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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사육신, 수양대군, 안평대군, 김종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사육신, 수양대군, 안평대군, 김종서)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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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아들인 수양대군이었다. 태종은 그래도 왕위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을 벌인 것이지만, 수양대군은 바로 50년 전 명나라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이 된다. 게다.가 그런 그의 행위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후대에 더욱 오명을 떨친다. 박팽년(朴彭年, 1417~56), 성삼문, 이개(李塏, 1417~56), 하위지(河緯地, 1412~56), 유성원(柳誠源, ?~1456), 유응부(兪應孚, ?~1456) 등 여섯 명의 충신이 죽음으로써 단종(端宗)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는 데서 나온 사육신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불의에 항거한 절개의 상징으로 받들어지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실은 그들의 행위를 단순한 정의나 고결한 충절로만 볼 수는 없다.

 

1450년 세종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은 문종은 이미 세종의 만년에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끈 경험이 있었으니 왕의 자질이 모자라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우리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어느 머리 없는 위정자의 말이긴 하지만,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불행히도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이미 문종 즉위년에 그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으니 일단 후계 문제는 없으나 그가 겨우 열한 살의 어린아이라는 게 불씨가 된다.

 

정상 때 같으면, 그러니까 새 왕조가 개창되고 나서 상당한 기간이 지나 자리를 잡은 뒤라면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한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 일찍이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일곱 살에 즉위해서 나라를 크게 일군 적도 있지 않던가? 수백 년 전의 일이라서 조선시대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때처럼 대신들과 섭정이 어린 왕을 잘 보좌한다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열세 살에 즉위한 고려의 인종도 비록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휘둘리기는 했어도 왕위만큼은 죽을 때까지 24년간이나 유지했으니 왕으로서 실패작은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 고려의 그 어린 왕들이 즉위할 무렵은 나라가 중기에 접어들어 적어도 왕계에 관해서는 안정된 시기였던 데 반해, 단종(端宗)이 즉위할 무렵은 아직 조선 왕조가 신생국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한 시기라는 게 문제다. 더구나 태종이 시작하고 세종이 마무리한 2차 건국(사실상의 건국) 작업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어린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불길한 조짐이다.

 

 

그래도 조카의 왕위에 흑심을 품은 삼촌이 없었다면, 혹은 그 삼촌이 하나뿐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왕에게는 삼촌이 무려 열일곱 명이나 있었을뿐더러 (세종은 여섯 아내에게서 열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첫째와 둘째 삼촌, 그러니까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53)은 조카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대신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단종(端宗)의 섭정을 자처한 셈인데,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삼촌이 섭정을 맡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니까 거기까지는 좋다(원래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정식 섭정을 맡아야 하겠지만 그녀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다).

 

조카가 자랄 때까지 서로 사이좋게 권력과 국정을 나누어 맡았다면 아무런 이야깃감도 되지 않았겠으나, 불행히도 두 대군은 권력을 양보할 의사가 없다. 이리하여 끝난 줄 알았던 왕자의 난이 다시 발생한다.

 

먼저 선수를 친 것은 동생인 안평대군이다. 그는 이미 문종의 치세에 황표정사(黃票政事)황표정사란 무슨 기구나 조직이 아니라 문종 대에 있었던 기형적인 인사제도를 가리킨다. 말 그대로 노란 표(황표)’로써 국정을 운영했다는 뜻이다.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진다더니, 과연 문종은 재위 시절부터 대가 센 동생들의 등쌀에 힘겨워했다. 그래서 그는 국정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동생들의 요구에 못 이겨 그들이 추천하는 인물을 관료로 임명했다. 하지만 천거하는 인물을 무조건 임용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문종은 그 인명부에서 관리로 발탁할 인물의 이름에 노란 표시를 했는데, 이게 바로 황표다. 정규 임용제도를 무시한 무원칙한 인사행정이었으나 단종(端宗)도 황표정사를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왕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태종과 세종이 맏아들 승계의 원칙을 무시하고 즉위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를 장악해서 조정의 요직에 자신의 인물들을 박아넣고, 장차 병약한 형을 대신할 대권후보임을 천명한 바 있다.

 

비록 맏형이 죽은 뒤에도 수양대군이 형으로 있지만 아마 안평대군은 형제 서열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태종은 다섯째 아들로 즉위했고 아버지 세종은 그의 같은 셋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평대군이 노리는 것은 왕위 자체가 아니라 실권이니까 형의 눈치를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안평대군의 꿈 워낙 다재다능한 탓이었을까? 시ㆍ서ㆍ화에 두루 능한 안평대군은 늘 형에게 한발 앞서 있다고 여기며 여유를 보였으나 결국은 경주에서 진 토끼가 되고 말았다. 위가 그가 화가 안견(安堅)에게 자신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고, 아래가 그 그림에 붙인 안평대군의 발문이다. 꿈의 내용은 무릉도원이었으나 그의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수양대군의 자세는 다르다. 아마 그에게는, 호방한 성격에다 학문은 물론이고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해 일찍이 삼절(三絶)이라 불리면서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권력마저 동생에게 빼앗기니 수양대군은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모로 그에게는 안평대군처럼 막후의 실력자를 택하기보다 왕위 자체를 노릴 만한 동기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동생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분야, 그러나 조선의 대권후보라면 가장 중시해야 할 분야를 개척한다. 그것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다. 마침 명 황실에서 황태자를 새로 책봉하자 수양은 이게 역전의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중국의 황태자가 책봉되면 조선에서는 사은사(謝恩使), 은혜에 감사하는 사절을 보내야 한다참고로,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절에는 크게 정기 사절과 임시 사절이 있었다. 정기 사절은 중국 황제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와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天秋使), 그리고 새해를 맞아 보내는 정조사(正朝使)와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를 말한다. 임시 사절로는 황제가 즉위했거나 황태자를 책봉하거나 외적을 물리쳤거나 할 때 보내는 사은사와 진하사(進賀使), 황족 중에 누가 죽었거나 황궁에 불이 났거나 할 때 보내는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 특별히 보고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주청사(奏請使)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실질적인 업무가 있다는 점에서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주청사였으나, 파견되는 사신의 지위로 보면 오히려 주청사에 비해 다른 사절들이 훨씬 높았다. 동양식 제국 질서의 유교적 허례허식을 보여주는 한 예다. 그게 조선에게 무슨 은혜를 베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우간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으로서는 명 황실에 경사가 있으면 무조건 은혜로 규정할 의무가 있다. 사은사는 중요 사절이므로 보통은 의정부 정승 중 한 명이 가는데, 영의정인 황보인(皇甫仁, ?~1453)은 얼마 전에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으므로 누구나 생각하는 사은사 후보는 좌의정인 김종서(金宗瑞, 1383~1453). 그런데 문제는 황보인이나 김종서가 모두 안평대군의 인맥이라는 점이다.

 

이번마저 놓치면 수양대군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직접 사은사로 가겠노라고 나선다. 김종서는 너무 늙었다는 게 그가 준비한 구실이다(사실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할 때 북변의 여진과 원수진 일 때문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안평대군은 서둘러 황보인을 찾아가서 자신을 천거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거기서도 준비해 놓은 카드가 있었다. 안평대군을 보내자고 말하는 황보인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두어 달 원행을 한들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히 자신을 소외시킨 안평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자 경고다.

 

굳이 사신으로 가겠다는 형의 의도를 간파한 안평은 그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과연 사은사 자리는 두 왕자가 경쟁을 벌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14534월 베이징에서 돌아온 수양은 돌아오자마자 즉각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린다. 여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는 필경 명 황실의 이름을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왕자의 난은 필연적이다. 다만, 앞서 두 차례 있었던 왕자의 난과 다른 점은 이번의 정변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깊숙이 관련된다는 사실인데, 앞으로 이것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변의 기본 패턴으로 자리잡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3차 왕자의 난

사육신의 허와 실

3차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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