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33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33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22. 08:54
728x90
반응형

331. 비단옷에 갈포옷을 덧입는 이유

 

 

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시경(詩經)에 이르길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담()하지만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지만 문채가 나고, 따사롭지만 조리가 명료하다.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前章言聖人之德, 極其盛矣. 此復自下學立心之始言之, 而下文又推之以至其極也. , 國風[衛碩人鄭之丰, 皆作衣錦褧矣.” , 絅同, 禪衣也. , 加也. 古之學者爲己, 故其立心如此. 尙絅, 故闇然; 衣錦, 故有日章之實. ,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
3132에서 성인의 덕을 말해 성대함을 극에 달하도록 했다. 여기서는 다시 하학(下學)의 공부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임을 말하였으니 아랫 문장은 또한 그것을 미루어 그 극치에 이르게 한 것이다. 시는 국풍의 위풍(衛風) 석인과 정풍(鄭風)의 편이니, 모두 의금경의(衣錦褧矣)’으로 쓰여 있다. ()은 경()과 같으니, 얇게 걸치는 옷이다. ()은 덧입는다는 것이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다.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운 듯하지만 비단옷을 안에 담았으니 날로 드러나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담박, 간결, 온화함은 홑옷을 겉에 껴입는다는 것이다. 싫어하지 않음, 문리가 갖춰짐, 이성의 예리함은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시왈 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시경(詩經)의 글은 위풍(國風) 위석인(衛碩人)」【늘씬한 여인이여 훤칠도 해라. 무늬 있는 비단 옷에 홑옷을 걸쳤네. 제후의 딸이요. 위후의 아내요. 동궁의 여동생이요. 형후의 처제요. 담공의 매부로다. 손은 부드러운 띠풀 같고, 살결은 희고 윤기가 나며, 목은 굼벵이처럼 기다랗고, 이는 박씨처럼 가지런히 빛난다. 매미 같은 이마에 부나비의 촉수같은 눈썹. 어여쁜 웃음 보조개 짓고, 아름다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토다[碩人其頎, 衣錦褧衣. 齊侯之子, 衛侯之妻, 東宮之妹, 邢侯之姨, 譚公維私. 手如柔荑. 膚如凝脂. 領如蝤蠐. 齒如瓠犀. 螓首蛾眉. 巧笑倩兮. 美目盼兮]. 國風 衛碩人에도 나오고, 정풍(鄭風) ()에도 나오는데, 원래 시경(詩經)에는 의금경의(衣錦褧衣)’로 되어있지만, 여기에서는 의금상경(衣錦尙絅)’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과 경()은 같은 것으로 선의(禪衣)이다라고 주자가 설명하고 있지요? ()은 좌선한다는 뜻으로 쓰인 게 아니고 홑옷이라는 뜻입니다. 얇고 가벼운 옷을 말해요. 요즘에 여성들이 검은색 옷을 아래위로 입고 겉에다가 속이 비치는 흰 옷을 입던데 그 모습이 유사한 것 같아요. 노자에도 이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오는데, “성인은 반드시 갈포를 입고 속에다 옥()을 품는다[聖人被褐懷玉]”는 거예요. 이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흔히 옷의 출발이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극지방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있긴 해도, 사실 인류의 발생자체가 아프리카 등지의 더운 지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옷의 역사를 추위와 연관시켜서 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옷이 생기기 전에는 문신(tattoo)같은 게 나타납니다. 인간이나 옷에 대한 열망을 갖는 이유가 단순히 기후에 대해서 자기 몸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앞선다는 설이 카알라일(Carlyle)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게 맞는 말 같아요. 물론 인류에게 옷이 생기면서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지만, 사실 인간의 몸은 옷을 입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체온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 자체가 퇴화된 셈이죠. 지금도 목욕탕에 가서 보면 털이 많이 난 사람들이 있잖아요. 인간도 과거에는 털이 많아서 빨가벗고 살아도 견딜 만한 조건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구요. 그런데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털이 퇴화된 것입니다.

 

인간의 의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신분의 문제입니다. 옷으로써 인간의 신분을 나타낸다는 말인데, 지금도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위치라든가 분위기를 파악해 낼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왕이나 임금의 옷은 대단하게 만들었어요. 곤룡포를 보면 자수가 굉장하지요?

 

그런데 성인들은 비단옷을 입더라도 그 위에 허름한 갈포를 걸쳐서 그 비단옷을 가렸습니다. 왜 그랬느냐? “오기문지저야(惡其文之著也)” 사실 나도 한복을 입으면(지금 입고 있는 이 한복은 순수직 무명으로 만든 것인데 아주 느낌이 좋아요), 한복을 입은 사람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도 원불교 교무님들이 앉아 계신데, 정녀분들이 한복으로 까맣게 정장을 하고 사시는 그게 보통 노력이 아닙니다. 24시간을 저런 옷 속에서 산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문채가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런 옷을 입을 때는 거기에 합당하게 나 자신이 행동하게 되는데, 그게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나는 것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게 한복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례적인 의미가 있어서 강단에 설 때는 꼭 입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꼭 입는 것은 아니예요. 내가 이리에서는 잠바를 입고 다니는 게 편하죠. 전혀 표시가 안 나고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고군자지도 암연이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9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암연(闇然)’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둡다는 게 아니라 딴 것과 구별이 안 된다는 뜻이죠. 속에는 거지같은 갈포를 입고 있으면서 겉에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다니는 자들이 소인들이란 말입니다. ‘적연(的然)’은 확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일망(日亡)’ 내면은 썩어 들어가는 것이죠.

 

난 말이죠, 사실 의식적인 행동인데, 사람을 만나러 갈 적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한복을 입고 나갑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 허름하고 어설프게 입고 나오면 대하는 태도가 어설퍼집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종종 나의 외관인 옷에 대한 반응만으로 알아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정확한 판단일 때가 많아요. 하여튼 옛날 사람들의 군자지도를 묘사한 33의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군자의 는 담박하여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문채가 나고, 온화하지만 조리가 분명하다[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우리가 칠할 때 보면 광택칠과 무광택칠이 있잖아요? 그런데 옛날 우리의 공예품이나 옷을 보면 번뜩이는 걸 아주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복 비단도 번뜩이는 스타일이 아니고 광택이 싹 죽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의 한복은 한복의 제 맛을 잃어 버렸어요. 예전에는 원색을 안 썼거든요. 과거의 염색을 보면 색이 아주 담박합니다. ()은 아주 소략하고 거칠고 간략한 것이고, ()은 문채가 나다, 광채가 나다의 뜻입니다. ()은 온화롭고 따사롭다는 말인데, 그러면서도 리()하다는 것은 명석하다, 조리가 명료하다는 것이죠. ‘담이불염 온이리(淡而不厭 溫而理)’는 것이 바로 유교문명의 심미적 감각이예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의 옷이라든가 용품들을 보면 우리와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상당히 비유교적이예요. 화려하고, 뻘겋고, 원색을 과감하게 쓰기 때문에 대단히 칼라풀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담간(淡簡)하다든가 담박(淡泊)하다는 면에서는 아주 극한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담박한 맛은 끝내주는데 그것이 너무 인위적이에요. 갈포처럼 소박한 맛이 있어야지, 인위적이어서는 안 되죠.

 

 

지원지근 지풍지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원지근(遠之近)’이라는 것을 보면, 앞의 25에 나왔던 시종(始終)’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죠? ‘원근(遠近)’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일 뿐이니, ‘은 곧 가까움이죠. 군자의 덕은 역시 이런 관계의 망에 대한 통합적 통찰을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25장에서도 성자 물지종시 불성무물 시고군자 성지위귀(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 誠之爲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것은 부터라는 뜻으로서, ‘풍지자(風之自)’이라는 것은 바람이 시작되는 근원를 말하는 겁니다.

 

또한, ‘미지현(微之顯)’이라는 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1에서 군자의 신독(愼獨)을 말할 때, “막현호미(莫顯乎微)”에서 나온 거죠? 이렇게 제일 마지막장과 1장의 맥락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자 주에도 먼 것이 가까운 데에서 시작하고 바람이 이는 것이 그 근원이 있으며, 은미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드러남을 알면, 즉 이 삼자를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갈 수 있다[遠之近 風之自 微之顯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앞에서 세 개의 세트로 연결된 ((()과 불염(不厭(()’라는 것은 뭐가 되겠습니까. 주자 주대로 말하면, “()ㆍ간()ㆍ온()은 갈포<덧옷:>를 밖에 껴입는 것이요, 불염(不厭)ㆍ문()ㆍ리()는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는 것이다[淡簡溫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주자의 주를 읽겠습니다.

 

小人反是, 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 是以的然而日亡也. 遠之近, 見於彼者由於此也, 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 微之顯, 有諸內者形諸外也. 有爲己之心,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 故下文引詩言謹獨之事.
소인은 이와 반대이니, 밖으로 확 드러나지만 실제로써는 계속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원지근(遠之近)’은 멀리에 나타남이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요, ‘풍지자(風之自)’는 밖에 드러남이 안에 근본하는 것이요, ‘미지현(微之顯)’은 안에 간직한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닦으려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덕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랫글에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근독(謹獨, 愼獨)의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풍지자 저호외자본호내야(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라고 했는데, 이 바람()이라는 것이 해석이 어렵습니다. 여기 바람은 덕성이 백성(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같은 그런 개념으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맹자(孟子)만장(萬章)에 나오는 백이지풍(伯夷之風)’()’개념으로 봐야 옳다는 주석들도 있습니다.

 

 

 

 

 

 

 

332. 거대한 화면에 조그만 갈매기

 

 

詩云: “潛雖伏矣, 亦孔之昭!” 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보아 하자가 없어서 마음에 미움이 없는 것이니, 군자의 미칠 수 없는 점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바에 있는 것이다.
 
, 小雅正月之篇. 承上文言莫見乎隱莫顯乎微. , 病也. 無惡於志, 猶言無愧於心, 此君子謹獨之事也.
시는 소아 정월의 편이다. 윗 장을 이어 막현호은(莫見乎隱)ㆍ막현호미(莫顯乎微)를 말했다. ()는 병폐라는 것이다. 뜻에 미워함이 없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것은 군자의 신독(愼獨)’의 일이다.

 

 

시운 잠수복의 역공지소(詩云 潛雖伏矣 亦孔之昭)’

()’이란 것은 숨어있다란 뜻이고, ‘()’이라는 것은 아주 심하게란 뜻으로서 부사적으로 쓰인 것이며, ‘()’라는 것은 밝다란 얘기죠. 이것은 원래 시경(詩經) 소아 정월(小雅 正月)()에 나온 것인데, 원래 아주 맑은 연못에 물고기가 저 바닥에 쫙 하니 잠복해 있는(숨어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숨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에서 볼 적에는 그 바닥까지 명료하게 보이는 그런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숨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처럼 드러나는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은폐된 잘못이 드러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 중용(中庸) 1의 의미(莫顯乎微)시경(詩經)과 연결해서 더욱 풍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군자내성불구 무오어지(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여기서 지()라는 것은 마음이죠.

 

 

군자지소불가급자 기유인지소불견호(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여기서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바[君子之所不可及者]’라는 것은 우리가 군자에게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는 그런 의미가 되겠죠. 쉽게 말해서, 그것은 유인지소불견호(唯人之所不見乎)’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 1장의 신독(愼獨)을 말한 것으로 유교적 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 중용(中庸)이라는 장대한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조금 드라마틱하게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로 시작해서 군자 계신호기소불도 공구호기소불문(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이라고 했습니다. , 중용(中庸) 전체의 구성은 천명(天命)’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작예악(作禮樂)’, ‘구경(九經)’, ‘왕천하(王天下)’ 등 세상만사를 얘기하다가, 제일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다시 인간의 가장 심오한 내면의 세계(愼獨)’로 돌아가는 겁니다.

 

중용(中庸)이라는 이 거대한 파노라마가 33장에서 시경(詩經)의 싯구들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로지 시경(詩經)의 언어들만 나열되고 있지, 딴 말은 안 하고 있죠? 이 전체의 흐름을 꿰뚫은 사람이라면 이 의미를 알 수가 있어요. 천명(天命)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중용(中庸)의 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라는 하나의 예술적 세계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 예술이라는 게 뭐예요? 바로 인간의 미세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내가 전번에 동아일보에서 어느 중국 작가의 그림을 봤는데, 아주 거대한 화면에 아주 조그만 갈매기 하나가 날아가는 걸 그려놨더군요. 상당히 인상적(impressive)이었어요. 중용(中庸) 33장이 딱 그런 겁니다. 점점 이렇게 갈매기가 날아가다가 사악 사라져갑니다. 이 시()라는 것이 이런 거 아닙니까? 참 멋있어요! 여러분들 이 이미지를 한 번 그려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가는 거예요.

 

 

 

 

333. 홀로 있을 때도 부끄럽지 않은 이

 

 

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는 것을 보니, 그 어두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
 
, 大雅之篇. , 視也. 屋漏, 室西北隅也. 承上文又言君子之戒謹恐懼, 無時不然. 不待言動而後敬信, 則其爲己之功益加密矣. 故下文引詩幷言其效.
시는 대아 의 편이다. ()은 본다는 뜻이다. 옥루(屋漏)는 방의 서북 모퉁이다. 윗 문장을 이어 또한 군자의 계근공구(戒謹恐懼)와 무시불연(無時不然)을 말했다. 말하고 행동함을 기다리지 않고 공경하고 믿게 하려면 위기(爲己)의 공이 더욱 더 치밀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은 시를 인용하여 아울러 공효를 말했다.

 

 

시운 상재이실(詩云 相在爾室)’

이 구절은 시경(詩經) 대아 억(大雅 抑)()에서 따온 겁니다. ‘()’를 말하므로, ‘이재실(爾在室)’네가 실()에 있다라는 말이죠? 지금의 문법으로 보면, ()와 재()가 서로 바뀌어야 하지만, 시경(詩經)의 언어들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법과는 좀 다릅니다. ‘()’본다니까, 구절 전체를 해석하면,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네가 홀로 방에 있음을 본다란 얘깁니다.

 

 

상불괴우옥루(尙不愧于屋漏)’

여기 ()’이라는 걸 일본 사람들은 오네가와쿠바(ねがわくば), 원컨대라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주자 주를 보면, ‘옥루(屋漏)는 실()의 서북우(西北隅)’라고 했죠? 이것은 보통 방안에서 서북향이 어두운데, 그 중에서도 귀퉁이니까 제일 어두운 데를 말하는 겁니다. ‘불괴(不愧)’는 부끄러움이 없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 중용(中庸)의 저자는 1계신호기소불도(戒愼乎其所不睹)’라는 이미지를 이 시에서 끌어왔습니다.

 

 

고군자 부동이경 불언이신(故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는 주체는 군자인데, 여기서 부동이경(不動而敬)’이라 할 때, ()의 주체는 백성으로 바뀌겠죠. ‘군자가 동()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를 공경하며 그가 말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屋漏      
         
西    
         
       

 

 

 

 

 

334. 절로 권면되고 경외하는 경우

 

 

詩曰: “奏假無言, 時靡有爭.” 是故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신명의 앞에 나아가 아뢸 때 귀신이 감응하여 오는 지극한 경의 순간에는 말이 없어지고, 다투는 이가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굳이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하며, 노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두와 도끼보다도 군자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 商頌烈祖之篇. , 進也. 承上文而遂及其效, 言進而感格於神明之際, 極其誠敬, 無有言說而人自化之也. , 畏也. , 莝斫刀也. , 斧也.
시는 상송 열조의 편이다. ()은 제사에 나간다는 것이다. 윗장을 이어 마침내 공효가 미쳤다는 것이다. 제사에 나가 신명을 감격시킬 즈음에 성()과 경()을 다하니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교화된다는 말이다. ()는 두려움이다. ()는 여물을 베는 칼이다. ()은 도끼다.

 

 

시왈 주가무언 시미유쟁(詩曰 奏假無言 時靡有爭)’

시경(詩經) 상송 열조(商頌 烈祖)()에 나온 시()입니다. 계속해서 시경(詩經)의 시들을 인용하기 때문에, 그 해석이 여러분들에게 조금 생소할 수 있는데, 잘 음미를 해보세요. ‘()’라는 것은 나아간다, 즉 나아가서 우리가 아뢴다는 뜻입니다. ‘()’라는 것은 격(), 즉 감격한다는 말로 내가 가서 아뢰는데 귀신이 감응하여 오는 겁니다. 이렇게 할 적에, 아까 말했듯이 아주 정성[]을 다하는데, 그 극치에 가면 무언(無言)! 말이 없어져요.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든, 뭐를 하든지 간에 아주 정성을 다해 극에 가면 말을 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미유쟁(時靡有爭)’ 어떤 귀신이 감격해서 오는 그런 지극한 경()의 순간에는 말이 없어지고 모든 다툼이 사라져 버려! 누가 먼저 귀신을 봤느냐 아니냐, 어느 귀신에게 제사를 더 잘 지냈느냐 아니냐하는 그런 모든 말이 없어지고 인간의 다툼이 없어져 버려요.

 

 

민위어부월(民威於釜鉞)’

()라는 것은 작두이고, ()은 도끼입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제후는 천자로부터 부월(釜鉞)을 받아서 사형을 집행한다고 했는데, 이 부월은 사람 모가지를 자르는 사형 집행 형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던 형구보다도 더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군자라는 것은 통치자를 말하는 겁니다.

 

 

 

 

 

 

 

335. 공손함이 천하를 평정한다

 

 

詩曰: “不顯惟德! 百辟其刑之.” 是故君子篤恭而天下平.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않는 덕을 여러 제후들이 본받는다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해지는 것이다.
 
, 周頌烈文之篇. 不顯, 說見二十六章, 此借引以爲幽深玄遠之意. 承上文言天子有不顯之德, 而諸侯法之, 則其德愈深而效愈遠矣. , 厚也. 篤恭, 言不顯其敬也. 篤恭而天下平, 乃聖人至德淵微, 自然之應, 中庸之極功也.
시는 주송 열문편이다. 불현(不顯)은 설명이 26장에 보인다. 여기선 이 시를 인용하여 그윽하게 깊고, 현묘하게 원대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윗 문장을 이어 천지에 드러나지 않는 덕이 있어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으면 덕은 더욱 깊어지고 공효는 더 심원해진다를 말하였다. ()는 두터움이다. 독공(篤恭) 공경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독공이천하평(篤恭而天下平)은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도 은미하여 자연히 응한다는 것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효다.

 

 

시왈 불현유덕 백벽이형지(詩曰 不顯惟德 百辟其刑之)’

시경(詩經)의 구절은 조송 열문(周頌 烈文)()에 있는 것입니다. ‘불현유덕(不顯惟德)’드러나지 않는 덕이란 말이고, ()자는 별 의미가 없는 어조사예요.

 

 

백벽기형지(百辟其刑之)’

여기서 백벽(百辟)’여러 제후들이란 뜻으로, ()임금 벽자로 제후를 말합니다. ()은 본받는다는 뜻이죠.

 

불현(不顯)’에 대한 해석은 덕기불현9德豈不顯)’이라고 해서, ‘그 덕이 어찌 드러나지 아니하리요라는 식으로 보는 설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 문장을 여러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으니 그 덕이 어찌 드러나지 아니하리요라고 풀이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 방법입니다. 하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 없이, ‘불현덕(不顯德)’드러나지 않는 덕그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주자 주에도, ‘천자의 드러나지 않는 덕을 여러 제후들이 본받는다[天子有不顯之德 而諸侯法之].’라고 했거든요. 저는 주자의 ()를 따르겠습니다.

 

 

시고 군자 독공이천하평(是故, 君子, 篤恭而天下平).’

 

 

 

 

336.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으로

 

 

詩云: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 “聲色之於以化民, 末也.” 詩云: “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는 밝은 덕을 품었으니 음성과 얼굴빛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음성과 얼굴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있어서는 말엽적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시경(詩經)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 터럭도 비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데 이르러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시운 여회명덕 부대성이색(詩云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이것은 시경(詩經) 대아 황의(大雅 皇矣)()에서 나온 것으로 상제(上帝)가 문왕에게 고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는 상제를 말하니까, ‘여회명덕(予懷明德)’은 상제 자신이 나는 명덕(明德)을 가슴에 품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죠. ‘부대성이색(不大聲以色)’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부대(不大)’대단치 않게 생각한다란 얘기고, ‘성이색(聲以色)’음성과 얼굴빛입니다. 이 성색(聲色)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덕()이 아닌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해요. “나는 밝은 덕을 가슴에 품었으니 음성(音聲)과 안색(顔色)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주자 주를 보면, “()과 색()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는 말을 인용하여, 윗문장에서 말한 이른바 불현지덕(不顯之德)’이라는 것의 의미를 명백히 한 것이다[引之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 正其不大聲與色也].”라고 했습니다.

 

자왈 성색지어화민 말야(子曰 聲色之於化民 末也)’라고 했습니다.

 

 

시운 덕유여모 모유유륜(詩云 德輶如毛 毛猶有倫)’

그러니까, 중용(中庸)()의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시경(詩經)』 「증민(烝民)을 인용했는데, 그 다음에 모유유륜(毛猶有倫)’라고 했습니다. 터럭[]이라는 건 아직도 ()’, 그 비교될 짝이 있단 말입니다. 비교될 동아리가 있다는 거예요. 터럭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까 내가 그림을 가지고 얘기했듯이, 하늘의 광대함을 표현하려고 화가가 거대한 화면에 조그만 갈매기 하나가 날아가는 것을 그려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덕이라는 것도 그 광대한 덕성의 세계에서는 이 조그만 갈매기와 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터럭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비교할 만한 건덕지가 있어요.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말은 시경(詩經)대아 문왕(大雅 文王)()에서 나온 것으로서, ‘상천지재는 무성무취라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지극하다 할 것이다!’ ! 이렇게 시경(詩經)의 구절로서 중용(中庸)이 끝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비록 중용(中庸)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수많은 프로세스를 거쳤지만, 결국 마지막에 결론은 뭘로 귀결되고 있습니까? 바로 신독(愼獨)이예요,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가라!” 이 홀로 있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경()의 세계요, ‘주일무적(主一無適)’하는 세계를 애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달하고자 궁극적인 것은 뭡니까? 그 어떤 터럭과도 비교될 수가 없는 최후의 무성무취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아주 인비저블(Invisible, 눈에 보이지 않는)한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까지 가야만 중용(中庸)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 조그만 갈매기가 날아가다가 이것마저 사라져 버리고 마는 바로 그런 데서 중용(中庸)은 이루어지는 거예요.

 

 

 

, 大雅皇矣之篇. 引之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 正以其不大聲與色也. 又引孔子之言, 以爲聲色乃化民之末務. 今但言不大之而已, 則猶有聲色者存,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 不若烝民之詩所言德輶如毛, 則庶乎可以形容矣. 而又自以爲謂之毛, 則猶有可比者, 是亦未盡其妙. 不若文王之詩所言上天之載, 無聲無臭,” 然後乃爲不顯之至耳. 蓋聲臭有氣無形, 在物最爲微妙, 而猶曰無之, 故惟此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 非此德之外, 又別有是三等, 然後爲至也.
시는 대아, 황의편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윗글의 이른바 불현지덕이라는 게 바로 음성과 얼굴빛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임을 밝혔으며, 또다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음성과 얼굴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에 있어 지엽적인 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대단찮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니, 그렇다면 이것은 오히려 음성과 얼굴빛이 남아 있는 것이어서 불현(不顯)의 묘()함을 형용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는 증민(烝民)’ ()에서 말한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한 것만 못하니, ‘덕유여모(德輶如毛)’라고 하면 거의 덕을 형용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비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이 또한 그 오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문왕(文王)’ ()에서 말한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이렇게 표현한 뒤에야 불현의 덕을 지극히 형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만 있고 형체가 없어,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인데도 오히려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소리와 냄새로도 불현(不顯), 독공(篤恭)의 묘함을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 덕 이외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급이 있은 뒤에야 지극함이 된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다.

 

내가 중용(中庸)을 가장 정열적으로(passionately) 석한 데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주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中庸)은 할 수 없다고 그랬어요(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9) 그러니까 중용(中庸)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드러나지 아니하는 지극한 세계란 말입니다.

 

 

개성취 유기무형 재물 최위미묘 이유왈무지(蓋聲臭, 有氣無形, 在物, 最爲微妙, 而猶曰無之).”

성취(聲臭)조차도 성취(聲臭)라 얘기하지 않고, 그 자체가 유기무형(有氣無形)하여 재물(在物)에 미묘(微妙)하다해서 성취의 미묘함을 강조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무성무취(無聲無臭)’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 유차가이형용불현독공지묘 비차덕지외 우별유시삼등연후위지야(故 惟此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 非此德之外 又別有是三等然後爲至也)”

여기서 삼등(三等)’이라는 것은, ‘성색(聲色(무성무취(無聲無臭)’3단계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3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지극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중용(中庸)의 거대한 파노라마는 제일 마지막에서 인간이 홀로 삼가하는 내면의 성찰(신독愼獨)’이 거의 완벽하게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은 노자가 말하는 현묘(玄妙)함도 아니요, 불교의 허무공멸(虛無空寂)한 세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도덕적 덕성이 다이내믹 이퀼리브리엄(Dynamic Equilibrium, 역동적 평형),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 과정에시중(時中), 완전히 자유자재로 형체가 없이 움직이는 그러한 미묘한 덕성의 세계(無聲無臭의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중용(中庸)은 다시 내면으로 수렴하는 것으로써, 33개의 장,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33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보겠습니다:

 

 

右第三十三章. 子思引前章極至之言, 反求其本,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推而言之.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 又贊其妙, 至於無聲無臭而後已焉,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 其反復丁寧示人之意, 至深切矣, 學者其可不盡心乎!
이 글은 제33장이다. 자사께서 앞 장의 극치를 다한 말씀에 근거하여 그 근본을 돌이켜 찾고, 다시, 배우는 사람이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고 홀로 삼가는 일로부터 미루어 말씀하셨는데,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해지는 성대함에 이르고, 또 그 오묘함을 찬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셨으니, 이는 이 한 편의 요점을 들어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반복하여 공손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니, 배우는 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제삼십삼장 자사인전장극치지언 반구기본 부자하학위기근독지사 추이언지(右第三十三章 子思因前章極致之言 反求其本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 推以言之)”

여기서 위기근독지사(爲己謹獨之事)’, 다시 말하면, ‘위기(爲己)’라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자왈 고지학자 위기 금지학자 위인(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는 두 개념은 유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현재 교육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은 위인지학(爲人之學)’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중용(中庸)에서 왕천하(王天下)하고 운명을 경영하는 자로서의 작()할 수 있는 군자지상(君子之像)’을 그려왔지만, 그 결론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회적 규범을 다스리는 것, 작예악(作禮樂)하고 왕천하(王天下)하는 그런 도문학(道問學)’의 세계에 대해서, 위기(爲己)’는 그 인간됨의 내면적 덕성의 문제인 존덕성(尊德性)’의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聖人之道
Grand Scale
至大無外
Minute Scale
至小無間
至德 至道
尊德性 道問學
致廣大 盡精微
極高明 道中庸
溫故 知新
敦厚 崇禮
인간의 내면적 주관세계 인간의 외면적 객관세계
실천이성의 세계 순수이성의 세계
涵養 進學
用敬 致知
存心
道體之大 道體之小
修德 凝道
인격의 길 학문의 길

 

 

21
핵심
내용
천도
(天道)
22 24 26     30 31 32 33
전편
요약
인도
(人道)
23 25 27 28 29      

 

 

 

 

 

 

 

337. 제왕지덕을 지닌 그대여 성실하라

 

 

성실하게 살라

 

사실 지금까지 중용(中庸)은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사회철학을 말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분명히 내가 강의에서 여러 가지 사회철학적인 측면을 지적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가서는 위기(爲己)를 말합니다. 그런데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게 아니라는 이런 중용(中庸)의 결론은 현대사상이 유교를 비판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근대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규범과 인간의 어떤 내면적인 덕성을 분리해야 된다고 보는 거죠.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런 마키아벨리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근세적 작위(作爲)개념으로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작위(作爲)’를 해석해 들어갔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용(中庸)의 결론은 사회적 규범과 내면적 덕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아무리 유명인이 됐고 아무리 훌륭한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보이지 않는 서북방의 깜깜한 구석에 앉아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된다[尙不愧于屋漏]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무성무취(無聲無臭)한 자기 내면적 세계에서까지 부끄러움이 없는 완벽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중용(中庸)은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이예요. 근세사상은 이러한 중용(中庸)의 내면주의, 덕성주의를 폄하했으나, 우리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은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신독愼獨)가 중용(中庸)적으로 작동되어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 유교에는 굉장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사실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뭘 말해주고 있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왕천하(王天下)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문명 속에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결국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실 나도 외롭고 여러분도 외로 와요. 이 문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 캄캄한 방(무성무취한 세계)에서 홀로 있을 때 외로움에 당면합니다. 그러한 고독 속에서도 인간은 지성(至誠), 즉 지극히 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주 쉼이 없이 노력하는 이 천지의 운행과 같이 지성(至誠)하다! 그러면 이 지성(至誠)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해요.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시시한 것 같지만, 결국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성실하게 사는 겁니다. 중용(中庸)은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명제로 1장이 출발했습니다. 신독(愼獨)! 모든 것이 나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중용(中庸)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시작하여 도()와 교()에까지 이 문제를 연결시키고, 문명과 자연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이상론을 펼쳐갔지만, 결국 인간은 성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여기 재미난 질문이 하나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성인(聖人)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통치자들이잖아요? 그러면 이 중용(中庸)도 통치자를 위한 철학이 아닙니까? 그런데, 쉽게 얘기해서, 과연 중용(中庸)은 김영삼을 위한 철학이냐? 이 말이예요. 중용(中庸)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성인(聖人)이라는 예악(禮樂)을 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설교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백세(百世)를 기다려서 성인이 다시 나와도 이 내 말은 변하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작()을 해라!”라는, 그러한 어마어마한 작예악(作禮樂)’의 사상을 말하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용(中庸)은 모든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니까 유교는 사실 제왕지학(帝王之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제왕지덕(帝王之德)’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철학이예요. 여기에 유교는 엘리티즘(Elitism)의 제왕철학이다라고만 말할 수 없는 보편주의가 있습니다. 중용(中庸)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제왕의 덕()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문제는 위()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차이입니다. 제왕의 자리()라는 것은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는 세습화되었는데 중용(中庸)의 유교이상론에는 세습화란 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세습되는 왕위를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할 수 있는 제왕지학(帝王之學)이면서 동시에 치자(治者)의 학문이고, 작예악(作禮樂)하는 사람들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지성인들이 이러한 제왕지덕(帝王之德)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위()를 얻게 되면 여러분들은 작()할 기회를 얻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이상이나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어요. 이러한 확고한 리더쉽이 있어야만 인간세 뿐만 아니라 천지까지도 같이 올바로 경영이 된다는 겁니다.

 

 

 

 

338. 성실하되 비약을 꿈꾸는 삶

 

 

최근에 이인화라는 친구가 쓴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이 친구는 얼마 전에 이화대학 국문과 교수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상당히 재질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조선시대를 무대로 해서 서구라파식의 추리소설을 쓴 것일 뿐이지, 우리 고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거예요. 정조(正祖)와 남인(南人)을 루이 14세와 그 지지세력으로 보고. 노론(老論)계통은 귀족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으로 설정해서, 마치 남인과 정조가 절대왕정을 수립하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근대가 좌절됐다는 식의 논리거든요.

 

그런데, 노론의 어디에 그런 입장이 확고하게 있었으며, 남인들이 과연 그러한 프레임웍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정약용도 결코 그런 프레임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단지 조선조의 역사를 서구라파 역사에 끼워 맞춰가지고 해석한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전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서구라파 역사를 읽는 한 방편으로서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서구라파 역사에서 어휘만 바꿔서 우리의 고전을 읽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오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탐정소설, 추리소설로서는 재미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만 봐야지 그 이상의 의미를 두면 곤란하다 이 말입니다. ! 그러면 주자(朱子) ()의 제일 마지막 부분을 읽겠습니다.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 又贊其妙, 至於無聲無臭而後已焉,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 其反復丁寧示人之意, 至深切矣, 學者其可不盡心乎!
그래서 독공이천하평(篤恭而天下平)’의 성대함에 이른 것이다. 또한 그 오묘함을 찬양하며 무성무취(無聲無臭)’에 이른 후에 그만두었다. 대저 중용 한 편의 요체를 들어 요약하여 말했으니 반복하고 정녕히 하여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이순치호독공이천하평지성(以馴致乎篤恭以天下平之盛)”

순치했다는 것은 이르렀다는 겁니다.

 

 

우찬기묘 지어무성무취이후이언 개거일편지요이약언지(又贊其妙 至於無聲無臭而後已焉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

일편지요(一篇之要)’라는 것은 이 33장을 말하는 거겠죠. 중용(中庸)예기(禮記)의 한 편()이기 때문에, ‘일편(一篇)’중용(中庸)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일편지요(一篇之要)’33장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에 일편지요(一篇之要)’라고 한 것은 저자가 이 33장에 중용(中庸) 전체의 요점을 압축해서 얘기했다는 말입니다.

 

 

기반복정령시인지의 지심절의 학자기부진심호(其反復丁寧示人之意 至心切矣 學子其可不盡心乎)!’

정령(丁寧)’이라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데이네이(ていねい)’라고 쓰는데, ‘공손함이란 뜻입니다. “반복하고 아주 공손하게 사람에게 보이시는 그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니, 배우는 자가 어찌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러분들, 중용(中庸)에 나오는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이라는 말 기억하죠? 나는 이번 중용(中庸) 전체 강의 속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는 말이 이 말입니다. 솔개가 거대한 창공에 촤악 난다! 그리고 그 아래 연못에선 고기가 타악 튀어 오른다. 이 광막한 우주, 그리고 이 깊은 연못! 상상해 보세요. 이게 뭡니까? “It's a man!”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솔개란 인간의 보이지 않는 무성무취(無聲無臭),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세계, 인간의 무한한 상상의 세계죠.

 

그리고 이 밑에서 약동하는 힘은 뭐예요? 너무 고상치 못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바로 좆심이예요. 신수(腎水)예요. ((()의 정()입니다. 이 물에서 촤악 솟구치는 힘, 인간은 계속 꼴려야 한다! 여기 꼴리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물에서 고기가 약동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 솔개의 비상이 가능합니다. 사실, 나의 인생은 이랬거든요.

 

나는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솔개와 같이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펼쳤습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연못의 고기와도 같이 생명력이 약동했어요. 나는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속을 날아다녔고, 또한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좆이 빠딱빠딱 세차게 꼴렸습니다. 여러분들은 나보다 더 높이 나르고, 여러분들은 나보다 더 쎄게 꼴려야만 돼! “연비려천(鳶飛戾天)하고 어약우연(魚躍于淵)이라!” 중용(中庸)의 이 한 마디, 이것은 대우주의 주인공인 인간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위대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로맨스! 우리의 사상! 우리의 과학! 우리의 신화! 모든 게 이 속에 있어요. 중용(中庸)의 이미지를 아래와 위에 가득 채워서[上下察] 여러분들의 기()가 하늘과 땅에 꽉 찰 때[浩然之氣 塞于天地之間]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 비로소 중용(中庸)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중용(中庸)이란 좆심이 없는 자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솔개와 같은 상상력이 없는 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러한 무한한 세계를 개척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나의 중용(中庸)강의를 모두 끝내겠습니다.(재생박수)

 

 

 

 

 

 

 

인용

목차

전문

본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