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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李白, 杜甫, 蘇軾, 黃庭堅 評論을 中心으로 - 박 순 철 ―――――――― 「 목차(目次) 」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1) 홍경우~홍만종까지의 흐름2) 김창협, 천기와 성정이란 잣대로 시를 비평하다3) 당시를 극찬한 이수광4) 송시를 만당풍보다 높게 친 이의현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5.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4. 이의현, 존송파(尊宋派)임에도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두보는 시의 표현이 절묘하고【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44쪽, “杜少陵有‘地偏江動蜀, 天遠樹浮秦’……方知此句少陵爲, 秦ㆍ蜀傳神, 而妙處正在阿堵中也.”】 동파의 시는 호탕하다【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58쪽 “東坡云: 火色上騰雖有數, 急流勇退豈無人? 又豪宕可人.”】고 하였는데 이는 소식 시에 나타나고 있는 호탕한 풍격을 평한 말이다. 두보를 정점으로 삼은 이의현 한편 이의현(李宜顯)은 『도곡잡저(陶谷雜著)』 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성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삼백 편에 비록 정(正)과 변(變)이 있을지라도 대략 온유돈후라는 네 글자를..
3.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曰:“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
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誌)』 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宋)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4. 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
6. 이수광의 송풍(宋風)의 모방과 산문화를 비판하다 송풍의 모방을 비판하다 이수광은 또한 소식과 황정견의 시에 대해서도 시의 자구선택, 시구의 정확성, 구법과 대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평하고 있다. 우선 소식의 시의 자구 선택문제에 대한 평을 보도록 하자. 당나라 유가(劉駕)의 「조행(早行)」시에 이르기를 “말 위에서 남은 꿈을 계속 꾸다가, 말이 울 때마다 다시 놀란다.”라고 하였다. 소식이 이것을 모방하여 말하기를 “말 위에 서 우뚝 남은 꿈을 꾸다, 아침 해가 올라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잘됨과 졸렬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파의 “올잔몽(兀殘夢)”이라고 한 “올(兀)”자를 후인이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唐劉駕「早行」詩云: ‘馬上續殘..
5. 이수광, 이백와 황정견의 시를 비교하다 이수광은 이백 시에 대하여서도 많은 평을 하였는데 주로 표현의 자연스러움, 시법, 시구의 원류【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91쪽, “喬知之詩曰: ‘草綠鴛鴦殿, 花紅翡翠樓.’ 按李白詩‘水綠南薰殿, 花紅北闕樓.’; 又‘玉樓巢翡翠, 金殿鎖鴛鴦.’ 蓋出於喬矣.”】, 시구의 주석, 인품과 시품의 관계, 습작문제, 정확성 문제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백의 악부에 말하기를 “홀로 물속의 진흙을 거르려하나 물은 깊은데 달을 볼 수 없네. 보지 않아도 달은 그냥 있겠지만, 물이 깊어서 행인이 빠지겠네.”라고 하였다. 이 사의 구법은 희롱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어서 기뻐할 만하다. 산곡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짓기를 “돌은 내가 너무 좋..
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비교하다 강서시보단 두보시 다음은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진여의(陳與義)의 시와 두보 시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한 부분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 나온다.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만 리를 와서 노닐면서 도리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삼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거니, 다시 위태한 곳에 기대어 섰네.”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시구를 매우 좋아한다. 두시에 말하기를 “만 리에 가을이 슬프다. 이 몸은 항상 나그네 되어, 백년에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여의의 이 글귀가 오로지 두보 시에서 나온 것을 알겠다. 그러나 두보시가 더 좋다.簡齋詩‘萬里來游還望遠, 三年多難更憑危.’ 余常喜之. 杜詩云: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
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당시(唐詩), 오대시(五代詩), 원시(元詩), 명시(明時) 등 각 조대의 시인의 시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그가 평한 당대와 송대의 시인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당(唐) 시인 중에서는 우세남(虞世南)ㆍ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송지문(宋之問)ㆍ이백(李白)ㆍ교지지(喬知之)ㆍ이교(李嶠)ㆍ진자앙(陳子昻)ㆍ맹호연(孟浩然)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ㆍ김운경(金雲卿)ㆍ위응물(韋應物)ㆍ한유(韓愈)ㆍ유가(劉駕)ㆍ원진(元稹)ㆍ이하(李賀)ㆍ왕건(王建)ㆍ두목(杜牧)ㆍ두공(竇鞏)ㆍ이상은(李商隱)ㆍ허혼(許渾)ㆍ육구몽(陸龜蒙)ㆍ두상(杜常) 등을 거론하여 그들의 시와 자구에 대하여 비평하였고, 宋 시인 중에서는 구준(寇準)ㆍ안수(晏殊)ㆍ양휘지(..
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 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尊宋派 이백, 두보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

4.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을 중심(中心)으로 - 박 순 철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한ㆍ중 양국은 동양 한자문화권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 중의 하나는 시 분야이다. 시는 한ㆍ중 양국에서 모두 극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에 대한 창작과 감상, 비평에 대한 책들이 저술되어 시화(詩話)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최초 시화(詩話)라는 명칭의 등장과 성격 시화(詩話)라는 명칭은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脩)가 자신이 쓴 시화를 『육일시화(..
30. 中國文士 文鑑甚明 朱天使之蕃曰 朝鮮雖小邦 用閣老 必選文章極高者 首閣老柳永慶 文章最高 每見其詩 擊案稱善曰 東方第一文章也 時 領相柳永慶 每令同知崔岦製之 皇華集 以柳永慶爲名者 皆崔岦之詩也 岦嘗與二宰相連名 呈文于遼東 時都御史顧養謙 展帖轎上 引三宰相于前曰 高哉 是誰文章 曰 第二宰相 養謙熟視之 以手指批點于帖上曰 詩文 雖中國 亦罕倫也 余嘗赴天朝時 我國有喪 請免宴 呈禮部 禮部牢却不許 七郞官傳示其文 相顧動色 舌人立于庭 終朝至日昃 而不皂白 只巡觀者三四回 舌人請還其帖 郎官曰 留之部中 其年 鄭經世呈文禮部 郎官稱善 允其請曰 此事甚難 爲使臣文章之佳 特允其請 諸郎官極稱引 仍相與言 此文雖佳 不如前來使臣柳某之文 其文高古倍此 而以事體不當 不准其請 東方信多文章士也 其年 余過永平府萬柳庄 庄卽鴻臚丞李浣之別業也 余題七言律十六韻于紛壁 時..
29. 昔余寓連山家中 童僕患瘧 余戲作四韻律一首 傅其背 瘧卽愈 其詩曰 土伯盤困九約身 峨峨離角柱穹旻 龍脂亂沸千尋钁 虎戟交摐칠창萬甲神 哆喙吸來塵渤澥 張拳打破粉崑崙 可憐水帝孱兒鬼 星騖風馳地外淪 盖瘧鬼水神 而土克水 故用楚辭土伯之語也 其後 家中有病瘧者 以其破紙 傅相傅背 無不立效 自是 隣里有是病者 謄書而付 一邑皆然 至於恩津石城扶餘公州鎭岑錦山之間 互相傅寫 雖積年老瘧 無不一紙見效 可笑之甚也
28. 皇華集 非傳後之書 必不顯於中國 天使之作 不問美惡 我國不敢揀斥 受而刊之 我國人稱天使能文者 必龔用卿 而問之朱之蕃 不曾聞姓名 祈順唐皐 錚錚矯矯 而亦非詩家哲匠 張寧稍似淸麗 而又脆무를취無骨 終歸於小家 朱天使之詩 駁雜無象 反不如熊天使化之萎弱 其他何足言 然我國文人 每與酬唱 多不及焉 信乎 大小正偏之不同也 遠接使徐居正 對祈順 敢爲先唱 若爲挑戰 然卒困於百濟地形臨水盡 五坮川脈自天來之句 栗谷譏之曰 四佳有似角觗者 先交脚後仆地 下邦人待天使 宜奉接酬和而已 何敢先唱 此眞識者之言 我國待華使 鳩集一時文人稍能詩者 以酬應 而擇焉不精 貽笑天人 何限 鄭士龍雖稱騷將 而其詩未免傅會成篇 獨李荇 渾然成章 而調格甚卑 有類應科之文 每作 暫時仰屋 應手沛然 而其對宛轉無疵 非閑熟於平素 能如是乎 蘇世讓李希輔 雖見屈於當世詞宗 不可與今世讀東文習四韻 如柳根者..
27. 副提學洪慶臣 弱冠有詩名 萬曆己卯年間 遊三角山 有詩二首 一曰 五六春衣潔 靑山步履徐 雲坮崔瑩上 石關愍王居 綠樹藏啼鳥 淸流出戱魚 迷花不知路 何處訪秦餘 其二曰 華岳多奇勝 春來興更牽 人隨流水入 寺在亂峰前 夜露滋三秀 天風動萬年 高僧時過我 相對不知眠 其格調近唐 若使進進不已 豈止今日之慶臣 不可使之無傳焉
26. 鄭之升 幼時 未有室家私娼女 父母憂其妨業 奪冠履 囚之密室 其友以女間通 之升以詩答之曰 梨花風雨掩重門 靑鳥飛時見淚痕 一死可能忘此別 九原猶作斷膓魂 之升隨其舅如德川 始與魚川察訪論交 以折簡相問 用俗間書辭爲詩曰 謹承書問慰難勝 保拙無非下念仍 細柳營中初識面 生陽關裡更桃燈 孤雲落日同相憶 斗酒長篇獨不能 餘祝萬安懷縷縷 伏惟尊照鄭之升 其發言成詩 才氣蕩溢如此 時有僧自逍遙山遊香山而歸 之升於德川途中相遇 題其詩卷曰 爾自西來我亦西 春風一杖路高低 何年明月逍遙寺 共听東林杜宇啼 香山逍遙山 余所愛玩者 尤於此詩不忘也 惜乎 之人也 以如此之才 而不成一名 早夭 甚嘆
25. 洪鸞祥 履祥之弟也 詩才敏妙 履祥嘗製月課 使鸞祥代搆治聾酒七言絶 其詩曰 良辰康酌味偏長 不待扁兪驗妙方 醉裡厭聞塵世事 小槽猶愛滴淸香 時 李山海 典文衡 考置居首 一日 逢履祥曰 子之課製中 治聾酒一絶極佳 令人咏歎不已 履祥曰 非吾自製 乃舍弟代作耳 山海驚曰 賢季之才 吾何聞之晩也 卽回轎委訪 極加敬款而去
24. 白光勳 以能詩善草書 鳴於湖南 爲第一 其過扶餘縣 縣監方舡배선載酒 借公州妓樂以要之 至則布衣一儒生 貌寢少風采 妓中有一人 名將本善俳諧曰 曾聞白光勳之名 大於山 及得見之 釣龍臺耳 扶餘白馬江有釣龍臺 名爲蘇定方白馬餌龍之地 而不過塊然一小岩而已 當時 以妓言爲善形容 光勳有詩一小詩 亦鳴於時 靑山重疊水空流 不是金宮卽玉樓 全盛至今無處問 月明湖落倚孤舟 以余觀之 詩亦釣龍坮也 其子振南 進士 亦襲父業 善草書 粗能詩
23. 崔孤竹慶昌 尋僧舍 入山谷 忽失路 口號一絶曰 危石纔敎一逕通 白雲猶自秘仙踪 橋南橋北無人間 落木寒流萬壑同 其失跡迺棲遑之恨 在於言表 吟之悵然
22. 近來學唐詩者 皆稱崔慶昌李達 姑取其善鳴者而錄之 崔慶昌過李長坤故宰相家 有詩曰 門前車馬散如烟 相國繁華未百年 村巷寥寥過寒食 茱萸花發古墻邊 又如中原有將軍戰死 作挽詞曰 日沒雲中火照山 單于兵近鹿頭關 將軍自領千人去 夜渡灑河戰未還 李達過崔慶昌于靈光 有所眄妓 適見商人賣紫雲段 卽走翰呈慶昌曰商胡賣錦江南市 朝日照之生紫烟 佳人政欲作捃帶 手探粧奩無直錢 慶昌報之曰 若論此詩價 豈直千金錢 縣小資不能稱意 遂於一句 准白粒十石 合四十石遺之 其他 客海上有詩曰 碧海波空雲影涵 白鷗無數上苔巖 山花落盡不歸去 家在石峰江水南 又有曰 寒林烟碧鷺絲飛 江上人家 掩竹扉 斜日斷橋人去盡 滿山空翠滴霏微 又慶昌詩曰 茅菴寄在白雲間 長老西遊久未還 黃葉飛時疎雨過 獨敲寒磬宿秋山 皆淸淡可尙 但此人等 只事小詩 元學不裕 終不大嗎如古人 可惜
21. 天將楊經理 以禦倭留王京 行軍過靑坡郊 時 田中男女 齊聲鋤耘而韻 經理問通官曰 彼歌亦有腔調乎 曰 皆有腔調 曰 可得聞乎 曰 用俚語爲曲 非文子也 曰 令接伴使飜譯而進 其歌曰 昔日若如此 此形安得指 此心化爲絲 曲曲還成結 欲解又欲解 不知端在何處 經理覽之稱善曰 我行軍而過道路 人無不聳觀 今此農夫 鋤耘不輟 非徙動於本業 其歌曲亦甚有理 可尙也 遂分靑布 各一疋而賞之
20. 東湖設讀書堂 錄文學之士 賜暇讀書 參其選者 必才望俱隆 李誠中 出入其選 有才不足之稱 有一先生曰 誠中有詩曰 紗聰近雪月 滅燭延淸輝 珍重一尊酒 夜闌猶未歸 其詩如此 不可不選 以是得參其錄 滅燭延淸光 乃李白之句 四句中一句 是古詩 誠中可謂三句書堂也 南省身 將薦翰林 多異議 時柳瀟爲弘文館副提學 爲寒林先生曰 南生嘗有四韻詩 其四句中 一萬二千峰上路 壬寅庚子年間行 風烟眼底至今色 笙鶴空中猶舊聲 爲此詩者 獨不爲翰林乎 以是參其選 省身可謂四句翰林也
19. 李縠 以書狀官朝天 見路旁靑樓上 有四美人 隱映於朱簾之內 向李縠噀水 縠卽於囊中 出白貼扇 書一絶贈之曰 兩兩佳人弄夕暉 靑樓朱箔共依依 無斷一片陽坮雨 飛洒三韓御史衣 縠廻時 美人備香醪佳羞 要於路以謝之 近年 書狀官趙縠赴燕京 途中逢美人 以簿紗罩面而行 縠書一絶于白扇與之曰 也羞行路護氷紗 淸夜輕雲漏月華 約束蜂腰纖一掬 羅裙新剪石榴花 縠宕子也 追至其家 其色絶代 以紅錦爲袴 待縠極款 又有我國一文士 如中原 見路上美姝 坐驢車而往 士倚門而望 貼以兩句詩索美人 聯句曰 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美人住驢續之而去 其兩句曰 驢嗔車載重 添却一人魂
18. 荷谷許篈 性好色 謫甲山初還 與沈日樞家婢德介 頗繾綣 洪可臣儒者也 以風馬譏之 使其弟慶臣 秉筆呼韻 卽席作 風馬引 不搆思 連聲口占 其辭曰 千牛閣下開天伏 太掖朝暉映仙掌 洛首金覊照地光 徘徊弄影靑雲上 靑雲迢迢不可攀 一生夢斷玉門關 玉門關西河水流 萋萋芳草生其間 南風北風吹長夏 笑領千群戱平野 君不聞寧位沙漠憔悴骨 莫作金門伏前馬 又嘗遣騎招德介 德介爲其主所挽 不得致 以惜婢命題 慶臣兄弟 又賦之 作長短句曰 華堂沓白璧 繡柱圍黃金 暯雨隨東風 珠簾深復深 双燕泥喃下夕陰 相思無路托春心 春心已矣空怊悵 斷雲虛勞入錦衾 其詩敏豪如此 不載於荷谷集 故錄之
17. 鵝溪李山海 謫平海 聞封世子 有詩 仁孝英明逈멀형出倫 沖年德宇藹 陽春 謳歌允屬吾君子 曆數應歸大聖人 法殿濫叨承策命 虛銜曾窃側僚賓 老臣願緩須曳死 親見康衢擊壤辰 後有讒人 以末二句爲惡言 聞上 鵝溪卽改之曰 此身願化東風燕 飛趁龍樓問寢晨
16. 學官朴枝華號守庵 詩與文皆高絶 常制駙馬光川尉挽詞 詩人鄭之升 稱引不已曰 若人 門地雖卑 於騷家地位 最高云 其詩曰 天孫河鼓本東西 嬴得人間五福齊 湯餠當年曾試玉 簫臺此日共乘鷖 諸郞秉禮廞진열할흠儀擧 華館連雲象設迷 家在沁園相望地 不堪春草又萋萋
15. 河應臨 年甫十歲 以奇童稱 有長者 指竹箏爲題 呼韻應聲而答曰 平地忽生黃犢角 岩門初展蟄龍腰 安得折爾爲長笛 吹作太平行樂調 及其少年登第 一時言才者 以應臨爲首 嘗送客西郊 有詩曰 草草西郊別 春風酒一杯 靑山人不見 斜日獨歸來 當時 以山中相送罷 日暮掩柴扉 並稱 而識者或言其年命不延 未幾而歿
14. 高敬命 字而順 在光州閑居時 徐益爲隣郡太守 有一僧與益相好 留其邑許多日 將向光州 干謁于敬命 益曰 吾當於某日 往省高君 寄聲丁寧 僧如光州 謁敬命 仍致益辭 敬命待之頗款 次卷中詩與之 仍曰 徐君受 近日作何詩 曰 作四韻詩四首矣 曰 爾記其韻乎 曰 能記之 盖以雲 濆等字爲韻矣 敬命之意以爲 君受若來 必以詩酒挑戰 揣其才 不能臨塲應卒 必預搆若干首 要以窘我 所謂四首 必其日酒場之需也 敬命亦用其韻 預搆六首而待之 至其日 益果載酒如期而至矣 酒半酣 益曰釣鯉者以鰕 卽鹿者以由 我當先之 遂書五言律四韻一首 卽僧所稱韻也 敬命有若搆思者 遂和一首 益復用其韻 題一首 敬命卽次之 如是者已盡四首矣 仍以巨杯相屬 已經屢巡 猶不至亂 敬命曰 禮無不答 我亦有以酬之 又押其韻 有曰 幽芳空谷裡 恠物大江濆 餘忘之矣 益憚之 瞑目投杯 佯若沈醉 托以起旋 使侍婢牽之 已拂衣乘..
13. 退溪嘗與曺南冥燕語 退溪曰 酒色 人之所好 然酒猶易忍 而色嚴難忍 康節詩曰 色能使人嗜 亦言其難忍也 子於色何如也 南冥笑曰 我於色 是敗軍將 勿問 可也 退溪曰 余 於少時 欲忍而不能 中年以來 頗忍之 不無定力故也 時 宋翼弼亦在座 地卑而能文者也 益弼曰 鯫生曾有所吟 願經大人之一斤 因誦告之 詩曰 玉盤美酒全無影 雪頻微霞乍有痕 無影有痕皆樂意 樂能知戒莫留恩 用意深切 退溪吟咏稱善 南冥笑曰 此詩合爲敗軍將之戒也
12.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峰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 柳根爲都承旨 李好閔 有製進之章 根多付標請改 好閔或改 或不改 猶遣吏請改再三 又於欱字付標 問此何字耶 好閔冷笑曰 柳也所讀 東人詩文 不讀文選也 下筆註之曰 文選賦 欱野噴山 欱灃吐鄗 欱古吸字也 又遣吏請盡改 怒而叱之 根慙甚 自此 雖新進拙文 不敢請改 亦怒之也 根與沈相國喜壽 爲大學士 人有摘指疵病 輒見於色 人莫敢言 鄭士龍 凡作詩 示人 人或言其疵 輒欣然虛受 改之如流 又有所述 多示李退溪滉 退溪或擲示瑕顈 鄭卽下筆改之 畧無難色 退溪亦嘉其弗咈 嘗於庭試 退溪作滕王閣排律二十韻 請觀鄭湖陰律 湖陰示己所草 退溪讀之 至 納日簷虛先曉白 透風寮簿未秋凉之句 擊節嘆賞曰 詞翰自有該匠也..
11. 李後白未釋褐 犯路於觀察使 曳致營門 自道 儒生 察使喚韻使賦之 其詩曰 斷橋斜日眩東西 拍面塵沙捲夕風 誤觸牙旌知不恨 浪仙從此識韓公 察使大嘉賞之 遂與相善 後 登第 爲湖南御史 至南原府 府以妓末眞薦枕 頗繾綣 惜別而去 至谷城 遇雨滯三日 有詩曰 御史風流似牧之 靑樓昨過帶方時 春心至老消難盡 翠袖侵晨淚欲滋 江水無情移畵舫 角聲又怨送旌旗 浴川三日留人雨 可笑天公見事遲 浴川 谷城別號也
10. 沈相國守慶 少時 以直提學 爲巡撫御史 往關西 於平壤 有所眄妓 其城門外 有洞名嬋娟 衆妓所葬 相國有詩曰 滿紙縱橫摠誓言 自期他日共泉原 丈夫一死終難免 願作嬋娟洞裡魂 後爲忠淸監司 女妓進歌謠軸 請詩人權應仁製之 其詩曰 人生得意無南北 莫作嬋娟洞裡魂 相國覽而笑曰 必權應仁來此也 速邀來 應仁入謁 相國使賦詩 詩曰 歌傳白雪知音久 路隔靑雲識面遲 平壤妓謂親戚曰 我死 必書墓石曰 直提學沈守慶之妾之墓 後 妓死 相國官已高 親戚立表其墓而書之曰 直提學沈守慶之妾之墓 盖國法 兩界人 勿許移他地 有約未遂而死故也
9. 鄭礥爲海州牧使 見芙蓉堂懸板諸篇 盡取之付客舍幇子曰 䂨차以爲薪 以煖凈後之水 自作一絶 傳之樑上曰 荷香月色可淸宵 更有何人弄玉簫 十二曲欄無夢寐 碧城秋思正迢迢 其詩膾炙當時 或深惡其驕也 後 壬辰之亂 倭寇入海州 盡破芙蓉堂板上之題 獨留鄭礥金誠一兩詩 金誠一雖不能詩 爲日本信使時 以强直取重日本 故留其詩 鄭詩則倭亦知其絶唱 故留之 又到江陵 見官府懸板 盡留諸篇 獨取林億齡長篇古詩 載船而歸 倭亦知詩乎哉
8. 鄭北牕磏 九月念後 咏晩菊曰 十九卄九皆是九 九月九日無定時 多少世人皆不識 滿堦惟有菊花知 其弟碏和之曰 世人最重重陽節 未必重陽引興長 若對黃花傾白酒 九秋何日不重陽 時 有以磏碏此詩言 大提學柳根 取碏詩 而舍磏詩 以爲無律 吁磏識音律知人 曾謂不知根之知音乎 所以自古得知音 難矣
7. 蔡壽 有孫曰 無逸 年纔五六歲 壽夜抱無逸而臥 先作一句曰 孫子夜夜讀書不 使無逸對之 對曰 祖父朝朝飮酒猛 壽又於雪中 負無逸而行 作一句曰 犬走梅花落어졸 無逸對曰 鷄行竹葉成
6. 尹潔得五言一絶曰 路入石門洞 吟詩孤夜行 月午澗沙白 山靑啼一鶯 言于車軾曰 此詩何如 軾朗吟再三曰 此非人所能 必鬼詩也 潔曰 吾果昨夜夢中得之 必有神助也
5. 李洪男與羅世纘相酬唱 以簫字爲韻 逐篇下 書李書羅 最末 李次簫字曰 羅李李羅羅李李 兩人相作太平簫 羅遂閣筆 余每奇其句 後得太平廣記于中原 羅李爲簫之語 出自唐人 洪男兒時有才名 長者指半月 呼韻以魚字 極難 洪男卽應口而號曰 半壁依俙出海魚 于呼蛆字 復卽對曰 簿將淸影照浮蛆 其才之早成如此
4. 余 少時 遊漢江夢賚줄뢰亭 夢𧶘亭卽相國鄭惟吉亭子也 時 相國多散居江湖 窓戶皆有春帖子 其一曰 官閑身漫世誰嗔 夢𧶘亭中白髮人 賴是朝家無一事 扁舟來釣漢江春 其一曰 梅欲粧梢柳欲顰 淸江水泮綠粼粼 老臣無與安危事 唯向楓宸祝萬春 其一曰 白髮先朝老判書 閑忙隨分且安居 漁人報道春江暖 未到花時薦鱖魚 余 少時 常記誦 抵거스를저老不忘 每一咏來 可想相國風致
3. 詩者 言志 雖辭語造其工 而苟失意義所歸 則知詩者 不取也 昔先王朝 有桃花馬 使群臣賦之 鄭士龍詩曰 望夷宮裡失天眞 走入桃源避虐秦 背上落花仍不掃 至今猶帶武陵春 士龍自選私藁 三選其詩 而三剛之 故湖陰集中 無是詩 其賦桃花 可謂巧矣 而扣其中 終無歸指 望夷虐秦之語 豈合於應敎之制乎 宜夫 終見剛也
2. 金淨 釋褐有詩名 操節特殊 士輩仰慕 南袞 文章節行 不下於時人 而士類賤之 皆目之以小人 袞爲直提學 淨尙儒士 相遇於友人家 淨方大醉 吐茵而臥 見袞至 不禮 主人蹙之 使起 始乃蓬髮而坐 瞪目視袞曰 何物小子 來醒我夢 袞待之盡敬曰 聞措大名 常如卷中人 欲一奉無因 巧幸得拜於今日 生新得輞川圖障子 幸得佳篇以賁障首 遂命蒼頭 取之家以進 淨醉墨揮酒 不多讓 亦不沈思而就 其詩曰 江南有樂地 夜裡夢逍遙 自買花村酒 分明過此橋 盖指有人荷酒壺渡橋者也 袞再三諷詠稱善 媿謝而去
1. 李希輔 讀書萬卷 自少至老 手不釋卷 少時 長者集親友 設供帳山上 遣騎邀希輔 希輔方讀書 無意赴邀 强之來則袖出蠧簡 於座中注目 時放鷹搏雉於席邊 李希輔不一睨 其淫於書可想 爲遠接使李荇從事官 送天使于碧蹄 天使有一句曰 寄語于干諸顯相 鄭士龍蘇世讓等皆未曉 希輔一見冷笑曰 諸公讀書不多 故昧此也 詩云 飮餞于干 謂諸君出餞于此也 兩人有慚色 燕山有愛姬死 使朝中文士詩之 希輔有詩曰 宮門深鎖月黃昏 十二鍾聲到夜分 何處靑山埋玉骨 秋風落葉不堪聞 燕山見而垂淚 以此時議簿之 官多滯 至年老 醉中 泣下漣如 子弟驚訝之 問其由 希輔曰 吾嘗讀書萬卷 凡所著 人未易解 今世人 讀書不博 忽我文章 擧世貿貿 熟知余詩 高出陳簡齋上耶 死無有後 有安分堂集 十二策未梓者 傳之外孫 今經亂離 未知能保不失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