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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반골기질의 허균을 비판한 홍만종 허균은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누비며 실력을 뽐내지만 예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태도 탓에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며 파직 당했다가 재임용되는 등 여러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다 결국 광해군 때에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거열형에 처해져 능지처참되며 생애를 마감한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호걸스런 사내다운 삶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런 내용을 알고 『소화시평』 권하 42번을 읽으면 더 이해하기가 쉽다. 권하 41번에서도 봤다시피 허균은 끊임없이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실력이 출중했던 탓에 주요보직에 머물며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예 겸춘추관이란 직위까지 겸직하게 되자 여러 감상이 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반골기질의 허균과 그를 도와준 사람들 『소화시평』 권하 42번의 주인공은 허균이다. 우리에게 허균은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문이 권력의 지표가 되고 한글은 아녀자들이나 쓰는 글로 폄하되던 당시에 한문으로 유창한 글을 쓸 수 있던 사람이 한문이 아닌 한글로 글을 지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엔 소설이란 장르는 하나의 문학 장르로 호평을 받지 못하고 ‘그저 신변잡기나 읊어대는 불온한 글’이란 인상까지 있었으니, 『홍길동전』이 조선 전기 문인사회에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허균은 양반가의 막내아들로 뛰어난 문학적 소양으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신분제 사회에선 모든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42. 시의 내용과 행동이 위배된 허균 許筠「除兼春秋有感」詩曰: “投閑方欲乞江湖, 金櫃紬書亦濫竽. 丘壑風流吾豈敢, 丹鉛讐勘歲將徂. 壯遊未許追司馬, 良史誰能繼董狐. 碧海烟波三萬頃, 釣竿何日拂珊瑚.” 辭意極其婉轉. 第附麗兇徒, 煽俑邪論. 言與行違. 一至於此, 何哉. 해석 許筠「除兼春秋有感」詩曰: “投閑方欲乞江湖, 金櫃紬書亦濫竽. 丘壑風流吾豈敢, 丹鉛讐勘歲將徂. 壯遊未許追司馬, 良史誰能繼董狐. 碧海烟波三萬頃, 釣竿何日拂珊瑚.” 허균의 「겸춘추관에 제수되자 느꺼움이 있어[除兼春秋有感]」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投閑方欲乞江湖 한가로움에 푹 빠지려 곧 강호에 구걸하려 했는데, 金匱紬書亦濫竽 금갑에 넣을 글 엮는 것으로 또 분수를 넘어서는 일이 되었네. 丘壑風流吾豈敢 산천의 풍류를 내가 어찌 바라겠나. 丹鉛讎勘歲將徂..
태평한 기운을 한시로 표현하는 방법 田園蕪沒幾時歸 전원이 거칠어졌으니, 어느 때에 돌아갈꼬? 頭白人間宦念微 머리 세니 인간세상 벼슬생각이 옅어지네. 寂寞上林春事盡 적막해라. 상림원에 봄 풍경 끝났지만, 更看疎雨濕薔薇 보슬비가 다시 장미를 적셨구나. 懕懕晝睡雨來初 나른한 낮잠은 비온 처음에 一枕薰風殿閣餘 배게엔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전각엔 여운이 있구나. 小吏莫催嘗午飯 아전들아 일찍이 점심 먹으라 재촉하지 말게, 夢中方食武昌魚 꿈속에서 곧 무창의 물고기를 먹으려던 참이니, 『소화시평』 권하 41번에 나오는 「초하성중작(初夏省中作)」이라는 시는 위의 시와 그닥 다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1~2구에선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인다는 것에 대해 풀어냈다. 그런데 3~4구에 오면 위의 시와 확연히 다..
주지번과 허균 『소화시평』 권하 41번에서는 중국 사신인 주지번이 말하는 허균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미 권상 35번 글을 통해 허균과 주지번이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 평가하는 걸 보니 단순히 친한 정도가 아니라, 어찌 보면 소울 메이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아예 허균을 매우 칭송하며 ‘중국에 있더라도 상위권에 랭킹될 정도의 실력파 문장가[雖在中朝, 亦居八九人中]’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를 다룬 ‘관포지교(管鮑之交)’나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담을 다룬 ‘지음(知音)’이나 이안눌과 권필의 우정담 등이 모두 그렇듯이 자기를 알아주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설 연휴에 모처럼 성남에 사는 친구와 만..
41. 주지번과 홍만종도 인정한 허균의 시작 재능 朱太史之藩, 嘗稱端甫雖在中朝, 亦居八九人中, 端甫, 許筠字也. 第以刑死, 文集不行, 人罕知之, 特揀數首. 其「有懷」詩, “倦鳥何時集, 孤雲且未還. 浮名生白髮, 歸計負靑山. 日月消穿榻, 乾坤入抱關. 新詩不縛律, 且以解愁顔.” 「初夏省中」詩曰: “田園蕪沒幾時歸, 頭白人間宦念微. 寂寞上林春事盡, 更看疏雨濕薔薇. 懕懕晝睡雨來初, 一枕薰風殿閣餘. 小吏莫催嘗午飯, 夢中方食武昌魚.” 評者謂: “東岳詩如幽燕少年, 已負沈鬱之氣; 石洲詩如洛神凌波, 微步轉眄, 流光吐氣; 許筠詩如波斯胡陳宝列肆, 下者乃木難火齊. 해석 朱太史之藩, 嘗稱端甫雖在中朝, 태사 주지번은 일찍이 ‘단보는 비록 중국에 있었더라도 亦居八九人中, 또한 8~9등엔 들어간다’고 칭찬했으니, 端甫, 許筠字也. 단보..
40. 허난설헌의 시 中國以我東爲偏邦, 諸子詩無一見選者. 近世薊門賈司馬ㆍ新都汪伯英, 選東方詩, 獨蘭雪軒詩最多. 如「湘絃謠」等作, 皆稱最工云. 其詞曰: ‘花泣露湘江曲, 九點秋煙天外綠. 水府凉波龍夜吟, 蠻娘輕戞玲瓏玉.’ ‘離鸞別鳳隔蒼梧, 雨氣侵江迷曉珠. 閑撥神絃石壁上, 花鬟月鬢啼江姝.’ ‘瑤空星漢高超忽, 羽盖金支五雲沒. 門外漁郞唱竹枝, 銀潭半掛相思月.’ 王同軌行甫所著『耳談』中, 亦載此詩. 其地河岳之靈, 偏發於陰於柔, 如其方偏, 故獨盛乎. 不知姬公ㆍ召公之遺音, 許氏得聞否云. 해석 中國以我東爲偏邦, 諸子詩無一見選者. 중국에선 우리나라를 구석탱이라 여기기에 여러 작가들의 시를 한 편이라도 뽑아 보는 이가 없었다. 近世薊門賈司馬ㆍ新都汪伯英, 選東方詩, 獨蘭雪軒詩最多. 근래에 계문(薊門)의 가사마(賈司馬)와 신도(新..
39. 허엽 가문의 시 許氏自麗朝埜堂以後, 文章益盛. 奉事澣生曄, 是爲草堂. 草堂生三子, 其二篈, 筠季, 女號蘭雪軒. 澣之從叔知中樞輯, 再從兄忠貞公琮, 文貞公琛, 皆以文章鳴. 或傳許氏祖山有玉柱長丈餘, 及筠椎碎之後, 文章遂絕云. 今摘各人一篇, 以見豹斑. 輯之「實性寺」詩曰: ‘梵宮金碧照山椒, 萬壑雲深一磬飄. 僧在竹房初入定, 佛燈明滅篆烟消.’ 琮之「夜坐卽事」詩曰: ‘滿庭花月寫窓紗, 花易隨風月易斜. 明月固應明夜又, 十分愁思屬殘花.’ 琛之「春寒次太虛韻」詩曰: ‘銅臺滴瀝佛燈殘, 萬壑松濤夜色寒. 喚起十年塵土夢, 擁爐新試小龍團.’ 澣之「村庄卽事」詩曰: ‘春霖初歇野鳩啼, 遠近平原草色齊. 步啓柴門閒一望, 落花無數漲南溪.’ 曄之「箕城戱題」詩曰: ‘許椽東來下界塵, 大平江上喚眞眞. 相將去作吹簫伴, 浮碧樓高月色新.’ 篈之「謫夷山..
38. 임전의 시 任處士錪, 號鳴皐, 工於詩, 而平生所讀李白ㆍ『唐音』而已. 嘗有作句, 雖好調響, 若不類唐, 則輒不示人. 其「江干詞」云: ‘三竿日出白烟消, 江北江南上晩潮, 隔浦坎坎齊打鼓, 郞船已近海門橋.’ 淡雅可詠. 해석 任處士錪, 號鳴皐, 工於詩, 而平生所讀李白ㆍ『唐音』而已. 처사 임전(任錪)의 호는 명고(鳴皐)로 시에 재주가 있었는데 평생 읽은 게 이백 시집과 『당음(唐音)』이었을 뿐이다. 嘗有作句, 雖好調響, 若不類唐, 則輒不示人. 일찍이 시구를 지은 것이 비록 격조와 음향이 좋더라도 당풍에 유사하지 않으면 별안간 남에게 보여주질 않았다. 其「江干詞」云: ‘三竿日出白烟消, 江北江南上晩潮, 隔浦坎坎齊打鼓, 郞船已近海門橋.’ 淡雅可詠. 「강간사(江干詞)」라는 시는 다음과 같으니 맑고 고와 읊을 만하다. ..
37. 구용의 시 具竹窓容, 嘗與石洲遊楮子島, 有詩一聯曰: ‘春陰一邊雨, 落照萬重山.’ 一時傳誦. 해석 具竹窓容, 嘗與石洲遊楮子島, 有詩一聯曰: ‘春陰一邊雨, 落照萬重山.’ 죽창(竹窓) 구용(具容)이 언젠가 석주와 서자도에서 놀다가 시 한 연구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春陰一邊雨 落照萬重山 한 구석에 비 내려 봄 그늘지고 만겹의 산에 낙조지네. 一時傳誦. 한 때에 전하며 외워질 정도였다. 인용 목차 / 작가 / 서설 한시사 / 한시미학
해직 당한 후 써나간 천연스러움이 가득한 권필의 시 『소화시평』 권하 36번에서는 홍만종이 생각하는 문학론을 볼 수 있고 권상 97번의 후기에서 당시(唐詩)와 강서시(江西詩)를 이야기하면서 다룬 창작관까지 볼 수 있다. 홍만종은 아주 파격적인 선포를 하면서 글을 열어젖히고 있다. ‘시는 하늘로부터 얻은 게 아니면 시라고 말할 수 없다[詩非天得, 不可謂之詩].’라는 서두가 그것인데, 너무도 확고하고 너무도 분명한 어조라 감히 다른 말을 섞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마저 감돈다. 이건 문학론으로 한정되어 말한 발언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흔히 사상 점검을 할 때 “‘김일성이 싫어요’, ‘북한은 인권 후진국’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말하지 못하면 ‘빨갱이’다.”라는 말과 매우 비슷한 구조를 ..
36. 선천적으로 시적 재능을 타고난 권필 詩非天得, 不可謂之詩. 無得於天者, 則雖劌目鉥心, 終身觚墨, 而所就不過咸通諸子之優孟爾. 譬如剪彩爲花, 非不燁然, 而不可與語生色也. 余觀石洲詩格, 和平淡雅, 意者其得於天者耶. 其「解職後」詩曰: “平生樗散鬂如絲, 薄宦悽凉未救飢. 爲問醉遭官長罵, 如何歸赴野人期. 催開臘瓮嘗新醞, 更向晴窓閱舊詩. 謝遣諸生深閉戶, 病中惟有睡相宜.” 辭意極其天然, 無讓正唐諸人. 해석 詩非天得, 不可謂之詩. 시는 하늘로부터 얻은 게 아니면 시라고 말할 수 없다. 無得於天者, 則雖劌目鉥心, 終身觚墨, 하늘로부터 얻은 게 없다면, 비록 치열하게 종신토록 창작【귀목술심(劌目鉥心): 맹교(孟郊)가 시를 지을 때 “눈동자를 파고 심장을 바늘로 찌르듯이 하며, 칼날로 얽힌 실을 푸는 것 같이 한다[劌目..
35. 불우한 권필 天使顧ㆍ崔之來, 權石洲韠, 以白衣從事被選. 宣廟命徵詩稿以入, 置之香案, 常諷誦之. 其「寒食」詩: ‘祭罷原頭日已斜, 紙錢飜處有啼鴉. 山谿寂寞人歸去, 雨打棠梨一樹花.’ 詞極雅絶, 且如‘人烟寒食後, 鳥語晩晴時.’ 其自然之妙, 何减於‘芙蓉露下落, 楊柳月中踈.’ 谿谷曰: “余見石洲, 凡形於口吻, 動於眉睫, 無非詩也.”云, 蓋石洲之於詩, 眞所謂天授者歟! 惜乎! 始以詩受知於宣廟, 終以詩得禍於光海, 士之遇時, 其幸不幸如此哉! ▲ 권필은 임금의 잘못을 꾸짖는 시 한 편으로 목숨과 바꿨다. -그림 이무성 작가 해석 天使顧ㆍ崔之來, 權石洲韠, 以白衣從事被選. 명나라 사신인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오니,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벼슬 없이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히게 됐다. 宣廟命徵詩稿以入, ..
34. 이춘영이 지은 영보정 시 李體素春英, 爲文章, 浩汗踔厲, 自成一家言. 嘗作「永保亭」詩四篇, 今錄其一曰: ‘雉堞縈紆水樹間, 金鰲頂上壓朱欄. 月從今夜十分滿, 湖納晩潮千頃寬. 渥氣全勝水氣冷, 角聲半雜江聲寒. 共君相對不須睡, 待到曉霧淸漫漫.’ 極其縱橫, 步驟挹翠. 해석 李體素春英, 爲文章, 浩汗踔厲, 自成一家言. 체소(體素) 이춘영(李春英)은 문장을 잘 지어 호탕하고 넉넉하며 뛰어나고 힘차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嘗作「永保亭」詩四篇, 今錄其一曰: ‘雉堞縈紆水樹間, 金鰲頂上壓朱欄. 月從今夜十分滿, 湖納晩潮千頃寬. 渥氣全勝水氣冷, 角聲半雜江聲寒. 共君相對不須睡, 待到曉霧淸漫漫.’ 일찍이 「영보정(永保亭)」 시 네 편을 지었지만 이제 한 편을 기록해두니 다음과 같다. 雉堞縈紆水樹間 성가퀴는 숲 사이를 휘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