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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07. 여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07. 여

건방진방랑자 2020. 4. 2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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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

남의 딸을 일컬을 때: 영애(令愛), 영녀(令女), 영원(令媛), 영교(令嬌), 영양(令孃), 영천금(令千金)

자신의 딸을 일컬을 때: 女息(여식)

 

자신의 아들

자신의 딸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女息(여식)

남의 아들 존칭

남의 딸 존칭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여가(驪歌)

여구가(驪駒歌)의 준말로 이별을 고하는 노래이다. 고대(古代)에 고별할 때 불렀던 여구(驪駒)라는 시편(詩篇)이 있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여가(與可)

() 나라 문동(文同)의 자()이다. 대를 제일 잘 그렸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였으며, 예서(隷書)와 행초(行草)와 비백(飛白)에 모두 그 묘()를 체득하였다. 송사(宋史)卷四百四十三

 

여가(黎家)

여자운(黎子雲)을 말한다. 자운은 담주(儋州) 사람인데 집은 가난하였으나 학()을 좋아하여 형제가 함께 독서하였다. 소식이 담이(儋耳)에 있을 적에 한번 방문하니 자운은 예우가 극진하여 아우를 시켜 술을 실어오고 청익(請益)하기를 게을리 아니하므로 소식은 그 당액(堂額)을 재주당(載酒堂)이라 써 주었음.

 

여간(茹肝)

간을 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벼름을 이르는 말이다. 합려에게 앙갚음하려 쓸개를 씹었다던 상담(嘗膽)이란 고사에서 유래했다. / 인용: 江上女子歌(이광정)

 

여강루(驪江樓)

여주(驪州) 청심루(淸心樓)

 

여강소부행(廬江少婦行)

중국문학사에서 서사시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를 가리킨다. 작자 미상의 장편 서사시(敍事詩)가 전해 오는데, 그 서문에 한나라 말 건안(建安) 연간에 여강부(廬江府) 소리(小吏) 초중경의 처() 유씨(劉氏)가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살면서 스스로 재가(再嫁)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집안에서 재가를 강요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초중경이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뜰 앞의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슬프게 여겨 이 글을 지었다.” 하였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여갱(藜羹)

명아주의 입으로 만든 국. 곧 검소한 음식을 말한다.

 

여거(旅拒)

여거(旅距)’와 같은 말로, ‘여럿이 모여서 항거하는 것을 말한다. / 인용: 民心篇(신흠)

 

여건도(呂虔刀)

() 나라에 여건이 차는 칼이 있는데 공인(工人)이 칼 모양을 상()보고 말하기를, “이 칼은 반드시 삼공(三公)이 찰 칼이요.” 하였다. ()왕상(王祥)이 공보(公輔)의 도량이 있다 하여 그에게 주었더니 왕상이 죽을 제 그 칼을 아우 왕람(王覽)에게 주었으므로 그의 가문에서 뒤에 대대(代代)로 삼공(三公)이 났다. 진서(晋書)』 「왕람전(王覽傳)

 

여경(餘慶)

자손들에게 끼친 선조의 복덕(福德). 주역(周易)곤괘(坤卦) 문언(文言)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였다.

 

여경덕조린(餘慶德照隣)

두보(杜甫)의 상위좌상시(上韋左相詩)독보적인 재주가 옛을 초월하니 여파의 덕이 이웃에 비추리라[獨步才超古 餘波德照隣].”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三

 

여계(女戒)

후한(後漢) 반소(班昭)의 찬으로 여자의 행실에 대해 논한 것이다. 비약(卑弱)ㆍ부부(夫婦)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계선성새상소(厲階先成塞上酥)

() 나라 현종(玄宗) 때 양귀비(楊貴妃)가 매번 우유에다가 목욕하였으므로, 북방에서 우유를 실어오느라 백성들이 시달렸다.

 

여고(汝固)

이식(李植)의 자()이다.

 

여고획(如皐獲)

옛날 가대부(賈大夫)가 말을 몰고 고택(皐澤)으로 들어가 꿩을 활로 쏘아 잡자[御以如皐 射雉獲之] 그동안 냉랭하던 그의 처가 비로소 웃으며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춘추좌전(春秋左傳)昭公 28年 附二

 

여골제입(與汨齊入)

격변하는 시대 정세 속에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달생(達生), 자맥질을 잘 하는 사람이 나는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함께 빠져들었다가 다시 용솟음치는 격류와 함께 빠져 나온다[與齊俱入 與汨偕出].”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여공(呂公)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다.

 

여과아천(女戈丫川)

매화를 그리는 비결이다.

 

여곽(廬霍)

여산(廬山)과 곽산(霍山)을 말한다.

 

여구(驪駒)

검은 말이다. 여구는 가곡(歌曲)의 이름인데, ()이 떠나려 하면 여구가(驪駒歌)를 노래한다. 한서(漢書)』 「왕식전(王式傳), “謂歌吹諸生曰歌驪駒라 했고, 복건(服虔)의 주에, ‘逸詩篇名也 見大戴禮 客欲去 歌之라 하였다.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고대에 고별(告別)할 때 불렀다 하며, 그 내용이 대대례(大戴禮)에 보이는바, “검은 망아지 문에 있으니 마부가 모두 있도다. 검은 망아지 길에 있으니 마부가 마구(馬具)를 갖추었도다[驪駒在門 僕夫俱存 驪駒在路 僕夫整駕].”하였다.

 

여구(臚句)

임금의 분부를 말한다.

 

여구곡(驪駒曲)

여구(驪駒)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검은 말(驪駒)을 타고 가는 사람과 작별하는 것을 읊은 노래이다. 그 가사에 검은 말이 문에 있으니 마부가 함께 있도다[驪駒在門 僕夫具存].”하였다.

 

여기(女岐)

신녀(神女)로서 지아비 없이 아홉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의 인물.

 

여기(女歧)

()의 형수. 요가 형수인 여기와 불의의 관계를 맺어 한집에 잠자는데 소강이 밤에 가서 여기의 목을 요의 목으로 잘못 알고 바꾸어 끊었다. 뒤에 요는 소강이 사냥할 때 놓아준 개에 물려 목을 끊겼다고 한다.

 

여남(汝南)

군명(郡名).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채현(上蔡縣) 서남부.

 

여남려봉안자(汝南旅逢顔子)

후한(後漢) 때 영천(潁川)의 순숙(荀淑)이 여남(汝南)의 황헌(黃憲 자는 숙도(叔度))을 만나 보고 나서 자기의 사범(師範)이라고 찬탄하며 그 옆을 떠나지 못하다가 뒤에 원굉(袁盎)에게 그대의 고을에 안자(顔子)가 있는 것을 어찌 알겠느냐.”고 묻자 원굉이 우리 숙도를 만나 본 모양이다.”고 말한 고사가 있으며, 또 곽태(郭泰)가 여남을 유람하다가 숙도는 천경(千頃)의 저수지 물과 같아서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고 극구 칭찬한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黃憲傳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여남평(汝南評)

후한(後漢) 말엽 여남(汝南)에 살고 있던 허소(許劭)는 식견이 높아 종형 허정(許靖)과 함께 명망이 있었으며, 고을 사람들의 인물을 평판하기 좋아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품제(品題)를 하니, 이때문에 여남의 풍속에 월단평(月旦評)이 있게 되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허소전(許劭傳)

 

여남현(汝南賢)

여남(汝南)은 중국 지명. 후한(後漢)때 여남의 허소(許劭)가 자기 종형 정()과 함께 명망이 대단했는데, 이들 둘이 모여 매월 그 고을의 인물들을 품평하였으므로 전하여 어진 자가 많은 고장을 말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허소전(許劭傳)

 

여년(驢年)

한없이 사는 것. 십이간지(十二干支)에 나귀 해는 없으므로 비유하여 한 말이다. 전등록(傳燈錄)鑽他古紙 驢年出得이라 하였다.

 

여단수족(如斷手足)

손발이 끊어진 것처럼 의지할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여대(輿儓)

고대 중국에서 열 등급으로 나눈 백성들 중 가장 아래의 두 등급에 속하는 천민(賤民) 계급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昭公) 7에서 사람의 신분을 왕(), (), 대부(大夫), (), (), (輿), (), (), (), () 등 열 가지 계층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가운데 아랫 등급의 천민 계급을 말한다. / 인용: 僧拔松行(황상)

 

여도지죄(餘桃之罪)

미자하(彌子瑕)가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가 미움을 받게 되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랑을 받을 때는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가고, 먹던 복숭아를 왕에게 주었어도 다리가 잘리는 죄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생각하여 수레를 타고 나가다니 효자로다’, ‘자기가 다 먹고 싶은 데도 불구하고 나를 생각해서 남겨주다니 얼마나 나를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더니, 사랑함이 식자 그것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수레를 타고 나갔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었다 하여 벌을 주었던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사랑을 받을 때와 미움을 받을 때가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여돈(蠡頓)

옛날에 큰 부자였던 범려(范蠡)와 의돈(猗頓)을 합칭한 말이다.

 

여동래(呂東萊)

여동래는 송() 나라 때의 학자로 호가 동래인 여조겸(呂祖謙)을 말하는데, 여조겸이 일찍이 직비서각저작랑 국사원편수관(直祕書閣著作郞國史院編修官)이 되어 고주역(古周易)ㆍ좌씨박의(左氏博議) 등 수많은 저서를 이루었다. 45세에 죽었다 한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四

주희(朱熹)가 일찍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매미 소리가 더욱 맑아진지라, 매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의 높은 풍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卷三十三

 

여동방(如東方)

사윗감으로 아주 훌륭하다는 의미다. 고악부(古樂府)인 맥상상(陌上桑), 나부(羅敷)라는 미녀가 한 성읍의 어른이 된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동쪽으로 떠나가는 일천 기마병들, 우리 남편이 바로 그들의 앞자리에 앉아 있네.[東方千餘騎 夫婿居上頭]”라고 쓰여 있다. 이는 작중의 여성 화자인 나부(羅敷)가 자기 남편이 지위가 높고 풍채도 빼어나다고 자랑하는 말이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여동진퇴문동파(女童進退問東坡)

여동은 어린 여자를 가리킨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풍류와 문장이 당대 제일로서 항주(抗州)의 기생 등 많은 기녀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여라(女羅)

소나무 겨우살이.

 

여랑걸(女郞乞)

여랑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영험이 있는 소녀의 혼신을 뜻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침주기우(郴州祈雨) 시에 여랑의 혼신께 비를 비노니, 구운 고기 제수 조촐코도 많아라.(乞雨女郞魂 炰羞潔且繁)”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卷九

 

여랑산석(女郞山石)

산석의 글귀란 바로 한유(韓愈)산석(山石)시를 말하고, 여랑(女郞)의 시란 곧 여인같이 온순한 풍의 시를 말한다. () 나라 때의 시인 원호문(元好文)의 논시절구(論詩絶句)정이 있는 작약은 봄 눈물을 머금었고 기력 없는 장미는 저녁 가지가 누웠다(이상은 송나라 진관(秦觀)의 시임) 하니, 이를 한퇴지(韓退之)의 산석 시에 대조해 보면, 이것이 여랑의 시임을 비로소 알리라[有情芍藥含春淚 無力薔薇臥晩枝 拈出退之山石句 始知渠女郞詩].” 한 데서 온 말로, 즉 송() 나라 진관(秦觀)의 시를 한유의 산석 시와 비유하면 한유의 시는 장부에 해당하고, 진관의 시는 여랑에 해당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卷三

 

여래장(如來藏)

여래(如來) 즉 부처가 될 씨앗으로서 인간의 본성(本性) 또는 불성(佛性)을 이른 말이다.

 

여량(礪良)

여산(礪山)의 고호이다.

 

여려(厲厲)

미워함, 정사를 범하여 나쁜 짓을 하는 모양

 

여로(黎老)

노인을 말한다.

 

여룡주(驪龍珠)

깊은 물 속에 사는 여룡의 턱 아래에 있다고 하는 보주(寶珠), 진귀한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리(閭里)

동리(洞里).

 

여리박빙(如履薄冰)

마치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 매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민(小旻)

 

여린촉처난구보(驪鱗觸處難求寶)

용은 턱밑에 비린(批鱗)이라 불리는 역린(逆鱗)이 있는데, 만일 이 비늘에 찔리면 죽는다 한다. 그러므로 용이 갖고 있는 여의주(如意珠)를 구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훌륭한 도묘(道妙)를 터득하려면 수많은 고난이 뒤따름을 의미한 것이다.

 

여림심천(如臨深泉)

깊은 샘가에 있는 것처럼 조심해야 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민(小旻)

 

여마동(呂馬童)

항우의 옛날 친구. 항우(項羽)가 패하여 오강(烏江)을 건너려 할 때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바로 항우라고 가르쳐주어 그의 목을 베도록 했었음.

 

여망(呂望)

강태공(姜太公)이다. 주문왕(周文王)의 스승. 점을 쳐서 스승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명(驢鳴)

후한(後漢) 말에 위왕(魏王)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왕찬(王粲)이 죽자, 함께 노닐던 이들과 함께 찾아와 조문하면서 그가 나귀 울음소리를 좋아했으니 우리 모두 한 번씩 그 소리를 들려주어 그를 보내자.”고 하여, 조객 모두가 나귀 울음소리를 냈다는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

 

여몽(呂蒙)

재상 노숙이 병사(病死)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 국세(國勢)를 신장하는데 힘썼다. 여몽은 촉() 땅을 차지하면 형주(荊州)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나라의 조조(曹操)와 화해ㆍ제휴할 것을 진언, 성사시키고 기회를 노렸음.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가 중원(中原)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때를 놓이지 않고 출격하여 관우의 여러 성()을 하나하나 공략(攻略)한 끝에 마침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오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명장으로 추앙을 받았다.

 

여몽령(如夢令)

옛 사패(詞牌) 이름이다. 일명 억선자(憶仙姿)라고도 하는 33자로 된 시체이다. 사율(詞律)卷二

 

여미화(酴醾花)

꽃나무. 이 꽃가루를 술에 타면 술맛이 좋다고 한다.

 

여민(黎民)

여증(黎蒸여수(黎首여서(黎庶여복(黎服)ㆍ금수(黔首)라고도 하며, 서민이나 일반 백성들을 말한다. / 인용: 詰楊吏(허격)

 

여민동락(與民同樂)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나눔을 말한다. 맹자(孟子)』 「양헤왕(梁惠王)/ 유의어: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반장(如反掌)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매우 쉬움. / 유의어: 이여반장(易如反掌)

 

여배승흥(驢背乘興)

시흥(詩興)이 일어날 만한 기막힌 분위기라는 말이다. 옛날 정계(鄭綮)시를 한 편 짓기 위해서는, 눈 오는 날, 나귀를 타고 패교를 건너갈 때와 같은 분위기[灞橋風雪中驢子背上]가 필요하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당시화(全唐詩話)5 鄭綮

 

여번(璵璠)

춘추(春秋) 시대 노() 나라의 보옥(寶玉) 이름이다.

 

여복(汝復)

이경용(李景容)의 자()이다.

 

여부(廬阜)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여산(廬山)을 가리킨다. () 나라 때 혜원(慧遠)이 이 산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18명의 학승(學僧)들과 더불어 수업(修業)하면서 백련사(白蓮社)라고 하였다.

 

여부계원(廬阜溪源)

송유(宋儒)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마음 근원이라는 말이다. 주돈이가 만년에 강서(江西)의 여부(廬阜) 즉 여산(驪山)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옮겨 와 살면서, 그 아래에 흐르는 냇물의 이름을 염계(濂溪)라고 하고는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송사(宋史)427 주돈이전(周敦頤傳)

 

여부주(廬阜酒)

여부는 여산(盧山)을 말한다. 동진(東晋) 때 혜원(惠遠)이 여산에서 연사(蓮社)를 결성(結成)하여 도연명(陶淵明)에게 입사(入社)를 청하니, 연명이 말하기를, “술마시기를 허락하면 들어가겠다.” 하였다.

 

여분(餘分)

정통(正統)이 되지 못하고 윤통(閏統)에 해당하는 국가에 대한 폄사(貶辭)이다.

 

여분(汝墳)

여수(汝水) 가의 큰 제방을 이른다. 시경(詩經)주남(周南) 여분(汝墳)

 

여붕우교이불신호(與朋友交而不信乎)

증자(曾子)가 하루에 세 가지를 돌아본 것 중의 하나로 벗과 사귀는 데에 신의로서 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여사(閭社)

마을.

 

여사(餘事)

정치하는 여가에 글을 하므로 여사(餘事)라 하였다.

 

여산(廬山)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그 남쪽에 아홉 줄기의 폭포가 있다 한다.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江西名山

 

여산(廬山)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동진(東晉) 때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여기에 동림사(東林寺)를 세우고 혜영(慧永), 뇌차종(雷次宗) 18인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사(結社)하였으며,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여기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백거이(白居易) 또한 낙양 동쪽의 향산에 많이 거처하여 보통 향산거사(香山居士)로 불리지만, “여산의 초당에서 밤비 소리를 들으며 홀로 묵다[廬山草堂夜雨獨宿].”라는 등 여산의 추억을 담은 시도 적지 않다.

 

여산대하(礪山帶河)

공신(功臣)을 봉()해 주는 맹세의 말인데, “황하의 물이 띠()와 같이 줄고, 태산이 숫돌같이 작게 되도록 영원히 서로 나라를 보전하여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다. 사기(史記)』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

 

여산동작구(驪山銅作柩)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여산(驪山)에 장사지냈는데, 이때 구리로 널을 만들었다. 사기(史記)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여산백련사(廬山白蓮社)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최초 결사(結社), 동진(東晉)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인(僧人)과 속인(俗人) 18명을 모아 염불하는 결사를 맺고서는 백련사(白蓮社)라고 하였다.

 

여산사(廬山社)

백련사(白蓮社)를 가리킨다. () 나라 때 혜원(慧遠)이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18명의 학승(學僧)들과 더불어 수업(修業)하면서 백련사라고 하였다.

 

여산삼소(廬山三笑)

여산은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여기에 동림사(東林寺)가 있으며, 그 밑에 호계(虎溪)가 흐르는데, 동림사에 있던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는 손을 전송할 적에 한번도 호계를 지나지 않았으며 만일 이 호계를 지나면 범이 울부짖었으므로 호계(虎溪)라 하였다. 하루는 법사가 선비 도잠(陶潛)과 도사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모르는 사이 호계를 지나자, 범이 울부짖으니 세 사람은 크게 웃었다. 후인(後人)들이 삼소도(三笑圖)를 그려서 전하는 이가 있었다. 노산기(廬山記)

 

여산옥예궁(驪山玉蘂宮)

현종이 여산(驪山)에 별궁(別宮)을 짓고 양귀비를 데리고 온천(溫泉)에서 향락하였는데, 양귀비는 술이 얼근히 취하면 연꽃보다 더 고왔다.

 

여산정사(廬山精舍)

() 나라의 고승(高僧) 혜원이 여산에 절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했던 고사가 있다. 양 고승전(梁 高僧傳)6

 

여산지(驪山址)

여산의 온천 터. 당 현종(唐玄宗)이 여산의 온천에 누차 행행하여 노닐면서 여기에 온천궁(溫泉宮)을 짓고 특히 총희(寵姬)인 양귀비(楊貴妃)를 여기에 머물게 했었다.

 

여산진면(廬山眞面)

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여산하씨(閭山賀氏)

여산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하씨는 하흠(賀欽)을 말한다. 하흠은 명 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가 요공(堯恭)이다. 요동 광녕(廣寧) 사람으로 진백사(陳白沙)가 강론하는 것을 듣고는 그날 즉시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가서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 뒤에 의무려산으로 들어가서 이학(理學)에 전념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키니, 사람들이 의려선생(醫閭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여상(藜床)

명아주 줄기로 엮어 만든 상탑(床榻)으로, 보통 간소한 좌탑(座榻)을 이른다.

 

여상(厲爽)

()는 병기(病氣), ()은 입맛을 잃는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여상(呂相)

() 나라 여단(呂端)을 말하는데, 송사(宋史)』 「여단전(呂端傳)에 태종(太宗)이 여단을 정승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하는 사람이다.”고 하니, 태종이 여단은 작은 일은 호도할지 모르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호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상(輿桑)

자여(子輿)와 자상(子桑)의 준말로, 절친한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자여(子輿)는 자상호(子桑戶)와 친한 친구였는데, 10일 동안이나 장마가 지자 자여는 자상호가 병들었을 것이다.” 하고는 자상호를 걱정해서 밥을 싸 들고 찾아가 사람의 운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상불호도(呂相不糊塗)

여상은 송 태종(宋太宗) 때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지낸 여단(呂端)이고 호도(糊塗)는 처사가 분명치 않고 흐리터분한 것을 말한다. 태종이 여단을 시랑에 제수하려 할 때 어떤 사람이 여단은 위인이 분명치 않고 흐리터분하다고 말하자 태종은 말하기를 여단은 작은 일은 그렇지만 큰 일은 그렇지 않다.” 하고 결국 제수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송사(宋史)卷二百八十一 呂端傳

 

여상작혈(藜床作穴)

한 자리에 오래 앉았으므로 상()이 뚫어졌다는 것이다.

 

여성(汝省)

이경회(李景會)의 자()이다.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의 봉호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

세속과 더불어 따라서 옮아간다. 어부사(漁父辭)

 

여소(蓼蕭)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제후들이 주() 나라 천자에게 조회하였을 적에 천자가 그들에게 사랑과 은혜로써 주연(酒宴)을 베풀며 연주한 악가이다.

 

여송달봉인(輿頌達封人)

() 임금 때에 화() 땅의 봉인이 수()ㆍ부()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 일로 요임금을 송축했었다.

 

여수(女嬃)

굴원(屈原)의 자씨(姉氏)로서 굴원이 대중과 부합하지 못하여 쫓겨난 것을 늘 책망하였다 한다. 이소경에, “여수의 선원(嬋媛)함이여! 차분히 나를 나무란다[女嬃之嬋媛兮 申申其詈予].” 하였다. 초사(楚辭)』 「이소(離騷)

 

여식(女息)

자신의 딸을 말한다.

 

여신(輿薪)

한 수레의 땔나무에 관한 비유는,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일부러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비평한 것이다. 맹자(孟子)』 「앙혜왕(梁惠王), 터럭 끝을 살필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으면서 한 수레의 땔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시력을 활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목이 나옴.

 

여악(廬嶽)

여산과 같은 말이다.

 

여악괴관(廬岳瓌觀)

중국 여산(廬山)에는 큰 폭포가 있는데, 이태백(李太白)의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여악사(廬岳社)

선비와 승려의 교분을 뜻하는 말이다. 진대(晉代)에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惠遠)이 승속(僧俗)18()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했던 고사가 있다.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惠遠法師

 

여악용투사(廬岳慵投社)

동진(東晉) 때 고승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에 결사(結社)를 하고, 고사 도잠(陶潛)을 초대하였으나, 도잠이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혜원이 허락하자 도잠이 뒤늦게 그곳에 참여했던 것을 말한다.

 

여악재연사(廬岳裁蓮社)

중국 강서성 강남부(江南府)에 있는 여산(廬山)의 백련사(白蓮寺)를 말한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고승 혜원(慧遠)이 맨 처음 이 산에 들어가 백련사를 결성하고 염불을 수행하였는데 그의 문도(門徒)가 수천 명이나 되었고, 그 후부터 그곳이 강남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악지자제(女樂至自齊)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공자가 노()의 사구(司寇)가 되어 정사를 바로잡자 제()에서 두려워하여 여악(女樂)을 보내어 저해시켰는데, 노의 임금이 거기에 고혹되어 정사에 해태하므로 공자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하였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여악찬미객(廬嶽攢眉客)

() 나라 혜원사(惠遠師)도잠(陶潛)더러 자주 연사(蓮社)에 들라고 권하자, 연명(淵明)이 눈썹을 찡그리고 갔다. 주속지(周續之)』 「우산기(虞山記)

 

여양(黎陽)

자공을 가리킨다. 자공이 공자의 문장(文章)은 들을 수 있으나 성()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여여(旟旟)

높이 올라가는 모양

 

여여(如如)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한 오법(五法)의 하나로서 법성(法性)의 이체(理體)가 둘이 아닌 평등을 말한 것이다. 평등불이(平等不二)하고 항구 불변(恒久不變)하는 법성(法性)을 뜻하는 용어로, 늘상 같은 모습을 유지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연란(藜燃爛)

() 나라 때 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에서 글을 읽는데 어느 노인이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찾아와서 그 지팡이 끝에 불을 붙여 밝혀 주었다. 유향이 성명을 물으니, 자기는 태을(太乙)의 정기라 했다고 한다. 삼보황도(三輔黃圖)

 

여오(旅獒)

() 나라 때에, “서방의 여() 땅에서 개()를 바치니 태보(太保) 소공(召公)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었다. 이국산(異國産) 큰 개를 무슨 진물로 여길 것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여오(汝五)

서상수(徐常修)의 자이다.

 

여옹침(呂翁枕)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한 객점에서 도사(道士)인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잠깐 잠을 자는 동안 부귀영화를 한껏 누렸다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모두 덧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82

 

여와(黎渦)

이와(梨渦), 주와(酒渦), 주과(酒窠)로도 쓰는바, 여인의 두 볼이 오목하게 들어가 보조개가 보이는 것으로 미녀를 가리킨다.

 

여와(女媧)

터진 하늘을 꿰맸다는 전설상의 신녀(神女) 이름인데, 예기(禮記)명당위(明堂位)여와가 생황(笙簧)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식(曹植)낙신부(洛神賦)풍이가 북을 치고, 여와가 노래를 부른다.(馮夷鳴鼓 女媧淸歌)”는 대목이 나온다.

 

여와긍토지희(女媧緪土之戲)

천지의 조화로 태어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여와는 중국 태고(太古) 시대의 여제(女帝) 이름인데 복희씨(伏羲氏)의 누이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인사부(人事部)천지가 처음 개벽했을 때 사람이 없어서 여와가 황토를 이겨서 사람을 만들었는데, 황토로 사람을 만들던 중 힘이 미치지 못하자 새끼를 진흙 속에 넣어서 사람을 만들었는데, 부귀한 사람은 황토로 만든 사람이요, 빈천하고 못생긴 사람은 새끼로 만든 사람이다.” 하였다.

 

여와련(女媧鍊)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태고적에 여와씨(女媧氏)가 오색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기웠다.”는 말이 있다.

 

여와보천(女媧補天)

상고시대에 무서운 재난이 한 차례 발생했던 적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고, 홍수가 범람하면서 사나운 불길이 타올랐으며, 사납고 못된 짐승들이 산에서 튀쳐 나와 사람들을 위협하며 해를 끼쳤다. 이때 여와가 오색의 돌을 제련해 구멍난 하늘을 메우고, 큰 거북이의 다리를 잘라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으로 만들어 무너진 하늘을 새로 지탱하게 했다. 또한 갖은 못된 짓을 하는 흑룡을 죽여 그 일대 백성을 구하고, 갈대를 태워 만든 재로 홍수를 막았다. 여와가 이러한 거대한 재난을 수습하자 대지는 다시 왕성한 생기를 회복했다.

 

여와보천경(女媧補天傾)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記)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연마해서 하늘을 때웠다.” 하였다.

 

여와석(女媧石)

여와씨(女媧氏)는 고대 여제라 하는데, 공공(共工)이라는 제후가 지혜와 힘만을 믿고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축융(祝融)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노하여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쳐받으니,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망가지므로 여와씨는 오색 돌을 구워 하늘의 구멍난 부분을 때웠다 한다.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여왜(女媧)

신화 속의 여신. 머리는 사람, 몸은 뱀의 형상이라 한다.

 

여용수(驪龍睡)

여룡, 즉 흑룡(黑龍)이 잠들어 있을 때에 턱 아래에 있는 구슬을 훔쳐 온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

 

여우렴(呂友濂)

우렴(友濂)의 이름은 동식(東植)인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 참판에 이르렀고, ()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여원(戾園)

무제의 태자가 죽은 뒤에 시호()를 여태자(戾太子)라 하고, 뒤에 그 무덤을 여원(戾園)이라 하였다.

여태자의 손자인 선제(宣帝)가 즉위한 다음, 태자의 시호를 여()라 하고, ()을 두었으므로 여태자의 묘를 가리킨다.

 

여원분서장벽실(慮遠焚書藏壁室)

진시황(秦始皇)서적을 불태우는 것을 염려하여 책을 벽 속에 넣어 두었음을 말한 것이다. 공등(孔騰)의 자는 자양(子襄)인데 진 나라 법이 엄함을 염려하여 상서(尙書)효경(孝經)논어(論語)를 공자가 살던 옛집 벽 속에다가 넣어 두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이것을 뒤에 한 문제(漢文帝) 때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찾아내니 여기에서 나온 상서(尙書)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하며, ()의 박사(博士)였던 복승(伏勝)은 진 나라가 책을 불태우자 벽 속에 상서(尙書)를 넣어 두었는데, 뒤에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갔다가 한()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복승은 그 책을 찾아냈는데 수십 편이 없어지고 다만 29편을 얻었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一 유림열전(儒林列傳)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한다.

 

여월계(餘月計)

날로 헤아리면[日計] 부족하여도 달로 헤아리면[月計] 남는다.”는 옛말이 있다. / 인용: 次伊川客舍韻(김예몽)

 

여월성쇠(與月盛衰)

구설(舊說), “소라가 구슬을 잉태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아기 밴 듯하므로 방태(蚌胎)하는데, 그 소라의 구슬은 달과 함께 찼다 줄었다 한다.”라고 보인다.

 

여유(與猶)

()는 예()와 같은 것으로 모두 짐승 이름인데, 이 두 짐승은 다 같이 경계심이 많아서 신중하게 망설이는 뜻이 있다. 도덕경(道德經)15예와 같이 겨울에 강을 건너듯 신중하고, 유와 같이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한다[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하였다. / 인용: 정약용, 인생을 말하다

 

여음후(汝陰侯)

()의 하후영(夏侯嬰). 유방(劉邦)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유방이 한 고조(漢高祖)가 되기 이전부터 서로 사이가 좋았고, 유방이 패공(沛公)으로서 항우(項羽)와 싸울 때는 함께 참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유방이 제위에 오른 뒤에는 그 간의 공로로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졌다. 사기(史記)95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여의(旅衣)

여행 도중 입을 옷으로,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여의(如意)

보살(菩薩)이 갖는 기물로서 이를 옥ㆍ뿔 따위로 만들기도 하는데, 한 자쯤 되는 자루에다 끝이 고사리 모양과 같다. 원래는 등의 가려운 곳을 긁는 데에 썼는데, 즉 가려운 곳이 뜻과 같이 긁힌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여의목(如意木)

도사(道士)가 소지하는 도구의 한 가지로 긁는 데 쓴다. ()과 철()로도 만든다.

 

여의쇄산호(如意碎珊瑚)

() 나라 때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는데, 하루는 왕개가 두어 자쯤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석숭에게 자랑하자, 석숭이 여의장으로 그 산호수를 때려 부수고는 자기 집에 있는 산호수를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5, 6척이나 되는 것이 수없이 많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여의여구(如衣如狗)

구름이 일어나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가탄(可歎), “하늘에 뜬 구름은 흰옷 같더니만, 어느새 변해 푸른 개 같아라[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하였다.

 

여이석(厲以石)

양치질을 말한다. () 나라 손초(孫楚)는 은거(隱居)하려 하여 벗 왕제(王濟)에게 돌을 베고 물로 양치질하겠다는 말을 잘못 돌로 양치질하고 물을 베겠다.” 하였다. 왕제는 물을 어떻게 베며 돌로 어떻게 양치질하는가.” 반문하자,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 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이빨을 닦으려고 해서이다.” 하여 둘러대었다. 진서(晉書)卷五十六 손초전(孫楚傳)

 

여인(黎人)

만인(蠻人)의 일종이다. 후산총담(後山叢談)널리 산골짜기에 사는 것을 요인(徭人)이라 하고, 물의 배 위에서 사는 것을 연인(蜒人)이라 하고, 섬 위에서 사는 것을 여인이라 한다.” 하였다.

 

여인(麗人)

미인(美人)을 가리키는데, 두보(杜甫)의 여인행(麗人行)삼월 삼일에 천기가 새로우니 장안의 물가에 미인이 많구려[三月三日天氣新 長安水邊多麗人]”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二

 

여인행(麗人行)

()두보(杜甫)가 지은 시. 그 한 구절에 “33일에 날씨 좋으니 장안(長安) 물가에 여인들이 많다.” 하였다.

 

여자구(呂子久)

자구는 여이징(呂爾徵)의 자(), 호는 동강(東江)이다. 북백은 관북(關北)의 방백, 즉 함경도 관찰사를 가리킨다.

 

여자동포(與子同袍)

자네와 두루마기를 같이 입겠네. 친구 사이에 서로 허물없이 무관하여 하는 말

 

여자시아조(餘子是兒曹)

후한서(後漢書)』 「녜형전(禰衡傳)큰 아이는 공문거(孔文擧)이고 작은 아이는 양덕조(楊德祖)이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녹록하여 거론할 가치도 없다.”에서 나온 것으로, 세속의 하찮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자여량(如茨如梁)

곡식이 무성한 모양.

 

여자청(女子靑)

동청(冬靑), 즉 감탕나무인데, 겨울에도 푸르다 하여 여자의 정절에 비유하여 여정(女貞)이라고도 한다.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를 말한다. / 유의어: 비예(睥睨), 치첩(雉堞) / 인용: 題樂民樓(정철), 上巳城南(남효온), 百祥樓(이계), 築城詞(이수광),

 

여재주(驢載酒)

() 나라 조학(曹學)이 날마다 돈과 호로병을 묶어 나귀등에 실어서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사람들이 조학의 나귀임을 알고 돈을 받고 호로병에 술을 담아 보냈다 한다.

 

여전(臚傳)

전상(殿上)에서 과거 급제자(科擧及第者)의 이름을 호창(呼唱)하면 계하(階下)의 위사(衛士)들이 일제히 그 소리를 전달하던 것을 말한다.

 

여절(女節)

황제(皇帝)의 정비(正妃)로 황아(皇娥)라고도 하는데, 밤에 별에서 무지개 같은 기운이 내려오는 꿈을 꾸고 지()를 낳았다 했다.

 

여정(呂政)

진시황(秦始皇) 영정(贏政)으로, 그가 실제로 여불위(呂不韋)의 소생이기 때문에 경멸하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여정(荔挺)

향초(香草)의 이름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중동(仲冬)의 달에 여정이 싹난다하였다.

 

여정(犁庭)

뜰을 갈아서 밭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즉 흉노를 멸망시킴을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여정(餘丁)

군역(軍役)에 종사하는 정년자(丁年者) 이외의 장정(壯丁)들을 말한다.

 

여조겸(呂祖謙)

여동래는 송() 나라 사람. 호는 동래(東萊). 주희(朱熹)가 일찍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매미 소리가 더욱 맑아진지라, 매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의 높은 풍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卷三十三

 

여좌(閭左)

() 나라 때에 부역(賦役) 등을 면제받고 이문(里門)의 좌측에 살던 빈약한 민가(民家)를 말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은 이 빈약한 민가에서까지 수졸을 징발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사기(史記)』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동쪽 지역. 의무려산은 요령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 서쪽에 있는 큰 산으로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지맥(支脈)이다.

 

여주(驪珠)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다는 보주(寶珠)를 이르는데, 이것은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므로, 전하여 뛰어난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

 

 

여지(荔枝)

과수(果樹)의 이름인데, 열매가 매우 맛이 좋다고 한다.

 

여지(荔支)

과일의 이름이다. 중국 복건(福建)ㆍ광동(廣東)ㆍ사천(四川) 등지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살은 희고 맛은 달고 즙()이 많으며, 모양은 용안(龍眼)의 열매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당 현종의 비()인 양귀비(楊貴妃)가 이를 매우 즐겨 먹었다고 한다. 당서(唐書)양귀비(楊貴妃)가 여지를 좋아했는데, 반드시 싱싱한 것으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므로 연도(沿道)에 역마(驛馬)를 놓아 수천 리의 거리를 전송(傳送)해 와도 그 맛이 변치 않은 채경도(京都)에 도착하곤 했다.” 하였다. 두목(杜牧)의 시()말발굽에 이는 티끌 귀비가 좋아하는데, 여지가 올라온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支來].”하였다.

 

여지금대(荔支金帶)

띠의 장식물을 금색(金色)에 진홍점(眞紅點)을 찍은 것으로 마치 여지(荔支)의 피황실홍(皮黃實紅)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데, 2품관 및 정3품관의 공복(公服) 차림에 띠는 띠이다.

 

여지여위(如脂如韋)

기름 같고 가죽같이 부드럽다.

 

여지지(輿地誌)

감은 천도(天道), 여는 지도(地道)의 뜻으로 천문 지리에 관한 기록물을 말하는데, 보통 지리서의 의미로 이해된다.

 

여지출처(如知出處)

세상에 쓰일 수 있을 때에는 나가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들어와서 사는 것을 말한다.

 

여진(呂秦)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 일찍이 진 장양왕(秦莊襄王)이 조() 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양적(陽翟)의 대고(大賈) 여불위(呂不韋)가 자기 아이를 임신한 총희(寵姬)를 장양왕에게 바쳤던 바, 그가 낳은 아이가 곧 뒤에 진 시황이 되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사기(史記)卷八十五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여진여퇴(旅進旅退)

특별한 주체성 없이 대중과 진퇴를 함께 하는 것. 국어(國語)』 「월어(越語)나는 필부의 용맹은 원치 않고 대중과 진퇴를 함께 하기를 원한다[吾不欲匹夫之勇也 欲其旅進旅退].”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여창(臚唱)

조선조 때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의식의 절차를 고저 장단에 맞추어 부르면서 창도(唱導)하던 일을 말한다.

 

여초(麗譙)

()의 무제(武帝)조조(曹操)가 지은 누각. ()는 성문 위에 있는 望樓. 화려하고 높다는 뜻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추(女樞)

()의 아내로, 역시 북극성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가 오제(五帝)의 둘째 번인 전욱(顓頊)이라고 한다.

 

여측인(蠡測人)

반고(班固)유통부(幽通賦)旣傾蠡而酌海 遂測管而窺天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츤(旅櫬)

객지에서 죽은 자의 영구(靈柩)를 말한다.

 

여치(呂稚)

여후(呂后)를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를 폐하고 척희(戚姬)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을 때 주창이 극력 반대하였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여후(呂后)가 고조 사후에 전권을 장악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와중에서도 주창만은 보전케 해 준 일을 말한다. 한서(漢書)卷四十二

 

여치(礪齒)

() 나라 손초(孫楚)침석수류(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수석침류(漱石枕流)’라고 잘못 말한 뒤, 곧장 이를 합리화시켜 말하기를 시냇물을 베개 삼는다는 것은 나의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을 가지고 양치질한다는 것은 나의 이를 갈아 내기 위함이다[所以枕流 欲洗其耳 所以漱石 欲礪其齒].”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調)

 

여침오십년(呂枕五十年)

중국 한단(邯鄲)에 사는 노생(盧生)이 객점(客店)에서 여옹(呂翁)을 만나 자기의 곤궁한 신세를 탄식하였더니, 여옹이 베개 하나를 내어 주며, “이 베개를 베고 누으면 뜻대로 될 것이요.” 하였다. 노생은 그 베개를 베고 곧 잠이 들었는데 꿈에, “50년 동안 장상(將相)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영화를 누리다가 80세에 죽었다.” 하여 깨어 보니, 한바탕 꿈으로 처음 누울 때에 그 집 주인이 황량(黃粱)을 솥에 넣어 찌는 것을 보았는데, 황량(黃粱)이 아직 익지 않았었다.

 

여필종부(女必從夫)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한다.

 

여하련효어(如何連曉語)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뭐라 할까 새벽까지 나눈 이야기들, 그중에 반절은 고향 생각이었다오[如何連曉語 一半是思鄕].”라는 구절이 있다. 한창려집(韓昌黎集)9 숙룡궁탄(宿龍宮灘)

 

여항(閭巷)

인가가 모여 있는 곳으로,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말한다.

 

여행자(廬行者)

선종(禪宗)의 제 육조(六祖)로서 속성(俗姓)이 노씨(盧氏)인 혜능선사(慧能禪師)의 별칭(別稱)이다.

 

여혜경(呂惠卿)

() 나라 사람. 자는 길보(吉甫). 그는 처음 왕안석(王安石)과 의기상합, 온갖 아첨을 부리다가 안석이 실권하자, 그의 복귀를 적극 방해한 소인이다.

 

여호모피(與虎謀皮)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뜻의 고사성어다.

 

여홍(女紅)

()은 공()과 같으니 즉 여자의 일을 말한다. 한서(漢書)』 「경제기(景帝紀), “금수(錦繡)의 찬조(纂組)는 여홍(女紅)을 해치는 것이다.” 하였다.

 

여환삼매(如幻三昧)

불경에 삼매(三昧)가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 여환삼매가 있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삼매라는 것이다.

 

여황(驪黃)

유능한 인재를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노송(魯頌) ()검은 말과 누런 말이 있으니 수레에 채우면 나는 듯이 달리도다[有驪有黃 以車彭彭].”하였다.

 

여황(驪黃)

진목공이 말을 잘 알아보는 백락(伯樂)의 제자 구방고(九方皐)에게 천리마를 구하려 보내었더니 오래 다니다가 천리마를 구해 놓고 와서 보고하였다. 진목공이, “그 천리마는 검은 말()이던가, 누른() 말이던가.” 하고 붙으니, “잊어 버렸습니다.” 하였다 진목공이 백락을 보고, “자네가 천거한 제자는 말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즉, 백락은, “검은색()인지 누른색()인지를 잊어버린 것이야말로 천리마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말이 천리를 가는 것은 털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기운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잘 보자면 털빛은 잊어버려도 좋은 것입니다.” 하였다. 열자(列子)』 「설부(設符)

 

여황빈모(驪黃牝牡)

사물을 관찰하는 경지가 매우 깊음을 비유한 말이다. 진 목공(秦穆公) 때에 백락(伯樂)이 진 목공에게 구방고(九方皐)를 천거하여 말()을 구하게 하였는데, 구방고가 말을 구하러 나갔다가 3개 월 만에 돌아와서 암컷으로 누런 빛의 말[牝而黃]’을 구해놓았다고 하므로, 진 목공이 사람을 시켜 데려다가 보니 수컷으로 검은 빛의 말[牡而驪]’이었다. 그러자 진 목공이 백락을 불러 이르기를 실패했도다. 그대가 천거해준 사람은 빛깔과 암수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무슨 일을 안단 말인가.” 하니, 백락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것이 나같은 사람은 만 명이 있어도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구방고는 천기(天機)를 관찰하기 때문에, 안에 든 정밀한 것만 취득할 뿐, 겉에 나타난 추()한 것은 잊어버려서입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열자(列子)』 「설부(設符)

 

여회(如晦)

바로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신 두여회(杜如晦)를 이른 말이다.

 

여흥자(驪興子)

민이길(閔頤吉)의 본관이 여흥이므로 그를 가리킨다. 이름은 민유경(閔有慶)이다.

 

여희곡읍(麗姬哭泣)

미인인 여희가 큰 소리로 슬피운다는 뜻이며, 시집가기 싫어하던 일이 시집간 뒤에는 울었던 것을 매우 후회했다는 것으로 한 치 앞을 못 보고 걱정하는 것에 비유하여 사용한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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