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원리로서의 물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앞의 정원에 나는 조그만 채마밭을 하나 가꾸고 있다. 봄이면 글을 쓰다 나가서 무우씨나 깻잎씨를 뿌리고 가꾸어 먹는다. 그런데 이것들은 왕성하게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라지만 가을이 되면 결실을 맺고 씨를 맺는다. 그래서 내년 봄이 되면 또 그 씨를 뿌리게 된다. 최소한 내가 올해 우리집 정원 채마밭에 뿌린 씨와 내년에 뿌리는 씨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이것을 같은 씨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씨를 보다 추상화시켜서 동일한 DNA구조의 지속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이 씨는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씨는 같은 씨이지만 매년 다른 모습으로, 다른 환경의 기후 조건에서 다른 체험을 향유하면서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식물의 윤회’는 너무도 쉽게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동물의 윤회의 경우, 개체의 존속과 소멸, 그리고 지속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하냐는 데는 제각기 문명마다 다른 세계관 속에서 설명이 가능하겠지마는, 인간의 윤회라는 것도 크게 말하면 이러한 대자연의 순환이라는 에코시스템(eco-system)의 틀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의 사상은 ‘우파니샤드’(Upanisad, 비밀 모임이라는 뜻)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문헌군, 그리고 마하바라타라는 대 서사시 등에 이미 명료하게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헌이 쓰여진 것은 반드시 불교의 발생 이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강 불교가 발생되기 이전 기원전 7~5세기에는 이미 정착된 내용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가을에 지는 낙엽과 봄철의 소생, 그런 것들을 고대인들은 분리해서 생각치를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잡다한 사상(事象)을 통괄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나 추상적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 공통된 속성을 ‘생명’이라고 한번 이름지어 보자! 그러나 고대인들은 생명을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지를 않았다. 대자연의 온갖 모습을 지어내고 있는 어떤 물리적 기저, 질료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생명 현상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질료로서 우리는 ‘물’ 같은 것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여름의 뙤약볕에 말라죽은 초목에 비가 내리면 다시 생명이 움트고 초목은 무성하게 소생한다. 사막에서 말라 죽어가는 인간에게도 오아시스의 물 한모금은 생명을 가져다 준다. 즉 물은 생명 그 자체로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생명원리로서의 수분은 식물과 더불어 인간에게 섭취되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이 되는가 하면, 그것은 정자가 되어 모태로 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킨다. 우리말의 ‘정’(精)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그 속에는 쌀(米)이 들어 있는 것이다. 쌀은 식물의 생명의 정화이며, 그것은 곧 인간의 몸에 들어와 또 다시 정자ㆍ정액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정화를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생명의 씨(bīja)로서 윤회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도인들은 그것을 물이라는 생명의 변용(transfommation)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어 시체가 화장되면 수분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는 순환의 경로를 더듬어 가는 물은 달[月]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달이 기울고 차는 것을 고대인들은 매우 신비롭게 생각하였고, 달을 천상의 물을 담는 용기로 파악하였다. 달에 물이 가득 찰 때가 만월이고, 찬 물이 다 흘러내리면 그믐이 된다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베다제식에 빼어놓을 수 없는 신적인 술[神酒] 소마(蘇摩, soma)가 달을 신격화한 월천(月天), 즉 소마데바(蘇摩提婆, Soma-deva)와 동일시된 것도, 바로 달이 신들이 마시는 소마를 담고 있는 용기라는 생각에서 유래된 것이다.
생명의 원리로서의 물은 달로부터 유출되어 지상으로 내려오고, 또 다시 지상에서 달로 되돌아가는 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사자의 영의 타계로의 편력, 그리고 타계에 있어서의 다시 죽음[再死]은 이와 같이 생명의 순환의 원리와 결합되어 갔다. 야마의 나라에서 다시 죽은 사자의 영은, 연기가 되어 하늘나라의 달에 도달한 물이 또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강림하듯이,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차안의 삶과 피안의 삶이 순환적으로 교체하고,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렇게 해서 윤회관은 형성되었던 것이다【上山春平ㆍ梶山雄一 編, 『佛敎の思想』(東京 : 中央公論社, 1980), 中公新書 364, pp.135~138, ‘윤회와 업’이라는 장을 참고했다】.
▲ 인도대륙은 거대한 평원이다. 인도의 농촌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풍요롭고 아름답다. 이 허수아비는 생명의 윤회의 한 상징일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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