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은 마침내 왕국에서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사대부들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새로운 권력다툼을 벌인다. 그들이 진흙탕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거대한 도약을 시작한다.
일본과 여진이 차례로 중화세계에 도전함으로써 마침내 중화의 본산인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희한하게도 그것을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온 거라고 판단한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개혁의 조건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시작된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다르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士大夫)였던 만큼 중종이 개혁의 주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의 옥새가 찍힌 각종 개혁 조치는 실상 사대부가 입안하고 시행한 것이었다(게다가 중종은 형과는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다).
연산군(燕山君)의 전제 왕정을 타도한 사대부가 꿈꾸는 조선은 국왕이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사대부가 국정의 모든 부문을 관장하는 나라다. 그럴듯한 용어로 윤색하자면 사대부(士大夫) 중심의 관료제 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것이 순수한 의미의 왕국과 모순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앞서 말한 바 있다). 마침 그 꿈을 실현할 만한 현실적 조건도 좋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국정을 문란케 하고 사대부 세력을 분열시켜 왔던 훈구파가 사라졌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세조(世祖)의 집권을 도왔다는 공로 하나만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50년 동안 버텨온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약발은 완전히 떨어졌고, 연산군(燕山君)의 폐위와 함께 그들의 실체마저 거의 사라졌다. 사실 그들이 기득권만 지니지 않았다면 훈구파는 애초에 사림파의 상대가 아니었다. 학문으로 보나, 도덕으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나라를 운영할 실력은 사림파에게 있었다. 사필귀정! 아무리 우회로를 거칠지언정 결국 모든 일은 본래의 궤도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정도전(鄭道傳)이 조선을 건국할 때 품었던 꿈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할까?
사대부의 꼭두각시로서 중종(中宗)이 맨처음에 한 일은 반정의 마무리 작업이다. 사대부의 주문에 따라 중종은 연산군(燕山君)을 강화로 유배보내고 반정을 주동한 신료들에게는 후한 포상을 내렸다【이로써 또 다시 공신이 생겨났는데, 얼마 안 가서 이 반정공신들이 종래의 훈구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결국 기득권층이 사라짐으로써 개혁의 호조건이 형성된 시기는 아주 짧았다. 실제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시도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계승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새로 공신 세력이 생겨나는 현상을 결코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비기득권층 사대부와 대립하는 것도 필연인데, 이것이 나중에 당쟁(黨爭)의 뿌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적인 왕위계승만 이어진다면 왕권에 아무런 결함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견딜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당쟁과 사화(士禍)는 조선 사회가 유교왕국, 사대부 국가의 체제를 취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온화한 성격의 중종(中宗)은 연산군의 폐비인 신씨와 자식들만큼은 어떻게든 건져보려 애썼지만,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중종에게 폐비 신씨는 형수이자 처고모이고, 연산군의 자식들은 조카이자 처남이 된다). 폐비 신씨는 친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으나, ‘대의(大義)로써 결단해야 한다’는 중신들의 강권에 못 이겨 그는 결국 어린 조카들에게 사약을 내리고 만다. 하기야, 그는 조강지처인 단경왕후(端敬王后)마저도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궁에서 내쫓아야 했으니 조카들의 운명까지 거둘 능력은 없었다. 유배된 연산군은 그 해 11월 병에 걸려 아내인 신씨를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왕국’의 시대는 끝나고 사대부(士大夫) 국가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일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역모를 꾀한 탓에 소규모 사화가 빚어지기도 했으나 새 정권은 그런 대로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 이념을 다시금 강조하는 절차다. 비록 성종 때 잠시 유교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세조(世祖) 이래 50년 동안 조선은 왕국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조선은 절대왕국이 되고 사대부(士大夫)는 국왕의 완전한 관료로 전락하게 될지 모른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경연이 재개되고, 연산군(燕山君) 시대에 기능이 마비되었던 홍문관이 복구된 것은 그런 위기감의 표현이다.
원래 유교 이념이 강성해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불교다. 이른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건국 이념에 따라 개국 초부터 기를 펴지 못했던 불교는 독실한 불교도였던 세조 덕분에 체면을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나마도 기대할 수 없다. 설사 국왕이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는다 해도 사대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불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종(中宗)은 불교도도 아니었으니 불교 탄압이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다. 그래서 사찰의 재건이 전국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젊은 승려들은 전에 없이 군역에 종사해야 했다. 세조(世祖)가 창건했던 원각사(圓覺寺)가 헐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선박을 건조한 것은 불교 탄압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인 지금 서울의 탑골공원에는 사찰이 없어지고 10층 석탑과 비석만이 남게 되었으며,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찰은 사대문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현재 서울 안국동에 있는 조계사는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이것으로 유교 정치의 토대는 어느 정도 정비됐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세종과 성종 치세와 같은 수준을 회복한 정도에 불과하다. 정작으로 중요한 과제는 그 토대 위에 어떤 건물을 쌓을 것이냐인데, 그 작업을 위해 중종(中宗)은 1515년 서른세 살의 정치 신인을 과감히 기용한다. 그는 바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라는 인물이다.
▲ 반정의 효과 연산군(燕山君)을 제거함으로써 사대부들은 조선을 왕국에서 사대부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니 폭군의 존재가 그들에게 오히려 결정적인 도움을 준 셈이다. 유학 체제가 성립함에 따라 그 전까지 왕실에서 믿었던 불교는 탄압 대상이 된다. 사진에 보이는 10층 석탑과 비석만 달랑 남기고 원각사가 해체된 것도 그 일환이다.
꿈과 현실 사이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훈구파의 사주를 받아 사림파를 박살낸 사건이었으나, 대형 사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상하지 않았던 엉뚱한 결과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림파의 새로운 리더를 길러낸 것이다. 열일곱 살 때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으로 간 소년 조광조(趙光祖)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맺게 된다. 때마침 희천에는 무오사화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김굉필은 그 이듬해에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나 1년 동안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배운 것은 적지 않았다. 학문과 경륜만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조선을 이끌게 될 사림파의 학맥을 얻었으니까.
친구들에게서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학문에 전념했던 조광조였으니 과거 합격은 떼어놓은 당상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고시에 패스하고 나서도 줄을 잘 타야만 출세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성취와 열정은 성균관에서도 곧 주목을 받는다【지금은 어느 사립 대학교의 이름으로 사용되지만 당시 성균관은 국립이었고, 오늘날의 대학교나 대학원보다도 한 급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를 오늘날 사법고시에 비유한다면 성균관은 고시 합격생들을 교육하는 사법연수원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우선 사마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학생 자격은 최소 연령만 15세로 정해져 있고 연령 제한은 없어 50세 이상의 학생도 있었다)】.
1510년의 사마시에서 그는 당당히 장원으로 합격했으므로 처음부터 성균관에서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수석 합격자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차피 수석은 매번 나오게 마련, 따라서 그가 성균관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는 아마도 죽은 김굉필이 남긴 제자라는 위광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드디어 1515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이었던 안당(安瑭, 1460~1521)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중앙 관직에 오르게 된다. 처음 배속된 부서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造紙署)였으니 대단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정식 과거인 문과(文科)에 합격하면서부터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사실 중종(中宗)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조정 대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조광조(趙光祖)를 천거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조광조도 관직보다는 학업에 더 뜻을 두었고, 그를 ‘될성부른 싹’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초라한 관직에 임명하느니 더 공부하게 놔두자는 견해를 피력했다. 1511년 사간원의 이언호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광조는 재주가 뛰어나지만 아직 나이 서른이 못 되어 한창 학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그의 뜻을 갑자기 빼앗아 낮은 관직에 임용한다면, 학업이 중단될 것이고 그 자신도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원칙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조광조가 얼마나 주목받는 인재였는지 말해주는 이야기다】.
그 무렵 그가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계기가 생겨난다. 1515년 3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조정에서는 후임 왕비의 간택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다른 경우라면 논쟁의 대상이 아니겠으나 아직 정비인 단경왕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일각에서 그녀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 군신, 상하, 예의가 있으므로 부부가 모든 질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 세력의 적이었던 신수근의 딸을 복위시키면 반정의 정당성이 허물어질 뿐 아니라 장차 어떤 피의 보복이 일어날지 모른다. 따라서 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은 당연히 단경왕후의 복위에 결단코 반대다.
그래서 당시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책임자)이었던 이행(李荇, 1478~1534)은 복위론을 주장한 박상(朴祥, 1474~1530)과 김정(金淨, 1486~1520)을 유배보낸다. 하지만 사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 조치에 대해 안당이 반대하고 나섰고 또 안당에 대해 권민수(權敏手, 1466~1517)가 반론을 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진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趙光祖)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 이행(李荇)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보낸 것은 언로를 막은 큰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대의 언론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월하고 논리적인 그의 지적에는 이행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입장이 공신들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당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趙光祖)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이 장면에서 유교왕국의 독특한 현상인 왕과 사대부(士大夫)의 이중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중종(中宗)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조강지처를 궁에서 내쫓을 때도, 그리고 새 왕비를 간택할 때도 별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사대부(士大夫) 세력에 휘둘렸다. 여염집 아낙네의 지위를 놓고 설전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다(그래서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은 『주역』을 인용해가면서 부부의 도리가 으뜸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꼭두각시라 해도 엄연히 국왕이 존재하는 한 사대부(士大夫)도 국정에 대한 전권을 가지지는 못한다. 앞서 여러 정변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조광조가 뜻을 펼치기 위해서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는 게 중요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조광조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학문적 바탕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신뢰와 자신의 학문을 토대로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 목표는 조선을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조선은 원래 유교왕국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학을 강조하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물론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동안에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睿宗)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 그리고 형제간인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은 게 그 점을 말해준다. 지배층에서도 유학이라고 하면 사(詞)와 장(章), 즉 시와 문장만을 숭상했을 뿐(과거의 과목도 그렇다)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처음부터 통치 철학이자 사회 철학으로 받아들인 조광조(趙光祖)는 국가의 운영에서는 물론 국왕과 사대부(士大夫),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까지 유학 이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대부가 실권을 쥐자마자 곧이어 사회 전체를 유학으로 도배하겠다는 계획이 나왔으니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조광조는 1518년에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책임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책임자)이 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각종 개혁 조치의 시동을 걸어놓았다. 직책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 사회를 유교적으로 전면 개조하는 총지휘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격서(昭格署)가 먼저 혁파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아마 소격서에서 도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점도 마뜩치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의 일부가 소격서에 주어지는 것도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종교와 학문은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그는 도교를 미신으로 보았다). 그래도 도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전통적인 영향력 때문에 조정 대신들의 다수는 소격서를 폐지하는 데 반대했으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개혁 세력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소격서는 이후 명맥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 학문 = 정치의 등식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학문과 정치가 일치하는 현상은 양면의 칼이다. 건강한 학문이라면 그 학문이 정치를 통해 현실에 접목될 수 있으므로 사회 발전을 가져오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불행히도 조선의 학문은 사대부(士大夫)를 제외한 모든 계층에게 유해한 유학이었으므로 ‘학문= 정치’의 등식은 독이 되고 말았다. 사진은 학문을 연구하는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조광조(趙光祖)라는 현실 정치가를 추천하기도 했던 성균관의 명륜당이다.
그러나 이번 개혁의 범위는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나,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의 예법이 일반 백성들의 가정에서까지 생활상의 원칙으로 지켜지게 된 것은 모두 이때부터다(이를테면 유교식 관혼상제라든가 과부의 재가가 금지된 것 등이 그런 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 사회에 관한 인상은 바로 그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정치와 행정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까지 겨냥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향약(鄕約)의 보급이다. 1517년 조광조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조선 8도에 시행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바람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다. 향약이야 원래 중국 송나라 시대에 여씨 형제가 처음 도입한 제도지만, 300년 이상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조광조가 향약에 주목한 이유는 주희(朱熹)가 그것을 토대로 사회개혁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약은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勤],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며[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향약의 4대 강령인데, 취지 자체는 좋다. 다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데, 400년 뒤까지도 정부 주도의 캠페인이 먹힌다면 역사의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향약은 조광조(趙光祖)가 품은 개혁의 꿈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여기까지만 봐도 조광조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느낌은 충분하다. 사실 그는 급진성을 넘어 조급증까지 보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은 정변 하나로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원래 문화나 생활의 영역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조선은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그가 꿈꾼 것처럼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진화하겠지만, 그 과정에 걸리는 기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짧지 않으며, 그에 따르는 진통도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지 않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대에 꿈이 현실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조광조도 자신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점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급진적이라서 실행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반대파가 있기 때문에 급진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을 제거하면 개혁은 순조롭게 성공할 것이다. 반대파의 핵심은 어느새 새로운 ‘훈구파’가 되어 있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이다. 그래서 조광조(趙光祖)는 다음 개혁 대상으로 그들을 낙점한다.
그렇잖아도 조광조의 거센 개혁 드라이브에 밀려 과연 누구를 위해 반정을 도모했는지를 회의하던 공신들은 예상치도 않았던 공격을 받는다.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賢良科)가 그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서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의 기본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사실 옳은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科擧制) 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 방식의 과거를 통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지배 이념으로서의 유학과 철학’으로서의 유학의 차이라고 할까?). 특히 조광조(趙光祖)는 주희(朱熹)의 철학을 정리한 『소학(小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면서 관인이 되기 전에 수신부터 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니, 경전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짓는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는 과거제가 그의 안중에 차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뼈가 지나치게 강하면 근육이 버텨내지 못하는 법, 아직 체력이 약한 개혁에 근육을 붙이려는 현량과(賢良科)는 결국 뼈를 부숴 버리는 결과를 빚고 만다. 추천제도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현량과를 이용해서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은 물론 김식(金湜, 1482~1520), 안처겸(安處謙, 1486~1521) 삼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서 요직에 임명한다. 조광조(趙光祖)의 관점에서는 물론 나라를 위해 일할 훌륭한 인재들이며 최소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겠지만, 훈구대신들이 보기에는 조광조가 세 불리기에 나서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야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겠으나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신용개(申用漑, 1463~1519) 등 중도의 입장에 서 있던 존경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다. 결국 그런 불찰이 개혁의 불발로 이어지게 된다.
▲ 유학의 생활화 향약은 마치 농촌공동체의 자치적인 도덕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광조(趙光祖)가 ‘제도’로써 시행한 데서 보듯이 실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강제적인 규율이었다 (자치하라는 것도 명령으로 집행되면 이미 자치가 아니다). 이제 유교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이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여씨향약을 한글로 풀이한 『여씨향약언해』인데, 말하자면 ‘15세기판 새마을운동 지침서’인 셈이다.
시대를 앞서간 대가
현량과(賢良科)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컸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趙光祖)는 내친 김에 코너에 몰린훈구파에게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펀치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현량과를 통해 자파 인물들을 많이 등용한 데 자신감을 가진 조광조는 1519년 10월 드디어 정국 공신들에 대한 숙청 작업에 나섰다. 아마 그 자신도 개혁의 롱런과 완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고비라 여겼겠지만, 최종 타깃이 된 공신 세력의 입장은 그보다 훨씬 비장할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은 칼자루를 쥐었고 수구 세력은 칼날을 움켜쥐고 있다. 이런 형세로만 본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개혁 세력은 개혁이 목표지만 수구 세력은 생존이 목표다. 씨움에 임하는 자세가 다른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사태를 반전시키게 된다.
일단 조광조는 선제 공격을 가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반정공신들 가운데 자격 미달자가 많다는 상소를 올린 게 먹혀든 것이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태조 때의 개국공신들도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다”는 개혁파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체제의 성격으로 보면 조선의 건국은 고려 왕조의 연장인 데 반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조선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전환시킨 사건이었으니 공신들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그로서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는 없었다). 나아가 개혁파는 이미 6년 전에 죽은 반정의 주동자 성희안(成希顏)마저도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시했으니, 이렇게 질적으로 평가한다면 살아남을 공신은 더더욱 줄어든다. 결국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76명의 공신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공신전과 노비들이 몰수되었다【물론 중종(中宗)은 그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조광조(趙光祖)의 세력이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僞勳削除]하자고 주장하자 중종은 이렇게 만류했다. “공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하고서 뒤에 개정하는 것은 대단히 옳지 않은 일이오. 사리사욕의 근원은 물론 막아야겠지만 설사 그 의도가 옳더라도 일의 진행은 천천히 하는 게 좋소, 갑작스런 조치로 어떻게 그 근원을 막을 수 있겠소?” 요컨대 개혁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다. 중종(中宗)의 유약한 품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발언이기는 하지만, 아마 조광조(趙光祖)가 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의 개혁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반정공신 총수의 무려 3/4에 해당하는 인원이 고스란히 직격탄을 받았으니 이제 공신 세력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비게 마련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는 후보자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다. 공신 자격을 빼앗기고 조광조에게 소인배라는 낙인까지 찍혀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은 남곤(南袞, 1471~1527)과 심정(沈貞, 1471~1531), 홍경주(洪景舟, ?~1521)는 개혁파의 유일한 약점에 모든 승부를 걸기로 한다. 그 약점이란 바로 국왕의 존재다. 아무리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위세를 떨친다고는 하나 유교왕국의 형식을 취하는 한 사대부(士大夫)는 국왕의 아래에 있다. 개혁 세력의 모든 조치도 바로 국왕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는가?
그들의 교활한 안테나에 중종(中宗)의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조광조(趙光祖)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사실 중종은 최근 들어 개혁파의 급진성에 신물이나 있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광조는 중종에게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 수신과 치인)의 도리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도(王道) 정치를 내세우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르면 군주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이렇게 조선의 개혁적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왕에게까지 군주의 도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황제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처음부터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조선왕조실록』은 전체가 중국 황제의 연호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2층 건물조차 짓지 않을 만큼 스스로 알아서 명나라의 속국으로 처신해 왔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는 군주지만 황제의 책봉을 받으므로 황제에게는 신하(제후)의 신분이다. 황제를 받들어 모신다는 점에서는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처지다(이것을 사대부士大夫들은 천하동례天下同體, 즉 천자 앞에서는 누구나 같다고 말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천하의 주인은 오직 천자 하나뿐이므로 사대부가 탄핵할 수 없는 것도 오로지 천자뿐이다. 사대부들의 이런 군주관은 17세기에 중국 대륙을 만주족이 정복함에 따라 중화의 천자가 사라질 때까지 지속된다】.
조광조는 물론 플라톤을 알지 못했으나 철인(哲人) 정치야말로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지상에 구현하는 것임을 굳게 믿었다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통한다고 할까(이것을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개혁을 처음부터 충실하게 지지해 주었던 가장 중요한 후원자를 잃는 결과를 빚는다. 하기야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는 중종(中宗)이라 해도, ‘학문이 고명해지면 다른 일은 자연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지극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는 조광조의 말에 거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꽃은 수렁에서 피어난다지만 그것도 수렁 나름이다. 혼탁한 조선의 정계에서 조광조(趙光祖)의 고결한 개혁 정신은 더러운 배경에 잘 어울리는 3류 드라마로 전락한다. 남곤을 위시한 보수반동 삼총사는 마침 홍경주의 딸이 희빈으로 있는 것을 활용해서 저질 드라마를 궁중 무대에 올린다(하긴 원래 조선의 궁중 자체가 저질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무대다).
희빈 홍씨는 나라의 민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가있다며 중종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심지어 궁중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꿀로 써놓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기도 한다. ‘주초(走肖)’란 곧 조광조(趙光祖)의 성씨인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이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인데, 사실 성리학적 이념에 철두철미한 그가 왕위를 꿈꾼다는 것은 애초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에게서 마음이 떠나면서 중종(中宗)은 3류 관객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는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확신한 제작자들은 이윽고 결정타를 준비한다. 1519년 11월 수구 삼총사는 조광조(趙光祖)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자기구미에 맞는 인물들만을 요직에 기용했다면서 죄를 내리라고 상소한다. 물론 현량과(賢良科)의 폐단을 겨냥한 주장인데, 중종(中宗)은 불과 몇 달 전에 그 자신이 현량과(賢良科)를 승인했으면서도 태연하게(?)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무리를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조광조 지지파인 안당과 중도파인 정광필이 만류하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趙光祖)의 무죄를 시위했으나 이미 반동의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조광조(趙光祖)와 김정(金淨) 등 개혁 주도 세력은 유배되었다가 공식에 따라 곧 사약을 받았고, 촉망받던 소장학자인 김식은 유배지에서 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 즉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영원하다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짓고 자결했다. 물론 그밖에 수십 명의 옥사와 파직이 뒤따랐다. 이 해가 기묘년이기에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르지만 참 어이없고도 기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뛰어난 학문과 진보적 정치 감각, 게다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으면서도 개혁에 실패하고 좌초한 조광조(趙光祖)는 건국 초기의 정도전(鄭道傳)을 연상케 한다. 두 사람은 사실상 당대 조선의 리더이자 총지휘자로서 각종 개혁 조치를 입안하고 실행했으며, 조선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왕권을 넘어서지 못했다(넘어서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면 역시 조선은 분명한 왕국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사대부 국가에서도 국왕은 사라지지 않고 상징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정도전과 조광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서도 왕이 될 꿈을 품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전과 조광조는 100여 년의 시차가 있는 만큼 사정도 크게 다르다. 우선 정도전은 다른 왕권(태종)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조광조는 사실 왕이 아니라 반대파 사대부에 의해 타도되었다. 조선이 사대부 국가로 진일보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또한 정도전의 꿈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광조(趙光祖)의 꿈은 불과 한 세대만 지나면 실현된다. 이 점은 그를 제거한 수구 삼총사의 말로를 보면 분명해진다. 홍경주는 얼마 뒤에 죽어 별다른 보복을 받지 않았으나, 심정은 곧 다른 사대부(士大夫)들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다가 죽음을 당했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남곤은 스스로도 죄책감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죽은 뒤에 곧바로 관직이 삭탈된 것이다. 게다가 조광조도 얼마 뒤에는 누명이 벗겨지고 나중에는 영의정으로까지 추존된다. 이렇게 보면 조광조는 비록 시대를 앞서간 대가를 치렀지만 정도전에 비하면 시대를 앞서간 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 급진적인 글씨? 급진적 개혁가 조광조의 글씨다.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조선사회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도배하려 했던 조광조는 결국 실각과 죽음으로써 급행료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불과 한 세대 뒤에 실현된다. 그를 공격한 사대부(士大夫)들은 그의 덕분에 사대부 국가가 앞당겨진 데 대해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비중화세계의 도약
사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가 꿈꾼 성리학 이념의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최선의 선택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선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바깥에 있다. 이 세상에 조선이라는 나라 하나만 존재한다면 개혁의 범위와 스피드가 전혀 중요하지 않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바깥 세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혹시 조광조(趙光祖)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를 인식한 탓에 개혁에서 조급증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우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4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는 후대에 르네상스라고 알려지게 되는 인문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기풍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는 에스파냐가 오랜 이슬람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유럽 세계의 막내로 동참하면서 대서양 항해에 나섰다【참고로, 당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과 중국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출발시킨 정화의 남해원정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남해원정이 30년쯤 빠르다. 그러나 남해원정은 중국에 새 왕조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주변 세계에 알림으로써 신흥국의 안정을 꾀하는 게 목적이었던 반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향료 무역로를 찾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성격은 서로 정반대였다. 남해원정이 전형적인 정부 주도의 전시적 행사였다면, 서유럽의 대항해는 민간 주도의 실속있는 탐험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원정을 보냈지만, 서유럽은 세상을 알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이러한 진취성의 차이는 이후 동서양 역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서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종교개혁의 물결이 크게 일어나면서 유럽 세계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의 문턱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런 변화보다도 당장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 즉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다. 우선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15세기 초반 중국과 한반도에서 신흥국 명나라와 조선이 체제 안정을 위해 애쓰고 있던 무렵 일본도 심한 진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의 진통은 통일을 위한 몸살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가마쿠라 정권의 뒤를 이은 무로마치 바쿠후가 약화되면서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을 계기로 일본 전역은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중앙권력이 유명무실해지자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부르는 전국 각지의 봉건 영주들이 각기 자신들의 사병 조직을 가지고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앞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세기에 중국과의 정식 국교를 단절한 이래로 한반도와 달리 독자적인 역사를 걸어왔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중국에 비해 훨씬 좁지만 나름대로 독립적인 천하 관에 입각한 역사를 전개하는데, 영주들의 내전은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천황과 공가(公家, 중앙 귀족)의 전통적인 질서와 서열이 무너지고 칼 가진 자,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사무라이의 시대답게 일본 역사에서는 그것을 ‘하극상의 시대’라고 부른다【하지만 이 시기에도 천황은 여전히 존속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치 사대부(士大夫) 국가 시대의 조선 국왕이 그렇듯이, 하극상 시대에 일본 천황은 비록 실권은 갖지 못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한 귀족과 호족, 슈고 다이묘들은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허수아비와도 같은 천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결국 조선에서 사화士禍의 형태로 나온 게 일본에서는 내전의 형태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일본 천황이 조선의 국왕과 다른 점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지 않으므로 ‘일본 천하’의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치가 완전히 실종됐으니 왜구가 전성기를 맞게 되는 건 당연하다. 앞서 보았듯 조선에서는 1426년 세종의 치세에 3포를 개항해서 왜구를 회유한 바 있으나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왜구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심지어 일본 열도의 서해안 지방에서는 실력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왜구로 나서서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을 노략질할 정도였다. 이른바 3포 왜란이 일어난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1510년 4월 쓰시마의 지배 세력이 5천 병력을 이끌고 3포를 침략해 관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태는 곧 어렵지 않게 진압됐으나 그로 인해 잠시 일본과의 무역이 금지되었다가 2년 뒤 허가량을 대폭 줄여 무역을 재개했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늘어가면서 조직화된다. 사실 그 무렵 조선 정부는 수십 년 뒤에 닥쳐올 왜구의 총공세(임진왜란)를 예감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광조(趙光祖)의 개혁 바람과 그 후유증을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일본 본토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 왜구가 보내는 신호 위의 그림은 왜구(오른쪽)가 명군(왼쪽)과 싸우는 모습[도쿄대 소장]. 오른쪽의 왜구들이 중국 동해안을 침략하는 그림이다. 예부터 동아시아의 해상을 돌아다니며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던 왜구들은 15세기 중반부터 일본 열도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는 장차 통일을 이루고 나서 일본이 대외 진출에 나서리라는 신호탄이었으나 조선의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은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해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또 한 가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어두웠던 것은 북방의 정세다. 일본 열도가 통일을 위한 몸살을 겪고 있던 무렵 만주에서도 역시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밖에 없다.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만주는 다시 중국의 직접 지배권에서 벗어났다. 명나라에게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따라서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명나라의 대외 정책은 그대로 조선에게로 이어져 조선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이른바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 지출이 많았음은 앞서 본 바 있다).
당시 만주의 실력자는 옛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이었으므로 명나라와 조선은 이들에게 관직도 주고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으나, 문제는 그런 교린정책이 계속 약발을 보이려면 두 나라의 국력이 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명나라와 조선이 내정에만 부심하면서 자연히 힘의 공백 지대가 되어버린 만주에는 점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다. 조만간 만주족이 큰일을 한 번 낼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명과 조선의 중화세계가 약화되고 비중화세계인 일본과 만주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신경을 쓸 여유도 없다. 기껏해야 3포 왜란에 놀라 비변사(備邊司)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하는 정도의 군제개혁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름 그대로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는 기구였으니 임시변통에 불과하다(굳이 비변사의 의의를 찾자면 조선 역사상 최초로 대외를 겨냥한 정규군 조직이라는 점이다.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까지 정규군이라 할 만한 조직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중종(中宗)은 과거에 무학(武學)을 포함시키고 화약 무기를 개발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 부실한 국방력을 메워보려 애썼으나, 대외적 변화에 어두운 전반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노력도 별로 빛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군역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베를 받던 관행(당시 베는 현금이었다)이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는 정식 제도로 자리잡을 정도였으니, 당시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 간의 오랜 서열 관계가 역전되는 격변의 시기, 그러나 중국과 한반도의 중화세계는 여전히 우물 안의 개구리로만 만족하고 있다.
▲ 사대교린의 줄타기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의 접경에 있었다. 그래서 중화세계와는 사대, 비중화세계와는 교린을 대외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삼았는데, 이질적인 두 세계를 제대로 매개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지도는 조선 초 두 세계를 상대로 한 어려운 줄타기 외교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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