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24 (42)
건빵이랑 놀자
8. 바르트의 풍크툼: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
7. 색 & 계(Lust & Caution): 욕망과 금지의 끝없는 이중주 욕망과 징계는 언제나 커플처럼 붙어 다닌다. 『색 & 계』의 영어 제목은 “Lust and Caution”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Lust’라는 단어를 보며 채워지지 않는 은밀한 열망을 떠올리고 ‘Caution’이라는 단어를 보며 욕망에 천형처럼 따르는 가혹한 징계를 떠올린다. 영화 제목처럼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욕망과 경계, 열망과 경고, 정욕과 징벌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더없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에도 “이러다 들키겠어요”라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삽시간에 깨버리는가 하면, 오랫동안 서로를 목마르게 그리워했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앞으로 다신 이 방에 ..
6. 세 번째 풍크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그녀의 암살 대상이자 마지막 사랑, ‘이 선생’뿐이다. 그녀는 우 선생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이제 연극과 현실을 구별할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 선생은 ‘첩보원답지 않은’ 그녀의 아마추어적 정직함에 놀라 그녀의 고백 자체를 거부한다. “됐다! 그만해라!”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소름이 끼치고, 너무 투명해서 듣는 것만으로..
5. 세 번째 풍크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
3. 첫 번째 풍크툼(punctum): 낭만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파열되다 이 선생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의 밀회는 더없이 스릴 넘치는 두뇌 게임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막 부인이 이 선생을 옷가게로 유인하여 두 사람이 첫 번째 밀회를 갖게 되는 날. 그녀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고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살짝 밀며 이 선생 앞에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짧고 덧없는 한숨을 쉰다. “고치니까 너무 붙네요.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에 숨 막혀 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장 지아즈가 아닌 막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정확히 이 선생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둡고 깊은 밀실로 그녀를 유인할 듯이 탐욕..
2. 탐색전: 무대 위의 연극 vs 무대 뒤편의 침묵 섹스 자체가 삶의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의 알레고리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그녀에게』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섹스는 단지 몸과 몸의 얽힘이 아니라 삶과 삶의 뒤얽힘이었고 인간의 근원적 소통불가능성의 뼈아픈 확인이었다. 그러나 『색 & 계』에서 그들의 섹스의 이미지가 유독 슬프고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장 지아즈, 즉 막 부인(탕웨이)의 캐릭터 탓인 것 같다. 그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발랄하고 앙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쾌활한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감각의 제국』의 여주인공 마츠다 에이코처럼 나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의외로 강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장 ..
색 & 계와 롤랑 바르트 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1.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완고하게 닫혀 있던 이 세계가,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휘청,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바닷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헝클어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라는 치명적인 가사로, 안 그래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멍든 가슴을 다시 한 번 살뜰하게 할퀴어 주었다.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
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
14. 진정한 애도의 순간 상실된 대상의 그림자가 주체에게 드리워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리비도의 상당 부분을 탐구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중에서 ‘애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어쩌면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가장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아픔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고 다만 그 끝나지 않는 슬픔의 통로를 함께 나란히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애도의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이 슬픔의 늪을 건너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루디는 비로소 그 ‘슬픔의 친구’를 찾아낸 것이다. 부토 소녀 유와 함께 루디는 아내를 찾아..
13. 나는 너야(I am you) 루디: (길을 걷다가 ‘Free Hug’ 팻말을 든 젊은이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프리 허그!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루디: 정말 공짜라고요? 젊은이: (웃으며) 네. 루디: (그래도 의심이 가지지 않은 듯 주춤주춤 서성거린다) 젊은이: (자신도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루디: (주춤주춤 다가가 젊은이에게 안긴다) 젊은이: (루디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루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평생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모범 사원 루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를 함께 관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루디, 춤이나 노래 같은 유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루디. 그가 변하고 있..
12.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 유: 난 죽은 사람과 춤을 춰요. 루디: 그게 누군데? 유: 우리 엄마요 루디: 언제 돌아가셨니? 유: 일 년 전 어제요. 엄만 늘 전화를 좋아했어요. 분홍색 전화기요. 엄마는 항상 통화중, 가족들과요. 루디: 우리 집사람도 엄청 전화를 했지. 애들 셋과, 항상 통화중. 유: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에요. 언제나요. 엄만 제 속에 있어요. 열일곱 살 소녀 ‘유’는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어 보이지만, 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기운은 아내가 죽은 이후로 늘 춥고 외로웠던 루디의 마음을 감싸준다. 분홍색 전화기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소녀의 춤. 그 사랑스런 광경을 보며 루디는 전..
11. 그림자의 춤: 나를 벗어 너를 입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 오늘날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야 할 개념도, 죽음의 순간이 지니고 있던 공적인 장엄한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 당연히 가족들과 의사의 첫 번째 임무는, 죽음을 면할 길 없는 환자에게 용태의 위중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더 이상 알아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관습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요구했다. (……) “나는 적어도 그가 결코 죽음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라는 한..
10. ‘과격하고 당혹스러움’과 ‘아름답고 사랑스러움’ 사이 루디: (인사불성으로 취해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에게) 언제 이렇게까지 마셨니? 칼: 다들 항상 아빨 챙겨야 하고, 아빤 항상 주인공이셔야 하죠. 엄만 항상 말씀하셨죠. 네 아빨 생각해! 불쌍한 네 아빠! 아빨 좀 가만 두렴! 피곤하셔! 너무 열심히 일해서 사무실 뜨기도 힘드셔! 루디: 됐다. 그만해라. 칼: 아버진 평생 그렇게 일에 숨어 지내셨죠! 진짜 엄마를 알지도 못하고! 아빤 엄마를 몰랐어요! 바보 같은 아빠. 나가요! 쓰레기차에나 가요! 거기 소속이잖아요. 재활용도 잊지 말구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겪는 슬픔을 그려낸다. 부부 금슬도 더없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남매도 더없..
9. 아내의 영혼과 교신할 수 있는 내면의 주파수를 찾아내다 죽음의 풍부한 겉치레는 오늘날 후퇴했고, 그래서 죽음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죽을 수 있으며, 불행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생명보험을 신뢰한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들 자신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86쪽. 죽음 자체만큼이나 죽음에 소비되는 비용을 걱정하는 각종 준비들에 현대인은 익숙해졌다. 크고 작은 모든 죽음의 징후에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건강보험, 죽음 이후의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상조 회사들,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불안까지 걱정하는 생명보험,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죽음을 아름..
8.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칼: (어머니가 평생 와보고 싶어 하시던 도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왜 두 분이서 한 번도 안 와보셨어요? 루디: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 네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가 빼앗았어. 죽은 사람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죽은 자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각종 업무와 부채관계 정리, 유언의 집행, 장례 관련 업무들……. 그 수많은 죽음의 공식 절차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는 가장 아픈 절차가 남아 있다. 바로 떠나간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애도의 절차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장례 절차보다 더..
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우울증 환자는 ‘명명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말로도 의미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이유다. 이 사람은 말을 해야 할 아무런 의미도 보지 않는다.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옮김,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4, 121쪽. 누군가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후에야 그 사람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새로운 애도의 표어는 ‘표현할 수 없는 애도’를 단 세 글자로 압축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대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지못미’라는 세 글자만으로 남겨진 자의 슬픔은 축약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못..
6. 그렇게들 흘러간다 검은 신이여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박인환, 『검은 신이여』 중에서 어김없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밤, 트루디는 뜬금없이 남편에게 춤을 춰보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녀가 늘 입는 오렌지 빛 기모노 잠옷을 입은 채로, 그녀는 마뜩찮아 하는 남편의 손을 잡아 부토를 춘다. 마치 그들의 저물어가는 사랑을 향한 진혼곡처럼, 발틱 해변으로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한밤중에 춤..
5.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다 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트루디는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마음속으로 혹독한 이별의 예식을 치러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틱 해변에서 남편과 거닐며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눠왔지만 유일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트루디는 이 마지막 여행에서 그의 죽음 뒤에 펼쳐질 바닥없는 슬픔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알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기나긴 어둠의 나날들을 이미 속속들이 관찰한 듯 철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녀가 다녀올 수 없는 슬픔의 극한까지 홀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그녀 마음에 새겨진 어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별의 슬..
4.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 정신분석 안에 인간의 가슴(heart)은 어디에 있는가? (……)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서 피분석자나 환자들에게 말할 때 가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종종 생생한 반응과 함께, 무언가가 소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슴의 필요들, 바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방어하고 있는 그것의 상처들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에는 대체로 생생한 충격이 발생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드나 에고나 수퍼에고를 말하는 것보다, 심지어는 무슨 리비도적 자아니 또는 내적 파괴자로 인격화된 반-리비도적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잘 접촉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수..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애도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7쪽. 남편의 임박한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트루디.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본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흔적들이 하나하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애도’도 ‘우울’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고, 우울은 사라진 대상과 혼자 남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상실감에 완전..
2. ‘바람직한’ 이별은 가능할까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똑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애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건 구경도 아닐 테니까. 그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 아내 트루디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의사는 이미..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1. 알고는 싶지만 배울 순 없는 이별학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내 몸 안에 있지만, 내가 더 이상 없으면 그 사람은 어디 있게 되지?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내게 허락된 모든 정규교육을 마친 후 나는 자주 이런 몽상에 빠지곤 했다. 만약 나에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과목을 만들어낼까. 학교에서..
19.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 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18. ‘아름다운 망상’과 ‘참담한 삶’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중세 서양의 파우스트 전설과 이 전설을 소재로 한 괴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
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
16.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고독의 창조성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 더 고상한 무의식, 좀 더 천박한 무의식, 좀 더 추악한 무의식, 좀 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
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돌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 더 일찍 ‘의..
14.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참담한 실패로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
13.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로 무너진 무한한 자유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
12. 정신분열을 대하는 내쉬와 융의 차이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11. 내과의사가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리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
10.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한한 자유 존 내쉬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논문은 그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작성한 27페이지짜리 짧은 박사논문이었다. 처음에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의 아이디어는 너무 단순해서 학자들의 눈에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너무 협소한 테마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이론의 가치는 너무 명백해서 내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쉬 균형의 엄청난 영향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전략적 게임과 관련된 내쉬 균형 개념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생물학에서조차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뉴 팔그레이브』는 내쉬 이론의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쉬 ..
9.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8. 융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
7. 내쉬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흔히 천재들은 외로운 거인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 도시 특정 분야에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로마 철학자 발레이우스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뉴턴과 로크,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후대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창조적 천재들은 젊은이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받은 잠재적 천재들은 앞선 천재들의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완성하려 든다고 발레이우스는 추측했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170쪽.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일생..
6.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
5.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
4. 융의 독백: 신경증 덕에 배웠다 우리가 만날 또 한 명의 천재 칼 구스타프 융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우리는 저마다 학창시절 학교에 가기 싫거나 숙제나 시험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종 ‘꾀병’을 생각해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칼 융은 학교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난데없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키곤 해서 학교를 반년 이상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이 소년 융에게는 행복한 고립의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했던 어린 소년 융. 어떤 의사는 융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융은 의사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며 달콤한 몽상에 빠져 지내..
3. 내쉬의 독백: 강력한 우상이 필요할 뿐 친밀한 스승은 필요치 않다 내쉬는 달랐다. 그가 어떤 예감을 갖기만 하면, 어떠한 인습적인 비판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건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배경 지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정신력, 그런 맹목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달리 본 적이 없다. -존 내쉬의 지인, 모저의 회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 갓 스무 살의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수업도 듣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왜 수업을 듣지 않느냐는 동료의 질문에 존 내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강의는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잠재적인 창의력을 파괴해.” 존 내쉬는 자..
2. 고독은 천재의 학교다? 지금 여기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때 아닌 접속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세계를 뒤흔든 ‘천재’이기 때문만도, 풍부한 심리학적 요소들로 인생을 채우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으로 존 내쉬의 삶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위함도 아니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무의식의 카오스를 의식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했고 그 결과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존 내쉬는 무의식이 의식을 습격하는 강도가 해일이나 행성충돌의 충격에 육박하자,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정신분열증은 무의식에 습격당한 의식의 처절한 실패처럼 ..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1. 내부의 서사가 외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인간들 위대한 사람은 (……) 여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면 혼자 간다. (……)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에서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느라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