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귀
귀각지첨선(晷刻知添線)
동지가 지난 뒤에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말한다. 『세시기(歲時記)』에 “궁중 여인들이 일을 하면서 붉은 실로 해 그림자를 재는데, 동지가 지나면 날마다 조금씩 그 길이가 늘어난다.”라고 하였다.
귀감(龜鑑)
귀(龜)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본 모습이다. 옛날에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 그것이 갈라지는 균열을 보고 사람의 장래나 길흉을 점쳤다. 반면에 감(鑑)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판단하는 모든 행위에 감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흔히 쓰는 감상(鑑賞), 감별(鑑別), 감정(鑑定) 등이 그 예이다. 귀감이란 말은 사람의 길흉이나 미추를 판단해 주는 기본 도구였던 셈이다. 즉 길흉을 점쳐주는 귀와 미추를 알려 주는 감(鑑)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본보기가 될 만한 언행이나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을 가리킨다.
귀감고명실(鬼瞰高明室)
고명 부귀(高明富貴)한 집은 귀신이 항상 그 집을 엿보아 장차 그 성만(盛滿)함을 해치려 한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부귀의 극에 이른 귀인의 집은 귀신이 그 교만한 뜻을 싫어해서 해치려고 틈을 엿본다[高明之家 鬼瞰其室]”라는 말이 나온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 해조(解嘲)
귀개공자(貴介公子)
귀한 집의 자제를 말한다.
귀거래(歸去來)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유래되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때, 순시하러 온 상관인 독우(督郵)에게 머리 숙이기 싫어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것이다.
귀곡(鬼谷)
① 하남(河南) 등봉현(登封縣)에 있는 골짜기로서 육국 시대(六國時代)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스승 귀곡선생이 살던 곳이다.
② 전국(戰國) 때,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왕후(王詡)의 별호이다. 청계(淸溪)의 귀곡(鬼谷)에 살았으므로 귀곡 선생(鬼谷先生)이라 하는데 “청계의 깊이가 천 길이 되는데, 그 가운데 도사가 살고 있다네[淸溪千餘仞 中有一道士]”라고 한 곽박의 시가 있다. 『사기(史記)』 卷六十九 「소진열전(蘇秦列傳)」
귀곡선생(鬼谷先生)
전국 때 제나라의 출신의 종횡가로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는 초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방성(方城) 부근의 영천(穎川) 양성(陽城)의 귀곡(鬼谷)이라는 곳에 은거하여 살았기 때문에 귀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귀곡(鬼谷)은 일설에는 지금의 섬서성 경양(涇陽)의 부풍(扶風)의 지양(池陽) 부근이라고도 한다. 그의 사상은 황노(黃老)의 심술(心術)에서 출발했다. 세상의 일을 논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우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반응(反應) 단계를 거쳐, 자기의 마음으로써 미루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췌마(揣摩)에 이르러, 마침내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비합(俾闔)의 술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함으로 해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유세가들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은 그의 제자이며 귀곡자(鬼谷子) 3편이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실려 있으나 일설에는 소진이 저술하고 신비감을 보태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도 한다.
귀곡자(鬼谷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종횡가(縱橫家). 성명‧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반 지식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가 숨어살던 귀곡이란 지명을 따서 호를 삼고 종횡설의 법(法)을 적은 귀곡자(鬼谷子) 3권을 지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귀곡천계(貴鵠賤鷄)
따오기(혹은 백조)는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에서, 먼 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임을 말한다.
귀관(鬼關)
중국 광서(廣西) 북류현(北流縣) 서쪽에 위치한 귀문관(鬼門關)을 말하는데, 중원에서 흠(欽)·염(廉)·뇌(雷)·경(瓊) 및 교지(交趾)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귀괴(鬼怪)
귀신이 번개같이 출입하는 모양이다.
귀굴(鬼窟)
유가(儒家)에서 외도(外道)를 뜻하는 말로, 선가(禪家)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귀근(歸根)
『도덕경(道德經)』 16장에 “만물이 무성하다가도 각자 그 뿌리에 복귀하나니, 그것을 일러 고요함이라 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라고 하였다.
귀기(鬼欺)
환온(桓溫)이 나우(羅友)의 재주나 학문은 대우하면서도 그 사람됨이 허탄하여 치민(治民)의 재목은 아니라 하여 발탁하지 않았다. 뒤에 한 사람이 고을살이로 나가게 되어 환온이 환송연을 마련하였는데 나우가 늦게 당도하였다. 온이 그 까닭을 묻자 “제가 급히 달려오던 중 귀신이 나타나 ‘나는 그대가 남의 고을살이 나가는 환송연에 참여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남은 그대가 고을살이 나가는 환송연에 참여하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이다.’고 야유하기에 자신이 부끄러워 내심 생각하느라고 길이 늦어지는 줄도 몰랐다.”고 익살을 부렸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귀녕(歸寧)
보통 부인이 친정 집에 가서 문안하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갈담(葛覃)」에 “돌아가서 부모를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고 하였다. / 인용: 秧歌五章(이학규)
귀래사(歸來辭)
문장(文章)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평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군(郡)에서 독우(督郵)가 나와 순시를 한다고 하자 “내 어찌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향리 소인(鄕里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느냐.”라 하고, 그날로 사직하고 이 글을 지었다 한다.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귀래장읍대장군(歸來長揖大將軍)
한 무제(漢武帝) 때 대장군 위청(衛靑)이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급암(汲黯)은 그를 볼 적에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던 고사에서 온 말로, 남자의 기개(氣槪)를 비유한 말이다.
귀래정(歸來亭)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굉(李浤)이 안동(安東)의 동쪽 와부탄(瓦釜灘) 위에 지은 정자 이름이다.
귀래탄무어(歸來嘆無魚)
“긴 칼아, 돌아가자. 밥상에 생선 없구나[長鋏歸來乎! 食無魚].”라고 하였다는 옛말이 있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 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귀래폐진흑초구(歸來弊盡黑貂裘)
외지(外地)에서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소진(蘇秦)이 진(秦) 나라에서 흑초구(黑貂裘)가 해지도록 있다가 왔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귀래학(歸來鶴)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라고 한 데서, 옛날에 정령위가 학으로 화해 돌아왔다는 말이다.
귀마방우(歸馬放牛)
전쟁에 사용할 말과 소를 숲이나 들로 돌려보내어 다시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음을 의미하는 뜻의 고사성어다.
귀모(鬼母)
유방(劉邦)이 칼로 베어 죽인 백사(白蛇)의 어미 이름이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귀모토각(龜毛免角)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라는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귀묵(龜墨)
옛날 거북 등에 먹줄을 긋고 불에 구운 뒤 길흉을 판단하였는데, 먹줄을 따라 거북 등이 터지면 길조(吉兆)로 여겼다. 『예기(禮記)』 「옥조(玉藻)」
귀문(龜文)
거북 모양으로 손잡이를 만든 관인(官印)이다. 한관의(漢官儀)에 “승상(丞相)은 황금으로 만든 거북 손잡이 도장에 장(章)이란 글자를 새긴다.”라 하였다.
귀문관(鬼門關)
중국 광서(廣西) 북류현(北流縣) 서쪽에 있는 관문으로 옛날 중원에서 흠주(欽州)·염주(廉州)·뇌주(雷州)·경주(瓊州)와 교지(交趾)로 통행하는 길목이었다 한다. 산세가 험준한 데다 장려(瘴癘)가 만연하는 등 풍토가 험악하여 생환(生還)하는 자가 드물었으므로 “열에 아홉은 못 돌아오는 귀문관(鬼門關 十人九不還)”이라는 속요(俗謠)까지 유행했다 한다. 『구당서(舊唐書)』 「지리지(地理志)」 4
귀문금신(鬼門金神)
귀문에 있는 금신으로 사람에게 재화를 내린다고 한다.
귀배괄모(龜背刮毛)
없는 거북 등의 털을 벗겨 뜯는다. 없는 것을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다.
귀백(鬼伯)
귀신들의 우두머리로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말한다.
귀산(龜山)
의흥(義興)의 고호(古號)이다.
귀석(歸舃)
수령으로 있다가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섭현(葉縣)의 수령 왕교(王喬)가 조정에 올 때마다 들오리를 타고 오곤 하였는데, 이를 잡아서 조사해 보니 옛날 상서령(尙書令)으로 있을 때 하사받은 신발(舃)이 그 속에 있더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귀선(鬼仙)
시의 귀재(鬼才)로 불린 이하의 별칭이다.
귀수(鬼叟)
선인(仙人) 황석공(黃石公)을 이른다. 진(秦) 나라 말기에 다리 위(圯上)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讀此可謂帝者師. 異日見濟北穀城山下黃石, 卽我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五十五
귀신(鬼神)
귀(鬼)는 음(陰)의 정기를 가진 영(靈)이요, 신(神)은 양(陽)의 정기를 가진 영(靈)이다. 혼백(魂魄)이란 말도 음양으로 구별되는 데 정신을 가리키는 양(陽)의 넋이 혼(魂)이요, 육체를 가리키는 음(陰)의 넋이 백(魄)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백(魄)은 땅 속으로 들어가 ‘鬼’가 되고 혼(魂)은 승천하여 ‘神’이 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의 혼령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어떤 일에 대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귀신(貴臣)
실직(實職)이 정2품 이상이거나 산관(散官) 1품 이상인 자를 말한다.
귀신(鬼薪)
진·한(秦漢) 시대의 형벌 명칭이다. 죄가 경미한 자에게 3년 동안 종묘(宗廟)의 땔나무를 하게 하는 형벌이다. 『사기(史記)』 「진황본기(秦始皇紀)」
귀신출후(鬼神出後)
죽은 사람이 양자 나가는 것을 말한다. 조선조 고종(高宗) 때 선보도유사(璿譜都有司) 이재만(李載晩)이 5세에 요절한 용성대군(龍城大君; 인조의 4남)의 후사(後嗣)로 들어가고, 또 선원파(璿源派)에서 1세 혹은 3세에 죽은 대군이나 왕자 또는 무후(無後)한 집안에다가 1백년 혹은 2백년 전에 죽은 사람으로 대를 잇게 하였다.
귀심(歸心)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음’을 말한다.
귀야유(鬼揶揄)
진(晉)의 나우(羅友)는 재학(才學)이 높았으나 환온(桓溫)이 그의 조행이 방종하다 하여 크게 임용(任用)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의 한 동료가 지방관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전별하는 자리에 그가 가장 늦게 참여하므로 환온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제가 초청하시는 명을 받고 달려오는 길에 한 귀신이 나타나 ‘그대는 남의 영전을 전별할 뿐, 자신의 영전 전별은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야유하기에 비로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그만 늦어졌습니다.”라 하였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注
귀어(龜魚)
황금으로 만든 귀형(龜形)과 어형(魚形)의 완구(玩具)인데, 이백(李白)의 대주억하감시(對酒憶賀監詩)의 서(序)에 “태자빈객(太子賓客) 하감(賀知章)이 장안(長安)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적선인(謫仙人)이라 부르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풀어 술과 바꾸어 마시면서 서로 즐겼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귀여(歸歟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진(陳)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야겠다(歸歟). 우리 당(黨)의 소자(小子)들이 광간(狂簡)하여 비연(斐然)히 문리가 성취되었으나 재단할 바를 알지 못한다[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 하였다.
귀여탄(歸與歎)
도(道)가 행해지지 아니하여 돌아가리라 마음먹은 한탄. 공자(孔子)가 진(陳) 나라에 있으면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귀와청장빈(歸臥淸漳濱)
은거 요양하는 것을 말한다. 장수(漳水)는 물 이름으로, 삼국(三國) 시대 유정(劉楨)이 고질이 있어 이곳에 가서 요양을 했다 한다. 『문선(文選)』 卷二十三 「劉楨贈五官中郞將詩」
귀우(歸愚)
어리석은 본분을 지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는 것을 말한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귀우함에 평탄한 길 있음을 알게 되고, 성현의 샘물 길어 올릴 두레박 줄을 얻었도다[歸愚識夷途 汲古得修綆].”라는 표현이 있다. 『한창려집(韓昌黎集)』 卷1 「秋懷詩」
귀유(貴遊)
관직이 없는 귀족(貴族), 또는 일반적으로 신분이 귀현(貴顯)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귀유도묵(歸儒逃墨)
외도(外道)에서 나와 유가(儒家)로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下에 “묵적(墨翟)의 무리에서 빠져 나오면 양주(楊朱)에게로 돌아가고, 양주에게서 빠져 나오면 반드시 우리 유가(儒家)로 귀의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귀의하면 그냥 받아 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逃墨必歸於楊 逃楊必歸於儒 歸斯受之而已矣]”라는 말이 있다.
귀이천목(貴耳賤目)
글자 그대로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먼 곳에 있는 것을 괜찮게 여기고, 가까운 것을 나쁘게 여기는 보통 사람들의 풍조를 가리킨다. 본래 이 말은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으로, ‘귀고천금(貴古賤今)’과 같은 말로 쓰인다. 환자신론(桓子新論)에 “세상 사람들은 먼 곳의 소문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서 제 눈으로 본 것을 천한 것으로 여긴다. 또 옛것을 귀하게 여기고, 지금 것을 비천하게 여긴다.”라는 내용이 있다. 『진서(晉書)』 장형·동경부(張衡·東京賦)편에, “세상에서 말하기를 후학(後學)이 속뜻은 모르고 겉만 이어 받아 전하며, 들은 것을 귀히 여기고 눈으로 본 것을 천하게 여긴다[所謂末學膚受 貴耳而賤目者也소위말학부수 귀이이천목자야]”라고 한 글에서 나온 말이다.
귀인(龜印)
거북이 모양의 금으로 된 도장으로, 즉 관인(官印)을 말한다. 하지장(賀知章)이 이백(李白)을 처음 만났을 때 관인을 잡혀서 술을 마셨다 한다.
귀일선사(歸一禪師)
고려(高麗) 스님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귀장(鬼章)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사마온공신도비문(司馬溫公神道碑文)에 의하면 “적의 큰 두목 귀장 청의를 사로잡아 와서 대궐 아래에 결박시켰다[生致大首領鬼章靑宜結闕下].”고 하였으니, 즉 오랑캐의 두목을 지칭한 말이다.
귀장(歸葬)
‘타향에서 시신을 운구하여 고향에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귀장역(歸藏易)
고대 『역(易)』의 이름인데 황제(黃帝)가 지었다 한다. 『주례(周禮)』에 “태복(太卜)이 삼역(三易)의 법을 맡았는데, 1은 연산(連山), 2는 귀장(歸藏), 3은 『주역(周易)』이다.”라 하였다. 일설에는 은(殷) 나라 시대 역인데 곤(鯀)으로 첫머리를 삼았다 한다.
귀적(歸寂)
‘중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귀전부(歸田賦)
① 귀전의 글은 진(晉) 나라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귀원전거시(歸園田居詩)를 가리킨다. 「귀거래사(歸去來辭)」
② 후한 순제(順帝) 때 장형(張衡)이 당시에 환관(宦官)이 권력을 행사하자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에서 지은 글이다.
귀조(歸潮)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조수물처럼 중국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귀주(龜疇)
낙수(洛水)에서 신귀(神龜)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낙서(落書)의 그림을 근거로 하여, 우(禹) 임금이 지은 홍범 구주(「홍범(洪範)」九疇)를 이른다. 구주는 바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칙인데, 그중 네 번째인 오기(五紀)에 역수가 들어 있으므로, 전하여 역서(曆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귀지미(貴知微)
『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에 “군자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 유순함을 알고 강함을 아나니, 그러므로 만민의 인망을 받는다[君子知微知彰 知柔知剛 萬夫之望].”라 한 데서 온 말이다.
귀지비(貴知非)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백옥(蘧伯玉)은 나이 50이 되었을 때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 고쳤다고 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논어(論語)』 「헌문(憲問)」ㆍ「위령공(衛靈公)」
귀지희(貴知希)
『노자(老子)』 70장에 “나를 아는 자가 드물수록 나의 아는 것은 귀하게 된다[知我者希 則我貴矣].”라고 하였다.
귀천청려(鬼薦靑藜)
한(漢) 나라 유향(劉向)이 밤에 천록각(天祿閣)에서 책을 교정하는데, 옆에 한 노인이 청려장 끝에다 불을 켜 가지고 비춰 주면서 “나는 하늘의 태을성(太乙星)인데, 인간에 묘금(卯金) 유(劉)란 선비가 책을 교정하므로 와서 도와주노라.”고 하였다 한다.
귀촉도(歸蜀道)
촉나라로 돌아가는 길. 접동새, 두견새. 옛날 촉(蜀) 나라에 두우(杜宇)라는 왕이 있었는데, 뒤에 왕위(王位)를 신하에게 빼앗기고 그의 혼(魂)이 자규(子規)가 되어 타향(他鄕)에 나와서 울기를 “촉도로 돌아가자, 돌아감만 못하다[歸蜀道 不如歸]”라고 부르짖는다 한다.
귀츤(歸櫬)
타향에서 죽어 고향의 선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귀치이(歸鴟夷)
서시(西施)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 나라의 미녀(美女)로서,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했을 때, 범려(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쳐 그로 하여금 황음에 빠지도록 했는데, 오 나라가 멸망한 뒤에 서시가 다시 범려에게로 돌아와 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귀향(歸鄕)
벼슬아치에 실시하던 경벌(輕罰)의 한 가지로 고려 때의 율명(律名)으로 피죄자(被罪者)를 고향에 돌아가 머물게 하던 것인데 조선조 적의 방귀전리(放歸田里)와 같고 지금의 정정법(政淨法)과 비슷하다. 그런데, 조선조말기에 와서는 도(道)·류(流)·서(方)·치(置)를 통틀어 귀향(歸鄕)이라고 일컬음과 동시에 그 율(律)을 편중하게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사설(僿說)에서 그 폐단을, 다산(茶山) 정약용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그 잘못을 각각 지적하였다.
귀허(歸墟)
무저곡(无底谷). 바닷물이 귀숙(歸宿)하여 두루 모이는 곳을 이른다. 『열자(列子)』 「탕문」에 “발해(渤海)의 동쪽이 몇 억만 리인지 알지 못한다. 큰 학(壑)이 있으니 실로 밑이 없는 골짜기다. 그 아래는 밑이 없으니 이름을 귀허라 한다.”라 하였다.
귀화(鬼火)
특히 전쟁터에서 죽은 병졸(兵卒)이나 우마(牛馬)의 피가 응결하여 인(燐), 즉 도깨비불(鬼火)이 된다는 설이 있다. 어두운 밤 음습한 땅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괴이한 불로 인화(燐火) 따위이다. 『논형(論衡)』 「논사(論死)」
귀흥진초화(歸興趁椒花)
돌아가서 새해를 맞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표현한 말이다. 산초 꽃은 매화(梅花)보다 일찍 피는데, 진(晉) 나라 유진(劉瑧)의 처(妻) 진씨(陳氏)가 언제나 새해가 되면 초화송(椒花頌)을 지어 한 해를 기원했다고 한다. 『진서(晉書)』 劉瑧妻陳氏傳 / 두보(杜甫)의 시 ‘십이월일일(十二月一日)’에 “未將梅蘂驚愁眼 要取椒花媚遠天”이라는 구절이 있다.『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4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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