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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3. 사유중심적 진리관과 존재중심적 진리관 따라서 장자의 꿈 은유는 단순히 치료적 효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 은유는 장자가 생각하고 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고전적으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존재와 사유의 일치로서의 진리는 내용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견해를 낳게 된다. 하나는 사유를 중심으로 이해된 존재와 사유의 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중심으로 이해된 존재와 사유의 일치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진리관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상이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유 중심적 진리관이 주체의 역량을 강조한다면, 존재 중심적 진리관은 타자의 고유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2. 판단중지의 한계 꿈 은유는 장자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더군다나 꿈 은유는 「내편」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장자 본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꿈 은유가 가진 철학적 함축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 여자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건 나만의 꿈이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과거의 상태라면, 다른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는 현재의 상태다. 결국 우리가 ‘그건 꿈이야’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과거의 생각..
2. 꿈 은유의 중요성 1. 예(禮)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다 타자와 조화롭게[和] 관계하겠다는 공자의 서의 정신은 자신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나 자신과 타자에게 동시에 폭력적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왜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공자가 예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서의 정신은 오직 조우한 타자가 나와 동일한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적절한 관계 맺음의 원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이란 사실 예가 원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결국 공자의 서는 나뿐만 아니라 타자도 예라는 동일한 심판자 밑에 두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3.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어 보이는 서의 원리에 잠재하고 있는 폭력성은 단지 타자에게만 가해지는 것이겠는가? 어쩌면 공자 사상의 핵심에는 폭력이라는 테마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는 우리가 바람직하게 살려면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자의 말대로 산다면, 우리의 내면에 예는 행동과 판단의 기준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홀로 있어도 이 초자아의 검열을 받게 된다. 예에 맞는 행동을 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기뻐하고, 예에 어긋나게 행동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공..
2. 서(恕)란 폭력 공자가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가 바로 내면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공자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공자 철학의 정수는 서(恕)라는 한 글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는 서를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거나 ‘자신이 서고자 하면 타자를 세워 주어라[己欲立而立人]’고 정의한다. 결국 서의 원리에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자신을 대상화해서 반성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내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서라는 윤리적 원리의 이면에는 더 큰 공자의 문제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공자는 이런 서라는 원리는 제공하지도 ..
1. 공자 사상의 의의 1. 공자를 심각하게 생각한 장자 보통 장자는 노자와 함께 도가(道家)의 중심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도가 사상이나 그 사유방법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관례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한대 이전의 선진(先秦) 사상계에서는 노자와 장자는 결코 노장으로 병칭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장자』 제일 마지막 33번째 편인 「천하(天下)」편을 살펴보아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천하(天下)」 편에서 노자와 장자는 상이한 전통을 계승한 학자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에서 노자는 보통 노담(老聃)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편」과 「외ㆍ잡편」이 각각 이 노담이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 ..
Ⅵ. 꿈과 깨어남 안연이 공자에게 물었다. “맹손재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소리내어 울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마음속으로도 슬퍼하지 않았고, 장례를 집행할 때도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를 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나라 전역에 걸쳐 가장 애도를 잘한 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내용이 없는 데도 그런 이름을 얻는 경우가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정말로 그것이 이상합니다.” 顔回問仲尼曰: “孟孫才, 其母死, 哭泣無涕, 中心不戚, 居喪不哀. 無是三者, 以善處喪蓋魯國, 固有無其實而得其名者乎? 回壹怪之.” 공자가 말했다. “그 맹손재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상례에 대한 앎[知]을 넘어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상례를 간소히 치르려 하다가 뜻대로 하지..
4. 일상에 깃들도록 하라 방금 읽었던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이런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발제 원문 마지막 부분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장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즉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爲是不用而寓諸庸]!” 이어서 장자는 바로 이것이 자신이 밝음을 쓴다[以明]라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임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옳다고 여기다 또는 이것이라고 여기다로 번역되는 위시(爲是)는 대대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인식이나 판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위시라는 의식은 앞에서 살펴본 자시(自是)에 근거하고 있는 사유와 판단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3.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매진하다 발제 원문을 보면 장자는 대대 관계가 해소되어 드러나는 진정한 마음[虛心]으로 세상의 타자와 조우하는 도주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갑자기 밝음을 쓰는 것[以明]이 좋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도대체 밝음을 쓴다고 한 장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밝음을 쓴다는 개념은 「제물론(齊物論)」편에 세 번 등장한다. 앞에서 다룬 원문이 그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일 당신이 그들(儒家와 墨家)이 부정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들이 긍정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밝음을 쓰는 것이다[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아쉽게도 이 두 번째 구절로도 우리는 도대체 밝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
2. 원환의 중심을 얻어라 갓난아이들은 결코 물을 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갓난아이들이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갓난아이들은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기 위해서, 주체는 기본적으로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자가 생각하는 우리의 본래적 마음은 바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조절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양으로 드러난다. 또 물은 도저히 묘사하기 힘든 복잡한 모양의 그릇이라고 해도 그 그릇에 담기면 그 복잡한 모양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의 마음이 이처럼 유동적..
3. 도의 지도리[道樞]와 밝음을 쓴다[以明]의 의미 1. 수영을 배우는 어른과 아이의 차이 이어지는 발제 원문을 보면 장자는 마음의 무대(無待)의 상태를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르고 있다. 우선 원문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저것과 이것이 대대하지 않는 경우를 도의 지도리라고 부른다. 한번 그 축이 원의 중앙[環中]에 서게 되면, 그것은 무한한 소통을 하게 된다.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여기서 도추(道樞)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대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도추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는 돌아가는 물레의 중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돌아가는 물레에 물건을 올려놓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중..
5. 나는 내 자신을 잃다 대대의 논리에 의해 A와 -A가 동시에 소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是)라고 여기던 고착된 자의식이 스스로 자신을 피(彼)라고 여겨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피(自彼)라는 의식 속에서 시(是)와 피(彼)는 겹치게 되면서, 대대의 논리는 해체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우리는 대대 논리의 해체를 무대(無待)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을 기호로 표시하면 ‘A = -A’라고 쓸 수 있다. 무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남곽자기(南郭子綦)와 그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를 읽어보도록 하자.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보였다. 안성자유는 ..
4. 자시(自是)와 자피(自彼)의 의식 장자는 지금 우리로 하여금 갓난아이로 되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일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장자철학에서 갓난아이는 하나의 이념으로 도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우리는 갓난아이로 상징되는 유동성을 확보해야 삶을 잘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 서 타자와 잘 소통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상초(庚桑楚)」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다. 또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
3. 우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단순히 동시에 생긴다[方生]는 관념이 동시에 소멸한다[方死]는 관념을 함축한다는 지적으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란 대대 관계를 해체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장자는 발제 원문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저것[彼]으로 여기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이것[是]이라고 여기면 자신을 알게 된다[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한문에서 자신을 의미하는 자(自)라는 글자는 동사와 결합되어 쓰이는 경우 재귀문을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동(自動)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움직인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위 원문에 나오는 자피(自彼)는 ‘자신이 자신을 저것이라고 여긴다’ 번역되고, 자시(自是)는 ‘자신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여긴..
2. 저것과 저것 아닌 것 이제 발제 원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어떤 것도 저것 아님이 없고, 어떤 것도 이것 아님이 없다[物无非彼, 物无非是].’ 원칙적으로 세계는 소[牛]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대대 논리로 설명 가능하다. 젖소ㆍ황소ㆍ물소 등이 소인 것에 속한다면, 대통령ㆍ염소ㆍ원자폭탄ㆍ오사마 빈 라덴ㆍ미적분학 등은 모두 소 아닌 것에 속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소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논리에만 해당될 수 있는가? 추상적으로 만일 우리가 개념 A를 사용하고 싶다면, 또 세계는 A인 것과 A 아닌 것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세게를 분할하는 핵심적인 논리가 대대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이런 대대 관계에 의해 분할되어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의적이라는 것도 암시..
2. 대대 논리의 해체: 무대(無對) 1. 데라다와 장자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공헌은 전통 서양 철학의 동일성의 논리를 해체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철학이 지닌 중요성은 그들이 단순히 동일성을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일성 그 자체가 차이에 의해 작동하고 기능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색깔을 예로 들어 보자. 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이 흑백이라는 두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검정색이 검정색으로 식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검정색이 흰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흰색이 흰색으로 식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흰색이 검정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흰색이라는 동일성은 검정색과의 차이로부터 가능하고, 역으로 검정색이라는 동..
3. 관계로 파악하되 동일성을 놓지 않았던 중국철학 앞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과 달리 중국 철학은 관계를 강조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 철학에서의 관계 논리를 대대(待對)의 논리라고 부르도록 하자. 여기서 대대라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의 대(待)라는 말과 ‘짝한다’라는 뜻의 대(對)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의존하면서 짝한다’는 의미다. 『도덕경』 2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고, 깊과 짧음은 서로를 드러나게 한다[有無相性, 難易相成, 長短相較].” 한 유한자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규정이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관찰된다. 예를 들면 계란은 ..
2. 동일률을 추구하는 서양철학 서양 철학의 이런 고유성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다툼과 논쟁을 근본으로 삼는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그들의 논쟁, 혹은 동일성이 무엇이냐는 논쟁은 보편적인 것에 의한 근거 제시, 곧 정당화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들의 동일성을 모색하는 논쟁은 보편자에 대한 탐색, 그리고 탐색된 보편자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삼단논법의 경우를 살펴보자.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삼단논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보아야 삼단논법이 지닌 핵심적 문제틀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소..
1. 동일성의 논리와 대대(待對)의 논리 1.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차이 서양 철학과 중국 철학은 어디에서 구분되는가? 많은 다양한 지점에서 서양 철학과 중국 철학은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서양 철학이 기본적으로 동일성(identity)을 사유했었다면 중국 철학은 관계(relation)를 사유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서양 철학이 아버지가 아버지일 수 있는 동일성을 묻는다면, 중국 철학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관계와 같은 관계성을 묻는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의자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서양 철학은 의자가 의자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동일성을 찾는다. 의자는 네 다리가 있고 그 ..
Ⅴ. 대대(待對)와 무대(無對) 어떤 것도 저것 아님이 없고, 어떤 것도 이것 아님이 없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저것으로 간주한다면,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고 만일 당신이 자신을 이것으로 여긴다면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에 따른다.” 이것이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의견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런 설명에 따르면) 동시에 생긴다는 것은 동시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또 동시에 소멸한다는 것은 동시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
6. 인간의 말과 새소리는 구별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고찰을 심화하기 위해 장자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도입하고 있다. ‘인간의 말과 새들의 소리는 구별되는가? 구별되지 않는가[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일단 이 의문에 대해 장자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있다. 아마도 장자는 우리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숙고하도록 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파악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장자의 질문에는 가능한 답이 두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말과 새 소리는 구별된다. 둘째,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말과 새 소리가 구별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이런 상식적인 주장이 생각만큼이나 그렇게 자명하지 않음을 알게 ..
5. 말의 의미는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장자가 언어를 부정하고 있다는 성급한 판단을 이제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발제 원문의 시작 부분부터 장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언어는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言非吹也].’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논의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이런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말하려고 한 것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주체가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가 의미하려는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분명 주체 입장에서 의미는 이미 확..
4.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그렇다면 장자 본인의 언어 사용은 어떠한가? 당연히 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 다시 말해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흔히 도가사상은 언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자가 비판했던 언어가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합리적 철학의 언어였을 뿐이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는 결코 모든 언어를 부정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후학들은 그의 자유로운 언어 사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그리고 치언(巵言)이다. 그런데 이런 세 종류의 문체들..
3. 합리적 철학이 망각한 것들 이제 다시 장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언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삶의 연관을 떠나 메타적인 이론체계로 변할 때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장자는 이런 본래 기능을 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세계의 기원과 통일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혹은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혜시(惠施)를 언급하고 있다. 「제물론(齊物論)」 편을 보면 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세계(天地)는 나의 더불어 태어났고, 만물들과 나는 하나다[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爲一].” 혜시에 따르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2. 현실주의에 저항하는 법 특정한 개념 체계를 통해서 다양한 세계들이 다르게 분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해석된 세계들 너머로 하나의 유일한 세계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이념적 존재다. 물론 인간이 특정한 공동체 속에 던져져서 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운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든 인간을 철저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규칙을 문제삼고, 이 규칙을 넘어서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이 점이 인간..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1. 『자본론』 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다음으로 언어의 의미 계열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라고 말하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 앞에 분절되고 구분되어 현상하는 어떤 대상[物]도 그런 분절과 구분을 본질적으로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대대(待對)의 논리로 작동하는 언어가 특정 공동체나 이로부터 구성된 자의식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그 대상은 그런 논리에 의해 분절되어 현상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부여한 이름이나 속성은 본질적으로 그 타자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예를 들..
4. 거울을 닦듯이 우리는 장자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거울은 나무 앞에 있으면 나무를 비춘다. 이 거울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사람을 비춘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거울은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 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이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떻게 될까? 장자가 거울의 비유로 마음을 설명하려는 논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장자에게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의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또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러므로 거울의 ..
3. 사진 같은 마음과 거울 같은 마음 문제는 자신의 도가 가진 태생적 제약성을 망각하고, 우리가 자신의 도를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는 절대적 기준이자 원리로 추상화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길을 걷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발자국이 남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길[道]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어떤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길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길은 뒷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길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이 길은 절대적인 길로 변해버린다. 절대적인 길은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는 결코 회의될 수 없는 절대적..
2. 도란 타자와의 소통 흔적이다 행(行)이라는 글자를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글자는 인격적으로는 ‘걸어간다’, ‘다닌다’, ‘움직인다’의 의미로 쓰이고, 비인격적으로는 ‘작용된다’, ‘운행된다’, ‘흐른다’의 의미로 쓰인다. 우선 비인격적인 예를 먼저 들어보자. ‘물이 흘러간다’고 해보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차이(difference)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아니 정확하게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과 차이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보부상이 사과를 메고 장사를 하러 갈 때 그는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2. “길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 1. 걸어갔기에 완성된 길 이제 직접 발제 원문을 읽어보자. 발제 원문의 핵심은 하단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발제 원문의 하단부는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구조는 마치 새끼를 꼬듯이 도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과 언어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 구조를 풀어헤칠 필요가 있다. 원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이룸으로 가리어지고,..
3. 도란 실천적 함축과 실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비록 장자 후학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실천적 진리로서의 도의 의미, 즉 기술, 방법, 길이라는 본래적인 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윤편(輪扁)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천도(天道)」편에 실려 있다. 환공(桓公)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편은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
2.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 도란 용어는 길, 방법, 기술 등과 같이 실천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듣고 ‘아!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 방법을 가지고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보고, 그 방법을 몸에 익혔을 때에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결국 공자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였던 것이다.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와는 차이가 난다. 가령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는 우리가 물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물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물에서는 손을 이렇게 휘젓고 발은 이렇게 놀려야 한다’는 실천적 진리는 직..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1. 도는 실천적 진리 성급한 연구자들은 장자가 언어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장자를 노자와 동일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제1장을 보면,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필(王弼)과 같은 역대의 주석가들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이들에 따르면 도..
Ⅳ. 말과 길 말하기는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기에는 말하려는 것(= 의미)이 있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말하기의 의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재로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만일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耶? 其未嘗有言耶?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
3. 고착된 자의식의 폭력성 이제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노나라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인 것처럼 응접하였다.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었고, 음악도 들려주면서 그는 극진하게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그 새에게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발제 원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노나라 임금이 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새라는 타자를 자기의 고착된 자의식 또는 내면에 근거한 외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자가 권고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 그리고 그 결과로 달성되는 동의와 일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心]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은 이미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소통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단지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사전에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독창적인 예술가들, 어린아이들, 환자들, 새들, 꽃들..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1.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여기서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표현과 임시적 자의식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물[水]의 비유를 통해서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유동적인 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드러나고, 세모난 그릇에 담기면 세모나게 드러난다. 여기서 유동적인 물 자체가 비인칭적인 마음[虛心]을 상징한다면, 상이한 그릇을 만나서 규정된 모양을 띠는 세모난 물과 네모난 물 등은 임시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세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릇으로부터 이 세모난 얼음을 빼어내도 이 얼음은 세모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세모난 얼음은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3.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장자가 문제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자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성심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존립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심은 된 자의식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지만,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도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의식에는 고착된 자의식과 아울러 임시적 자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결코 임시적 자의식과 관련된 성..
2. 구성된 마음[成心]을 장자가 부정하지 않은 이유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또 그 문맥과의 소통에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완성된 사람[至人]이나 평범한 사람[愚人]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단지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독특할 뿐이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1. 성심이 있기에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한다 이제 성심에 대한 장자의 진단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제물론(齊物論)」 편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저 구성된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만이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들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 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
3. 다시 구성되는 주체 보통 우리는 선입견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선입견이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선입견의 불가피성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러브스토리』라는 영화를 보아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선입견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선이해이자 선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송나라 사람도 만약 이런 선입견이 없었다면 월나라로 장사하러 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의 대표주자인 가다머(Gadamer)와 같은 사람은 선입견을 철학적으로 긍정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선입견은 구체적인 현재의..
2. 송나라의 삶의 문맥을 가지고 월나라에 간 사내 논의의 편의상 먼저 「소요유」편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어보자.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宋人資章甫而適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이 송나라 사람이 살았던 삶의 문맥을 송이라고 하고, 그가 모자를 팔려고 갔지만 모자를 쓸 필요가 없었던 월나라의 삶의 문맥을 월이라고 해보자. 삶의 문맥이 지닌 구체성과 고유성은 우리의 삶이 몸을 통해 타자의 삶과 얽히게 되는 데서 기인한다. 특정 삶의 문맥 송에서 살았던 이 인물이 다른 삶의 문맥 월로 장사하러 가게 된 메카니즘을 재구성해 ..
1. 구성된 마음[成心] 또는 선입견의 의미 1. 성심이 초자아가 될 때의 위험성 발제 원문의 함의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구성된 마음으로 번역되는 성심(成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연구자들은 성심을 선입견이나 편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심과 관련된 장자의 진단은 이렇게 간단히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장자가 일체의 모든 성심을 부정하였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관점이나 입장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장자가 성심을 문제삼고 있는 이유는 성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성심이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 즉 초자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예를..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且女獨不聞耶?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인용 목차 장자 원문 트위스트 교육학 철학 삶을 만나다 카자흐스탄 여행기 장자에게 듣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