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하라
아아! 옛것을 본받는다는 자는 자취에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 되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자는 법도에 맞지 않음이 근심이 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噫! 法古者病泥跡, 創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
새것을 추구해서도 안 되고, 옛것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어떨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다소 심각해진 이 질문 앞에 연암은 비로소 처방을 슬며시 내놓는다. 그것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란 열 글자이다.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겉껍데기만을 흉내 내니 문제가 되고, 새것을 만들라고 하면 듣도 보도 못한 가당치도 않은 황당한 말만 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그러니 옛것을 본받더라도 오늘에 맞게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더라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어정쩡한 중간항을 도출하여 적당히 타협하자는 비빔밥 문학론이 아니다. 실로 연암 문학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놓인다.
그 핵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변變’ 한 글자에 걸려 있다. 옛것이 좋다. 좋긴 하지만 그대로는 안 된다. 변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주역』에서 이미 한 이야기이다. “역易은 궁하면 변한다. 변하면 통하니, 통해야만 오래갈 수 있다易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고 했다. 옛것은 오래되면 낡은 것이 된다. 그 낡은 옛 것을 새롭게 만들려면 변해야만 한다. 변하면 그 옛것은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과 만날 수가 있다. 옛것을 본받아라. 그러나 그대로 묵수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언어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은 오늘에도 통할 수 있는 가치가 될 수 있다. 변화할 수 없는 옛것은 오늘과 소통될 수 없다. 공자가 성인인 까닭은 그 정신 때문이지 양화와 꼭 닮은 외모 때문이 아니다. 새것이 좋다. 그렇지만 옛 거울에 비추어 검증될 수 없는 새것은 허탄한 것일 뿐이다. 잠깐 그 새로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옛것을 본받되 변화할 줄 알아라’와 ‘새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도록 하라’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렇게 하면 어찌 되는가? 연암은 그렇게 할 때 ‘지금 글’이 곧 ‘옛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옛글이란 무엇인가? 옛날 사람이 자기 당시의 생각을 당대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옛글로 되었다. 지금 글이란 무엇인가? 지금 사람이 지금 생각을 지금 말로 쓴 것이다. 이것도 먼 훗날에는 옛글로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고문, 즉 ‘옛글’이란 옛 사람의 흉내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진정한 고문은 바로 ‘지금 글’을 추구할 때 획득된다. 이럴 때만이 ‘지금’ 것이 ‘옛’ 것으로 될 수 있다.
▲ 전문
인용
2. 새 것을 만든다는 건 기이한 걸 만드는 게 아니다
3.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하라
8. 연암은 고문가일까?
8-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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