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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莊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총서를 발간하며 I. 들어가는 말 1.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① 고전과 조우하여 전혀 다르게 생성되기 위해 ② community가 아닌 society에 살려 했던 사람 ③ 사유의 한계에서만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④ 차이를 통할 때만 새로운 나로 생성된다 ⑤ 우화로 글을 쓴 이유 2. 『장자』라는 책의 구성과 편찬자 ① 장자가 남기고 싶었던 진정한 가르침 ② 황로학파가 고본 『장자』를 편찬했다 ③ 장자에 대한 선입견을 뚫을 때 장자와 만나게 된다 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① 장주(莊周)와 장자(莊子)에서의 깨달음 ②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③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원문 ..
3. 더 읽을 것들 더 깊이 『장자』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곽경번과 왕선겸의 다음 책 을 읽는 것이 좋다. 곽경번(郭慶藩), 『장자집석(莊子集釋)』(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 1993). 왕선겸(王先謙), 『장자집해(莊子集解)』(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 1987). 왕숙민(王叔岷), 『장자교전(莊子校詮)』(대만(臺灣):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민국(民國)83). 앞의 두 책 중 곽경번의 책은 왕선겸의 책보다 부피가 훨씬 많이 나간다. 그렇지만 이 책은 곽상이라는 최초의 주석자의 주석을 충실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자』 내에 나오는 원문들을 독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해석학적, 언어학적인 여러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은 장자..
3. 장자 철학의 한계와 떠나야 할 때 무매개적 소통은 공동체적 규칙이 내면화된 초자아의 허구적 자기동일성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여겨 제거하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무매개적 소통에서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런 주체 형식을 갖지 못한다면, 주체는 결코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칭적 주체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주체, 무의미의 주체다. 물론 여기서 말한 무의미는 공허하거나 모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유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가 권고하는 비인칭적인 주체의 달성은 표면적으로는 어떤 역사적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새로..
2. ‘비인칭적 주체의 소통’이 가진 문제점 장자에게 매개에 의해 미리 규정된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매개없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로 회복하는 관건은, 전적으로 주체의 마음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래서 좌망(坐忘), 심재(心齋)와 같은 수양론은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타자라는 요소는 결코 장자의 수양론만으론 해소되지 않는 무엇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장자에 따르면 완수된 소통에 대한 규정은 어떤 성격의 타자와 조우했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장자가 권고한 대로 ‘비인칭적인 주체’로 변형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타자와 다시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이 비인칭적인 주체는 타자에 맞게 임시적 주체로 현실화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
2.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1. 장자 철학에서 숙고할 두 가지 사항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은 장자철학의 고유성을 규정한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가 일체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조우해서 소통해야 함을 의미한다. 장자에게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은 존재론적으로 우리 마음의 본래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모든 타자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소통 역량[神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울 비유는 확대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랄 수 있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성, 혹은 육체와 마음의 통일체 중 후자의 측면, 즉 무한한 마음의 측면만을 추상해서 설명하고 있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가 무한한 마..
4. 자의식은 버리고 무매개적으로 소통하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장자는 비어 있는 마음을 의미하는 허심(虛心)을 강조하고 있다. ‘심재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허심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라는 인칭적인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유나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이나 희노애락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인칭적 수준에서의 작용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적인 작용이나 정서적인 작용은 모두 선이해나 선감정을 전제로 해서만, 따라서 과거의식에 의거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소통은, 기본적으로 과거 의식에 사로잡힌 고착된 자의식을 비운 마음에서 무매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보다 더..
3. 소통을 통해 변한다 소통은 지적인 이해나 또는 정서적 교감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인칭적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통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독립된 타인 사이의 관계 맺음이라기보다, 우리가 소통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 그 논점이 있는 개념이다. 이처럼 소통은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생성되는 비인칭적 수준에서의 관계맺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요유(逍遙遊)라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대붕 이야기’도 곤(鯤)이라는 물고기에서 대붕(大鵬)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
2. 소통을 위해 거울과 같이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 장자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번역되는 무대(無待)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기존의 연구자들처럼 절대(絶對)로 이해될 때, 결코 우리는 장자철학의 핵심에 이를 수 없게 된다. 반면 무대라는 개념이 꿈과 같은 일체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이해될 때, 우리는 그가 모색했던 삶과 소통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절대라는 개념 속에서는 주체와 타자는 원리적으로 소멸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반면 무대가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으로 이해될 때, 주체와 타자는 실존적으로 긍정될 수 있다.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을 수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약에 실패해서 주체와 ..
XII. 결론과 더 읽을 것들 1. 장자철학의 고유성 1. 대화와 소통이란 주제를 담은 『장자』 장자의 철학은 어떤 통일된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정치적 상황과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상징되는 사상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대화와 소통의 결여라는 상황 속에서 그의 철학은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일방적인 무력 사용과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독단적 학설 묵수는 당시가 대화와 소통에의 의지가 결여되었던 시대임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무력의 사용은 상대 국가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고, 독단적인 학설의 묵수는 상대 학파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당시는 표면적으로 다..
3. 장자가 생각하는 부자유 이제 드디어 발제 원문을 읽어볼 준비가 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과 관련된 두 종류의 인간의 상이한 삶을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은 대대로 좀 빨래를 하면서 살았는데,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가지고 있어서 추운 겨울에도 좀 빨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던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전자로부터 이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사서 그것을 겨울에 벌어진 수전(水戰)에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다. 비록 여기서 장자는 상이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핵심은, 동일한 손이 트지 않는 비방과 그와 관련된 상이한 의미 부여에 놓여 있다. 한 사람은 이 비방을 가지고 계속 겨울에 찬물로 솜을 빠는 데 사용했다면, 다른 한 ..
2.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유 장자는 대붕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의 생산, 주체의 변형, 따라서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날기 위해서 대붕이 구만 리라는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자신을 다른 주체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로운 의미 창조의 고통을 감당해야만 한다. 작은 홈에 차 있는 물에는 한 장의 잎도 충분히 배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지만, 이런 작은 물에서 그릇은 배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는 법이다. 기존의 의미체계 속에서 주체는 극 의미 체계에 맞게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주체의 자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조건을 묵묵하게 복종하는 것을 긍정하는 자유, 관념적인 자유, 즉 자기만족에 불과할 것이다. 대붕이 대붕일 수 있기 위해서 이 새는 ..
3. 조건적 자유의 이념 1. 장자가 생각하는 자유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는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 물의 부피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당신이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
3.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의미 체계는 변동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자유는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초자아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면, 다른 말로 고정된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간은 다른 일체의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철저하게 자신의 순수한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고정된 의미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떤 행동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
2.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거부하는 것 칸트의 자유 개념에서 문제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면에 떠오르는 실천 명령, 또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자유와 양립 가능한 생각이냐는 것이고, 둘째는 순수한 도덕 법칙에서 등장하는 보편적 법칙이 과연 진실로 보편적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첫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앞에서 이미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양심의 소리, 또는 내면 깊이 울려나오는 소리란 다름아닌 공동체적 규칙이 내면화되어 이루어진 것, 즉 초자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즉 내가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의 기준이 초자아라면, 결국 나의 행위는 자유롭다기보다는 구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2. 자유란 무엇인가? 1. 자리 양보와 실천 이성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는 칸트(I. Kant)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에서부터 자유는 정당하고 깊이있게 다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유를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혹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자유에 대해 접근해간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칸트의 자유 개념이 법정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법정은 기본적으로 어떤 행위의 책임을 묻고 따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해서 재판을 받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재판정에는 판사ㆍ변호사ㆍ검사가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에 대한 ..
3. 철학적 성찰에 따라 사람의 의미는 변한다 전통 유가사회에서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만 한다고 의미 부여된 존재였다. 다시 말해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성은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를 매개하는 의미는 명령과 복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고전적인 의미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어떤 젊은 여성도 스스로에게 자신은 남자에게 복종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여서, 현대 여성들은 스스로를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인격체라고 의미부여한다. 이런 현대의 여성이 시집을..
2. 의미가 먼저이고 주체와 대상은 이후에 구성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보통 대상과 의미를 혼동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대상은 사물 자체에 의미가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우리가 관념 속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그것에 부여된 의미를 억지로 빼어냈을 때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순수한 관념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체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사물 자체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대상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의 경험은 우리 자신이 이미 부여한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놀이 공간으로서의 돌덩이에서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를 빼는 순간, 우리에게 무엇이 경험되겠는..
1. 의미란 무엇인가? 1. 돌덩이와 고인돌 강화도에 가보면 커다란 돌덩어리가 하나 있다. 그 돌덩어리는 상당히 넓은 편편한 돌덩어리가 작은 돌덩어리들에 의해 받쳐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 돌덩어리가 고인돌이라는 것과 그것이 이전 선사시대 때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칼싸움을 하느라고 그 고인돌을 오르고 뛰어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어른으로서 우리는 권위 있는 목소리로 “얘들아! 거기서 뛰어놀면 안 돼!”라고 소리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돌덩어리에 대한 의미 부여가 어른과 아이들에게 각각 상이하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돌덩어리는 고인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이들에게 돌덩어리는 놀이..
XI. 의미와 자유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니 거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그런데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서 깨뜨려 버렸네.” 惠子謂莊子曰: “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擧也. 剖之以爲瓢, 則瓠落無所容. 非不呺然大也, 吾爲其無用而掊之.” 장자가 대답했다. “여보게 자네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무명을 빨아서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하였다네. 어떤 이방인이 그 말을 듣고 금 백 냥을 줄 터이니..
3. 두 가지 소통에서 중요한 것 무매개적 소통은 인간 주체의 반성 능력, 즉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 있는 매개를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역량을 긍정한다. 이 점에서 무매개적 소통은 동물적인 자극이나 반응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무매개적 소통의 경우 주체가 타자와의 무한한 소통을 통해 무한히 다양한 매개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과 반성의 역량으로 인해 마음은 타자에 민감해지게 되고, 주체는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반면 매개적 소통은 주체가 미리 형성된 매개를 독단적으로 모든 타자에 적용될 수 있는 본질이나 일반성으로 긍정함으로써 현실화된다. 결국 매개적 소통 아래에서 작동하는 주체는 스스로 직접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타자와 관계하는 셈이다. ..
2. 매개적 소통과 무매개적 소통 여기서 잠깐 장자가 날개 없이 나는 것이라고 비유했던 무매개적 소통이 전제하는 철학적 함축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이 일체의 다른 외적인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무매개적 소통에 대한 주장은 소통의 결과로 매개가 그 흔적으로 출현하는 것이지, 결코 매개가 있어서 소통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무매개적 소통은 매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약을 가할 뿐이다. 무매개적 소통은 매개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깊은 반성을 토대로 제기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매개적 소통 일반은 존재론적으로 이 무매개적 소통 위에 자리잡고 있다. 특정한 매개의 출현은 특정..
3. 무매개적 소통의 철학적 함축 1. 노자철학과 장자철학의 차이 노자의 철학과 장자의 철학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두 철학은 표면적으로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 장자 후학들도 『장자』를 편집할 때 노자의 철학을 자신들의 스승의 철학과 뒤죽박죽 섞고 있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무사유와 무반성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에서 들뢰즈는 철학을 크게 두 종류의 이미지로 분류한 바 있다. 그것은 나무(tree) 이미지와 뿌리줄기(근경, 根莖, rhizome) 이미지다. 나무가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들을 지탱한다면, 뿌리줄기는 땅 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기도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
3.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와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 정리하자면 ‘심재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로 표시된 부분(심재에 대한 이야기)과 ㉯로 표시된 부분(날개 없이 날기[以无翼飛]에 대한 이야기)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자가 인칭적인 자의식의 제거를 통해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수양론을 다루는 부분이라면, 후자는 이렇게 수양을 통해 달성된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결코 단절시켜서도 안 된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의 회복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필연적으로 귀결된다면, ㉯부분은 사족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장자가 심재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심재 이야기의 이..
2. 타자와의 소통은 목숨을 건 비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장자의 전언의 취지는 우리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되면 저절로 타자와 소통하게 된다는 데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부분 ㉯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려는 이야기, 즉 무매개적 소통을 기술하려고 한다. 분명 ㉮부분에 따르면 안연은 이제 소통의 가능성으로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셈이다. 그런데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는 이제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지고 안연이 어떻게 타자와 소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盡矣, 吾語若)!” 놀랍게도 장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이 ..
2. ‘심재 이야기’의 두 층위 1. 심재(心齋)란? ‘심재(心齋)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과 ㉯)으로 구성된다. 우선 10 부분을 먼저 분석해보도록 하자. 심재라는 말에서 재(齋)라는 글자는 ‘재계하다’라는 의미다. 재계한다는 것은 제사 같은 것을 지낼 때 심신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의 재계한다라는 것은 음식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자가 심재(마음의 재계)를 말할 때, 그의 제자 안연은 자신은 집이 가난해서 저절로 음식을 삼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공자는 자신이 말한 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어서 공자는 자신이 심재라는 말로 의미했던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지향[志]을 전일하게 해야..
3. 장자가 말하는 수양론 장자의 철학도 수양론, 즉 내향적 실천론이라는 중국 철학 일반의 성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장자의 수양론이 전제하는 마음도 이념으로서의 마음(=본래적 마음), 현상적 마음(=비본래적 마음), 주체적 마음으로 분열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본래적 마음이 타자와 부드럽고 유연하게 소통할 수 있는 비인칭적인 마음[心]이라고 한다면, 비본래적 마음은 ’나는 나다’라고 집착하는 인칭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장자의 수양론은 앞에서 살펴본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吾喪我]’라는 언급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수양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주체적 마음[吾]은 자신의 현상적 마음[我]이 소통에 부적절하다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그 다음에 주체적 마음은 이..
2. 수양론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 수양론은 기본적으로 내향적이면서 따라서 자기지시적일 수밖에 없는 실천론이다. 왜냐하면 수양의 주체와 그 대상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양론은 이런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역설을 완화하기 위해서 제3의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수양의 이념이자 목적으로 도입되는 본래적 마음 혹은 내재적 초월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양론이 이제 모든 난점과 역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양의 이념으로서 내재적 초월성을 도입한 수양론은 동일한 마음을 세 종류의 마음으로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첫째는 수양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주체적 마음)이고, 둘째는 수양이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현상적 ..
1. 수양의 세계와 삶의 세계 1. 외향적 실천론과 내향적 실천론 많은 연구자들은 수양론을 서양 철학과는 구별되는 동양 철학의 고유성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옳은 주장일까? 수양(self-cultivation)이란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변형시킴으로써 자신의 삶과 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양론은, 현실적 개체에 의한 모종의 이상인격의 현실화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어떤 이론의 현실화라는 논점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수양론은 중국 철학을 세계에 대한 사변적 이해를 중시하는 서양 철학으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서양철학이 세계의 본질이나 현상적 법칙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라면, 오히려 수양론을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세계가 아닌 자기를 장악하고자 한다...
Ⅹ. 날개 없이 나는 방법 ㉮ 안회가 말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顔回曰: “吾無以進矣, 敢問其方.” 공자가 말했다. “재계[齋] 하라. 너에게 말하면, (마음을 그냥) 가지고서 한다면 쉽게 될 수 있겠느냐? 쉽다고 하는 자는 저 맑은 하늘이 마땅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仲尼曰: “齋, 吾將語若. 有心而爲之, 其易耶? 易之者, 皥天不宜.” 안회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齋)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顔回曰: “回之家貧, 唯不飮酒不茹葷者數月矣. 如此則可以爲齋乎?”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제사지낼 때의 재이지, 마음의 재가 아니다.”曰: “是祭祀之齋, 非心齋也.” 안..
3. 포정 이야기의 중층구조 「양생주(養生主)」편을 시작하는 동시에 이 편을 상징하는 포정 이야기는 삶을 기르는 방법을 상징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포정의 소 잡는 이야기를 듣고 문혜군은 감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을 기르는 것[養生]이 무엇인지를 알았다[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문혜군이 어디서 양생의 지혜를 얻었을까? 그는 바로 수천 마리의 소들을 잘라도 아직도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롭게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칼에서 그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왕으로서의 문혜군은 바깥으로는 다른 호전적인 제후국들에 둘러싸여 있고, 안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신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찌 이런 무수한 타자들이 수천 마리의 소들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겠..
2. 목적론적 사고 의심할 여지없이 포정 이야기의 핵심은 포정이라는 주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정은 처음부터 포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포정은 소를 능숙하게 잡기 때문에 포정일 수 있는 것이다. 포정은 애초에 백정의 본성이 있어서 이 본성이 실현되어 포정이 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백정의 본성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일단은 포정은 소를 잘 잡아야만 된다. 만약 포정이 소를 잘 잡지 못하고 매번 칼날을 망가뜨렸다면, 아마도 ‘포정은 백정의 본성을 타고 났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X가 현실적으로 Y를 한다’는 말이 ‘X에게는 원래 Y를 할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후에 생긴 결과를 사태에 미리 귀속시키는..
3. ‘포정 이야기’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1. 필연과 우연 다양한 철학의 경향들을 나누는 데 많은 기준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고려해 보려는 것은 우발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철학의 경향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은 우발성을 긍정하는 철학과 우발성을 부정하고 필연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나뉠 수가 있다. 우발성은 ‘Contingency’의 번역어다. 이 ‘Contingency’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접촉(Contact)을 의미하는 ‘contingere’라는 말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발성을 긍정하는 철학은 기본적으로 접촉 또는 조우(encounter)를 긍정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소나기를 만날 때, 우리는 ‘소나기와 접촉했다’ 혹..
3. 19년 동안 익힌 기술이 머뭇거려지는 순간 서양 연구자들은 ‘포정 이야기’를 포함한 『장자』 도처에 나오는 ‘장인 이야기들’에 많은 관심을 피력하고 있다. 그들의 장자 연구는 know-how와 know-that의 구별, 즉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의 구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실천적 얇은 이론적 앎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실천적 앞에서 이론적 앎은 도출될 수 있지만, 이론적 앎에서 실천적 앎은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두 바퀴로 되어 있고 페달을 밟아서 가는 운송수단임을 아는 것(=이론적 앎)이 필연적으로 자전거를 실제로 탈 수 있다는 것(=실천적 앎)을 함축하지는 않지만, 자전거를 실제로 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전거가 이러저러한 운송수단임을 안다는 ..
2. 유동적인 마음의 역량으로 타자와 직면하다 구체적으로 포정이 문혜군에게 이야기한 소 잡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포정은 처음에는 보이는 것마다 다 소로 연상되었을 정도로 소에 집중을 한다. 다시 말해 포정은 지금 개를 보아도 소로 보이고 고양이를 보아도 소로 보이는 몰입의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몰입의 상태에 빠져 있던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이제 포정은 살아있는 소를 보아도 일상인이 보는 것과 같은 온전한 소가 아니라 소의 모든 부위들과 뼈들만 보게 되었다. 이런 경지에 이른 다음 그는 자신이 지금 소를 잡을 때 “그 소와 신(神)으로 조우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는다[以神遇而不以目視].”고 말한다. 여기서 포정이 말한 눈으로 본다는 것과 신으로 조우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본다는..
2. ‘포정 이야기’에 대한 예비적 분석 1. 고착된 자의식이 해체되어야 소통이 가능하다 『장자』라는 책에는 수많은 장인(匠人)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내편」 「양생주(養生主)」 편에 실려 있는 포정(庖丁)이라는 소를 도살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외ㆍ잡편」을 보아도 이런 장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편이 아마도 「달생(達生)」 편일 것이다. 이 편은 주로 장인들에 대한 우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장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달생」편 외에도 「외ㆍ잡편」 도처에 산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전자방(田子方)」편에 나오는 ‘화공 이야기’, 「지북유(知北遊)」 편에 나오는 ‘허리띠 버클을 잘 만드는 장인 이야기’, 「..
3.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 이처럼 유행하고 있는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라는 담론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다시 말해 차이와 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차이와 타자가 아니라 동일성에 의해 매개된 것에 지나지 않는 차이와 타자라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는 강자의 변덕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것이다. 암자에서 온갖 화초를 키우면서 자연으로부터 진정한 앎을 배운다는 스님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는 어느 동양화가도 어느 순간 그것들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타자와 차이가 인정과 배려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사실 그 타자와 차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와 차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타자와 차이라는 개념이 인정..
2.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가 지닌 문제점 차이와 타자에 대한 존중은 아마도 현대 윤리학의 금언에 해당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 우리나라도 차이와 타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는 담론이 주도적인 지적 흐름으로 번성해 가고 있다. 지금 그 어느 누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자’는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언론과 출판 도처에서 우리 지식인들도 앞다투어 차이와 타자를 진지하게 설교하는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이와 타자의 인정은 표면적으로 분명 훌륭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지식인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다음과 같은 질문..
1. 타자의 타자성 1. 관념 속 자연 “산에서 살다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가 없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어 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또 자연은, 태양과 물과 바람과 나무는,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방금 읽었던 아름다운 글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자연을 노래했던 소로우(Thoreau)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님께서 쓰신 글 중 일부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 스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자연과 그렇지 못한 인간적 욕심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다. 그런데 우리는 스님이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자연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자연은 과..
Ⅸ. 타자의 타자성 포정이라는 훌륭한 요리사가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률, 무곡 「뽕나무 숲[桑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다스리는 우두머리[經首]」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문혜군이 말했다. “참, 훌륭하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
3. 양행(兩行)을 통해 유지해야 할 것들 이 점에서 발제 원문에 등장하는 양행(兩行)이라는 논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성인(聖人)은 옳고 그름[是非]으로 사태를 조화롭게 하지만 자신은 천균(天鈞)에 머문다[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釣].” 이어서 장자는 이런 상태를 바로 양행(兩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성인이 사용하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인칭적인 주체 형식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판단, 즉 위시가 아니다. 이것은 인식을 통해 정립된 판단[爲是]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판단, 즉 인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천균(天釣)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자연스러운 균형, 앞에서 살펴본 도추(道樞)의 상태를 ..
2. 소통의 완수 여부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이에 비해 인시란 타자에 따르는 판단이나 사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제3자, 일반자의 매개를 거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처하고 있는 사태나 타자의 고유성 및 단독성(이 경우에는 원숭이들)에 근거하는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과 원숭이들 사이의 소통은 기본적으로 원숭이 키우는 사람 쪽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비인칭적 주체가 인칭적 주체와 소통하려고 하는지 되물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칭적 주체도 어차피 비인칭적 주체가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라는 점을 이해하면 우리는 쉽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식량이 떨어져 이제 불가피하게 식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원숭..
3. 양행(兩行)의 의미 1. ‘조삼모사’의 왜곡 이제 발제 원문의 후반부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유명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금 조삼모사는 하나의 고사성어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의미를 교과서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로 독해되고 있는 조삼모사 이야기는 사실 『장자』를 오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조삼모사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 우리는 쉽게 조삼모사 이야기가 매우 긍정적인 전언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조삼모사 이야기는 인시(因是)를 설명하기 위해서 장자가 도입한 우화다. 만약 통상적으로 이해된 조삼모사의 부정적 의미가 옳다면,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판단형식인 인시는 똑똑..
3.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인시(因是)라는 판단형식은 표면적으로는 사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비주체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또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오해된 것이 사실이다. 분명 인시라는 판단형식이 주체의 자유를 제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인간은 유한자이고, 따라서 자유도 제약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인 자유란 사실 무한자인 신에게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무한자라면 우리에게는 외부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어떤 타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자유가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사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역으로 만일 우리가 자신이 외부를 가..
2. ‘인시(因是)’라는 주체 형식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가진 주체, 즉 과거의식을 판단의 기준으로 맹신하면서 출현하는 고착된 자의식을 가진 주체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규정성이 외부(=특정한 공동체)로부터 획득한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나아가 이런 주체는 이런 규정성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자신이라고 여기게끔 하거나 혹은 자신을 옳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칭적 주체의 이런 자기 망각과 착각을 장자는 자시(自是)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우리는 위시라는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혹은 같은 말이지만 위시라는 판단이 함축하고 있는, 주체 형식이 고착된 주체 혹은 인칭적인 주..
2. 위시(爲是)와 인시(因是) 1. 일상적 판단엔 특정 시기의 미적 규칙이 반영되어 있다 이제 발제 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발제 원문 초반을 장식하는 것은 위(爲是)라는 개념과 인시(因是)라는 개념이다. 우선 먼저 위시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위시는 ‘~라고 여기다’를 의미하는 위(爲)라는 글자와 ‘이것, 이쪽, 옳다, 이렇다’를 의미하는 시(是)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위시라는 말은 ‘이것이라고 여기다’, 혹은 ‘어떤 것을 옳다고 여기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본문에 위시라는 판단양식의 예로 장자가 들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서시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아름답다고 판단하고 문둥병에 걸려서 얼굴이 얽은 여자를 추하다고 판단한다. 그렇다..
3. 대화처럼 보이는 독백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서양에서는 진리(truth)라고 한다면, 동양에서는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사실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 자체로는 공허한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마치 진리나 도가 자명하게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나 도라는 용어 자체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도인들, 즉 “혹시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라고 자득한 미소로 다가오는 그들과 구별되지 않게 될 것이다. 진리나..
2.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하다 앞에서 이미 읽어보았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어떻게 해서 수영을 그리도 귀신처럼 잘하게 되었는가[吾以子爲鬼, 察子則人也. 請問: 蹈水有道乎]?”라는 공자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타자를 고려하는 지행합일에 대한 명확한 사례를 얻게 된다. 급류를 수영하다보면, 나는 자신을 빨아들이는 물의 흐름[齊]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자신을 밀어내는 물의 흐..
1. 장자의 도(道) 1. 지행합일의 한계와 극복법 중국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장들 중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주장이 있다. 말 그대로 ‘앎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진리가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행합일의 주장이,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진리관, 혹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지행합일의 실천과 앎 중에서 먼저 정립되는 것은 다름 아닌 앎이기 때문이다. 지행합일에서의 앎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위적 앎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당위란 지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Ⅷ. 수양과 삶의 통일 그러므로 이것이라고 여기는[爲是] 사변적 인식은 가로로 누워 있는 작은 기둥과 세로로 서 있는 큰 기둥, 추한 사람과 ‘서시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도는 소통되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으면 불완전함도 있다.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詭憰怪,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타자에 대해 내가 규정한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없어져야, 그 타자는 나와 다시 소통해서 하나일 수 있게 된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에 깃들도록 한다. 일상적인 것[庸]이란 씀..
3. 장자의 거울은 어느 시점엔 부셔버려야 한다 거울로 비유되는 마음은 우리 실존이 갖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성 중 무한의 측면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우리에게 내재하는 실체처럼 이해될 때 우리는 장자의 삶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오독하게 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선불교 역사 가운데 전설처럼 남아있는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제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혜능과 신수는 모두 선불교의 다섯 번째 스승[五祖]인 홍인(弘忍)의 제자들이었다. 홍인은 관례대로 여섯 번째 스승[六祖]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자신의 가사와 그릇을 남겨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각자의 깨달음을 벽에 써보라고 말했..
2. 거울 비유는 단지 비유일 뿐 장자는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마음, 우리가 회복해야만 하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 비유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거울 비유로 이해된 마음이 실체처럼 사유될 때, 다시 말해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마음이 마치 불교의 불성(佛性)처럼 원래 어떤 오염물도 갖고 있지 않은 본래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또 다시 장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해된 마음은 비인칭적인 마음일 수는 있어도 유동성을 갖는 마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갑게 응고된 마음, 이 세계를 일체의 편견 없이 관조하기만 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든 타자들은 그저 이 거울 앞에..
3. ‘거울[鏡]’ 은유의 중요성과 한계 1. 단독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기 장자에게 단독자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독자는 일반성/특수성이라는 매개 또는 교환의 논리를 제거하면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도 타자도 모두 단독성을 통해서 조우하고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라는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한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은 아들이라는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아들로서의 이삭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일반성이 함축하는 행동 양식에 의해 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해 인자하고 자애롭게 처신하고, 이삭은 아브라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처..
3. 단독자와 단독자의 만남 무엇보다도 단독자를 의미하는 독(獨)이라는 글자는 글자 그대로 홀로 있음을 의미한다. 홀로 있음은 나 자신이 일반성(generality)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singular) 나로 남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독적인 것(the singular) 또는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독성이라는 개념을 특수성(particularity)이라는 개념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자, 아브라함의 고민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2.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장자의 단독자 발제 원문에 쓰이고 있는 견독(見獨)이라는 말에서 견(見)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본다는 의미로 주체가 잊음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태를 본다는 의미다(이 경우 견이라고 읽는다). 다른 하나는 드러난다는 의미로 주체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다(이 경우는 현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견독(見獨)의 방법을 데카르트(R.Descartes)의 방법적 회의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의심과 회의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주체 형식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회의한다. 그 회의는 수학적 진리에까지 이를 정도로 투철한 것이었다. 방법적 회의의 끝에 남았던 것이 ..
2. 단독자[獨]의 철학적 의미와 함축 1. 철학적인 ‘외(外)’의 의미 ‘좌망(坐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단독자 이야기’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수행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얼른 보면 철학에서는 다룰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옳은 인상이다. 왜냐하면 장자는 지금 여기서 우리의 주체 형식의 변형을, 다시 말해 이론적 체계가 아닌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우리가 이 이야기를 분석할 수 없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이런 실천이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한 사실적 이해보다는 이 실천이 지닌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충분히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단독자 이야기를 읽었을 ..
3. 고착된 자의식이란 양파를 벗겨가다 고착된 자의식은 ‘나는 이제 자신을 비웠어’라는 의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에도 이미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의식의 동일성을 해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생사 관념도 대대 관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처럼 언어적 논리에 대한 직시로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관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사는 형식적으로는 저것과 이것[彼ㆍ是]으로 대표되는 대대 관계 일반의 한 사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 인간의 고착된 자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대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2. 생사의 관념조차 벗어나다 우리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먼저 배우는 것이 물에 뜨는 법이다. 수영 강사는 내게 물에 몸을 맡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물에 빠져 죽으려는 느낌으로 물에 몸을 맡겨라’라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끝내 나는 다시 물에 가라앉고 잔뜩 물을 먹고 말 뿐이다. 우리는 화가 나서 수영 강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질 수도 있다.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도 제가 이렇게 물을 먹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수영 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설마 물에 빠져서 죽지는 않겠지..
1.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의식’ 1. 소의 물살에서 자유자재 헤엄치던 사람 장자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마음에서 해체하라고 권고했다. 이런 해체를 통해서 우리는 접촉한 타자에 따라 임시적인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마음의 유동성, 즉 비인칭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고착된 자의식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여긴다[自是]’라는 의식형태로 규정될 수 있다면,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자의식은 ‘자신을 저것으로 여긴대[自彼]’라는 의식형태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이것[是]이라고 개념 규정되기에, 자신을 저것으로 여기는[自是] 주체의 의식 상태는 이것[是]이면서 동시에 저것[彼]인 상태, 즉 ‘이것=저것’인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도의 ..
Ⅶ. 단독자[獨]의 의미 성인의 도로 성인의 재주가 있는 이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삼일이 지나서 천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천하를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칠 일이 지나서 외부 대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외부 대상을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구 일이 지나서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以聖人之道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參日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이미 삶을 잊어버린 후 (그는) 조철(朝徹)할수 있었다. 조철한 후에 (그는) 단독자[獨]를 볼 수 있었다. 단독자를 본 이후에 (그에게는..
3. 맹손재가 상례를 가장 잘 치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장자에 따르면 사유 현재가 꿈과 같은 것이라면, 존재 현재는 깨어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전언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관적이고 나아가 잔인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불교에는 여실(如實)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디로 현실과 같이 사태와 자신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어느 날 어느 여인이 울면서 부처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제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보고 싶고 또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는 말했다. “네가 어느 집이나 가서 그 집 중 ..
2. 자아의 상이한 형태 얼마 전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최소 6개월 이상은 가끔 잊는다고 한다. 아내를 사고로 잃은 어떤 남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회사에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안방 문을 열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찾곤 한다. 그러다가 방에 걸린 아내의 영정을 보고서야 그는 아내가 죽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아내에 대한 지고한 사랑 때문인가? 아니다. 이것은 이 남자가 자신의 자기의식을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의지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은 사유의 연속성, 인칭적 자아의 동일성을 부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사유는 계속 관성(기억ㆍ지각ㆍ예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착..
3. 꿈[夢]으로부터의 깨어남[覺] 1. 사유현재와 존재현재 장자는 공자 사상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자신의 사유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그 핵심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공자의 서(恕)의 원리를 더 급진화하는 데 있다. 즉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人所不欲, 勿施於人]!”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마늘을 싫어하기 때문에 남에게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주지 않는다. 이런 원칙은 기본적으로 남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늘을 싫어했을 때에만 적용가능한 원칙에 불과하다고 이미 말했다. 여기에는 타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원칙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타자의 소리에 대한 귀 기울임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