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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5. 우화로 글을 쓴 이유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타자와 조우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조우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하나는 차이보다 동일성을 긍정하는 경우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를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삶의 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장자처럼 동일성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경우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를 삶의 짝으로 긍정하고 타자에 맞게 자신의 동일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경우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라는 고전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선입견, 예를 들면 ‘장..
4. 차이를 통할 때만 새로운 나로 생성된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언젠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사람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과 그 사람의 내면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타자를 알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내가 이미 그 사람과 삶의 수준에서 조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에 맞추어 무의식적인 삶의 수준에서 자신을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첫 만남의 설레임 속에서 가능했던 “그(혹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경험은 아..
3. 사유의 한계에서만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사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는 내가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좌절될 때, 즉 사유가 스스로 부적절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실 타자는 우리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와 직면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은 타자란 항상 사유의 한계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말해준다. 사유라는 더듬이로 ..
2. community가 아닌 society에 살려 했던 사람 왜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국이라는 다른 공동체의 전통에 속하는 사상가, 그것도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를 다루려고 하는 것일까? 장자가 성인(聖人)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중국 철학사에서 공인된 그의 중요성 때문인가? 한 마디로 왜 지금 우리는 장자와 대화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장자의 삶과 그의 사상이 주는 고유성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자가 중국이란 하나의 통일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회고적으로(retrospectively) 재구성될 경우에만 그는 중국이라는 단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실 그는 많은 나라들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복수적..
1.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1. 고전과 조우하여 전혀 다르게 생성되기 위해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책만큼 시간과 생성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책은 우리에게는 미래의 시간이자, 나를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다. 이 책의 20페이지를 읽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미 읽은 19페이지들이라는 과거와 지금 펼쳐져 있는 20페이지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많은 미래가 생성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읽었다는 이 19페이지들도 흘러간 과거라기보다는 어느 때이든 미래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읽었던 앞 페이지들도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철학 해설과 비판 총서를 발간하며 오랫동안 중국 한자 문명권의 영향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중국 철학은 우리 삶과 사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아련한 추억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서양문명권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왜 우리는 지금도 중국의 많은 철학자들과 만나야만 하는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이제 우리에게 충분히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낯설음과 거리감은 중국문명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삶과 사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철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지 못했었다. 반면 지금 ..
21년 상반기 공부여정기 올해 공부는 2월 10일에 떨어졌다는 최종 결과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모든 임용시험 준비생들이 그렇듯 한 해의 모든 일정이나 계획은 시험 일정에 따라 진행된다. 12월이면 남들은 연말이라고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여러 행사들을 할 테지만 우리에겐 시험 결과가 나오는 그 순간이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날이다. 그러니 보통 1차 시험 결과가 나오는 12월 말이나, 2차 시험 결과가 나오는 2월초에 한 해를 마무리 짓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셈이다. ▲ 시험준비생에게 1년은 시험 보는 날과 결과 나오는 날밖에 없다. 다시 시작할 자양분을 얻기 위해 그렇다고 바로 공부를 시작하긴 싫었다. 어느새 공부는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 먹는 밥처럼 그냥 정..
8화: 비해당에 모인 거필들 一日, 大君於妻等曰: “天下百家之才, 必就安靜處, 做工而後可成. 都城門外, 山川寂寥, 閻落稍遠, 於此做業, 可以專精.” 卽搆精舍十數間于其上, 扁其堂曰: ‘匪懈堂’, 又築一壇于其側, 名曰: ‘盟詩壇’, 皆顧名思義之意也. 一時文章鉅筆, 咸集其壇, 文章則成三問爲首, 筆法則崔興孝爲首. 雖然, 皆不及於大君之才也. 해석 一日, 大君於妻等曰: 하루는 대군이 저희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天下百家之才, 必就安靜處, “천하의 모든 재사(才士)는 반드시 안정한 곳에 나아가서 做工而後可成. 갈고 닦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법이니라. 都城門外, 山川寂寥, 閻落稍遠, 도성 문밖은 산천이 고요하고, 인가에서 좀 떨어졌을 것이니, 於此做業, 可以專精.” 거기에서 업을 닦으면 전심해지고 정밀해질 수 있을 것..
89화: 꿈속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다 柳泳亦醉暫睡, 小焉, 山鳥一聲, 覺而視之, 雲烟滿地, 曉色蒼茫. 四顧無人, 只有金生所記冊子而已. 泳悵然無聊, 收神冊而歸, 藏之篋笥. 時或開覽, 則茫然自失, 寢食俱廢, 後遍遊名山, 不知所終云爾. 『國立圖書館本』 해석 柳泳亦醉暫睡, 小焉, 류영도 술이 취하여 자다가 山鳥一聲, 覺而視之, 산새의 우는 소리에 깨서 사면을 바라보니, 雲烟滿地, 曉色蒼茫. 구름과 연기는 천지에 가득하고 새벽빛은 푸르고 아득했다. 四顧無人, 只有金生所記冊子而已.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 김진사가 적은 책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泳悵然無聊, 收神冊而歸, 藏之篋笥. 류영은 슬프고 무료하여 때때로 열어보고는 돌아와 상자 속에 감춰뒀다. 時或開覽, 則茫然自失, 寢食俱廢, 때때로 열어 보면 ..
88화: 김진사와 운영이 마지막으로 지은 시 進士醉倚雲英之身, 吟一絶句曰: “花落宮中燕雀飛 春光依舊主人非 中宵月色凉如許 碧露未沾翠羽衣” 雲英繼吟曰: “故宮柳花帶新春 千載豪華入夢頻 今夕來遊尋舊跡 不禁哀淚自沾巾” 해석 進士醉倚雲英之身, 吟一絶句曰: “花落宮中燕雀飛 春光依舊主人非 中宵月色凉如許 碧露未沾翠羽衣” 김진사는 술이 취하여 운영에 몸에 기대여 절구 한 수를 읊는다. 花落宮中燕雀飛 꽃 떨어진 궁중에 제비와 참새가 나니, 春光依舊主人非 봄빛은 예와 같되 주인은 아니구나. 中宵月色凉如許 한밤 달빛은 차기가 이러한데, 碧露未沾翠羽衣 푸른 이슬은 가볍게 푸른 털옷을 적시네. 雲英繼吟曰: “故宮柳花帶新春 千載豪華入夢頻 今夕來遊尋舊跡 不禁哀淚自沾巾” 운영도 따라 읊는다. 故宮柳花帶新春 고궁의 버들개지는 새 봄빛을 ..
87화: 유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라고 부탁하다 乃揮淚而執柳泳之手曰: “海枯石爛, 此情不泯, 地老天荒, 此恨難消. 今夕與子相遇, 攄此悃愊, 非有宿世之緣, 何可得乎? 伏願尊君, 俯拾此藁, 傳之不朽, 而勿浪傳於浮薄之口, 以爲戱翫之資, 幸甚!” 해석 乃揮淚而執柳泳之手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류영의 손을 잡는다. “海枯石爛, 此情不泯,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다 닳아도 이 정은 없어지지 않고, 地老天荒, 此恨難消. 천지가 노쇠하고 황폐해져도 이 한은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今夕與子相遇, 攄此悃愊, 오늘밤은 그대와 상봉하여 이처럼 진실하고 정성스런 일을 펼쳤지만 非有宿世之緣, 何可得乎? 전생의 인연은 없으니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伏願尊君, 俯拾此藁, 傳之不朽, 엎드려 원하오니 그대께서는 이 초고(草稿)를..
86화: 천상의 사람이라 밝히다 柳泳曰: “然則子皆爲天上之人乎?” 金生曰: “吾兩人素是天上仙人, 長侍玉皇前, 一日, 帝御太淸宮, 命我摘玉園之果, 我多取蟠桃瓊玉, 私與雲英而見覺, 謫下塵寰, 使之備經人間之苦. 今則玉皇已宥前愆, 俾陞三淸, 更侍香案前. 而時乘飇輪, 復尋塵世之舊遊耳.” 해석 柳泳曰: “然則子皆爲天上之人乎?” 류영이 물었다. “그러면 당신들은 천상의 사람이십니까?” 金生曰: “吾兩人素是天上仙人, 김진사가 답했다. “우리들은 원래 천상의 선인으로 長侍玉皇前, 오랫동안 옥황상제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습니다. 一日, 帝御太淸宮, 命我摘玉園之果, 하루는 상제께서 태청궁(太淸宮)에서 우리들에게 옥원(玉園)의 과실을 따오라 명하셔서 我多取蟠桃瓊玉, 私與雲英而見覺, 우리는 많이 반도(蟠桃)와 경옥(瓊玉)을 취..
85화: 김진사와 운영이 지상에 내려온 이유 寫畢擲筆, 兩人相對悲泣, 不能自抑. 柳泳慰之曰: “兩人重逢, 志願畢矣. 讐奴已除, 憤惋洩矣. 何其悲痛之不止耶? 以不得再出人間而恨乎?” 金生垂淚而謝曰: “吾兩人皆含怨而死. 冥司怜其無罪, 欲使再生人世, 而地下之樂, 不減人間. 況天上之樂乎! 是以不願出世矣. 但今夕之悲傷, 大君一敗, 故宮無主人, 烏雀哀鳴, 人跡不倒, 已極悲矣. 況新經兵火之後, 華屋成灰, 粉墻摧毁, 而唯有階花芬茀, 庭草藪榮, 春光不改昔時之景敬, 而人事之變易如此, 重來憶舊, 寧不悲哉!” 해석 寫畢擲筆, 兩人相對悲泣, 不能自抑. 김진사는 여기까지 적고 붓을 던지자, 두 사람은 서로 붙들고 울며 자제하지 못한다. 柳泳慰之曰: “兩人重逢, 志願畢矣. 류영은 그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두 분이 여기서 다시 만남..
84화: 부처님께 간절히 빌어 특이는 인과응보를 받게 되다 沐浴潔身, 而就佛前面拜, 叩頭薦香, 合掌而祝曰: “雲英死時之約, 慘不忍負, 使特奴虔誠設齋, 冀資冥佑, 今聞所祝之言, 極其悖惡. 雲英之遺願, 盡歸虛地. 故小子敢復祝願. 能使雲英復生, 使金生得免如此之寃痛. 伏望世尊, 殺特奴, 着鐵架, 囚于地獄. 伏乞世尊, 苟如此發願, 則雲英爲尼, 燒十指, 作十二層金塔, 金生爲僧舍五戒, 創三巨刹, 以報其恩.” 祝訖, 起而百拜, 叩頭而出. 後七日, 特壓於陷井而死. 自是我無意於世事. 沐浴潔身, 着新衣, 臥于安靜之房, 不食四日, 長吁一聲, 因遂不起. 해석 沐浴潔身, 而就佛前面拜, 나는 목욕재계하고 불전에 나아가, 면배하여 叩頭薦香, 合掌而祝曰: 이마를 바닥에 대고 분향하며 합장하고 축원하였소. “雲英死時之約, 慘不忍負, “..
83화: 특이의 만행을 알게 되다 適當槐黃之節, 雖無赴擧之意, 托以做工. 上淸寧寺, 留數日, 細聞特之事, 不勝其憤, 而無特如何. 해석 適當槐黃之節, 雖無赴擧之意, 托以做工. 마침 백중일을 맞아 비록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으나 공부를 힘썼소. 上淸寧寺, 留數日, 청녕사에 올라가 수 일간 체류하는데, 細聞特之事, 不勝其憤, 여러 승려에게 특이가 했던 바를 들었고 다시금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而無特如何. 특이 없으니 어이하리오. 인용 목차 전문 1화: 수성궁과 근처 모습의 묘사 2화: 술기운에 류영 소동파 시를 읊다 3화: 류영, 술 취한 채 이상한 기척을 느끼다 4화: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 5화: 류영, 운영과 김 진사를 만나다 6화: 깊은 사연을 가진 운영과 김 진사 7화: 안평대..
82화: 마지막까지 거짓말로 진사를 우롱하다 特歸語我曰: “雲英閣氏, 必得生道矣. 設齋之夜, 現於奴夢曰, 至誠供佛, 不勝感謝. 拜且泣之, 寺僧之夢, 亦皆然矣” 我信之其說矣. 해석 特歸語我曰: “雲英閣氏, 必得生道矣. 특이는 돌아와서 내게 말했소. “운영 각시는 반드시 살 방도를 얻을 것입니다. 設齋之夜, 現於奴夢曰, 설재(設齋)하던 날 밤 저의 꿈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至誠供佛, 不勝感謝. ‘지성으로 불공하여주니 감사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拜且泣之, 寺僧之夢, 亦皆然矣” 절하면서 우시었고, 사찰 승려들의 꿈도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我信之其說矣. 나는 저는 그 말을 믿고 실성통곡하였소. 인용 목차 전문 1화: 수성궁과 근처 모습의 묘사 2화: 술기운에 류영 소동파 시를 읊다 3화: 류영, 술 취한 ..
81화: 또 배신을 때린 특이 卽上寺, 三日叩臀而臥, 招僧謂之曰: ‘四十石之米何用? 盡入於供佛乎? 今可多備酒肉, 廣招俗客而饋之宜矣.’ 適有村女過之, 特强劫之. 留宿於僧堂, 已過數十日, 無意設齋. 寺僧皆憤之. 及其建醮日, 諸僧曰: ‘供佛之事, 施主爲重, 而施主不潔如此, 事極未安, 可沐浴於淸川, 潔身而行禮可矣.’ 特不得已出, 暫以水沃濯, 而入跪於佛前祝曰: ‘進士今日速死, 雲英明日復生, 爲特之配.’ 三晝夜發願之設, 唯此而已. 해석 卽上寺, 三日叩臀而臥, 招僧謂之曰: 그러나 특이는 절간에 올라가 삼일 간 엉덩이를 두드리며 누웠다가 승려를 불러 말했소. ‘四十石之米何用? 盡入於供佛乎? “사십 석의 쌀을 어디다 쓰겠소? 불공에 다 바치겠는가? 今可多備酒肉, 廣招俗客而饋之宜矣.’ 오늘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세속..
80화: 죽은 운영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특을 통해 사찰에서 예식을 드리게 하다 進士曰: “雲英自決之後, 一宮之人, 莫不號慟, 如喪考妣. 哭聲出於宮門之外. 我亦聞之, 氣絶久矣, 家人將招魂發喪, 一邊救活, 日暮時乃甦. 方定精神, 自念事已決矣. 無負供佛之約, 庶慰九泉之魂. 其金釧寶鏡及文房諸具盡賣之, 得四十石之米, 欲上淸寧寺設佛事, 而無可信使喚者, 呼特而言曰: ‘我盡宥前日之罪, 今爲我盡忠乎?’ 特伏泣而對曰: ‘奴雖冥頑, 亦非木石, 一身所負之罪, 擢髮難數. 今而宥之, 是枯木生葉, 白骨生肉, 敢不爲進士致死乎!’ 我曰: ‘我爲雲英, 設醮供佛, 以冀發願, 而無信任之人, 汝未可往乎’ 特曰: ‘謹受敎矣’ 해석 進士曰: “雲英自決之後, 一宮之人, 진사가 말했습니다. “운영이 자결한 후에, 궁의 사람들은 莫不號慟, 비통해 ..
79화: 운영, 결국 자살하다 小玉跪而告泣曰: “前日浣紗之行, 勿爲於城內者, 妾之議也. 紫鸞夜至南宮, 請之甚懇, 妾怜其意, 排群議從之, 雲英之毁節, 罪在妾身, 不在雲英. 伏願主君, 以妾之身續雲英之命.” 大君之怒稍解, 囚妾于別堂, 而其餘皆放之;其夜妾以羅巾, 自縊而死. 進士把筆而記, 雲英引古而敍, 甚詳悉. 해석 小玉跪而告泣曰: 소옥이 다시 꿇어 고하며 물었습니다. “前日浣紗之行, 勿爲於城內者, 妾之議也. “전일 완사(浣紗)의 여행을 성내로 가게 한 것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紫鸞夜至南宮, 請之甚懇, 자란이 밤중에 남궁에 와서 간곡히 청함에, 妾怜其意, 排群議從之, 저도 그 심중을 알면서도 여러 사람의 뜻을 물리치고 자란을 좇았으니, 雲英之毁節, 이것이 운영의 훼절한 동기이옵니다. 罪在妾身, 不在雲英. 죄는 ..
78화: 운영의 대답내용 妾之招曰: “主君之恩, 如山如海. 而不能苦守貞節, 其罪一也. 前日所製之時, 見疑於主君, 而終不直告, 其罪二也. 西宮無罪之人, 以妾之故, 同被其罪, 其罪三也. 負此三大罪, 生亦何顔? 若或緩死, 妾當自決, 以待處分矣.” 大君覽畢, 又以紫鸞之招, 更展留眼, 怒色稍霽. 해석 妾之招曰: “主君之恩, 如山如海. 제가 공초했습니다. “주군의 은혜는 산 같으며, 바다 같습니다. 而不能苦守貞節, 其罪一也. 그럼에도 불구하옵고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 죄의 하나이요, 前日所製之時, 見疑於主君, 전후 두 번이나 글을 지을 때에 주군의 의심을 받으면서 而終不直告, 其罪二也. 끝내 정직하게 고하지 않은 것이 죄의 둘이요, 西宮無罪之人, 以妾之故, 同被其罪, 其罪三也. 서궁의 무죄한 사람들이 첩으로 연고..
77화: 옥녀의 대답내용 玉女招曰: “西宮之榮, 妾旣與焉, 西宮之厄, 妾獨免哉? 火炎崑崗, 玉石俱焚, 今日之死, 得其所死矣.” 해석 玉女招曰: “西宮之榮, 妾旣與焉, 옥녀가 공초했습니다. “서궁의 영화를 제가 이미 함께 했는데, 西宮之厄, 妾獨免哉? 서궁의 위태로움을 제가 홀로 면할 수 있겠습니까? 火炎崑崗, 玉石俱焚, 곤강의 화염이 치솟아 옥석이 함께 불타니【『서경』 「胤征」】 今日之死, 得其所死矣.” 오늘의 죽음은 그 죽을 곳을 얻은 것입니다.” 인용 목차 전문 1화: 수성궁과 근처 모습의 묘사 2화: 술기운에 류영 소동파 시를 읊다 3화: 류영, 술 취한 채 이상한 기척을 느끼다 4화: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 5화: 류영, 운영과 김 진사를 만나다 6화: 깊은 사연을 가진 운영과..
76화: 자란의 대답내용 鶿鸞招曰: “今日之事, 罪在不測, 中心所懷, 何忍諱之. 妾等皆閭巷賤女. 父非大舜, 母非二妣, 則男女情欲, 何獨無乎? 穆王天子, 而每思瑤臺之樂, 項羽英雄, 而不禁帳中之淚, 主君何使雲英獨無雲雨之情乎? 金生乃當世之端士也, 引入內堂, 主君之事也. 命雲英奉硯, 主君之命也. 雲英久鎖深宮, 秋月春花, 每傷性情, 梧桐夜雨, 幾斷寸腸. 一見豪男, 喪心失性, 病入骨髓, 雖以長生之樂, 難以見效. 一夕如朝露之溘然, 則主君雖有惻隱之心, 顧何益哉? 妾之愚意, 一使金生得見雲英, 以解兩人之怨結, 則主君之積善, 莫大乎此. 前日雲英之毁節, 罪在妾身, 不在雲英. 妾之一言, 上不欺主君, 下不負同儕. 今日之死, 死亦榮矣. 伏願主君, 以妾之身續雲英之命矣.” 해석 鶿鸞招曰: “今日之事, 罪在不測, 자란이 공초했습니다. ..
75화: 비취의 대답내용 翡翠招曰: “主君撫恤之恩, 山不高, 海不深. 妾等憾懼, 惟事文墨絃歌而已. 今不洗之惡名, 偏及西宮, 生不如死矣, 惟伏願速就死地矣.” 해석 翡翠招曰: “主君撫恤之恩, 비취가 공초했습니다. “주군의 무휼(撫恤)하신 은혜는 山不高, 海不深. 산이 높지 않으며 바다가 깊지 않습니다. 妾等憾懼, 惟事文墨絃歌而已. 저희들은 서글픔과 두려움으로, 글을 짓고 거문고에 노래로 일을 삼을 뿐입니다, 今不洗之惡名, 偏及西宮, 지금 씻을 수 없는 악명이 서궁에 미쳤으니, 生不如死矣, 惟伏願速就死地矣.” 살아가는 것은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오직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죽기를 바랄 뿐이외다.” 인용 목차 전문 1화: 수성궁과 근처 모습의 묘사 2화: 술기운에 류영 소동파 시를 읊다 3화: 류영, 술 취한 ..
74화: 은섬의 대답내용 銀蟾招曰: “男女情欲, 稟於陰陽, 無貴無賤, 人皆有之. 一閉深宮, 形單隻影, 看花掩淚, 對月消魂, 則可知人間之樂, 而所不爲者, 豈力不能而心不忍哉? 唯畏主君之威, 固守此心, 以爲枯死. 宮中之計, 今無所犯之罪, 而欲置之於死地, 妾等黃泉之下, 死不暝目矣.” 해석 銀蟾招曰: “男女情欲, 稟於陰陽, 은섬이 공초했습니다. “이성 간의 정욕은 음양에서 타고난 것으로, 無貴無賤, 人皆有之. 상하귀천이 없이 사람은 모두 소유하고 있습니다. 一閉深宮, 形單隻影, 그런데 한번 깊은 궁에 들면, 한 마리 외로운 새가 되어, 看花掩淚, 對月消魂, 꽃을 보면 눈물을 가리고, 달을 대하면 넋을 사르니, 則可知人間之樂, 인간의 즐거움을 알 수 있으니, 而所不爲者, 豈力不能而心不忍哉?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
73화: 운영과 친하던 다섯 명의 궁녀들이 죽을 고비에 처하다 此言傳播, 入於宮中, 告于大君. 大君大怒, 使南宮人搜西宮, 則妾之衣服寶貨盡無矣. 大君招致西宮侍女五人于庭中, 嚴俱刑杖於眼前, 下令曰: “殺此五人, 以警他人.” 又敎執杖者曰: “勿計杖數, 以死爲準.” 五人曰: “願一言而死.” 大君曰: “所言何事? 悉陳其情.” 해석 此言傳播, 入於宮中, 告于大君. 곧 이 일이 소문이 나서 궁인의 귀에 전해지고, 대군에게 알렸습니다. 大君大怒, 使南宮人搜西宮, 대군은 매우 화내며 남궁 사람들 하여금 서궁을 수색하게 하여, 則妾之衣服寶貨盡無矣. 제 의복과 보화가 다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大君招致西宮侍女五人于庭中, 대군은 서궁의 시녀 다섯 명을 잡아다 뜰에 꿇리고, 嚴俱刑杖於眼前, 下令曰: 눈앞에서 형장(形杖)..
72화: 궁지에 몰린 특이가 궁궐 근처에서 진사를 음해하다 特自知其罪, 問於宮墻外盲人曰: “我向者晨過此宮墻之外, 有人自宮中踰西垣而出. 我知其爲賊, 高聲進逐, 其人棄所持物而走. 我持歸藏之, 以待本主之來推. 吾主索之廉隅, 聞吾得物, 躬來索出, 吾答以無他寶, 只得釧鏡二物云, 則主人躬入搜之, 果得二物. 亦其無饜, 方欲殺之, 故吾欲走去, 走之吉乎?” 盲曰: “吉矣.” 驥隣在旁, 多聞其語, 謂特曰: “汝主何許人? 虐奴如是耶?” 特曰: “吾主年少能文, 早晩應爲及第者, 而爲貪婪如此, 他日立朝, 用心可知.” 해석 特自知其罪, 問於宮墻外盲人曰: 특이는 자기의 죄를 아는지라, 궁 밖에 있는 장님에게 점을 쳤습니다. “我向者晨過此宮墻之外, “지난 날, 아침 전에 궁 밑으로 지나가려 할 때, 有人自宮中踰西垣而出. 궁중에서 담을..
71화: 특이의 계책을 간파하다 進士知特之所爲, 率奴十餘名, 不意圍其第搜之, 則只有金釧一雙, 雲南寶鏡一面. 以此爲臟物, 欲呈官推得, 而恐事泄. 不得此物, 則無以供佛之需. 心欲殺特, 而力不能制, 黽黙不語. 해석 進士知特之所爲, 率奴十餘名, 후에 진사는 특이가 했던 것을 알게 되어 노예 십 여명을 인솔하여 不意圍其第搜之, 예상치 않게 집을 둘러 수색했지만, 則只有金釧一雙, 雲南寶鏡一面. 다만 집에는 금팔찌 한 짝과 운남의 보경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以此爲臟物, 欲呈官推得, 그것을 장물로 증거 삼아 관가로 소송하고 싶었지만 而恐事泄. 그러면 모든 일이 누설될까 두려웠습니다. 不得此物, 則無以供佛之需. 그러나 보물들을 얻지 못하면 불공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心欲殺特, 그래서 김진사는 마음으로 특이를..
70화: 특이가 간교한 계책으로 진사를 속이다 一日, 特自裂其衣, 自打其鼻, 以其流血, 遍身糢糊, 被髮跣足奔入, 伏庭而泣曰: “吾爲强賊所擊.” 仍不復言, 若氣絶者然. 進士慮特死, 則不知埋寶之處, 親灌藥物, 多般救活, 供饋酒肉. 十餘日乃起曰: “孤單一身, 獨守山中, 衆賊突入, 勢將剝殺, 故捨命而走, 僅保縷命. 若非此寶, 我安有如此之危乎? 賦命之險如此, 何不速死!” 卽以足頓地, 以拳叩胸而哭. 進士懼父母知之, 以溫言慰之而送之. 해석 一日, 特自裂其衣, 어느 날 특이는 자기가 입었던 옷을 찢어버리고, 自打其鼻, 以其流血, 遍身糢糊, 자기의 코를 때려 피를 온몸에 칠하고, 被髮跣足奔入, 伏庭而泣曰: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진사의 집에 뛰어 들어가 뜰에 엎어져 울었습니다. “吾爲强賊所擊.” “제가 강도에게 맞..
69화: 특이에게 운영의 보물이 잘 있는지 묻다 進士不能盡看, 氣絶踣地. 家人急救乃甦. 特自外而入曰: “宮人答之何語, 如是其欲死!” 進士無他語, 只曰: “財寶汝愼守乎? 我將盡賣, 薦誠於佛, 以踐宿約矣.” 特還家自思曰: “宮女不出來, 其財寶天與我也.” 向壁竊笑, 而人莫知之矣. 해석 進士不能盡看, 氣絶踣地. 진사는 다 읽지도 못하고 기절하여 땅바닥에 넘어졌습니다. 家人急救乃甦. 집안사람들이 급히 구하여 김진사는 소생할 수 있었습니다. 特自外而入曰: 이에 특이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말했습니다. “宮人答之何語, 如是其欲死!” “궁인이 무슨 말로 답하였기에 이와 같이 죽고자 하십니까?” 進士無他語, 只曰: “財寶汝愼守乎? 진사는 다른 말은 않고 다만 말했습니다. “재보를 잘 지키고 있느냐? 我將盡賣, 薦誠於佛, 以..
68화: 진사에게 이별을 고하는 운영의 편지 其夜入來, 而妾病不能起, 使紫鸞迎入. 酒三行, 妾以封書寄之曰: “自此以後, 部得更見. 三生之緣, 百年之約, 今夕盡矣. 如或天緣未絶, 則當可相尋於九泉之下矣.” 進士抱書佇立, 脉脉相看, 叩胸流涕而出. 紫鸞慘不忍見, 倚柱隱身, 揮淚而立. 進士還家, 折而視之, 其書曰: “薄命妾雲英, 再拜白金郞足下. 妾以菲薄之資, 不幸以爲郞君之留意. 相思幾日, 相望幾時, 幸成一夜之交歡, 未盡如海之深情. 人間好事, 造物多猜. 宮人知之, 主君疑之, 禍迫朝夕, 死而後已. 伏願郞君, 此別之夜, 毋以賤妾置於懷抱間, 以傷思慮. 勉加學業, 擢高第, 登雲路, 揚名於世, 以顯父母. 而妾之衣服寶貨, 盡賣供佛, 百般祈祝, 至誠發願, 使三生未盡之緣分, 再續於後世, 至可至可矣.” 해석 其夜入來, 而妾病不能起..
67화: 사랑했지만, 그럴 수 없어 서로 시름시름 앓아가다 自是進士不復出入, 杜門病臥, 淚濺衾枕, 命如一縷. 特來見曰: “大丈夫死則死矣. 何忍相思怨結, 屑屑如兒女之傷懷, 自擲千金之軀乎? 今當以計, 取之不難也. 半夜入寂之時, 踰墻而入, 以綿塞其口, 負而超出, 則孰敢追我.” 進士曰: “其計亦危矣. 不如以誠叩之.” 해석 自是進士不復出入, 杜門病臥, 이후로 진사는 다시 궁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문을 굳게 닫고 병석에 누우니 淚濺衾枕, 命如一縷. 눈물이 베개를 적셔, 명이 실오라기처럼 되었습니다. 特來見曰: “大丈夫死則死矣. 특이가 보고 말했습니다. “대장부가 죽고자 하면 죽을 것입니다. 何忍相思怨結, 屑屑如兒女之傷懷, 어찌 상사하는 원한을 만들고, 아녀자의 마음까지 상하게 하고, 自擲千金之軀乎? 스스로 천금과..
66화: 죽으려는 운영과 말리는 궁녀들 妾卽下庭, 叩頭而泣曰: “主君之一番見疑, 卽欲自盡. 而年未二旬, 且以更不見父母而死, 九泉之下, 死有餘感. 故偸生至此, 又今見疑, 一死何惜? 天地鬼神, 昭布森列, 侍女五人, 頃刻不離, 淫濊之名, 獨歸於妾, 生不如死. 妾今得所死矣.” 卽以羅巾, 自縊於欄干. 紫鸞曰: “主君如是英明, 而使無罪侍女自就死地, 自此以後, 妾等誓不把筆作句矣.” 大君雖盛怒, 而中心則實不欲其死, 故使紫鸞救之而不得死. 大君出素縑五端, 分賜五人曰: “製作最佳, 是以賞之.” 해석 妾卽下庭, 叩頭而泣曰: 저는 마당에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主君之一番見疑, 卽欲自盡. “주군께서 처음 의심하실 때, 자진하고자 했습니다. 而年未二旬, 且以更不見父母而死, 하지만 나이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어 ..
65화: 안평대군, 결국 눈치 까다 一日, 大君坐西宮繡軒, 矮躑蠋盛開, 命侍女各賦五言絶句以進. 大君大加稱賞曰: “汝等之文, 日漸就將, 余甚嘉之. 而第雲英之詩, 顯有思人之意. 前日賦烟之詩, 微見其意, 今又如此, 汝之欲從者, 何人耶? 金生之樑文, 語涉疑異, 汝無乃金生有思乎.” 해석 一日, 大君坐西宮繡軒, 矮躑蠋盛開, 어느 날 대군이 서궁 수헌(繡軒)에 앉아 철쭉꽃이 활짝 피어난 것을 보고, 命侍女各賦五言絶句以進. 궁인들에게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습니다. 大君大加稱賞曰: 대군은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리며 말씀하셨습니다. “汝等之文, 日漸就將, 余甚嘉之. “너희들의 시작(詩作)이 날로 진경(進境)에 들어가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노라. 而第雲英之詩, 顯有思人之意. 그러나 다만 운영의 시에는..
64화: 자란은 떠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 말하다 卽呼紫鸞, 三人鼎足而坐, 妾以進士之計告之. 紫鸞大驚, 罵之曰: “相歡日久, 無乃自速禍敗耶! 一兩月相交, 亦可足矣, 踰墻逃走, 豈人之所忍爲也? 主君之傾意已久, 其不可去一也. 夫人之慈恤甚重, 其不可去二也. 禍及兩親, 其不可去三也. 罪及西宮, 其不可去四也. 旦天地一網罟, 非陞天入地, 則逃之焉往? 倘或被捉, 則其禍豈止於子之身乎? 夢兆之不祥, 不順言之, 而若或吉祥, 則汝肯往之乎? 莫如屈心抑志, 守貞安坐, 以聰於天耳. 娘子若年貌衰謝, 則主君之恩眷漸弛矣. 觀其事勢, 稱病久臥, 則必許還鄕矣. 當此之時, 與郞君携手同歸, 與之偕老, 計莫大焉, 不此之思耶. 當此之計, 汝雖欺人, 敢欺天乎?” 進士知事不成, 嗟歡含淚而出. 해석 卽呼紫鸞, 三人鼎足而坐, 妾以進士之計告之. 곧 자..
63화: 운영, 특을 의심하다 妾曰: “其曰長城者, 宮墻也. 其曰冒頓者, 此特也. 郞君熟知此奴之心乎?” 進士曰: “此奴素頑兇. 然於我則前日盡忠, 今日與娘結此好緣, 皆此奴之計也. 豈獻忠於始, 而爲惡於後乎?” 妾曰: “郞君之言, 如是懇眷, 何敢辭乎? 但紫鸞, 情若兄弟, 不可不告也.” 해석 妾曰: “其曰長城者, 宮墻也. 其曰冒頓者, 此特也. 제가 말했습니다. “장성(長城)은 궁장(宮墻)이오, 목돌은 특(特)입니다. 郞君熟知此奴之心乎?” 낭군께서는 특이의 마음을 익히 아시는지요?” 進士曰: “此奴素頑兇. 진사가 말했습니다. “이놈은 본디 미련하고 음흉하오. 然於我則前日盡忠, 今日與娘結此好緣, 皆此奴之計也. 그러나 나에게 전날 충성을 다했고, 오늘 낭자와 이런 호연을 맺은 건 모두 이놈의 계교이오. 豈獻忠於始, ..
62화: 불길한 느낌을 운영에게 말하다 翌日之夜, 進士入語妾曰: “可以去矣. 昨日之詩, 疑入大君之意, 今夜不去, 恐有後禍.” 妾對曰: “昨夕夢見一人, 狀貌獰惡, 自稱冒頓單于曰: ‘旣有宿約, 故久待長城之下.’ 覺而驚起, 甚怪夢兆之不祥, 郞君其亦思之乎?” 進士曰: “夢裡虛誕之事, 何可信也? 해석 翌日之夜, 進士入語妾曰: 이튿날 밤에 진사는 서궁에 들어가 제게 말했습니다. “可以去矣. 昨日之詩, 疑入大君之意, “도망가야 하오. 어제의 시에서 대군을 의심하게 하였으니, 今夜不去, 恐有後禍.” 오늘밤 도망가지 않으면 후환이 닥칠까 두렵소.” 妾對曰: “昨夕夢見一人, 제가 대답했습니다. “어젯밤에 꿈속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狀貌獰惡, 自稱冒頓單于曰: 용모가 흉악한 자칭 목돌(冒頓)이라 하는 선우(單于)가 말하기를..
61화: 대군, 김 진사의 시를 보고 의심을 품다 大君以前搆匪懈堂, 欲得佳製懸板, 而諸客之詩, 皆未滿意. 强邀進士, 設宴懇之. 一揮而就, 文不加點, 而山水之景色, 堂搆之形容, 無不盡焉, 可以驚風雨, 泣鬼神. 大君句句稱賞曰: “不意今日復見王子安!” 吟咏不已. 但一句有‘隨墻暗竊風流曲’之語, 停口疑之. 進士起而拜曰: “醉不省人事, 願爲之辭退.” 大君命童僕, 扶而送之. 해석 大君以前搆匪懈堂, 欲得佳製懸板, 대군은 전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현판을 만들어 걸려고 하였지만, 而諸客之詩, 皆未滿意. 모든 객의 시가 뜻에 맞지 않았습니다. 强邀進士, 設宴懇之. 그래서 진사를 불러 잔치를 배설하고 현판을 청하였습니다. 一揮而就, 文不加點, 而山水之景色, 일필휘지로 쓰니 문장에 점을 더하지 않아도 산수의 경치와 堂搆之形..
60화: 특의 간교한 계책 特曰: “如此重寶, 積置于本宅, 則大上典必疑之, 積置于奴家, 則人必疑之. 無已則堀坑山中, 深瘞而堅守之可矣.” 進士曰: “若或見失, 則吾與汝難免盜賊之名矣, 汝可愼守.” 特曰: “吾計如此之深, 吾友如此之多, 天下無難事, 有何畏乎? 況持長劍, 晝夜不離, 則吾目可抉, 此寶不可奪. 吾足可斷, 則此寶不取, 願勿疑焉.” 蓋特意, 得此重寶而後, 妾與進士, 引入山谷, 屠殺進士, 而妾與財寶, 自占之計. 而進士迂儒, 不可知也. 해석 特曰: “如此重寶, 특이 말했습니다. “이런 보물을 積置于本宅, 則大上典必疑之, 본댁에 산 같이 쌓아놓으면 대군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고, 積置于奴家, 則人必疑之. 소인의 집에 두면 이웃 사람에게 또한 의혹을 받을 것입니다. 無已則堀坑山中, 深瘞而堅守之可矣.” 그만두지 ..
59화: 특의 계책으로 도망갈 채비를 마치다 其夜, 以特之謀告於妾曰: “特之爲奴, 素多智謀. 以此計指揮, 其意如何” 妾許之曰: “妾之父母, 家財最饒. 故妾來時, 衣服寶貨, 多載而來. 且主君之所賜甚多, 此不可棄置而去. 今欲運之, 則雖馬十匹, 不能盡輸矣.” 進士歸於特, 特大喜曰: “何難之有?” 進士曰: “若然則計將安出?” 特曰: “吾友力士十七人, 以日强韌爲事, 人莫能當. 而與我甚結, 唯命是從. 使此輩運之, 則泰山亦可移矣.” 進士入語妾, 妾然之. 夜夜收拾, 七日之夜, 盡輸于外. 해석 其夜, 以特之謀告於妾曰: 그날 밤 특의 계교를 제게 알려줬습니다. “特之爲奴, 素多智謀. “특은 종이지만 본디 지략이 많소. 以此計指揮, 其意如何” 특이 이 계교를 지휘하니 그 뜻이 어떠하오?” 妾許之曰: “妾之父母, 家財最饒. ..
58화: 꼬리가 길수록 잡히는 법이기에 특이 알려준 방책 自是以後, 昏入曉出, 無夕不然. 喜深意密, 自不知止. 墻內雪上, 頗有跫痕. 宮人皆知其出入, 莫不危之. 一日, 進士忽慮好事之終成禍機, 中心大惧, 終日不樂. 特奴自外而進曰: “吾功甚大, 迄不論賞可乎?” 進士曰: “銘懷不忘, 早晩當重賞矣.” 特曰: “今見顔色, 亦似有憂, 未知何故耶?” 進士曰: “不見則病在心骨, 見之則罪在不測, 何之不憂?” 特曰: “然則何不竊負而逃乎?” 進士然之. 해석 自是以後, 昏入曉出, 無夕不然. 그 후로 황혼이면 궁중에 들어가고 새벽이면 나오니 그렇지 않은 저녁이 없었다. 喜深意密, 自不知止. 이렇게 깊고 은밀하여 기뻤기에 스스로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墻內雪上, 頗有跫痕. 하지만 궁 안의 눈 위에는 발자취가 낭자하게 남았습니다. ..
57화: 담장을 넘어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맛보다 進士用其計, 踰墻而入, 伏於竹林中, 月色如晝, 宮中寂廖. 少焉, 有人自內而出, 散步微吟. 進士披竹出頭曰: “何人來此?” 其人笑而答曰: “郞出郞出.” 進士趨而揖曰: “年少之人, 不勝風流之興, 冒犯萬死, 敢至于此, 願娘怜我.” 紫鸞曰: “苦待進士之來, 若大旱之望雲霓也. 今幸得見, 妾等蘇矣. 郞君, 願勿疑焉” 卽引而入, 進士由層階循曲欄, 竦肩而入. 妾開紗窓, 明玉燈而坐. 以獸形金爐, 燒鬱金香, 琉璃書案, 展『太平廣記』一卷, 見進士至, 起而迎拜. 郞亦答拜, 以賓主之禮, 分東西坐. 使紫鸞設珍羞奇饌, 而酌紫霞酒飮之. 酒三行, 進士佯醉曰: “夜如幾何?” 紫鸞會知其意, 垂帳閉門而出. 妾滅燈同枕, 喜可知矣. 夜旣向晨, 群鷄報曉, 進士起而去. 해석 進士用其計, 踰墻而入, ..
56화: 노예 특이 만들어준 사다리와 털버선 進士密窺其處, 則墻垣高峻, 自非身俱羽翼, 莫能至矣. 還家, 脉脉不語, 憂形於色. 其奴名特者, 素稱能而多術. 見進士之顔色, 進而跪曰: “進士主, 必不久於世矣.” 伏庭而泣. 進士跪而執其手, 悉陳其懷抱. 特曰: “何不早言? 吾當圖之.” 卽造槎橋, 甚爲輕捷, 能捲能舒. 捲之則如貼屛風, 舒之則五六丈許, 而可運於掌上. 特敎之曰: “持此橋, 上宮墻而還, 捲舒於內, 下之來時, 亦如之.” 進士使特試於庭, 果如其言, 進士甚喜之. 其夕將往時, 特又自懷中出給豹皮襪, 曰: “非此難越. 進士用着而行之, 輕如飛鳥, 所踐無足聲.” 해석 進士密窺其處, 則墻垣高峻, 진사는 그날 밤에 서궁에 왔지만 담장이 높고, 自非身俱羽翼, 莫能至矣. 자신의 몸엔 날개가 없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還家, 脉..
55화: 김 진사를 기다리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자란 其夜二更, 小玉與飛瓊, 明燭前導, 而來西宮曰: “日間之詩, 出於無情, 而言涉戱翫. 是以不避深夜, 負荊來謝耳.” 紫鸞曰: “五人之詩, 皆出南宮. 一自分宮之後, 頗有形跡, 有似唐時牛李之黨, 何不爲其然也. 女子之情則一也. 久閉離宮, 長弔隻影, 所對者燈燭而已, 所爲者絃歌而已. 百花含葩而笑, 雙燕交翼而戱, 薄命妾等, 同銷深宮, 覽物懷春, 情思如何. 朝雲岱神, 而頻入楚王之夢; 王母仙女, 而幾參瑤臺之宴. 女子之意, 宜無異同, 而南宮之人, 何獨與姮娥苦守貞節, 不悔靈藥之偸乎!” 飛瓊與玉女, 皆不禁淚流曰: “一人之心, 卽天下人之心也. 今承盛敎, 悲憾之懷, 油然而出矣.” 起拜而去. 妾謂紫鸞曰: “今夕, 妾與進士有金石之約. 今若不來, 明日必踰墻而來矣. 來則何以待之?” 紫鸞曰..
54화: 운영, 김 진사에게 서쪽 궁궐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다 妾騎馬, 而先來至巫家, 則巫顯有含慍之色, 向壁而坐, 不借顔色. 進士抱羅衫, 終日飮泣, 喪魂失性, 尙不知妾之來矣. 妾解左手所着雲南玉色金環, 納于進士之懷中曰: “郎君不以妾爲菲薄, 屈千金之軀, 來待陋舍, 妾雖不敏, 亦非木石, 敢不以死許之, 妾若食言, 有此金環” 行色忽遽, 起以將別, 流涕如雨. 與進士附耳語曰: “妾在西宮, 郎君來. 暮夜, 由西墻而入, 則三生未盡之緣, 庶可續矣.” 言訖, 拂衣而去. 先入宮門, 則八入繼至. 해석 妾騎馬, 而先來至巫家, 제가 말을 타고 먼저 무녀의 집으로 가니, 則巫顯有含慍之色, 向壁而坐, 不借顔色. 무녀는 화냄을 품은 기색으로 벽을 향해 앉아 안색을 아낌이 없었습니다. 進士抱羅衫, 終日飮泣, 진사는 라삼(羅衫)을 부여잡고..
53화: 친구들의 놀림이 가득한 시를 받고도 기분 나쁘지 않네 是夕來時, 紫鸞與妾又先出. 而向東門, 則小玉微笑, 賦一絶以贈之. 無非譏妾之意也, 妾中心羞赧, 而含忍受之, 其詩曰: “太乙祠前一水回 天壇雲盡九門開 細腰不勝狂風急 暫避林中日暮來” 紫鸞卽次其韻, 翡翠ㆍ玉女, 相繼次之, 亦皆譏妾之意也. 해석 是夕來時, 紫鸞與妾又先出. 而向東門, 저녁이 되어 저와 자란이 먼저 나와 동문 밖으로 가려할 적에 則小玉微笑, 賦一絶以贈之. 소옥이 미소 지으며 시 한 수를 지어주었습니다. 無非譏妾之意也, 妾中心羞赧, 而含忍受之, 그 시는 저를 희롱하는 글이었지만 저는 부끄러웠지만 참고 받았습니다. 其詩曰: “太乙祠前一水回 天壇雲盡九門開 細腰不勝狂風急 暫避林中日暮來”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太乙祠前一水回 태을사 앞에는 한 물..
52화: 김진사와의 첫 만남에 대한 술회 上年秋月之夜, 一見君子之容儀, 意謂天上神仙, 謫下塵寰. 妾之容色, 最出於九人之下, 而有何宿世之緣, 那知筆下之一點, 竟作胸中怨結之祟. 以簾間之望, 擬作奉箒之緣, 以夢中之見, 將續不忘之恩. 雖無一番衾裡之歡, 玉貌手容, 恍在眼中. 梨花杜鵑之啼, 梧桐夜雨之聲, 慘不忍聞, 庭前細草之生, 天際孤雲之飛, 慘不忍見. 或倚屛而坐, 或憑欄而立, 搥胸頓足, 獨訴蒼天而已. 不識郎君亦念妾否? 只恨此身未見郎君之前, 先自溘然, 則地老天荒, 此情不泯. 今日浣紗之行, 兩宮侍女皆已集, 故不得久留於此. 淚和墨汁, 魂結羅縷, 伏願郎君, 俯賜一覽. 又以拙句謹答前惠, 非此之僞弄, 聊以寓咏好意. 其文則傷秋之賦, 其詩則相思之詩也. 해석 上年秋月之夜, 一見君子之容儀, 그러다 지난 해 가을밤에 한 번 군자의 ..
51화: 궁녀의 한계에 대한 술회 恨不得爲男, 立身揚名, 而爲紅顔薄命之軀, 一閉深宮, 終成枯落而已, 豈不哀哉! 人生一死之後, 誰復知之. 是以恨結心曲, 怨塡胸海. 每停刺繡, 而付之燈火, 罷織錦, 而投杼下機, 裂破罷幃, 折其玉簪. 暫得酒興, 則脫爲散步, 剝落階花, 手折庭草, 如癡如狂, 情不自抑. 해석 恨不得爲男, 立身揚名,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 입신양명하지 못하고, 而爲紅顔薄命之軀, 一閉深宮, 홍안박명(紅顔薄命)의 몸이 되어 한 번 깊은 궁에 갇히고는 終成枯落而已, 豈不哀哉! 끝내 말라죽을 운명이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人生一死之後, 誰復知之. 인생이 한번 죽은 후에 누가 다시 이것을 알리오? 是以恨結心曲, 怨塡胸海. 이러므로 한이 마음에 맺히고 원한이 가슴에 차오릅니다. 每停刺繡, 而付之燈火, 罷織錦, ..
50화: 궁녀가 된 이후의 파란만장한 삶 不禁思歸之情, 日以蓬頭垢面, 藍縷儀裳, 欲爲觀者之陋, 伏庭而泣. 宮人曰: “有一朶蓮花, 自生庭中.” 夫人愛之, 無異己出, 主君亦不以尋常視之, 宮中之人, 莫不親愛如骨肉. 一自從事學問之後, 頗知義理, 能審音律, 故宮人莫不敬服. 及徙西宮之後, 琴書專一, 所造益深. 凡賓客所製之詩, 無一掛眼, 才難不其然乎! 해석 不禁思歸之情, 그 후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정을 금하지 못해, 日以蓬頭垢面, 藍縷儀裳, 날마다 봉두난발인 머리에 때낀 얼굴을 하고 남루한 의상을 입자, 欲爲觀者之陋, 伏庭而泣. 보는 이들마다 더럽다고 하여 뜰의 엎드려 울기도 했습니다. 宮人曰: “有一朶蓮花, 自生庭中.” 궁인들이 말했습니다. ‘한 떨기 연꽃이 절로 뜨락에 피었구나.’ 夫人愛之, 無異己出, 부인이 ..
49화: 궁녀가 되기까지 妾鄕南方也, 父母愛妾, 偏於諸子中, 出遊嬉戱, 姙其所欲. 園林溪水之涯, 梅竹橘柚之蔭, 日以遊翫爲事. 苔磯釣漁之徒, 罷牧弄笛之兒, 朝暮入眼. 其他山野之態, 田家之興, 難以毛擧. 父母初敎以三綱行實, 七言唐音. 年十三, 主君招之, 故別父母, 遠兄弟, 來入宮門. 해석 妾鄕南方也, 父母愛妾, 偏於諸子中, 첩의 고향은 남방입니다. 부모님은 자식 중 저를 편애하시어 出遊嬉戱, 姙其所欲. 나가 놀아도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 두었나이다. 園林溪水之涯, 梅竹橘柚之蔭, 日以遊翫爲事. 숲속 시냇물 가, 매화, 대나무, 귤, 유자나무의 그늘 아래 날마다 놀기를 일삼았습니다. 苔磯釣漁之徒, 罷牧弄笛之兒, 이끼 낀 바위에서 물고기 낚는 무리와 소풀을 뜯기고 피리 부는 아이들이 朝暮入眼. 아침저녁으로 ..
48화: 드디어 두 사람이 함께 만나다 妾退還西宮, 以白羅衫, 書滿腔哀怨而懷之, 與紫鸞故爲落後, 謂執馬者曰: “東門外巫女, 最爲靈驗云, 我將往其家, 問病而行.” 僮僕如其言. 至其家, 巽辭哀乞曰: “今日之來, 本欲爲一見金進士耳. 可急通之, 則終身報恩.” 巫如其言送人, 則進士顚到而至矣. 兩人相見, 不得出一言, 但流涕而已. 妾以封書給之曰: “乘夕當還, 郞君於此留待.” 卽上馬而去. 進士坼封書而視之, 其辭曰: ‘曩者, 巫山神女, 傳致一札, 琅琅玉音, 滿紙丁寧. 敬奉三復, 悲歡交至, 意不自定. 卽欲答書, 而旣無信便. 且恐漏泄, 引領懸望, 欲飛無翼, 斷腸消魂. 只待死日, 而未死之前, 憑此尺素, 吐盡平生之懷, 伏願郎君留神焉.’ 해석 妾退還西宮, 以白羅衫, 저는 물러나 서궁으로 돌아온 뒤, 백라삼(白羅衫)에 書滿腔哀怨而..
철학 삶을 만나다 목차 강신주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장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교환 가능한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 사건과 무의미 더 읽을 책들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이성의 의미와 한계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더 읽을 책들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더 읽을 책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3. 예상치 못한 일탈을 만끽하길 여러분은 거미가 어떻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옮겨 가는지 압니까? 우선 거미는 자신의 거미줄을 힘이 닿는 대로 허공 속에 뿜어냅니다. 간혹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거미줄은 허무하게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미가 실망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허공 속으로 거미줄을 뿜어냅니다. 다행히도 이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럼 이제 그 바람을 타고 거미줄은 다른 나뭇가지에 금방 들러붙습니다. 그런데 거미는 몹시 신중한 동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을 그렇게 걸린 거미줄에 조용히 갖다대고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행히도 어떤 사람이 거미줄을 찢고서 걸어갑니다. 다시 거미줄은 땅바닥으로 ..
2.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난 연꽃의 향기만이 그윽하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이 책은 제가 소개한 가훈과 같은 역할을 하려는 의도 하에 쓰여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어느 정도는 여러분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니, 어쩌면 많은 분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느낌, 심지어는 불쾌한 느낌까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편안하게 여기고 있던 삶을 제가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나 여러분의 낯선 느낌은 사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족, 국가, 자본주의로 요약되는 삶의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물에 사는 것에 편안해지면 물고기는 자신이 물에 산다는 사실을 낯설게 여길 ..
에필로그 1. 철학이 의미 있어지는 순간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한 ..
더 읽을 책들 윤수종 엮음, 『다르게 사는 사람들』(서울: 이학사, 2002) 우리 사회의 타자들은 소외받는 소수자들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타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일방적인 구분이 지니는 의미와 문제점,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엠마뉘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 2000) 윤리를 생각하려면 타자를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철저하게 타자를 숙고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영, 『가학증·타..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들, 즉 타자, 사랑, 고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뇌물은 우리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뇌물에는 받은 것 이상으로는 돌려주지 않고, 또한 준 것 이상으로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뇌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어야 상대가 좋아하고 또 얼마만큼 주어야 그 뇌물의 효력이 발생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물의 관계에서는 블랙홀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자란 나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와 삶의 규칙을 달리하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니..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 「섬」이란 시를 지은 노창선 시인은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이 심연은 검은 바다와 같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도 섬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섬이 된 것 역시 타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로 건너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타자를 만나서 섬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게로 비약하려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검은 밤바다를 건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라도 보내어 ‘가슴속 까만 가뭄’을 전하려고 하니까요.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집에서 학교나 회사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이 그 한 사람에게 몰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렬한 첫 만남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
타자란 무엇인가? 노나라 임금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끌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노나라 임금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규칙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 그가 행했던 애정 표현은,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닌 ..
더 읽을 책들 김상봉, 『호모에티쿠스』 (서울: 한길사, 1999) 서양철학사를 윤리학적 시선에서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학에 기초해서 서양의 윤리학적 전통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나 니체의 즐거움의 윤리학을 다루는 데서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랄프 루드비히, 『정언명령』(이충진 옮김, 서울: 이학사, 1999) 칸트의 의무의 윤리학을 잘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의무 사이의 기묘한 반전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마치 칸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김주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0)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② 여러분은 우울한 주체가 아닌 즐거운 주체,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아닌 행복한 자유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방법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충실한 니체주의자였던 들뢰즈의 설명을 통해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amor fati),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répétition)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éternel retour)는 이렇게..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 우울, 슬픔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물로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칸트는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자율적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의 명령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요. 만약 프로이트나 니체의 지적이 옳다면, 장씨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주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말하기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느라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즉시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칸트에 따르면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도덕법칙을 구성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 즉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주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은, 분명 타인이 만든 도덕법칙을 타율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이 초자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겁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 혹은 ‘자발적 복종’이란 기이한 논리가 출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씨 부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자아의 명령은 나의 내면에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작동합니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을 듣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보입..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② 장씨 부인의 선택을 이문열은 마치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 누구도 그녀에게 문장 배우기를 포기하고 가사를 배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이 자율적 선택이라는 이문열의 착각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율의 윤리학을 표방했던 칸트【칸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도 철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상가이다. 그는 경험을 강조했던 경험론적 전통과 이성을 강조했던 합리론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여성이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유아기 때의 역사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만약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무척 불편해질 테니까요. 가령 어린아이가 김치 먹는 법을 배운다고 해봅시다. 밍밍한 모유나 분유만 먹던 아이에게 마늘과 고추로 버무려진 김치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극적인..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② 생식에 관한 이와 같은 유학자들의 식물학적 상상력은, 후손들의 성씨가 당연히 남성의 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쪽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이런 식물학적 상상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물이 어떻게 새로운 개체를 낳는 지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우리 인간의 염색체 수는 46개입니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이 숫자의 절반인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완전한 수정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수정체는 23+23, 즉 46개의 염색체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수정체가 자궁 속에서 자라서 마침내 새로운 개체로 이 세..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 ‘주체’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주체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은 아마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가장 지속적이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녀 차별, 특히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 우월주의를 흔히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가 하나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여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가진 함의를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통..
더 읽을 책들 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저자는 자신의 관심사가 ‘세상을 움직이는 믿음과 감정의 힘을 지닌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를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를 포함한 여러 다양한 종교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함의는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02) 동양에서는 불교가 마음의 고통을 다루었다면, 서양에서는 정신분석학이 그 임무를 자임했습니다. 이 책은 풍부한 임상적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인지를 매우 ..
집착 없이 살아가기② 그렇다면 이 화두의 답은 무엇일까요? 답을 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몽둥이로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화두가 던져지자마자 정확한 답을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깨달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중 몇 가지만 제시해볼까요? “바람이 시원합니다.” “새가 울고 있네요.” “하늘이 푸릅니다.”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화두는 사실 아주 교묘하게 짜여 있었던 셈입니다. 몽둥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여러분으로 하여금 몽둥이에 집착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만일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몽둥이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다’고 해도 맞고..
집착 없이 살아가기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화두 하나를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때 저는 여러분께 약속했습니다. 이 화두만 풀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화두를 푼 분도 있겠지만,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이야기는 깨달음, 즉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님 같지도 않던 스님 한 분이 단하(丹霞)라는 스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이 저물자 단하 스님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혜림사라는 절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 절을 홀로 지키고 있던 스님은 단..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나 의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사실 ‘없음이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베르그손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물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썩은 물이라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느낌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를 때 우리는 이전에 마셨던 시원한 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즉 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덤 속의 물을 찾아서 마셨을 때 원효 스님은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토할 것 같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은 어젯밤 시원하게 마신 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원효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만약 우리가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우리의 마음이 오지 않은 친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와 있어야만 하는 친구가 지금 내 생각 바깥에서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마음의 고통은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마음 바깥에 없을 때, 전자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카페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냅니까? 차라리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생각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 마음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
집착의 메커니즘 어떤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갓 돌이 지난 귀여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하며 아이의 몸을 만져 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녀의 천사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이를 화장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문을 열고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왕자님, 많이 기다렸지. 엄마 왔네.” 그러나 거실 한쪽의 조그만 상 위에 있는 아이의 영정과 국화..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②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싯다르타와 그를 따라 깨달았던 많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그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내려올 때 스님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합장하곤 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성불’이란 말은 ‘부처[佛]가 된다[成]’는 뜻입니다. 이제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이 조금 궁금하지 않습니까?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은 『법구경(法句經, Dhammpada)』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과, 그가 이야기한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에게 귀의하면, 네 가지 진리를 자세히 명상하여 반드시 바른 지혜를..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니다...
더 읽을 책들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옮김, 서울: 청사, 1998) 자본주의의 모든 비밀은 기본적으로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양자는 등가인 것처럼 교환되지만, 화폐가 상품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서울: 이산, 1999) 화폐와 상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맑스의 사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언어학에 대한 이해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제국을 분..
우리와 세계화②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제 세계화라는 거역하지 못할 현실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오직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우리와 세계화 우리의 현실은 단순한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세계로 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저 현실로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가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계어인 영어를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영어 캠프, 영어 마을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지요.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대학에서도 이제는 수업의 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② 그렇다면 자신의 잉여가치를 부단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산업자본은 폐쇄된 민족국가라는 모델 안에서 안주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산업자본의 세계적 팽창 현상이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선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두 차례에 걸쳐 발발한 세계대전도 바로 이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이 기존의 다른 산업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닌 ‘식민지-시장’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인 것이니까요. 이것은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코끼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목숨을 건 투쟁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최종 승자가 바로 미국과 미국에 속하는 산업자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에 거점을 둔 다국적 산업자본들..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자본은 가치의 증식, 즉 잉여가치를 부단히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산업자본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으로 어떻게 하면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줄어들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잉여가치는 M-C와 C-M′의 두 가지 과정 사이의 차이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잉여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M-C의 과정에서 산업자본가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화폐를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료의 가격이 상승하거나, 공장 유지비가 올라가거나, 혹은 인건비가 올라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②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얻어진 5000원에 만족할 수 있나요? 만약 여러분이 현명한 자본가라면, 여러분의 수중에 모인 5000원으로 다시 공동체 B에서 인삼을 구입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인삼을 공동체 A에 팔기 위해서지요. 결국 공동체 A에서 출발해서 공동체 B를 거쳐서 다시 공동체 A로 돌아올 때, 여러분의 자본은 1000원에서 자그마치 2만 5000원으로 증식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A에서 1000원으로 소금을 산 것, 즉 M-C는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공동체 B에서 소금을 5000원에 판 것, 즉 C-M′도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는 이윤이 발생했습니다. 이 이윤은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요..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 보통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도래한 경제구조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를 전자본주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pre-capitalism) 시대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이전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전자본주의 시대에도 이미 자본주의 자체는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의 형태였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뿌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얕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컨대 전자본주의 시대가 상인자본주..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② 결국 자신이 가진 우월한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화폐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암초를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롭게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암초는 화폐를 유통 과정에서 빼내어 금고에 담아두려고 하는 ‘얼빠진’ 생각이겠지요. 반면 두 번째 암초는 유통 과정에서 볼 수도 있는 손해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암초를 현명하게 잘 피했다면, 여러분은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리한 자본가’가 되는 공식, 즉 맑스가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이라고 부른 유명한 공식이 출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00원에 구매된 면화가 100+10원, 즉 110원에 다시 판매된다고 해보자. 따라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 화폐를 가진 자는 그 화폐의 가치만큼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을 잠재적으로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소유한 자는 이제 다른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제한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보다 화폐를 가졌을 때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200만 원의 현금과 노트북 중 전자를 선택했던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
화폐와 우리② 『자본론』이란 유명한 책에서 맑스가 깊이 숙고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발견했던 것은 화폐가 가진 이런 무자비하기까지 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화폐는 무엇이 자신으로 바뀌었는지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이 다 화폐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된다. 유통은 모든 것이 그곳에 뛰어 들어갔다가 화폐라는 결정으로 변화되어 다시 나오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용광로가 된다. 이 연금술에는 성자의 뼈조차도 대항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연약한,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화폐에서는 상품의 온갖 질적 차이가 없어져버리듯이 화폐 자체도 철저한 평등주의자로서 일체의 차이를 제거해버린다. 그런데 ..
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와 우리 여기 왼쪽에 200만 원의 현금이 있고, 오른쪽에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이 있다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현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현금을 선택할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상품이 아닌 화폐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은 유한한 것인 데 반해, 화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상품이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상품이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목적에만 국한된 사용가..
더 읽을 책들 전인권, 『박정희 평전』 (서울: 이학사, 2006)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 이념은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훈육되었으며, 국가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서울: 태학사, 2004) 노자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한 철학자라는 통념을 깨고 있는 책입니다. 노자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통치자를 대상으로 전개된 것이며 아울러 그의 정치철학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위한 형이상학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이용재 옮김, 서울: 아카넷, 2003) 프루동은 부르주..
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세계화와 국가② 흔히들 지금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취지를, 자본의 세계적 흐름을 방해하는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자유롭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윌리엄 탭(William K. Tabb, 1942~)【윌리엄 탭은 퀸스칼리지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인데,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계화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많은 ..
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② 동양에서는 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누구를 떠올릴까요? 이를테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대하 역사소설의 주인공 유비(劉備, 161~223)【유비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군주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덕이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아직도 외적인 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삼국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마침내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재상을 얻음으로써 촉나라를 창건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보도..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선전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 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
더 읽을 책들 이숙인,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서울: 여이연, 2001) 서양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여성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여성관과 가족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성과 가족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꿈꿀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서울: 한길사, 2003) 가족과 사랑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입니다. 책 중간 중간에서 번뜩이는 루소의 날카로운 통찰력 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게 독서의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기존..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헤겔은 사랑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가족’ 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유기체로서의 가족 자신의 생존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점에서 카프카는 바디우에 앞서 이미 ‘하나’라는 통일의 원리를 문제 삼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이르러 헤겔의 ‘하나’라는 이념은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둘’이란 공리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로 머물기 위해서 ‘둘’이란 공리를 끈덕지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말은, 결국 우리에게 ‘둘’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말..
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카프카의 통찰은 헤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남녀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가족’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전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사랑-가족-사랑-가족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카프카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생산하는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숙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실마리로 우리는 왜 헤겔이 그렇게도 사랑에..
‘하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카프카 헤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형식일 것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헤겔의 사랑은 ‘남자-여자-자식’으로 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객관적인 ‘하나’로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의 이런 생각이 사랑과 가족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황홀경적인 일체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2세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가족이란 통일체, 이런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주의적인 가족 이미지 밑에 일종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