 나는 학생의 질문에 감동했습니다. 제 강의의 핵심포인트를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추측컨대 ‘무신론(atheism)’이라는 말을 매우 ..
열반적정과 삶의 종교 다음의 제4명제를 분석해보죠. 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ṃ nirvāṇam) 열반적정이라는 명제는 제법무아(제법에는 기실 아我가 없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또다시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한 측면과도 같은 것이죠. 제행무상과 일체개고가 한 쌍이라면, 제법무아와 열반적정은 또다시 한 쌍이 되지요. 제법이 무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말이지요. ‘열반(涅槃)’이라는 말은 ‘니르바나(nirvāṇam)’라는 말의 음역입니다. 아~ 참, 제가 가사를 쓰고 제 친구 박범훈이 곡을 만들고 박애리가 노래 부른 ‘니르바나’라는 작품이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데 그것을 보셨나요?(2018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초연, BTN 제작, 29분 ..
제법무아의 아트만과 실체 자아! 이제 제3의 명제를 분석해봅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sarvadharma anātmānaḥ 여기 ‘제법’이라는 말 속에, ‘모든’의 뜻을 가지는 ‘제’ 이외로 ‘법(法)’이라는 말이 주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 ‘다르마(dharma)’라는 말처럼 불교세계에서 넓게 쓰이는 말도 없습니다. 다르마는 법칙, 정의, 규범의 뜻도 있고, 불타의 가르침을 총칭해서 쓸 때도 있고, 덕, 속성, 원인의 뜻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중국고전 중에서 법가에서 쓰이는 ‘법’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지만 기실 다르마는 법(法)보다는 도(道)라고 했어야 옳을 것 같아요. 그런데 4법인 제3명제에서 쓰인 ‘법’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냥 사물, 물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매..
중동 사막문명의 테마: 죄 중동으로 가면 상황이 아주 달라져요. 고조선-고구려문명의 테마가 ‘생(生, Creative Advance)’이고, 인도문명의 테마가 ‘고(苦)’라고 한다면 중동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테마는 역시 ‘죄(罪, Sin)’입니다. 사막에서의 삶은 공동체의 영역이 매우 좁으며, 대자연의 순환이라는 생생지도(生生之道)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땅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수직적 관계 속에서 초월적 ‘존재’로서만 인식되고, 우주의 순환이라는 시공범주를 벗어나 버리죠. 그런데 사막의 사람들이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자에 대하여 갖는 의식은 ‘죄’라고 하는 한계 상황을 통해 매개됩니다. 여러분들께서 구약의 레위기 18장을 ..
일체개고와 쇼펜하우어, 문명사적 맥락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은 ‘일체(一切)’가 다 ‘고(苦)’라는 뜻입니다. ‘고(苦)’ 즉 ‘두흐카(duḥkha)’라는 것은 아비달마 문헌에서는 ‘핍뇌(逼惱)’라고 번역했는데 ‘핍박하여 고뇌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괴롭다’는 뜻이지요. ‘일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은 ‘존재함’ 그 자체가 고라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일체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삼법인에 미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 우주가 팽창하느라고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뿐만 아니지요. 우..
행(行)과 연기(緣起)의 의미 기실 일체개고와 제행무상은 한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제행이 무상하면 모든 것이 ‘고(苦)’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제행의 ‘행(行)’은 우리말로는 ‘간다’는 뜻이지만, 그 원어인 ‘삼스카라 (samskāra)’는 ‘드러난 것’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며 ‘제행(諸行)’은 나의 인식 세계에 드러나는 모든 현상(phenomena)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 사건, 그 모든 것은 항상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제일 먼저 깨달은 진리는 ‘연기’라는 것인데 ‘연(緣)’이라는 것은 원인의 뜻이고, ‘기(起)’라는 것은 연으로 해서 ‘일어나는’ 결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사물도 그것..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사법인) 우리는 지금 여기서 선(禪)을 얘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불교의 근본교리, 그 근원적 지향성을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의 교리에 관한 천만 가지 법설이 난무하지만, 나는 여러분께 내가 불교학개론 첫 시간에 배운 누구나 쉽게 접하는 세 마디를 우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특징 지우는 세 개의 인장과도 같은 것, 바로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사실 이 삼법인이라는 것만 정확히 알아도 불교에 관한 모든 논의는 종료됩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해체계에 이 세 개의 도장만 확실히 찍히면 확고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에는 이런 식의 확고한 기준이 되는 법인(..
임제 법문의 궁극적 의미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성상태현(性相台賢, 성은 법성法性을 말하며 삼론종三論宗을 의미, 상은 법상法相을 말하며 유식종을 의미, 태는 천태종天台宗, 현은 현수종賢首宗, 즉 화엄종華嚴宗을 의미한다)의 불교경전을 골고루 섭렵하였으며, 그 이전에 이미 유교의 기본경전과 도가의 경전들을 통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책을 읽고 사색한다는 것 자체가 좌선의 용맹정진과 똑같은 삼매(三昧)입니다. 어떻게 지식을 배제하고 높은 선경(禪境)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이렇게 생각해보죠. 선종의 마지막 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이렇게 말했어요 야 이놈들아! 불법이란 본시 힘쓸 일이 없나니라 단지 평상심으로 무사히 지내면 되나니라 너희들이 옷 입고 밥처먹고 똥 싸고 오..
교와 선, 이와 사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불교를 선종이니 교종이니 운운하고, 이판(理判, 좌선수행을 주로 하는 선승)이니 사판(事判, 조직운영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이니 하여, 분별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합니다. 불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 방편적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개념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敎)’와 ‘선(禪)’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교종ㆍ선종을 운운하기 전에 불교 그 자체를 고구(考究)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학승은 선경이 높질 못하고, 좌선만 하다가 득도했다 하는 스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고 스님들이 서로서로 비난하는 소리가 잘 들려와요. 선과 교를 분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이런 ..
법상종과 댜나의 음역 속에 겹친 속뜻 그리고 이 학파는 법의 본질(性, 성)을 다루지 않고 법이 드러나는 의식의 현상(相, 상)을 다루기 때문에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 말이 다시 너무 학술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만, 겉으로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요가행파’ ‘유식종’ ‘법상종’은 거의 같은 말이라고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법상종(유식종)에 의하여 아주 복잡한 불교 인식론이 만들어졌고, 선의 궁극적 의미도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을 이해해야만 확연하게 풀린다는 것만을 얘기해놓고 넘어가겠습니다. 단순히 선사들의 공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선(댜나), 삼매, 요가 등등은 본시 인도사람들의 생활습관 속에 배어 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그러한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있는 어..
선불교와 선, 삼매, 요가의 뜻 선불교는 물론 인도불교에 없는 개념이고, 인도불교사에는 선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한 적이 없습니다. 기실 선불교라는 것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점점 중국적인 풍토와 언어와 심성, 그리고 사회적 여건에 적응하여 간 종국에, 다시 말해서 인도불교의 중국화과정 (Sinicization process)의 정점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불교의 모습일 뿐이죠. 불교의 변화상(變化相)일 뿐이죠. 산문적인 불교가 운문적인 불교로, 논리적인 불교가 초논리적 불교로, 논술적인 불교가 시적인 불교로, 다시 말해서 산스크리트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가 고전중국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로 변해가는 과정의 극단적 사례가 선불교의 제반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禪)’이라는 말은 본래 그 자체로 ..
한국의 불교는 선불교가 아니라 통불교이다 내가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에 관해서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제 함구불언(緘口不言)하려 합니다. 내가 얘기하려 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문벌싸움, 일종의 불교종파주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계에서 도를 닦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소개하고 싶었고,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이야말로 당ㆍ송의 불학을 뛰어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과 가치와 느낌의 결정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새로운 정신사적 활로라는 것을 이 조선땅의 미래세대들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내가 택한 불교의 진리체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서의 서론이 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론인 『반야심경(般..
성철 스님의 입장 성철은 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서 계율적인 엄격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경허 - 만공계열의 선풍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막행막식이 새로 태어나는 순결한 비구종단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1947년 봉암사결사를 묘사한 글을 보면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목표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성찰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매우 고귀한 측면이 분명 있고, 정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줄기 순결한 빛줄기로서 큰 효용이 있었습니다. 그러..
해인사 반살림 그런데 이 90일간의 싸움기간 동안의 한 중간이 되는 45일을 ‘반살림’ 또는 ‘반결제’ 라고도 부릅니다. 그때에는 시작이 반인데 이미 반을 잘 채웠으니 나머지 기간도 아무런 마장(魔障)이 없이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큰 행사를 합니다. 성찬을 준비하여 대중공양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방장스님께서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대의 해인사 총림 방장스님은 성철(性徹, 1912~1993, 경허 스님 돌아가신 해에 태어남)이라는 분이었는데, 해방 후 정화운동과정을 통하여 한국불교, 특히 비구승단의 중심점이 되신 분으로 엄청난 권위를 축적해온 거목이었습니다. 학인들은 감히 궐내에서 고개 들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서슬퍼런 존재였습니다. 법문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웅전 앞마당 삼중석탑(三重石塔)이 있..
안거 ‘안거(安居)’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문자 그대로 ‘편안히 거한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낸다는 뜻입니다. 사실 초기 인도불교승단에서는 6월 초부터 9월까지 약 3ㆍ4개월 동안 몬순기(monsoon期, 남서 계절풍이 부는 인도의 우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한 곳에 정주(定住)하여 수행에 전념토록 한 승단의 법규를 의미했습니다. 비가 내리면 저지대에 있는 개미, 파충류들이 모두 고지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유행(遊行)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거는 본래 우안거(雨安居)였고, 이 우안거는 여름 한 철의 하안거(夏安居)밖에는 없었습니다. 동안거(冬安居)가 ..
마조와 은봉 지앙시(江西)의 어느 절, 비탈길, 어느 젊은 스님이 손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 비좁은 비탈길 아래 켠에 거대한 체구의 노장 조실스님이 다리를 뻗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수레를 몰고가면서 황망히 외쳤습니다. “스님! 스님! 수레가 내려갑니다. 비키세요! 뻗은 다리를 오므리시라구요[청사수족請師收足]!” 조실스님이 눈을 번뜩 뜨면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이! 한번 뻗은 다리는 안 오무려[이전불축已展不縮].” 그러자 젊은 스님이 외칩니다. “한번 구른 수레는 빠꾸가 없습니다[이진불퇴己進不退].” 아뿔싸!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조실스님의 발목을 깔아뭉개고 말았습니다. 딱 부러진 발목을 질질 끌고 법당에 들어간 조실스님, 거대한 황소 같은 체구에 호랑이 같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 대..
명진의 이야기 기실 나는 명진의 삶의 일대기에 관해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구요. 성인으로 만나 생각이 통하고, 인품의 질감을 통해 교제하는 것뿐이지요. 명진에게는 당대의 여타 스님과는 달리 강렬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중이라 하면 쉽게 ‘도 닦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가치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아는데, 명진은 근원적으로 ‘도를 닦는다[修道]’하는 것을 공동체적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동의 사회적 선(Common Good)을 위하여 자기를 내던지는 일상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요. 명진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핏 경상도 액센트가 강한 것처럼 들리는데, 기실 그는 충청남도 당진(唐津) 신평면(新平面)..
정화운동(1954~62)의 한계 사실, 해방 후에 이승만정권이 종교를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저질스러운 짓들을 많이 하면서 오히려 기독교, 불교가 다 같이 망가져갔습니다. 청담이나 성철 스님으로 대변되는 불교정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그 내면에 ‘봉암사결사’와 같은 훌륭한 정신도 있었지만 결국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불교계의 자생적 자정 노력이 펼쳐지지 못한 채, 공권력의 폭력에 의존케 됨으로써 결국 파행적인 해결책만 도모되었고, 불교정신 자체의 타락만 초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총무원장이라는 권좌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저열한 스님들의 행태에까지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 내가 ‘진짜 중’이라는 말 한마디의 의미를 풀려고 했다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이제 그 의미를 말해보도록 하죠...
경허의 선풍이 20세기 조선불교를 지켰다 경허라는 존재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조선왕조가 하나의 문명체로서 그 유기체적 수명을 다해가는 그 처참한 쇠락의 폐허에서 피어난 화엄(꽃)이라는 데 있습니다. 1910년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제령 7호(총독부령 83호)로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반포하였습니다. 경허는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시적(示寂)하였습니다. 그 뒤로 한국불교는 30개의 본ㆍ말사체계로 개편되면서 조선총독부의 행정체계 하에 소속되었고 대처가 장려되었습니다. 한국불교를 근원적으로 왜색화시키려는 다양한 조처가 취해졌지만 크게 생각해보면 겉모양상의 변화와는 달리 그 내면의 불교정신은 일제강점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
만공과 동학사 야간법회 경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설 속에서 시비ㆍ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경허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경허라는 한 인간의 개별적 이야기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표하는 시대정신(Zeitgeist), 한국불교의 새로운 분위기, 그 심오한 선풍(禪風)의 클라이막스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공이 동학사에서 진암 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이때 경하는 동학사를 떠나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허는 진암 노스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어린 만공은 9척 거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