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 홍양호의 의원전(醫員傳)에 나타난 인물 형상
진재교(성균관대)
1. 머리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개방적 사유로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인 개명적(開明的) 관료(官僚)다. 그는 민의 삶과 지방 고유의 향토 정서를 시로 포착한 점에서 실학파(實學派) 문학과 동일한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18세기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선점하고, 다양한 양식으로 그 새로움을 포착한 점은 남다른 것이거니와, 학계에서 이 점을 진작 주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간의 연구 또한 주로 이계의 시와 사유양식, 문학론과 문학 활동 그리고 학문 성향 등에 주목하여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나 성과에 가려, 이계가 탁월한 전(傳) 작가라는 사실에 시선을 두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계는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애국적 인물들을 다양한 ‘서사’로 교직(交織)하여 성취를 이루었고, 동시기 여느 작가 못지 않은 11편의 인물전(人物傳)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물전에서 다양한 계층을 입전하여 시대에 맞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던 새로운 인물을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이계가 남긴 인물전에 대해 개괄하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인물전의 면모와 특성을 살피고자 한다. 사실 이계는 당시 첨예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온 천주교 지도자를 비롯하여 인술을 베푼 의원, 애국적인 하급무인(下級武人), 그리고 개성 강한 여러 인물 등을 입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왕에 소개한 「최필공전(崔必恭傳)」과 이조 후기 인물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을 제외하고 ‘의원전(醫員傳)’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이 분석의 대상이다. 이 작품은 입전 인물의 개성도 그렇지만 서사와 내용 또한 흥미를 더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2. 이계전(耳溪傳)의 현황과 그 특징
이계(耳溪)는 민족의 고대사를 위시하여 임진ㆍ병자 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역사적 업적을 남긴 수다한 애국 인물을 입전하여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창작한 바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자료에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편찬한 것인데, 주로 역사서에 실린 것과 개인 문집류(文集類), 그리고 실기류(實記類)를 비롯하여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여기서 이미 전(傳) 작가로서의 이계(耳溪)의 재능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은 대개 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으로 옮겨 놓았다. 예컨대 이계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의 열전을 근거로 약간의 윤색을 가한 경우도 있고, 개인문집이나 실기류라든가 더러 자신이 직접 견문한 것을 토대로 대상 인물을 입전한 경우도 있다.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이미 그의 서사수법과 서사를 교직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거니와, 여기서 전(傳) 작가로서의 이계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고(本稿)는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제외하고, 이계가 직접 견문한 인물을 대상으로 입전한 11편의 인물전(人物傳)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우선 이계가 남긴 인물전의 현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작품 | 줄거리 | 대상 인물 | 비고 |
침은조생광일전 (針隱趙生光一傳) |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한 의원을 입전 | 의원 | 『이향견문록』ㆍ『청구야담』ㆍ『동야휘집』에 실림 |
홍효자차기전 (洪孝子次奇傳) |
어린 나이로 부모를 신원하여 살려내고 자신은 죽는 한 효자의 삶을 입전 | 효자 | 『이향견문록』ㆍ『청구야담』ㆍ『동야휘집』ㆍ『청야담수』에 실림 |
장의사후건전 (張義士厚健傳) |
병자호란시에 청나라를 타도할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무인을 입전 | 무인 | 『청구야담』에 실림 |
청화이공양소전 (淸華李公陽昭傳) |
태종과 동년생(同年生)이며 진사를 함께 한 고려 사처사(四處士)의 한 사람인 이양소(李陽昭)의 절의를 입전 | 고려(高麗)의 처사(處士) | 『청구야담』에 전재 |
이처사몽리전 (李處士夢鯉傳) |
역관 집안의 후예로 역관을 거부하고 경행(徑行)을 행한 여항인의 특이한 행적을 입전 | 여항인 | 『완암집』ㆍ『근재집』에도 입전. 『병세재언록』에도 기술됨. |
최필공전 (崔必恭傳) |
여항인으로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한 최필공의 배교와 순교의 삶의 이력을 입전 | 천주교 지도자 | |
피재길소전 (皮載吉小傳) |
웅담(熊膽)으로 만든 고약으로 민간에 시험하고 급기야 임금의 종기를 낫게 한 의원의 처방과 삶을 입전 | 의원 | 『청구야담』ㆍ『이향견문록』에 실림 |
부원수김장군경서전 (副元帥金將軍景瑞傳) |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에 청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자 항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무인의 절의를 입전 | 무인 | |
고려유신삼선생전 (高麗遺臣三先生傳) |
고려의 유신(遺臣)인 조윤(趙胤)의 충절과 삶을 입전 | 처사 | |
풍림신의사규년전 (楓林申義士虬年傳) |
무인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위장산(葦長山) 전투에서 전사 | 의병장 | |
의사수문장문기방전 (義士守門將文紀房傳) |
임진전쟁시에 남원성을 사수한 수문장의 절의를 입전 | 수문장 | 『청구야담』ㆍ『이향견문록』에 실림. |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계는 이조 후기의 역사 공간에서 새롭게 부상한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입전하고 있다. 이계와 동시기의 작가들도 다양한 인물을 입전한 사례가 없지 않으나, 이계가 입전한 인물은 그 대상의 폭이 비교적 넓고, 당대에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많다. 이계가 활동하던 뒤시기에 이옥(李鈺)이나 김려(金鑢)와 같은 작가들이 다양한 인물을 입전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계가 창작한 전작품을 이들과 비교하면 양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계가 창작한 11편의 전 작품은 동시기 작가에 비하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그리고 이계가 입전한 인물로 그 계층이 다양할 뿐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인물들을 두루 아우르고 있으며,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과 서술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위에 제시한 11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전통적 입전 대상인 효자ㆍ의병장ㆍ처사를 비롯하여 무인ㆍ여항인ㆍ수문장ㆍ의원ㆍ천주교 지도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당대의 새로운 인간형으로 주목받았던 인물들까지 아우르고 있다. 더욱이 홍차기【홍차기는 풍산 홍씨로 홍인보의 아들인데, 이계와는 인척간이다. 홍차기는 사후 국가에서 정려질(旌閭秩)을 하사받았다. 순조 22년 3월에 예조에서 각 식년에 서울과 지방에서 충(忠)ㆍ효(孝)ㆍ열(烈)을 정부에 보고하면서 올린 효자 정려질에 홍차기의 이름이 들어 있다. 1795년 충주목사로 있던 이가환(李家煥)은 홍차기를 추모하여 비문(碑文)을 지어주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홍차기의 행동과 아버지를 신원(伸寃)한 이야기는 당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널리 유포되어 시공을 넘어 회자되었던 것 같다.】ㆍ이몽리【이몽리는 영조 21년에 좌의정(左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여염에 있는 이몽리(李夢鯉)의 효제(孝悌)와 지조(志操)를 칭송하면서 해당 관청에서 쌀과 고기를 내려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권장하도록 주청하자 영조가 이를 허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실록』 권61, 영조 21년 1월 22일조 참조】ㆍ최필공ㆍ피재길 등과 같은 인물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문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당대에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특이한 인간형이다.
이처럼 이계(耳溪)는 충ㆍ효의 규범적 인간형은 물론 당대의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떠오르는 인물들까지 두루 입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조후기의 공간에서 첨예한 정치 문제로 떠올랐던 천주교 지도자까지 입전한 사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새롭게 부상한 인물에 대한 이계의 인식의 폭은 물론, 그 자신 이조 후기 전의 변모에 적극 호응한 전 작가임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계가 입전한 대상 인물로 의원(醫員)과 천주교 지도자를 주목한 사실은 특기할 점일 터, 이는 여느 작가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사례로 보인다. 이 시기 예인(藝人)ㆍ거지ㆍ과학자를 비롯하여 수다(數多)한 여항의 인간군상을 입전한 사례는 쉽게 만날 수 있으나, 의원과 천주교 지도자까지 다룬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의원을 입전 대상으로 한 경우, 유재건(劉在建)이 편찬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항의 작가가 자기 계층의 인물을 주목하여 입전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사대부 문인들이 의원을 입전 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특이한 사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의원(醫員) 피재길(皮載吉)과 천주교 지도자 최필공(崔必恭)은 당대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대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주목을 요한다.
피재길은 무명의 민간의원에서 웅담고를 사용하여 정조의 종기를 낫게하고, 이를 계기로 일약 내의원(內醫院)의 침의(鍼醫)로 들어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정조의 사후, 사인(死因)에 연루되어 유배간 바 있거니와, 그는 의원의 신분으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천주교 지도자 최필공은 정조의 천주교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인물이다. 피재길이 정조의 사인과 관련하여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온 인물이라면, 최필공은 정조대에 가장 민감한 정치 문제였던 천주교 문제와 관련하여 파장을 몰고 온 장본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계가 가장 민감한 당대의 정치적 자장 안에 있는 인물을 입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 서술 시각과 지향은 매우 문제적이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계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경향은 전통적 입전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사건 자체와 사건 속의 인물이 주는 ‘흥미’에 보다 큰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계는 단순히 교화적 서술에 치중하지 않고, 사건 자체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서사로 교직하고, 현실 상황에서 일어난 문제적 사건을 사실대로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둘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전통적 인물전에서 볼 수 있는 ‘입전의식’에서의 ‘도덕적 교화’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에서 이계는 하층민에게만 인술을 베풀고, 세리(勢利)를 위해 상층의 권귀(權貴)와 전혀 교유하지 않는 조광일의 일화를 서사에 넣어 교직하고 있다. 이계(耳溪)는 조광일의 독특한 삶과 인생관에 주목하여 서술하거니와, 이는 당대의 규범적 인간형과 다른 새로운 개성적 인간상의 포착을 의미한다. 조광일은 기존의 의원들로부터 일탈하여 그야말로 민들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과 인술을 펼침으로써 의인(義人)으로서의 면모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계가 새로운 인간형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최필공전(崔必恭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재길이 시정의 명의원으로 이름을 날리던 일과 침의(鍼醫)로 발탁된 사건, 그리고 최필공이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천주교를 배교(背敎)한 사건 등은 흥미롭게 읽혀지는 대목들이다.
「이처사몽리전(李處士夢鯉傳)」에서의 이몽리 역시 여항인(閭巷人)이면서 역관(譯官)이 되기를 거부하고 학문과 행실을 닦아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학문과 행실로 벼슬까지 제수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에 매진하고, 30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친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다. 이계는 이몽리의 삶에서 규범 밖의 인간모습을 발견하고 여기에 흥미를 가지고 입전하였던 것이다.
「홍효자차기전(洪孝子次奇傳)」은 전형적인 효자전(孝子傳)에 해된다. 하지만 이계는 홍차기의 행위를 전적으로 ‘효(孝)’라는 교화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사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이계는 오히려 어린 나이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생면부지의 아버지 홍인보를 살려내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홍차기가 겪는 인간적 고난과 아버지를 신원(伸寃)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효자전’의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흔히 ‘효자전(孝子傳)’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규범 또한 쉽사리 감지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계는 사건 자체와 사건이 지니는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입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도리어 도덕적 규범성과 교화적 의도가 약화되어 있다【나머지 작품들은 외견상 충절(忠節)이라는 가치를 확인하는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 모두 이러한 가치지향에 전적으로 종속된 것은 아니다. 건국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특이한 인물인 이소양(李昭陽)과, 국란에 임해 이를 극복하는 사건을 서사로 교직하면서 명장이 아닌 무인과 하층민에서 애국 인물을 발견하여 입전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이들 작품들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점에 치중한다는 것에서, 충절을 확인하려는 도덕적 규범성과 교화적 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이러한 이계의 서술의식에서 이조 후기 전의 변모상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계(耳溪)의 인물전은 『청구야담(靑邱野談)』이나 『청야담수(靑野談藪)』와 같은 후대 야담의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계의 전 작품이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천예록(天倪錄)』과 같은 전대의 필기(筆記)와 야담집 등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면 『청구야담(靑邱野談)』 등에 수록된 작품들은 원출전이 이계의 전(傳)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이계의 전 작품과 야담집의 서사를 비교하면 글자나 표현 등에서 부분적인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골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 점에서도 이계의 전 작품이 후대 야담 성립에 적지 않게 기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계의 전은 『청구야담(靑邱野談)』에 6편, 『동야휘집(東野彙輯)』에 2편 『청야담수(靑野談藪)』에 각 1편 등이 실려 있다. 이를 고려하면, 이조 후기 야담의 편저자들은 이계의 전에 흥미를 가지고 각 야담집에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계의 전은 각 야담집에 수용되면서 서사가 변개(變改)되기도 하지만, 거의 그대로 수용되는 경우도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의 경우, 일부 작품에서 특정 대목의 실사적(實事的) 기술(記述)을 약화시키는 반면, 구연방식(이야기 방식)으로 변환시키기도 한다. 논찬(論贊) 부분 역시 야담의 서사문법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야담의 편저자들이 이계의 전을 많이 수용한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특히 『청구야담(靑邱野談)』에서 이계의 인물전을 6편이나 수용한 것은 더욱 주목할 사안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계의 작품이 규범화(規範化)된 기존의 인물전과 달리 흥미롭고 작품성이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작품의 분석
앞서 살펴 본 대로 이계(耳溪)가 남긴 11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작품 성취와 개성적인 작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작가의식이 두드러진 ‘의원전(醫員傳)’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이 그 분석의 대상이다.
1) 시정(市井)의 의원(醫員)에서 어의(御醫)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서사분절
동아시아 서사에서 ‘전(傳)’의 양식으로 의원(醫員)을 주목한 사례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을 하나의 독립 제목으로 마련하여, 당내 최고의 명의였던 태창공(太倉公)과 편작(扁鵲)의 의술과 삶을 주목한 바 있다. 이를 시원(始原)으로 하여 이후 의원에 대한 전(傳)은 여러 사서(史書)에 두루 보인다. 열전(列傳)은 물론 개인의 사전(私傳) 또한 하나의 유형을 이룰 정도로 적지 않게 의원의 개성적 삶을 포착한 바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이상로전(李商老傳)」과 「설경성전(薛景成傳)」을 독립시켜 특기한 사실이나, 조선조 초기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의원 백귀린(白貴麟)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한 것도 그 예이다. 이후 사대부 문인들도 사전(私傳)으로 의원의 삶을 포착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조 후기 이덕주(李德胄, 1696~1751)의 「의자권상륜전(醫者權尙綸傳)」에서 볼 수 있고, 여향의 작가들 또한 두드러진다. 특히 다수의 의원을 입전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은 그러한 사례의 대표격이다. 이계(耳溪)의 의원전도 이러한 유형 중의 한 사례일 것이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은 ‘웅담고(熊膽膏)’라는 비방을 통해 시정의 무명 의원에서 내의원의 침의로 이름을 날리다가 정조의 사인(死因)과 함께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게 되는 피재길의 전기를 서술한 작품이다. 정조는 1793년에 자신의 종기를 낫게 한 피재길을 대상으로 입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계는 피재길의 전 생애를 모두 기술하지 않고 ‘소전(小傳)’의 형태로 피재길의 특정 부분의 삶을 특기한다. 우선 서사분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피재길은 의원 집안의 자식으로 그의 아버지는 종기를 잘 다스리고, 약 조제를 잘하였다.
②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피재길은 의술을 전수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견문에 의지하여 여러 처방을 전수받는다.
③ 피재길은 의서를 읽지 않았으나, 고약이 모든 부스럼을 낫게 한다는 비법만은 터득한다. 그는 그 비법을 팔아 생활하였으며, 사대부도 그 약을 시험해보고 효험을 얻자 칭송한다.
④ 계축년(1793년 정조 17년) 여름, 임금이 머리에 부스럼이 났으나, 오래도록 낫지 않고 점차 얼굴과 턱에까지 번져 잠자리조차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⑤ 모든 내의원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재길의 이름을 아뢰는 자가 있어 임금이 불러들여 치료 방법에 대해 묻는다.
⑥ 재길이 식은땀을 흘리며 잘 대답하지 못하자 좌우의 내의원들이 속으로 비웃었으나, 임금이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도록 한다.
⑦ 재길은 임금에게 한 가지 비책을 제시한 뒤, 웅담과 여러 가지 재료로 고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다.
⑧ 임금이 그 고약을 바르니 하루가 지나자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 되자 병에 차도가 있게 된다.
⑨ 임금이 약원(藥院)에 글을 써서 명의라 칭하고 고약을 신방(神方)이라 이르면서 그 공로에 보답할 방법을 의논하도록 한다.
⑩ 원신들이 내의원의 침의(鍼醫)에 임명하고 6품의 관복을 하사하여 정직(正職)을 내려줄 것을 청한다.
⑪ 임금이 나주(羅州)의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였고, 약원의 모든 의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그 의술을 인정한다.
⑫ 이에 재길의 명성이 온 나라 안에 알려지고 웅담의 고약은 마침내 천금의 처방으로 세상에 전해진다.
⑬ 사신(史臣)의 평(評).
‘소전(小傳)’이라는 제명(題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계(耳溪)는 피재길의 전체적인 생애를 그리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에서 피재길의 생애를 약술하는 한편, 피재길이 시정의 명의에서 일약 내의원의 침의로 활약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일화 부분만을 특기하고 있다. 더욱이 이게는 피재길의 구체적인 이력과 침의에서 물러난 후의 생애 부분도 전혀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삽화적 유형에 속한다. 특히 ‘웅담고’로 명의의 반열에 오른 피재길의 특이한 삶에 대한 이력은 이계(耳溪)는 물론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대단한 관심과 흥미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내용이 『청구야담(靑邱野談)』과,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에 수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작품의 서두를 분석
위의 작품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본래 피재길의 본관은 홍천(洪川)이며 자(字)는 여성(汝成)으로 1749(己巳)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793(癸丑)년에 입사(入仕)하여 나주 감목관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그는 시정을 돌아다니던 무명의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기실 그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점은 흥미롭다. 아마도 그는 웅담고로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한 보상으로 내의원(內醫院)의 침의(鍼醫)로 입사하여 『태의원선생안(太醫院先生案)』에 기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작품은 피재길이 민간의 떠돌이 의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작가의 설명 부분과 이후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내의원의 침의가 되는 일화 부분, 그리고 작가의 의론 등으로 구성되었다. 서사는 이를 내적으로 연결하여 피재길의 의술과 의원으로서의 남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일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작가가 설명하는 대목을 보기로 하자.
피재길이라는 사람은 의원 집안의 자식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기치료에 종사하였는데, 약을 잘 조제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재길은 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의술을 전수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견문한 것으로 여러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재길은 일찍이 의서(醫書)를 읽은 적이 없었고, 다만 약제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모든 종기에 관한 약을 팔아 생활하며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감히 의원의 축에 끼지 못하였다. 사대부가 그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그의 약을 시험해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皮載吉者, 醫家子也. 其父業治瘇, 善合藥. 旣歿, 載吉尙幼, 未及傳父術, 其母以聞見, 敎諸方. 載吉未嘗讀醫書, 但知聚材煎膏已. 一切瘡瘍, 賣以自給, 行于閭巷間, 不敢齒醫列. 士大夫聞而招致之, 試其藥, 頗有驗.
위의 인용문은 서사분절 ①에서 ③으로 작품의 서두 부분에 해당된다. 전통적인 인물전(人物傳)에 보이는 입전 인물의 가계에 대한 고증이나, 인물에 대한 배경, 그리고 구체적인 행적과 같은 인정기술(人情記述)이 매우 소략하다. 단지 피재길이 의원에 종사한 가계의 후예라는 사실과, 부친의 의술을 전해 받지 못해 어머니로부터 여러 처방을 배운 사실, 그리고 의원이면서 의서(醫書)조차 읽지 못한다는 특수한 사례 등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계(耳溪)는 내의원을 관장하던 예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어서 피재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도, 작품에서는 이러한 점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고약의 비법을 터득한 의술 부분만을 특기하여 피재길의 인간상을 포착하고 있다. 이처럼 특정 부분만을 압축적으로 특기하는 수법은 오히려 피재길의 독특한 개성과 의원으로서의 면모를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데 유효한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계(耳溪)는 당초에 피재길이 의서조차 읽지 않았고 정상적인 의학 교육을 받지 못하여 의원 축에도 들지 못한 점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가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터득하여, 이를 팔아 생활하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는 저간의 사실을 서두에 배치하였다. ③에서 “사대부가 그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그의 약을 시험해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라는 언술은 그의 고약이 특효를 보아 점차 의원으로서 명성을 얻어가는 과정을 확인시켜 주는 언명이다. 더욱이 사대부가에서조차 그의 고약에 효험을 보았다는 점에서, 피재길은 이제 시정공간을 넘어 일약 전국적인 면의로 발돋움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대목은 뒤의 정조를 치료하게 되는 일화와 연결되는 고리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복선의 기능을 하는 바 있다.
이계집과 실록의 서술차이
서사분절 ④에서 ⑫에 해당되는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이 웅담고를 조제하여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침의가 되는 등 포상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앞의 설명 부분과 두 번째 일화는 계기적 관계를 가지지 않은 듯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피재길이 고약으로 명성을 획득하여 명의(名醫)로까지 알려지게 된 부분과, 이를 계기로 종국에는 관료의 추천을 받아 정조의 종기를 치료하는 적임자로 불려간 것은 인과관계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의 인간적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의원으로서의 진멱모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품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부분을 보자. 피재길이 처음에는 비록 정식 의원 축에는 끼지 못하고, 여항을 떠돌며 의술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처지였으나 자신이 직접 제조한 웅담고에 대한 약효와 자신의 의술에 대한 강한 자부심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정조와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①
조정의 신하들도 날마다 줄을 지어 기거하였는데, 재길의 이름을 아뢰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불러들이라고 명하고 물어보니, 재길은 신분이 낮아 전전긍긍하면서 능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좌우에 있는 여러 의원들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임금이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며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의 의술을 다하라.” 재길이 말하길 “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사온대 시험해봐도 되겠습니까.” 임금이 물러나도록 하여 약을 제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재길이 웅담(熊膽)에다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서 달여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임금이 묻기를 “며칠이면 다 나올 수 있겠는가?” 대답하기를 “하루면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면 종기가 없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얼마 후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廷臣日成班問起居. 有以載吉名白上者, 命召入問之. 載吉賤夫也, 戰汗不能對, 左右諸醫, 皆竊笑之. 上使近前診視曰: “毋畏也, 盡爾技.” 載吉曰: “臣有一方可試.” 命退而劑進, 乃以熊膽和諸料, 熬成膏傅之. 上問: “幾日可痊?” 對曰: “一日痛止, 三日收矣.” 已而一如其言.
②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험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정조를 치료하는 대목이다. ①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이고 ②는 『정조실록(正祖實錄)』 권38 정조 17년 7월 16일조에 보이는 기록이다. 실록은 피재길이 정조를 치료한 사실과 그 공으로 내의원의 침의로 임명한 사실만을 짤막하게 기술해둔 데 반해, 이계(耳溪)는 작품에서 당시의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포착해내어 피재길의 성격과 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피재길을 향한 부정적 시선
그런데 당시 피재길은 의학을 정상적인 수학하지도 않은 데다, 의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에, 임금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실사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계(耳溪)는 이를 마치 현장에서 일어난 정황을 직접 견문한 듯한 필치로 포착하여 피재길의 인간적 모습과 행동양식을 전해준다.
문면(文面)에 보이듯 작품에서는 피재길의 자신 없는 듯한 어눌한 말투, 자신이 처방한 약에 대한 답변, 그리고 그만이 소유한 비방(秘方)과 인간적 면모가 서로 교차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외견상으로 정상적인 의학 수업을 받지 못해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과, 비법으로 조제하여 당당하게 웅담고를 지어 바치는 대목은 어찌 보면 썩 어울리지 않을 법하다. 이러한 부조화는 의서조차 읽을 줄 모르는 자격 미달의 의원으로서의 인간적 특이성을 말해주는 언표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방을 전수 받아 뛰어난 의술을 지닌 소유자라는 점을 더욱 잘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함께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작품에 서술되지 않았으나 피재길은 ‘웅담고’를 계기로 정조가 사망할 때까지 내의원의 침의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그는 오직 ‘웅담고’라는 고약을 만드는 비법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하거니와, 사실 이 점이 이계(耳溪)가 정조의 명으로 이 전을 짓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계가 ‘소전(小傳)’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듯이,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은 의원을 입전하였다는 소재적 참신성을 제외하면 분량도 그렇지만 서사 구성과 인물의 초점화하는 데서 자신의 다른 작품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이는 피재길의 전 생애를 통해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을 매개로 인물을 특기한 데 연유하는 바 있다. 한편으로는 작가 자신이 피재길에 대한 내면과 구체적인 정보 등이 소략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작품의 생동감을 떨어지게 하는 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논찬 부분 역시 재미와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 논찬에서 보여준 작가의 평은 피재길의 인간적 면모와 재능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피재길의 의술을 주목한 한편 그를 특이한 인물로만 인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계(耳溪)는 인물과 사건을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평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피재길의 ‘의술’에 신뢰감을 가지지 않는 인상이 짙은 듯하다. 말미의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寧不異哉]’라는 마지막 표현은 이를 말해준다. 이는 인물의 특이함에 대한 긍정적 표현이라기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언명이다.
더욱이 논찬의 분량 또한 전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여 서사 또한 균형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이는 ‘소전(小傳)’이라는 형식적 한계에 연유하는 바도 있으나, 작가의 서사방식이 스스로 초래한 측면도 있다. 작가가 피재길의 전체적인 상을 그리기보다는 독특한 그의 개성을 하나의 일화에 수렴하여 너무 초점화시킨 결과, 서사의 균형을 어긋나게 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 드러난 이후의 삶
작품은 여기서 그치고 있으나, 이후 피재길은 계속 내의원의 침의로 계속 활동한다. 그러다가 정조의 사망과 함께 그는 정조의 사인(死因)에 연루되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인물로 다시 부각된다. 종지로 임종한 정조의 사인은 당시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약원(藥院)의 의원들 역시 역의(逆醫)로 지목되어 국문을 당하거나 문책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의 병을 치료하였던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과 방외의(方外醫) 심인(沈鏔) 등이 국문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강명길은 역의로 지목되어 작처(酌處)하기 전에 물고(物故)되고, 심인(沈鏔) 역시 역의로 지목되어 경흥부로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또한 침의였던 피재길(皮載吉)ㆍ백성일(白成一)ㆍ정윤교(鄭允僑)도 역의로 지목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결국 피재길은 순조 원년 7월에 무산부에 유배되었다가, 순조 3년 2월에야 해배되는 등 인간적 고초를 겪는다. 해배 이후의 피재길의 대한 행적은 더 이상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거나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에서 이계(耳溪)는 시정(市井)의 의원에서 ‘웅담고’를 만들어 일약 어의(御醫)로 이름을 날린 한 의원의 삶을 특기하였다. 그리고 이계는 이 인물을 통해 당대 관습과 규범의 획일성에서 벗어난 특이한 개성적 인물을 선입관 없이 포착하고 있거니와, 여기서 이계의 작가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2) 침술(鍼術)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
1. 서사분절
피재길이 ‘웅담고(熊膽膏)’로 내의원의 침의로까지 발탁되어 이름을 날린 인물이라면, 조광일은 독특한 침술로 시정공간을 누비면서 오직 민(民)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삶은 피재길의 삶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서사분절을 보기로 한다.
① 의술의 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가며, 어진 사람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의술에 은거한다는 작가의 전평(前評).
② 충청도 내포에 조광일(趙光一)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선조는 본래 태안(泰安)의 대성(大姓)이었으나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나그네로 합호(合湖)의 서쪽에 정착한다.
③ 조생은 침(針)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부르기를 침은(針隱)이라 하였으며, 권문세가들에게 가지 않았고 현달한 자와도 내왕하지 않는다.
④ 작가는 우연히 조생의 집에 지나다가 조생이 남루한 옷차림인 노파의 아들에게 왕진을 가서 치료해준 것을 목도한다.
⑤ 한번은 작가가 비가 오는 흙탕길에서 조생을 만나, 가는 곳을 묻는다. 조생은 일전에 어느 마을의 백성에게 놓은 침이 효험이 적어 재차 침을 놓으러 간다고 대답한다.
⑥ 작가가 아무런 이익이 없이 이렇게 고생하느냐고 묻자 조생이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린다.
⑦ 이후 작가는 조생이 왕래하는 것을 살펴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이후 친교를 맺는다. 그 사람됨이 소탈하고 너그러우며 남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⑧ 그는 오직 의원이 된 것을 기뻐하였으며, 옛 처방으로 치료하지 않고, 항상 작은 가죽주머니에 동침(銅針)과 철침(鐵針)으로 만든 십여 개의 길고 짧고 둥글고 모난 침을 가지고 다니면서 종기를 터트리고 부스럼을 다스리고 불치병도 낫게 한다.
⑨ 어느 날 작가가 “의원은 천한 기술이며 여항(閭巷)은 비루한 곳인데, 어찌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조생은 “장부가 재상이 되지 못하면 의원이 되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대답한다.
⑩ 이어서 조생은 ‘의원의 의술로 사람들을 살려 뜻을 행하는 것이 남의 녹을 먹으며, 때를 얻어 백성을 구제하는 도를 행하다가 불행을 만나기도 하고 비난과 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재상보다 낫다’고 한다.
⑪ 그리고 조생은 의술을 행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일 따름이므로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가장 가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이라고 말한다.
⑫ 또한 조생은 침술을 행한 지 십여 년 동안, 거의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는데, 앞으로 수십 여 년 동안 만 명을 살리고 내 일을 마칠 것이라고 대답한다.
⑬ 세태와 다른 명의 조광일을 입전(立傳)한 이유를 들면서 논찬을 한다.
여러 출전 내용 비교
조광일에 대한 내용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경민(李慶民: 1814~1883)의 『희조일사(熙朝軼事)』도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과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조의사광일(趙醫師光一」을 비교해보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내용은 축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계(耳溪)의 평을 대신하여 유재건 자신의 평을 첨가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이계가 직접 견문한 사실을 없애거나 축약시켜 작품의 서사도 평이하게 만들고 있어 이계의 전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의 흥미와 생동성을 반감시키고 있다. 이경민(李慶民)의 『희조일사(熙朝軼事)』는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내용 중에 앞과 뒤의 논찬을 제외하고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희조일사(熙朝軼事)』를 보면 책의 앞부분에 ‘초촬군서목록(抄撮群書目錄)’이라 적시해두었다. 이는 초촬(抄撮)의 방식으로 작품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경민은 『희조일사(熙朝軼事)』에서 자신이 보았던 문집의 이름을 부기해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조일사(熙朝軼事)』의 대부분의 내용은 원문집의 내용을 많이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평을 한 부분이나 초촬(抄撮)하면서 문장에 어색한 부분만을 고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참고한 문집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따라서 『희조일사(熙朝軼事)』에 나오는 각 작품은 작가가 새롭게 창작한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청구야담(靑邱野談)』의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앞의 두 작품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이 작품의 서사방식에서 이계(耳溪)의 전과 차이가 난다.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일반 ‘전(傳)’에서 볼 수 있는 ‘논찬(論贊)’ 부분을 약화시킨 반면, 이 부분을 야담 작가의 시각으로 치환시켰다. 또한 시간과 공간, 인물의 구체성 그리고 전(傳) 작품에서 흔히 보여주는 견문에 바탕한 사실성 또한 약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이계의 견문과 경험을 거세한 반면, 다중이 공유하는 불특정한 ‘이야기’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이계는 조광일을 직접 만나보고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서사를 이끌고 있는 반면, 『청구야담(靑邱野談)』은 조광일을 알게 되는 과정을 비롯하여 전체 서사를 사실에 기대어 기록한 것에서 벗어나 구연에 바탕한 서사수법으로 그 사실을 바꿔 놓고 있다. 이를테면 『청구야담(靑邱野談)』은 이계의 사실 체험을 제거함으로서 개인의 견문에 바탕한 서사를 다중(多衆)이 공유하고 나누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조광일을 알게 되는 과정과 인물의 서사방식, 일화에서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불특정한 시점으로의 변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의 전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는 야담과 전에 대한 상호 비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두 작품의 서사수법의 상이함을 확인하는 점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는 『청구야담(靑邱野談)』이 전(傳)을 소재로 하되, ‘전’의 서사문법이 아닌 야담적 문법 혹은 ‘야담’의 고유양식에 부합하도록 서사를 교직(交織)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이한 면모가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수준이 『청구야담(靑邱野談)』의 것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용분석
그러면 작품으로 들어가 본다.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빈부(貧富)를 고려하지 않고 그야말로 하층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의원의 진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그 서사지향부터 차이가 난다. 하층민에게 의술을 베푸는 인물의 서사는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이기도 하지만【『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백귀린(白貴麟)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백귀린은 의술(醫術)을 잘하였으나 자신의 처지와 경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층민을 치료하는 데 진력을 한 특이한 인술(仁術)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의술행위와 상통하는 바 있다.】, 이조 후기 인물전에서 이러한 인물을 형상한 경우는 적은 편이다. 여항인이 편찬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과 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사대부 문인들의 사전(私傳)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일단 소재의 참신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더욱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조광일의 인물 성격 또한 매우 개성적이며 주체적이라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이 지점에서 서사를 통해 조광일의 인물 성격을 알아보자.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이계(耳溪)가 경험한 3개의 일화, 그리고 서두의 의론과 말미의 논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이 서두의 의론이며 ④가 첫 번째 일화, ⑤와 ⑥이 두 번째 일화에 해당되고, ⑨에서 ⑫까지가 세 번째 일화다. ⑬은 말미의 논찬에 해당된다.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설명적 서술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3개의 일화를 중심축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는 바, 이 축으로 하층민을 대상으로 인술을 베푸는 조광일의 인간상과 민간의 영웅으로서의 개성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계는 조광일의 연대기적 기술에 치중하기보다는 특정한 사건을 경험한 실사를 근거로 특정 시기만을 특기하여 서술하되, 그 인간상을 압축시켜 특화시켜 서사로 구성하고 있다. 더욱이 앞 뒤 부분에 의론과 논찬을 배치하는 서사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전형적인 삽화 유형의 전에 속한다.
삽화 유형의 전(傳)은 삽화에 해당되는 일화의 내용은 인물의 인간상과 개성적 성격을 드러냄은 물론, 그것은 작품의 질을 결정짓는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일화는 조광일의 덕성과 성격, 그리고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 가치에 수렴되는 한편, 각 일화는 내부적으로 상호 연결되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서두 부분의 의론과 말미의 논찬 역시 조광일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서두에 드러난 호감어린 시선
여기서 먼저 서두의 의론 부분을 보기로 한다.
‘뛰어난 의술은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이 병을 다스린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일컫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의술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는 반드시 현달하여 높은 지위에 있어야 나라에 병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 혹 궁하여 시험할 수 없으면, 음양(陰陽)ㆍ허실(虛實)ㆍ약석(藥石)에 기술을 펼치니, 널리 베풀고 백성을 구제한 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간다. 때문에 옛날의 어진 선비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왕왕 의가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醫居九流之一, 蓋雜流也. 吾聞上醫醫國, 其次醫病, 此何以稱焉? 治國猶治病, 有醫之道焉. 然士必顯而在上, 國可得醫也, 或窮而無所試, 則寓其術於陰陽虛實藥石之間. 其博施濟衆之功, 亞於醫國. 故古之賢而不遇者, 往往隱於醫.
입전 인물에 대한 이계(耳溪)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편, 전개될 인물에 대한 예고를 해주고 있다. 사실 이 의론의 문맥을 꼼꼼하게 음미해보면 인물 성격에 대한 단순한 예고를 넘어 복선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광일은 어진 선비로 불우하여 의술에 숨어 지내는 인물이며, 나라를 다스려 공을 이룬 현자와 마찬가지로 인술로 생명을 구하는 인물이라는 의미를 내함(內含)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들머리부터 입전 인물에 대한 호감을 전제하고 작품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전개될 부분도 이러한 복선을 확인하는 것으로 채워짐을 알 수 있다. 위의 구절에 이어지는 서사는 이계가 입전 인물을 만나는 과정과 인술을 베푸는 실사를 목도한 경험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계(耳溪)는 젊은 시설 충청도 내포에 있으면서 조광일을 만나게 되는데, 지역 주민들에게 의원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近余僑居湖右, 不能其風土, 問土人以醫. 皆曰: “無良者.” 强之乃以趙生對]. 이계는 작품에서 조광일의 선조는 태안의 대성(大姓)이었는데 당대에 가난 때문에 유랑하다가 합덕의 내포에까지 들어온 사실을 먼저 적시해두고 있다[其先泰安大姓. 家貧客遊, 寓居合湖之西涯]. 당시 조광일은 몰락한 유랑지식인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술에 맡겨 여항의 의원으로 숨어지내는 인물로 보여진다【이조 후기 지식인의 분화과정에서 유랑지식인이 출현하는데, 이들 유랑지식인은 의술ㆍ훈장ㆍ지관 등과 같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그는 남다른 능력은 없었으나, 오직 침(針)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침은(針隱)이라 하였으며, 자기의 침술을 팔기 위해 권문세족들에게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無異能, 以針名, 自號曰針隱. 生足未嘗跡朱門, 門亦無顯者跡].
인술을 택한 두 가지 일화
이러한 그의 성격과 행동에서 당시 의원들이 인술을 저버리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만을 치료하는 행위와 정반대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의 한 부분을 보자.
①
내가 일찍이 조생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틀녘에 어떤 노파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을 두드리며 말하길, “나는 아무 마을에 백성으로 아무개의 어미입니다. 나의 자식이 아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감히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생은 “그러지요. 우선 가 있으면 나도 즉시 가겠소.”라 대답하고 바로 일어나 뒤따랐다. 걸어가면서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吾嘗過生廬. 淸晨, 有老嫗藍縷匍匐而扣其門曰: “某也. 某村百姓某之母也. 某之子病某病殊死, 敢丏其命.” 生卽應曰: “諾. 第去, 吾往矣.” 立起踵其後, 徒行無難色.
②
한번은 길에서 만났는데, 마침 비가 내려 흙탕 길이 되었다. 조생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오?”하니 “아무 마을의 백성 중에 아무개의 아비가 병이 들었어요. 내가 일전에 한번 침을 놓아주었는데 효과가 없어 오늘 다시 가서 침을 놓아주기로 약속하여 가는 중입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된다고 몸소 이같이 고생을 하시오?” 조생은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렸다.
嘗遇諸塗, 時天雨道泥. 生頂蒻跋屐而疾行. 問生何之, 曰: “某鄕百姓某之父病, 嚮吾一針而未効. 期是日將再往針之.” 恠而問曰: “何利於子而躬勞苦乃爾?” 生笑不應而去.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화들이다. 동틀 녘에 남루한 차림의 노파가 병든 아들을 위해 조광일에게 치료를 부탁하자 그가 주저없이 왕진을 나가는 모습이 ①의 일화다. 그리고 일전에 놓은 침이 차도가 없자, 비 오는 흙탕길인데도 불구하고 재차 왕진을 나가는 모습이 ②의 일화다. 어떠한 상황에도 주저 없이 빈민을 위해 진료하러 간다는 점에서 ①과 ②의 일화는 연결된다. 두 일화 모두 진정한 인술을 행하는 조광일의 의의(義醫)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는 바 있다.
두 번째 일화에서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된다고 몸소 이같이 고생을 하시오?[何利於子而躬勞苦乃爾]”라는 작가의 세속적인 질문에 빙그레 웃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가버리는 조광일의 행동은 매우 개성적이며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의원으로서의 그의 활동이 당대 일반적인 의원들의 행위와는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괴이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조광일의 행위가 의원의 일반적 행동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는 오히려 여기서 참다운 의원으로서 모습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두 일화에서 보듯이 조광일이 인식한 진정한 의술이란 신분적 차별은 물론 치료비에 관계없이 병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처지로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면 누구든 마다 않고 가는 삶의 자세는 의의(義醫)로서의 면모가 뚜렷하다. 앞에서 ‘침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침은[以針名, 自號曰針隱]’이라 불렀던 사실과 후반부에 ‘스스로 의원이 된 것을 기뻐하였다[自喜爲醫]’라는 구절을 여기서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침을 잘 놓는다거나 의술하는 행위에 자족(自足)하였다는 의미라기보다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으며 자부하였으며, 이러한 의원의 자세를 자신의 소명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대인들이 조광일의 인술(仁術)과 인생관을 인정하고 주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대목은 침술을 베푸는 조광일의 인간상을 간명(簡明)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포착하는데 썩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②의 일화에서 조광일이 이계(耳溪)의 질문에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生笑不應而去]’린 점 또한 향후 복선으로 작용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으로 서사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이계는 이러한 질문을 계기로 조광일과 교유를 하게 되고[余心異之, 伺其來往, 遂得狎而交焉], 이를 통해 예전에 듣지 못한 대답을 재차 질문하고, 마침내 조광일의 속내와 내면세계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답이 세 번째 일화에 해당된다.
의술로 세상을 통찰하다
이계(耳溪)는 “무릇 의원은 천한 기예로 여항(閭巷)의 비천한 곳에 해당된다. 그대의 능력으로 어찌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이에 여항의 소민(小民)들과 교우하면서 어찌 자신을 자중하지 않는가[夫醫者賤技, 閭巷卑處也. 以子之能, 何不交貴顯取聲名, 乃從閭巷小民遊乎, 何其不自重也]?”라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 이에 대한 조광일의 대답은 그야말로 그가 도달한 인생관의 정점을 보여준다.
장부가 재상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의원이 되는 것이 낫지요. 재상은 도로써 백성을 구제하지만 의원은 의술로 사람들을 살리니, 궁(窮)하고 현달(顯達)하는 것이 그 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을 뿐이라오. 그러나 재상은 때를 얻어서 그 도를 행하더라도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어요. 남의 녹을 먹고 책임을 맡아서 한번이라도 원하는 것을 다하지 못하면 비난과 벌이 뒤따르는 법이지요. 의원은 그렇지 않으니 의술로 뜻을 행하면 뜻을 얻지 못함이 없는 법이라오. 병을 다스릴 수 없으면 두고 떠나더라도 나의 허물이 아니지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의술에 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내가 이 의술을 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일 뿐이라오. 그러므로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지요.
丈夫不爲宰相, 寧爲醫. 宰相以道濟民, 醫以術活人, 窮達則懸, 功等耳. 然宰相得其時行其道, 有幸不幸焉, 食人食而任其責, 一有不獲則咎罰隨之. 醫則不然, 以其術行其志, 無不獲焉. 不可治則舍而去之, 不吾尤焉. 吾故樂居是術焉. 吾爲是術, 非要其利, 行吾志而已. 故不擇貴賤焉.
의술로 세상을 통찰하는 조광일의 언명들은 의원으로서의 자기 소신을 넘어 여항의 은자(隱者)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단순하게 의술을 베푸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세계의 폭과 인술을 베푸는 인생관의 깊이를 적실하게 보여준다. 조광일이 “의술을 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吾爲是術, 非要其利, 行吾志而已]”라거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는다[故不擇貴賤焉]”라는 언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주체적 인간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인간상을 주목한 그 자체는 한 의원의 개인적 삶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선입관 없이 그려내려는 작가정신의 소산일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와 통찰이 전제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언명들이다.
꼴불견 의원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
이어지는 조광일의 대답은 당시 인술을 저버린 의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꼬집는 것으로 채워진다. 조광일이 진단한 의원들의 비뚤어진 의술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위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의술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의원들의 꼴불견, 재상들의 요구에도 거들먹거리며 마지못해 가는 행위, 권세 있는 부유한 집이 아니면 가지 않는 작태, 그리고 가난하거나 권세가 없으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부재중이라고 딴청을 피우는 모습 등[吾疾世之醫, 挾其術以驕於人. 門外騎相屬, 家設酒肉以待, 率三四請, 然後肯往. 又所往, 非貴勢家則富家也. 若貧而無勢者, 或拒以疾, 或諱以不在, 百請而不一起, 是豈仁人之情哉]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세태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여지없이 비판한다.
한 편에서 그는 이러한 세속적 의원들의 세태에 대해 의원(醫員)으로서의 삶의 지표를 날카롭게 세워 세속적인 그것과 대립적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 조광일의 인술(仁術)이 가장 정채를 발하는 대목이면서 서사의 절정에 해당된다. 그러면 과연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의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곧 민에게 베푼 참다운 ‘인술(仁術)’이었음은 아래의 언급에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오로지 백성들과 놀면서 부귀와 권세 있는 자에게 구하지 않아 이러한 무리들을 징계하고자 한 것이지요. 저 귀하고 현달한 자들도 어찌 우리들을 작게 여길 수 있겠소? 내가 슬프고 가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일 따름이지요. 또 내가 침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침술을 행한 것이 십여 년인데, 혹 어떤 날에는 몇 사람을 살리고 어떤 달에는 십 수인을 살렸으니, 침으로 온전하게 살린 사람을 계산하면 족히 수천 사람은 될 것입니다. 내 지금 나이 사십 여세로 다시 수십 년 동안에 만 명을 살릴 수 있고, 살린 사람이 만 명이 되면, 내 일을 마치는 것이지요.
吾所以專遊民間, 而不干於貴勢者, 懲此輩也. 彼貴顯者, 寧少吾輩哉. 所哀憐, 獨閭巷窮民耳. 且吾操針而遊於人, 十餘年矣. 或日療數人, 月活十數人, 計所全活, 不下數百千人. 吾今年四十餘, 復數十年, 可活萬人. 活人至萬, 吾事畢矣.
추호도 세리(勢利)에 따라 자신의 의술을 베풀지 않고, 오로지 곤궁한 백성들만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로서의 삶의 견결함을 보여준다. 그는 민간의 부유한 자들과 노닐며, 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이권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이러한 인술로 십여 년 동안에 수천 사람의 생명을 구했음을 강개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민의 영웅인 셈이다. 그의 삶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여생도 이러한 삶을 지속하여 만여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표라는 점을 단호하게 제시하고 있다.
조광일이 자신의 삶의 주체와 인생관을 실현하는 공간은 바로 인술(仁術)이었고, 그는 인술로써 삶의 의미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 조광일의 인간상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이계(耳溪)의 시각 역시 의원으로서의 주체적 삶을 살면서도 인술을 견지하고자 한, 한 인간의 견결(堅決)한 의지와 의의(義醫)에 초점을 맞추어 조광일의 인간상을 더욱 부각시키는 바 있다.
논찬을 통해 칭송한 이계
더욱이 조광일이 인술을 베풀어 새로운 의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간상에 대한 이계의 후평도 서사에 조응한다.
이계는 조광일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한편 그의 품성과 삶의 미덕을 극구 칭송하고 있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명예나 보답을 바라지 않은 점, 곤궁한 사람을 우선하는 자세 등을 들어 호감 어린 시선으로 극찬하고 있다[趙生術高而不干名, 施博而不望報, 趍人急而必先乎窮無勢者, 其賢於人遠矣].
요컨대 이계는 논찬을 통해 조광일의 인술과 인간적 풍성에 대해 최대치로 끌어올린 표현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계가 인술을 베푼 조광일을 의의(義醫)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시사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도 따져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이 흥미롭고 새로운 인물을 입전한 문제작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도 이계의 이러한 시선과 입전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입전 인물의 선택에서 서사 방향과 시각은 오로지 작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의 논찬은 그러한 구실을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이계(耳溪)는 과거사에서 애국 인물을 뽑아 입전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제외하고, 모두 11개의 인물전을 창작하였다. 이계가 입전한 대상 인물은 개성과 계층이 다양한데, 이 작품 중 특히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의원전(醫員傳)에 해당된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전통적인 도덕규범 예컨대 충ㆍ효ㆍ열과는 애초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의원전’은 이조 호기 문인들의 인물전에서도 흔하지 않는 사례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이계가 의원을 비롯하여 여항의 세계에서 재예(才藝)를 지니고 그 나름의 가치 있는 특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주목한 자체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미 알려진 바 있듯이 이조 후기 전의 입전 대상이 신선(神仙)ㆍ이인(異人)ㆍ거지ㆍ예인(藝人) 등이 새로운 입전 대상 인물로 부각되며, 입전 인물의 신분도 대개 상층 지배층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시기와 전혀 다른 새로운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이계가 이러한 새로운 인물을 주목하여 입전한 것 역시 이러한 전사(傳史)의 역동적인 흐름에 적극 호응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이계의 전 작품이 『청구야담(靑邱野談)』에 6편이나 수록된 사실은 이계전의 독특한 작품성을 의미한다.
이계처럼 단일 작가가 의원을 위시하여 천주교 지도자 등 하층민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주목한 것은 동시기의 작가의 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뒤 세대 작가인 유재건과 같은 여항인으로 자기 계층의 인물을 입전한 사례를 제외하면 의원을 입전한 사례는 매우 드물며, 이계처럼 천주교 지도자를 정면으로 다룬 것은 매우 희귀하다. 일단 이계가 입전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이계의 문학적 감수성과 특장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위에서 살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은 소품이지만 민간의 의원에서 내의원의 침의에까지 오른 한 인물의 특이한 삶을 적절하게 포착하고 있다. 또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침술로 시정간을 누비며 인술(仁術)을 베푼 진정한 의의(義醫)의 상을 감동적으로 형상하였다. 두 작품 모두 일화를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특정한 사건을 통해 인물의 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에서는 작가가 세 개의 일화를 배치하여 인술을 베푸는 민간의 영웅으로 조광일을 그려내고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이계가 당대의 탁월한 시인으로서는 물론 전작가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간 시인으로서만 주목받아 온 이계의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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