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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90. 안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90. 안

건방진방랑자 2020. 4. 2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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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안가입훈(顔家立訓)

안씨(顔氏)는 북제(北齊)사람 안지추(顔之推)를 말한 것으로 지추가 두 권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저술하였다. 북사(北史)卷八十三

 

안건(顔騫)

공자(孔子)제자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을 말한 것으로 곧 훌륭한 제자를 가리킨다.

 

안건(岸巾)

두건을 뒤로 제껴 써서 이마가 훤히 드러나게 하는 것. 전하여 예법을 무시하고 아무에게나 친근하게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이설에는 미천한 자가 쓰는 두건이라고도 한다.

 

안검(按劍)

사기(史記)』 「노중연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길가에 내던지면 칼자루를 잡고서(按劍) 노려보지 않는 자가 없다[明月之珠, 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剣相眄者].”는 말이 있다.

 

안경파금설(眼境葩金屑)

불서(佛書), “금가루가 비록 귀중하나 눈에 들어가면 눈이 흐리다[金屑雖貴 着眼則眯].”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좋은 말과 지식도 거기에 집착하면 마음 닦는 데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안고수비(眼高手卑)

눈은 높으나 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에는 사치하게 살던 사람이 가난해져 눈은 높고 돈은 전처럼 쓰지 못할 경우를 일컫기도 한다.

 

안곡(按曲)

곡조를 고르게 한다.

 

안공걸미(顔公乞米)

안공(顔公)은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진 당()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가리킨다. 그의 걸미첩(乞米帖)생활 능력이 졸렬한 탓으로 집안 식구들이 죽을 먹은 지가 벌써 몇 달이나 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못 먹고 있는 형편이다.”는 내용이 나온다.

 

안공걸미서(顔公乞米書)

당 나라 안진경의 걸미서(乞米書)가 있는데, 그 내용인즉 생계에 졸하여 온 집이 죽을 먹고 지내는데 이미 몇 달을 지내고 보니 지금은 그것마저 떨어졌다.”라고 하였다.

 

안공첩(顔公帖)

() 나라 안진경(顔眞卿)이 노 대부(魯大夫)에게 쌀을 부탁하는 쪽지에 내가 생업에 졸렬하여 온 식구가 죽을 마시고 있노라.” 했다.

 

안구(晏裘)

다 떨어진 갖옷을 말한다. 안자(晏子)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정승인 안영(晏嬰)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기로 이름이 나 베옷에 사슴 갖옷을 입고 조회(朝會)에 나아갔으며, 30년 동안이나 갖옷 한 벌로 지냈다.

 

안기(安期)

산의 이름이다. ()의 안기생(安期生)이 수련을 쌓던 곳이라고 한다.

 

안기(安期)

안기생(安期生)인데, () 나라 낭야(琅琊) 사람으로 해상(海上)에서 약을 팔며 스스로 포박자(抱朴子)라 일컬었다. 진시황(秦始皇)이 그와 사흘 밤을 함께 이야기하고서 황금(黃金)과 백벽(白璧)을 주었는데, 다 두어두고 가면서 글월을 남겨 두기를 천년 이후에 나를 봉래산(蓬萊山)에서 찾아달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안기(安期)

왕승(王承)을 말한다. ()는 안기(安期)이며 왕술(王述)의 부친. 서진(西晉) 때 남전현후(藍田縣侯)를 하사받고 동해태수(東海太守)를 지냈으며, 동진 때에는 원제(元帝)의 종사중랑(從事中郞)을 지냄. 성품이 담담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청렴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음.

 

안기생(安期生)

고대 중국의 신선 이른다. 해변(海邊)에서 약을 팔며 장수(長壽)하여 천세옹(千歲翁)이라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유(東遊)하였을 때 3주야를 이야기하고 금옥(金玉)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떠나며 뒷날 봉래산(蓬萊山)에서 찾아 달라.”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안기생(安期生)

신선의 이름으로, 일찍이 하상장인(河上丈人)을 따라 황제(黃帝)노자(老子)의 설을 배우고 동해(東海) 가에서 약을 팔았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을 순시할 때 그와 더불어서 사흘 밤낮을 이야기해 보고는 금과 벽옥 수천만 개를 하사하였는데, 안기생은 이를 모두 부향(阜鄕)에 놓아두고 가면서 서()와 적석(赤舃) 한 짝을 남겨 두어 그에게 보답하였다. 그 뒤에 진시황이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로 가서 그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봉래산(蓬萊山)에 이르기 전에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고 한다.

 

안기자(安期子)

동해의 선산(仙山)에서 살았다는 전설상의 선인(仙人) 안기생(安期生)을 말한다.

 

안기조여과(安期棗如瓜)

안기생(安期生)은 신선인데, 한 나라 때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노닐다가 안기생을 만났는데, 안기생이 크기가 참외만한 큰 대추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안낙당(顔樂堂)

김흔(金訢)의 호이다. 김흔은 성종 10(1479)에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갔으나, 대마도에서 병이 나 되돌아왔다.

 

안남(安南)

인도차이나 동쪽의 한 지방, 당나라의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유래한 명칭이어서 베트남인들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안노(雁奴)

기러기 떼가 물가에서 묵을 때엔, 주위의 많은 기러기를 시켜 야경(夜警)을 서게 한다는데, 그들을 기러기 종(雁奴)이라 한다. 옥당한화(玉堂閒話)

 

안녹산(安祿山)

그는 원래 영주(營州) 유성(柳城) 출신의 호인(胡人)이다.

 

안단(雁斷)

한서(漢書)』 「효무황제본기(孝武皇帝本紀)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잡혀 북해(北海)에 유폐되었을 때 사신을 보내어 소무를 요구하였으나, 흉노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핑계하므로, 사신은 천자가 상림원(上林院)에서 사냥하다가 기러기를 잡았는데, 그 발에 소무의 편지가 매여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니, 흉노가 놀라 소무를 내어 주었다.” 하였는데, 이에서 나온 말이다.

 

안대(安大)

북쪽 변방에서 번호(藩胡)와 장사하며 익숙히 알고 지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다.

 

안도(安堵)

담 안에서 편안하게 머물다는 뜻으로, ‘걱정이나 근심이 사라져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인용: 柳居士(홍신유)

 

안독(案牘)

관아(官衙)의 문서. 즉 잡다한 사무를 말한다.

 

안돈(安頓)

적절하게 배치하다 편안하다 거주하다 당부하다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안락(安樂)

송유(宋儒) 소 강절(邵康節)이 처음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때 초가집에서 농사를 지어 그저 의식이나 해결하면서[歲時耕稼 但給衣食] 자신의 거처를 안락와(安樂窩)’라고 이름 짓고는 무사태평의 세월을 보냈던 고사가 있다. 송사(宋史)427 소옹전(邵雍傳)

 

안락당(顔樂堂)

김흔(金訢)의 호이다. 김흔은 성종 10(1479)에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갔으나, 대마도에서 병이 나 되돌아왔다.

 

안락와(安樂窩)

낙양현(洛陽縣)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거실(居室) 이름인데, () 나라 때 소옹(邵雍)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대(五代) 시대 주() 나라 안심기(安審琦)의 고택(故宅)을 얻어 거처하면서 항상 유유자적하며 안락와라 명명하고 또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 「소옹전(邵雍傳)

 

안렴대(按廉臺)

상산 정상에 있으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옛날 거란병이 쳐들어왔을 때 삼도(三道)의 안렴사(按廉使)가 이곳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9

 

안령록(鞍嶺錄)

이괄의 난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사책(史冊)을 말한다. 정충신(鄭忠臣) 등이 안현(鞍峴)에서 이괄의 군사를 대파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안류(安榴)

석류(石榴)의 별칭으로, 석류가 본디 안식국(安息國)에서 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안마(鞍馬)

안장을 지운 말이다. 흔히 먼 길을 가는 것을 뜻할 때 인용된다.

 

안면박대(顔面薄待)

잘 아는 사람이 면재하여 푸대접하는 것.

 

안명(安命)

천명을 편안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운명에 편안히 한다[知其不可奈何 而安之若命].” 한 데서 온 말이다.

 

안목소시(眼目所視)

다른 사람이 눈을 집중시켜 보고 있는 곳.

 

안묘(安苗)

곡식이 잘 자라도록 해줌. 여름철 사냥을 묘()라고 하는데, 그는 곡식을 해치는 짐승들을 잡아 없앰으로써 곡식이 잘 자라도록 도와준다는 뜻이다. 좌전(左傳)隱公 五年

 

안무전우(眼無全牛)

문장의 기예가 능란한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포정(庖丁)이 말하기를 처음에 신이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로만 보였으나 3년이 지난 뒤에는 눈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하였다.” 하였다.

 

안문(鴈門)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근처에 있는 산으로, 혜원(慧遠)이 이곳 출신이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의 옛 군명으로, 관문(關門)이 있는 요충지이다.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산명(山名). 이 산은 두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 그 사이로 기러기가 통과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인데, 전하여 기러기 고장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안미간가금왕후(眼眯肝家金旺後)

가을에는 폐기(肺氣)가 왕성하여 간기(肝氣)를 누르면 눈이 침침해 진다고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오행(五行)을 오장(五臟)과 절후에 배치시켜 폐는 금(), 간은 목()이라 하고 또 가을은 금, 봄은 목이다.” 하였는데, 금극목(金克木)의 이치로 금인 가을에는 목인 간을 이기어 간과 연관이 있는 눈이 어두워짐을 말한 것이다.

 

안민(顔閔)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와 민자건(閔子騫)을 말한다.

 

안배입요천(安排入寥天)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자연의 추이(推移)에 따라 변화해 가면서 그야말로 적요한 하늘의 일자(一者)에 들어간다[安排而去化 乃入於寥天一].”라고 하였다.

 

안보(按譜)

악보(樂譜)를 고찰한다.

 

안부(按部)

군대(軍隊)의 진열(陣列)을 조정하는 일, 군대를 부서(部署)하는 일, 또는 각 부서를 안찰(按察)하는 일 등을 말한다.

 

안부(鴈夫)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전안 의식을 할 때, 기러기를 들고 신랑 앞에 서서 가는 사람을 말한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안부전(鴈不傳)

고향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는 뜻이다. 잉어와 기러기는 서신을 전한다고 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편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을 앎. / 유의어: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비(按轡)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환제(桓帝) 때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뭇 도적을 안찰(按察)했다. 그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서 개연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 또는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도()를 즐김을 말한다. / 유사어: 안분지족(安分知足)

 

안사(安史)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안사(安史)의 난

 

안사고(顔師古)

사고는 당 태종 때의 학자인 안주(顔籒)의 자()이다. 그는 훈고학(訓詁學)에 정통했고 문장에도 뛰어나 오경(五經)의 문자를 정리했으며, 한서(漢書)를 주해했다. 저서에는 광류정속(匡謬正俗) 8편이 있다.

 

안사언(安士彦)

사언(士彦)은 안방준(安邦俊)의 자()이고, 우산(牛山)은 그의 호이다.

 

안산(案山)

풍수가들이 말하는 터나 묘()의 앞산.

 

안상도(安上圖)

임금을 편안히 할 계책, 즉 난리를 진정시킬 계책을 말한다.

 

안새(鴈塞)

기러기가 서식하는 곳. 일반적으로 북방을 말한다.

북쪽 변방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안새유관(雁塞楡關)

안새(雁塞)와 유관(楡關)은 중국 북방 국경의 지명이다.

 

안생기미(顔生驥尾)

좋은 스승을 만나 공부가 더욱 진전됨을 말한다. 안생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을 말하고, 기미는 파리가 기마(驥馬) 꼬리에 붙어서 천리를 가는 것이니 안연이 비록 재질이 훌륭하였지만 공자를 만났기 때문에 더욱 대성하였다는 말이다.

 

안서(雁書)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는 말이다. 안찰. 안신. 안백.

 

안석(安石)

동진(東晋)의 사안(謝安)의 자가 안석이다. 그는 정승으로 있으며 동산(東山)에서 항상 기생과 음악으로 정무의 여가를 보냈다고 한다.

() 나라 때의 고사(高士) 사안(謝安)의 자인데, 그는 수차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전혀 나가지 않다가 뒤에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나가 이부 상서(吏部尙書)ㆍ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등에 제수되어 부견(苻堅)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안석(安石)

() 나라 양하(陽夏) 사람인 사안(謝安)의 자이다. 간문제(簡文帝)가 죽은 뒤에 환온(桓溫)이 나라를 찬탈하려고 사안을 위협하였으나 굽히지 않아 계획이 성사되지 않았으며,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으면서 진 나라의 왕조를 일심으로 보좌하여 당시 사람들이 명상(名相) 왕도(王導)에다 견줬다 한다.

 

안석류(安石榴)

() 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안석국(安石國)에서 가지고 왔다는 석류 나무인데, () 나라 때 석류 나무에 열린 과실의 숫자를 가지고 등과(登科)할 사람의 수효를 미리 알았다는 고사있다. 해록쇄사(海錄碎事)文學 科第

 

안석류화(安石榴花)

안식국(安息國)이 원산지인 석류꽃을 말한다. () 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6장건(張騫)이 서역에서 안석류, 호도(胡桃), 포도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였다.

 

안석방(安石謗)

안석은 진()나라 사안(謝安)의 자()이다. 사안이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40이 되어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중승(中丞) 고숭(高崧)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경은 여러 차례 조정의 명에 응하지 않으면서 동산(東山)에서 고상하게 지내므로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안석이 조정에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하였는데, 창생들이 지금 역시 경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다.” 하니, 사안이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사안열전(謝安列傳)

 

안석불출여창생하(安石不出如蒼生何)

현인만이 어려운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안석재동산(安石在東山)

안석은 진() 나라 사안(謝安)의 자. 일찍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산수를 즐기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사안전(謝安傳)

 

안선(安禪)

심신(心身)을 편안하게 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안선자(安禪子)

안기생(安期生)인데 선진(先秦) 시대의 방사(方士)이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한 무제(漢武帝)가 방사 이소군(李少君)의 말에 따라 해중(海中)에 사신을 보내 봉래의 신선 안기생의 무리를 찾았다.”고 하였다.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

바로 한나라 고조(高祖)의 당산부인(唐山夫人)이 지은 노래이다. / 인용: 原詩(홍석주)

 

안수(鴈水)

강 이름이다. 고산(高山)에서 발원하여 만경(萬頃) 바다로 들어감.

 

안심결(安心訣)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 2()인 혜가(慧可)가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자 스승인 달마(達磨)가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혜가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覓心了不可得].”고 하자 달마가 너에게 안심의 경지를 주었다[與汝安心竟].”고 답한 고사가 있다. 전등록(傳燈錄)3

 

안심방(安心方)

마음을 편케 해 주는 처방을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2() 혜가(慧可)가 달마(達摩)에게 불안한 마음을 편케 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청하자, 달마가 불안해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고 대답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혜가가 그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가 없다.[覓心了不可得]”고 하자, 달마가 내가 이미 너에게 안심의 경지를 주었노라.[吾與汝安心竟]”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전등록(傳燈錄)3

 

안심법(安心法)

불교 용어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법을 말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이조(二祖)인 혜가(慧可)가 일찍이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자, 달마(達摩)가 그 불안해하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혜가가 그 마음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覓心了不可得]”고 하자, 달마가 너에게 이미 안심의 경지를 주었다[與汝安心竟]”고 한 일화가 전한다. 전등록(傳燈錄)3

 

안씨가훈(顔氏家訓)

안씨(顔氏)는 북제(北齊)사람 안지추(顔之推)를 말한 것으로 지추가 두 권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저술하였다. 북사(北史)卷八十三

 

안씨단씨비(顔氏段氏碑)

안씨(顔氏)는 태사(太師) 안진경(顔眞卿)을 가리킨다. 안진경이 이희열(李希烈당 덕종 때 반란을 일으킨 역적)을 토벌하러 갔다가 도리어 희열에게 잡혔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의 나이 여든, 수절을 아니 죽을 뿐[吾年八十 知守節而死耳]”이라 말하자. 희열은 사람을 시켜 목을 졸라 죽였다. / 단씨(段氏)는 태위(太尉) 단수실(段秀實)을 가리킨다. 당 대종 때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수실이 그를 토벌하게 되었다. 단수실은 거짓으로 주자에게 항복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주자의 홀()을 빼앗아 주자의 이마를 치고 크게 꾸짖었다가 끝내는 주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 인용: 靑石(백거이)

 

안씨단표유지락(顔氏簞瓢由至樂)

논어(論語)』 「옹야(雍也)어질도다 안회(顔回).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一簞食一瓢飮]만 마시며 누항(陋巷)에서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참아 내지를 못하는데, 우리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不改其樂], 어질도다 안회여.”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안씨여우(顔氏如愚)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를 가리킨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안회와 종일 이야기해도 한마디의 반대가 없고 마치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더니 물러간 후에 그의 사생활을 자세히 살펴보니 나의 말을 충분히 행동으로 실천해 낸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로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하였다.

 

안안(安安)

마음을 편안히 가질 만한 곳에서 편안히 지냄, 천성 그대로 할 뿐, 노력하지 않고도 덕성이 아름다운 일, 경솔하거나 난폭하지 않은 모양

 

안안(晏晏)

부드러운 모양. 화평한 모양, 천성 그대로 조금도 무리가 없는 모양

 

안여(安輿)

모친을 말한다. 당 의종(唐懿宗)이 생일 잔치를 자은사(慈恩寺)에서 벌였을 때 조은(趙隱)이 안여(安輿)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관람했던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조은전(趙隱傳)의종(懿宗)의 탄일(誕日)에 자은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조은이 안여에 모친을 모시고 와서 관람을 하자[隱侍母以安輿臨觀] …… 진신(搢紳)들이 모두 영광으로 알았다.” 하였다.

 

안여태산(安如泰山)

태산같이 마음이 끄덕 없고 든든한다. 안여반석(安如磐石)이라고도 한다. 편안하기가 태산과 같음.

 

안연(顔淵)

공자(孔子)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이름은 회(). 그는 일찍이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도를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았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안영(晏嬰)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현상(賢相)으로,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마부가 된다 해도 기쁘겠다고 찬탄했던 인물이다[假令晏子而在餘雖爲之執鞭所忻慕焉]. 사기(史記)62 관안열전(管晏列傳)

 

안영고절능수양(晏嬰高節凌首陽)

여기서 수양산(首陽山)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가리킨 것인데, 춘추시대(春秋時代) 안영(晏嬰)이 제() 나라의 재상(宰相)으로서 호구(狐裘) 한 벌을 30년이나 입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로, 안영의 청렴함이 백이ㆍ숙제보다 낫다는 말이다. 사기(史記)卷六十二 관안열전(管晏列傳)

 

안영단열(晏嬰短劣)

춘추시대(春秋時代) ()의 대부(大夫)안영(晏嬰)으로, 신장이 오척도 다 안 되어 장신의 초()나라에 사신 갔을 때 초의 임금으로부터 키가 작은 데 대한 갖가지 놀림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의젓한 자세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오히려 초의 군신(君臣)들 기를 꺾어놓았음. 열국지(列國志)

 

안웅(豻熊)

활 쏘는 장소(澤宮)에 설치한 안후(豻侯)와 웅후(熊侯)를 말한다.

 

안위체(安危體)

두보(杜甫)의 시에 어찌 감히 국가의 안위 걱정을 하랴. 늙은 대신 여전히 많이 있는 걸[敢料安危體 猶多老大臣].”이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3 傷春五首 再有朝廷亂

 

안유자손(安遺子孫)

방덕공(厖德公) 형주(荊州)에서 숨어 살면서 유표(劉表)에 벼슬하지 않았다. 유표가 찾아가서 그의 밭매는 것을 보고, “당신은 고상하게 살지마는 자손에게 무엇을 물려 줄터이요.” 하니, 그는 답하기를, “다른 이는 모두 자손에 위태로운 것(富貴)을 끼쳐 주지마는 나는 자손에 편안한 것을 물려 주오.” 하였다.

 

안읍(安邑)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안읍에는 대추가 많이 난다.” 하였고, 위 문제(魏文帝)가 군신(群臣)에게 내린 조서에는 안읍의 대추 맛이 천하에 제일이다.” 하였다.

 

안인(安仁)

() 나라 때 문인(文人)으로 황문 시랑(黃門侍郞)을 지낸 반악(潘岳)의 자이다.

 

안인졸(安仁拙)

안인(安仁)은 진() 나라 반악(潘岳)의 자(), 그의 한거부(閑居賦)서문(序文)에 졸렬하기만 한 관직 생활을 탄식하고 영록(榮祿)에 담담한 심경을 피력한 내용이 들어 있다.

 

안인한(安仁恨)

안인(安仁)은 진() 나라 때 문장가 반악(潘岳)의 자. 반악이 손수(孫秀)의 무함을 받아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던 일을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안자(顔子)

공자(孔子)의 수제자(首弟子)이므로, 현인(賢人)의 대표로 들었다. 수신(修身)을 잘하여, 논어(論語)』 「옹야(雍也)()는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는다.” 하였다.

 

안자(晏子)

제경공(齊景公) 때의 현상(賢相)안영(晏嬰)을 높여 이른 말이다.

 

안자누항(顔子陋巷)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은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있어 집이 매우 가난했으므로 빈궁한 것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안자락(顔子樂)

인욕(人欲)을 초월하여 천리(天理)에 심취한 즐거움. 논어(論語)』 「옹야(雍也)한 그릇 밥에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하게 살아간다면 남들은 걱정 그칠 날이 없겠지만 회()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하고 있으니, 참 어질다, 회 그 사람.” 하였다.

 

안자석이계(晏子惜泥谿)

제경공(齊景公)이 이계(尼谿)의 땅을 공자(孔子)에게 봉해 주려 하였더니 안자(晏子)가 방해하였다.

 

안자일표(顔子一瓢)

청빈(淸貧)을 즐기는 현자의 낙을 말한다. 안자(顔子)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논어(論語)』 「옹야(雍也)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 不改其樂이라는 말이 나온다.

 

안자지어(晏子之御)

변변치 못한 지위를 믿고 우쭐대는, 기량이 작은 사람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안작(贋作)

서화(書畵)의 위작을 이른다. 한비자(韓非子)』 「세림(說林), “()가 노()를 공격하여 참정(讒鼎)을 요구하니, 노에서 안작을 보내 주었다[齊伐魯, 索讒鼎, 魯以其鴈往].” 하였다.

 

안저무인사해공(眼底無人四海空)

소식(蘇軾)의 시에 아미산(峨眉山) 민산(岷山) 가로걸친 서쪽 태백산(太白山), 그처럼 눈이 높아 사해에 사람이 없었어라[西望太白橫峨岷 眼高四海空無人].”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7 書丹元子所示李太白眞

 

안저무전우(眼底無全牛)

백정이 소를 잡아 분해하는 데 있어 그 기예가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 완전한 소의 모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영감으로 척척 분해한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기예에 대단히 익숙함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안저전우(眼底全牛)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신이 처음에 소를 바를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그저 소로만 보이더니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에서 나온 것으로, 기예가 능란하여 여유만만한 사람을 칭찬하는 말이다.

 

안전창우(眼前瘡疣)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말한다. 당 나라 섭이중(聶夷中)전가시(田家詩), “눈앞에 난 종기가 아물자마자 심장과 머리 살을 도려내누나[醫得眼前瘡 剜刻心頭肉].”하였다.

 

안족(雁足)

기러기 발, 즉 현악기의 줄 밑에 괴어 소리를 조절하는 기구이다.

기러기 발은 한 무제(漢武帝)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소제(昭帝)가 보낸 사자가 선우(單于)에게 거짓말을 하기를 황제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하다가 북쪽에서 날아온 기러기를 잡았는데 기러기의 발목에 소무 등이 아무 곳에 있다고 쓰여진 백서(帛書)가 묶여 있었다.” 하자 선우가 사과를 하고 소무를 돌려보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편지를 가지고 가는 인편이나 왕래하는 서신을 말한다.

 

안족신난통(雁足信難通)

편지가 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 나라 소무(蘇武)는 흉노(匈奴)와 싸우다가 잡혀가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는데, 기러기를 붙잡아 발목에 글을 써서 매단 다음 날려보냈다. 뒤에 무제(武帝)는 이 기러기를 활로 쏘아 잡고서는 그의 있는 곳을 알아 끝내 돌아오게 되었다. 한서(漢書)』 「소무전(蘇建傳)

 

안종원(安宗源)

안종원(安宗源)의 아버지 안축(安𨋀)이 호()가 근재(謹齋)인데, 일찍 강원도 안찰사로 가서 관동별곡(關東別曲)이라는 가사(歌辭)를 지은 적이 있다.

 

안주(雁柱)

현악기의 줄 밑을 괴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소리를 조절하는 기구 이름으로, 기러기의 발 모양과 같다 하여 보통 기러기 발이라고 부른다.

 

안중무인(眼中無人)

안중에 사람이 없다. 자기밖에 없듯 교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김. / 유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안중준골(眼中駿骨)

훌륭한 친구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안중(眼中)은 곧 안중인(眼中人)의 뜻으로서 서로 친한 사이를 말하고, 준골(駿骨)은 준마의 뜻으로 즉 뛰어난 선비를 비유한 말이다.

 

안중지기(眼中知己)

항상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기를 말한다. 보통 못 잊는 친지(親知)를 안중인(眼中人)이라 한다.

 

안중지인(眼中之人)

눈 속에 있는 사람. ()든 사람을 말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하고, 눈앞에 없어도 평생 사귄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안중지정(眼中之釘)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이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눈에 박힌 못.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눈에 거슬리는 사람

 

안지초(安枝鷦)

자기의 분수를 지켜 편하게 사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무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鷦鷦巢於深林 不過一枝].” 하였다.

 

안지추(顔之推)

북제(北齊) 때 사람. 박식이었고, 문장이 뛰어났음. 저서에는 문집(文集)과 안씨가훈(顔氏家訓)이 있다.

 

안차길(安且吉)

임금이 하사한 옷이 편안하고 길()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당풍(唐風) 무의(無衣)어찌 칠명(七命)이 없을까마는 임금이 주신 옷이 편안하고 길하다[豈曰無衣七命 不如子之衣].” 하였다.

 

안창지죄(安昌之罪)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성제 때의 사부(師傅)가 되어,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함을 보고도 직언(直言)하지 못하고 아첨하므로 주운의 탄핵을 만났다.

 

안창후당객(安昌後堂客)

() 나라의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아끼는 제자 대숭(戴崇)이 올 때마다 그를 데리고 후당(後堂)으로 데리고 가서 부녀(婦女)의 시봉을 받으며 한껏 즐기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장우전(張禹傳)

 

안척(顔跖)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顔回), 9천여 명의 도적 떼를 이끌고 천하를 횡행했다는 도척(盜跖)을 말한다.

 

안척단장(顔跖短長)

도척(盜跖)은 흉악한 도적으로 사람의 간을 내어 회를 쳐서 먹는 자인데, 안락하게 오래 살았다. 공자(孔子)의 제일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顔回)는 덕이 성인(聖人)의 다음인데도 32세에 요절하였다.

 

안청(眼靑)

반갑게 맞는다는 뜻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완적(阮籍)이 상주가 되었을 때 혜희(嵇喜)가 예절을 갖추어 조문하니 완적이 흘기는 눈(白眼)으로 대하고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갖고 찾아오니 완적이 기뻐하여 반가운 눈(靑眼)으로 맞이했다.” 하였다.

 

안촉(顔蠋)

전국(戰國)시대 제()나라 사람.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면서 늘 말하기를, “무사하게 지내는 것이 귀()와 맞먹고, 일찍 자는 것이 부()와 맞먹으며, 천천히 걷는 것이 수레와 맞먹고, 늦게 먹는 것이 고기 먹는 것과 맞먹는다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無罪以當貴[].” 하였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안충(安沖)

동진(東秦)의 사안(謝安)과 환충(桓沖)을 가리킨다. 동진 시대 서진(西秦)의 부견(苻堅)이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동진을 정벌할 것을 논의하자, 권익(權翼)이 말하기를 동진이 아무리 미약하지만 큰 죄악이 없고, 게다가 사안과 환충 같은 사람은 다 강표(江表)의 위인(偉人)입니다.” 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卷二十九 晉紀

 

안치(雁齒)

다리 난간에 나무나 돌을 깎아서 나란히 세운 것이 마치 기러기의 행렬이나 이()의 모양 같으므로 한 말이다.

 

안탑(雁塔)

대안탑(大雁塔)은 중국 자은사(慈恩寺) 안에 있는 7층 탑 이름으로, () 나라 때 과거 급제자들이 여기에 이름을 써넣었다고 한다.

사찰(寺刹)에 있는 탑()의 아칭(雅稱)이다.

 

안탑명(雁塔名)

() 나라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자은사(慈恩寺)의 안탑(雁塔)에 이름을 적었던 데서 온 말이다.

 

안탕용추(鴈宕龍湫)

()은 탕() 자와 통하는데 안탕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그 골짜기에 크고 작은 용추가 있는데, 수백 길이나 되는 폭포로서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浙江

 

안태사(安胎使)

왕자가 탄생하였을 때 그 태반(胎盤)을 태봉(胎峯)에 묻기 위해 출장하는 특사(特使)이다.

 

안택(安宅)

()을 말한다. “인은 사람이 항상 머물 곳이라 하여 편안한 집이라 하고, ()는 사람이 반드시 행하여야 할 도리라 하여 바른 길이라고 한다[仁人之安宅也 義人之正路也].”하였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맹자(孟子)』 「이루(離婁)

 

안택대로(安宅大路)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맹자(孟子)』 「이루(離婁), “()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하였다.

 

안택정로(安宅正路)

()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은 사람의 편안한 집[安宅]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正路]이다. 그런데 편안한 집을 비워 놓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리고 가지 않으니, 슬프도다!”하였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안토낙천(安土樂天)

예기(禮記)애공문(哀公問)안토(安土)하지 못하면 낙천(樂天)하지 못하고, 낙천하지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는데, () 나라 왕정상(王廷相)은 신언(愼言) 작성편(作聖篇)에서 어디에 있든 편안한 것을 안토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편안한 것을 낙천이라 한다.” 하였다.

 

안토중천(安土重遷)

고향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안평군(安平君)

전단(田單)이 연 나라 군사를 물리친 뒤에 받은 봉호(封號)이다.

 

안평원(顔平原)

평원(平原)은 안진경(顔眞卿)의 봉호(封號).

 

안풍리(安豐吏)

조세(租稅)를 독촉하는 관리. ()의 동소남(董召南)이 안풍(安豐)에 살았었는데 당시 자사(刺史)가 그의 현행(賢行)을 천자(天子)에게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록(爵祿)은 그에게 오지 않고 날마다 관리가 문 밖에 와서 조세만을 독촉하였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한문공(韓文公) 동생행(董生行)

 

안하단류구(岸下斷類姤)

구괘(姤卦)는 위 5획은 모두 연하였고 아래 한 획만이 끊겨 있다[]. 이것은 가파른 언덕의 모양이 마치 구괘처럼 아래가 딱 끊긴 것을 말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앞에 가로 놓인 것은 박괘(剝卦)와 같기도 하고 뒤가 끊긴 것은 구괘와 같기도 하다[或前橫若剝 或後斷若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태도가 몹시 거만하여 남을 사람 같이 대하지 않음을 말한다.

 

안한공(安漢公)

전한(前漢) 시대 왕망(王莽)의 봉호이다. 왕망이 한때 한()을 찬탈하여 자칭 황제가 되었으나, 뒤에 다시 한 나라의 중흥(中興)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안합착배(顔闔鑿坏)

안합(顔闔)은 노() 나라 처사(處士)인데, 임금이 억지로 불러서 사자(使者)가 문으로 들어오니 그는 뒷담을 뚫고 도망하였다. 회남자(淮南子)』 「제속훈(齊俗訓)

 

안항(顔巷)

안자누항(顔子陋巷)의 준말로 궁벽한 시골살이를 말한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은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있어 집이 매우 가난했으므로 빈궁한 것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한 대바구니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顔回)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안항(雁行)

기러기떼가 하늘을 날 때의 가지런한 줄을 말하는데 형제간의 행렬과 같다고 하여 형제간을 비유적으로 말한다.

조정의 반열.

 

안행면기(安行勉企)

편안히 행함은 자연스럽게 행함을 말니 바로 성인의 일이고, 힘써 행함은 노력하는 것으로 보통 사람의 일이다. 중용(中庸)20

 

안현(安玹)

중종(中宗)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 있으면서 의약(醫藥)에 밝아서 항상 시종하였다. 그 뒤 명종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안현시혈상반반(鞍峴詩血尙斑斑)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안변도호부 조(安邊都護府條),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한 남자가 북녘의 장성(長城)의 사역장으로 갈 때 그의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쌀을 지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나 고향이 어디인가를 물으니,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이에 마침내 서로 붙들고서 통곡하면서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부자(父子)의 형상을 바윗돌에 그리고는 함께 죽었다. 이에 이곳에다 장사지냈다.’ 한다.” 하였다. 안현은 안변도호부의 서곡현(瑞谷縣)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안호(鴈戶)

정처 없는 떠돌이 백성들이 임시로 기거하는 집. 정자통(正字通)

 

안홀청(眼忽靑)

반겨주는 표정을 말한다. () 나라 완적(阮籍)이 본디 법도를 지키는 선비를 미워하여 자기 어머니 초상 때, 혜희(嵇喜)가 예의를 갖추어 조문하자 못마땅하여 눈을 희게 뜨더니,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오자 그제야 눈을 푸르게 떴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안화(眼花)

눈이 어지러워 꽃이 날리는 것처럼 어른어른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안회식타애(顔回食墮埃)

공자(孔子)가 진채(陳蔡) 사이에서 곤욕을 당할 때 7일을 굶게 되어 자공(子貢)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와 쌀 한 섬을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안회(顔回)와 중유(仲由)가 그 쌀을 가지고 쓰러진 지붕 밑에서 밥을 짓고 있는데, 천정에서 그을음이 밥솥 안으로 떨어져서 안회는, 그것을 버리자니 묻어나가는 밥알이 아깝고, 그냥 두자니 불결하여 생각 끝에 그 그을음이 묻은 밥알을 걷어서 먹었다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안후선(雁後先)

형제를 안항(雁行)이라고 하는데, 형제가 기러기처럼 앞뒤에서 번갈아가며 벼슬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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