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닫는 글. 2 중용을 석 달 만에 마치며 알게 된 것
이쯤에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무언가 끝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다. 최근에서 더 크게 느끼게 됐는데, 그건 단순히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정도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 후배 민희가 보내준 희망 한 아름이란 선물이다. 기존의 번역서가 있지만 좀 더 깔끔하게 다듬어져서 보기 편하다.
끝내보았을 때 알게 되는 두 가지
이걸 잘 몰랐을 때는 『논어』나 『맹자』를 어쨌든 다 해석하고 나면 할 게 없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만 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헐~
그건 어쨌든 한문공부를 일정수준까지는 공부했다는 말이고, 그럼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건 내가 자질이 없거나 임용은 글러 먹었거나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급기야 ‘그러니 사서(四書)를 이렇게 빨리 끝냈으면 안 됐는데’하는 생각에 이르며 공부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신념의 끝판왕 격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명확히 알게 됐다. 무얼 끝냈다는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음미하게 됐기 때문이다.
첫째, 끝냈다고 하더라도 끝낸 건 아니다. 그건 기반을 만든 정도에 불과할 뿐, 내가 완벽하게 알게 됐다는 걸 의미하지 않으니 말이다. 더욱이 한 번 했다는 자기 위안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안 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럴 땐 차라리 “한 번 보긴 했는데, 여전히 몰라”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봤지만 모른다’, 그러니 다시 보고 다시 파고들려는 우직함과 멍청함이 필요하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을 주는 글들엔 김득신의 「독수기(讀數記)」와 정약용과 황상의 대화인 「임술기(壬戌記)」, 그리고 『중용』 20장의 ‘남은 한 번에 잘하더라도 나는 백 번이라도 해보며 남은 열 번에 잘하더라도 나는 천 번이라도 해보련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글, 공자의 증자에 대한 평가들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안다 모른다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멍청스럽게 알려고 노력했고, 얼마나 모르는 듯 배우려 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횟수를 내가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그 순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 마치는 순간 끝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길이 생기고 다른 방법이 강구되며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 열린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끝내면서 어느 부분이든 생각이 바뀐 곳이 있으니, 그건 다른 방향의 변화를 유도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중용』을 블로그에 업로드하겠다고 맘을 먹고 나선 책으로 있는 파일, 예를 들면 『시네필 다이어리』, 『비슷한 것은 가짜다』, 『한시미학산책』과 같은 책들도 올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아예 카테고리도 만들게 됐다.
그러니 끝남의 의미를 이쯤에서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겠다. ‘무턱대고 큰 꿈을 꾸기보다 하나하나 있는 것들을 끝내가기 위해 목표치를 최저로 잡고 해나가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또는 끝냄이란 결과를 통해 예전엔 전혀 생각도 못해본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실행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끝남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물은 건너봐야만 알고, 하고 싶은 건 생각만 하지 말고 해봐야만 그 의미를 알며, 한계치를 정하기보다 맘껏 부딪혀 봐야만 무언가가 열린다.
▲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이야말로 외투를 벗으려 할 때 상처받지 않도록 도와주는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황상: “저, 저…저 같은 아이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정약용: “너 같은 아이가 누구냐?”
황상: “첫째는 머리가 둔한 것이고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미련한 것입니다.”
정약용: “공부는 너 같은 아이라야 할 수 있다. 너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너라야 할 수 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은 자신의 머리만 믿고 소홀하게 공부한다. 막힘없이 글 잘 쓰는 이는 자신의 재주에 마음이 들뜨기 쉽다. 배우고 바로 깨닫는 사람은 공부를 대충 하니, 그 깨달음이 오래가지 못한다.”
두 번의 멈칫했던 순간들과 변(辯)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정리되며 6월 5일부터 내가 썼던 서문부터 시작하여 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어제부로 끝난 것이니, 석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면 된다. 체감 상으론 한 달 정도가 걸린 거라 느껴졌는데 무려 석 달이란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도 올린 시기들을 보다보니 뜸해진 순간들이 보인다. 10장을 끝낸 날이 6월 26일인데, 11장은 7월 17일에나 시작하고 있고, 18장을 7월 31일에 끝냈는데, 19장을 8월 23일에나 시작하고 있다.
일시 | 정리 내용 | 내용 |
6.5 ~ 6.26 | 서문 ~ 중용10장 | 21일 동안 꾸준히 올림. |
7.17 ~ 7.31 | 중용11장 ~ 중용18장 | 초반의 열정이 사라지며 21일 동안 올리지 못함. 14일간 꾸준히 올림. |
8.23 ~ 9.10 | 중용19장 ~ 마무리 | 20장이 양이 많기에 부담이 되어 20일 동안 올리지 못함. |
처음 멈칫했던 순간에도 무언가를 계속했으니 어떤 이유인지 지금에 와서 농땡이를 피웠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생각으론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6월 5일의 각오가 한 풀 꺾이기에 최적화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초반엔 확실히 흥미롭기 때문에 막 달려들어 하게 되고, 그게 어느 일정 수준까지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곧 시들시들해져 버린다(바로 이 마음은 딴 것보다 『카자흐스탄 여행기』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 여행기는 지금 와서 다시 올리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데도 처음엔 ‘하루에 하나씩 올리자’라고 생각하며 달려들었지만 곧 생각이 흐려져 지금은 올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하는 상황이 됐다). 거기다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늘어나면 더욱 정신을 못 차리고 올리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초반에 무려 21일이나 버텼다는 건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는 건 무얼 하나 꾸준히 한다는 게 결코 쉽지 만은 않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서 14일 간 또 일정을 진행하다가 18장까지 하고 멈칫했다. 그러고 또 20일 정도의 간격이 있는 것이다. 이때는 그래도 최근의 일이라 왜 그랬는지 명확히 기억난다. 『중용』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장은 바로 20장이다. 많은 정도가 약간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다. 그건 마치 자전거를 이제 처음 배운 사람에게 서울까지 라이딩을 가자고 하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 이유들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무작정 시간이 흐른 것이고, ‘헉 하는 심정’을 넘어 ‘레알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다 「양혜왕」상7을 했을 때처럼 나누어서 부담을 최소화하고 해보자고 방법을 바꿨다. 해야 할 게 많을수록 잘게 나누어 충분히 할 수 있는 정도로 분량을 줄이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안도감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성취해가니 말이다. 그래서 내용에 따라 나눠보니 크게 5개 정도는 나눠질 것 같았다.
두 번의 멈칫으로 알게 된 것
그렇게 한 고비를 넘고 나니 완전히 수월해졌다. 아래의 표는 두 번의 멈칫이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표다.
장수 | 기간 | 성백효 번역본 페이지 | 소요시간 |
1장~18장 | 6월 5일~7월 31일 | 82쪽 ~ 141쪽 | 한 달 26일 |
19장~33장 | 8월 23일~9월 9일 | 142쪽 ~ 196쪽 | 17일 |
위의 표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지만 난관에 부딪치면 한없이 늘어지지만 한 번 돌파구를 마련하면 진도는 쭉쭉 빠지게 된다. 특히 심적으로 ‘저것은 벽’이라고 느낀 거라면 더욱 그렇다는 점이다. 넘기 전까진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 철옹성처럼 느껴지지만 넘고 나면 순식간에 그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그러니 위기는 곧 기회라고, 넘어진 그 상황이 곧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한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사고전서]와 [한어대사전] 등 공부를 위한 도구들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다. 거기에 한국고전번역원의 글들까지. 참 좋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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