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22 (13)
건빵이랑 놀자
4.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간단히 비유를 해보자. 사방이 막힌 방에 내가 있다. 방안에 있는 한 대의 컴퓨터가 바깥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다른 사람과의 대화 수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누군가 모뎀의 선을 자르고 조작된 신호를 보낸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다. -노성래, 『과학동아』 2002년 6월호, 52쪽. 모피어스는 지금까지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세계가 ‘가상’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인류가 AI인공 지능 컴퓨터 제조 기술을 갖게 된 것에 스스로 경탄하면서 AI의 탄생을 자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AI에 지나치면 의존하게 되면서 AI와 인류 사이에 권력의 균..
3. 현실은 꿈의 배설물일 뿐이야 신화란 본질적으로 무한하면서도 객관적 현상에 있어서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어중간한 존재로서의 모순적인 인간 상태를 비애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 -폴 리쾨르 가끔 미치도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평소엔 전혀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도 갑자기 아무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유모차를 타고 지나가며 까르륵 웃는 아이가 정말 살아 있는 천사처럼 보일 때, 엄마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나의 3대를 넘어 우리가 진화해온 지긋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때, 오늘 따라 매일 보는 친구나 연인의 얼굴이 불현듯 ‘여신 포스’를 풍기며 아름답게 빛나 보일 때. 우리는 그럴 때..
2. ‘토마스’와 ‘네오’ 인간은 망가진 채로 태어나 수리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 바로 그 집착제이다. -유진 오닐 옛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각자 자기 문화에 어울리는 성소(聖所)를 찾아 기도를 드림으써 하루를 시작했다. 현대인은 ‘로그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략적인 ‘뇌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컴퓨터를 켜서 ‘즐겨찾기’ 리스트를 살펴보면 된다. 컴퓨터는 우리의 관심사와 우리의 욕망의 좌표를 알려주는, 너무도 노골적인 꿈의 ‘검색 히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컴퓨터를 탓할 필요는 없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1950~)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구조는 신석기 시대 이후로 근본적으로 변..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1.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본성은 한정되어 있으나, 욕망에 있어서는 무한대를 달리는 인간은 천국을 기억하는 타락한 신이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 만약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건해야만 한다. -엘리아데 다가오는 시험이 걱정스럽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걱정스럽고, 가족들의 잔병치레가 걱정스러운 이 ‘일상적 고통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통이 있다. 이런 걱정들은 각각 시험이 끝나면 해결되고 월급이 입금되면 잊히며 건강이 회복되면 사라진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고통, ‘나 하나’의 개인적 안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세속적 일상을 ..
11.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
10.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제 윌과 숀의 심리 상담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물한 살이 된 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인생을 밝혀줄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숀으로 인해 윌은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실체와 대면했다. 윌의 고통은 단지 과거의 상처들만이 아니었다. 윌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내가 고통의 근원이다’라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의 씨앗이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어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떠나도록 방치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그것은 ‘모든 게 내 탓..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연민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와 ‘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연민은 고통 받는 타자를 바라볼 때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매우 편안한 안전장치다. 연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보수적인 자신의 현상태를 은폐하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는 괴리감을 심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고화한다. 나의 행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거기서 연민이 탄생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응시」, 문학과지성사, 1994, 109쪽. 사랑하면, 굳이 청진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고, 사랑하면, 굳이 녹음기를 틀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 스카일라의 귀도 윌의 마음 안에 있다. 늘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윌의 표정 뒤에 숨은 두려움을, 그녀는 듣는다. 윌도 편하지 않다. 그녀의 귀가 내 마음에 자리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에게 낱낱이 들키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감추고 또 감췄건만, 그녀는 내 두려움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그 두려움..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낯선 괴짜 할머니의 유모차에 탄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는 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할머니가 끄는 낡은 유모차를 타고, 도둑질하듯 은밀하게 세상을 구경한다. 이 소녀에게 뚝딱뚝딱 엉터리 휠체어를 만들어주는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아름다운 대낮의 풍경을 보게 된다. 평범한 하늘에 뜬 범상한 구름을 보며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조제, 다락방에서 헌책들을 벽돌처럼 쌓아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조제. 두 다리로 걷지는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 세상 모든 곳을 바지런히 걸..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영화 『가위손』에서는 흥미로운 퀴즈가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워드(조니 뎁)의 기이한 외모와 천재적 재능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킴(위노나 라이더)과 가족들. 킴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정상성’을 시험하기 위해 퀴즈를 낸다. “네가 길에서 돈가방을 봤다고 하자. 주위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어떻게 하겠니? A. 돈을 갖는다. B. 친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산다. C.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D. 경찰에 신고한다.” 킴의 동생들은 “나라면 그냥 갖겠다”고, 에드워드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시덕거린다. 에드워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킴의 눈빛도 덩달아 흔들린다. 에드워드는 창백한 얼굴에 투명하게 묻어나는 진..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화면을 발견했을 때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데!’라고 감탄하는, 스펙터클의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 영화 『라이온 일병 구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관객들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라며 전투 장면의 현장감을 극찬했다. 그러나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숨 막히는 전투 신이 과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사실감이란 본래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후 판단되는 감각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총알이 눈앞에서 난사되고 사람이 피와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아프답니다. 폐 속의 질병은 내 정신적 질병이 넘쳐흐른 것에 불과하지요.” 이런 식으로 ‘정신적 요인’을 질병의 원인으로 치환시키는 사고법은 ‘당신의 성격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암을 유발하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암 환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사람이다’라는 식의 당혹스런 논리를 대중적으로 유포시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믿음은 16세기 후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부터 유포된 낭만적 환상이었다. 감정이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논리, 질병의 원인 자체가 개인의 불행 혹은 악행에 기반한다는 상상은 수전 ..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질병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환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가 범인의 소유물인 것처럼(?), 질병도 환자의 소유물이라는 환상이 아닐까. 아픈 사람 스스로가 병을 만든다든지, 환자 자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식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범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듯 질병 또한 환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에이즈 인권 운동 포스터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다. “단지 내가 HIV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내가 죽음의 전문가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내 모든 에너지를 오직 ‘삶’을 향해 쏟아 붓고 있다.” “나는 HIV 보균자 그 이상의 존재다I’m more than HIV-Positive.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신나게 춤추러 가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