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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32장 - 1. 비단옷에 갈포옷을 덧입는 이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32장 - 1. 비단옷에 갈포옷을 덧입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9. 2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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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비단옷에 갈포옷을 덧입는 이유

 

 

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시경(詩經)에 이르길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담()하지만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지만 문채가 나고, 따사롭지만 조리가 명료하다.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前章言聖人之德, 極其盛矣. 此復自下學立心之始言之, 而下文又推之以至其極也. , 國風[衛碩人鄭之丰, 皆作衣錦褧矣.” , 絅同, 禪衣也. , 加也. 古之學者爲己, 故其立心如此. 尙絅, 故闇然; 衣錦, 故有日章之實. ,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
3132에서 성인의 덕을 말해 성대함을 극에 달하도록 했다. 여기서는 다시 하학(下學)의 공부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임을 말하였으니 아랫 문장은 또한 그것을 미루어 그 극치에 이르게 한 것이다. 시는 국풍의 위풍(衛風) 석인과 정풍(鄭風)의 편이니, 모두 의금경의(衣錦褧矣)’으로 쓰여 있다. ()은 경()과 같으니, 얇게 걸치는 옷이다. ()은 덧입는다는 것이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다.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운 듯하지만 비단옷을 안에 담았으니 날로 드러나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담박, 간결, 온화함은 홑옷을 겉에 껴입는다는 것이다. 싫어하지 않음, 문리가 갖춰짐, 이성의 예리함은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시왈 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시경(詩經)의 글은 위풍(國風) 위석인(衛碩人)」【늘씬한 여인이여 훤칠도 해라. 무늬 있는 비단 옷에 홑옷을 걸쳤네. 제후의 딸이요. 위후의 아내요. 동궁의 여동생이요. 형후의 처제요. 담공의 매부로다. 손은 부드러운 띠풀 같고, 살결은 희고 윤기가 나며, 목은 굼벵이처럼 기다랗고, 이는 박씨처럼 가지런히 빛난다. 매미 같은 이마에 부나비의 촉수같은 눈썹. 어여쁜 웃음 보조개 짓고, 아름다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토다[碩人其頎, 衣錦褧衣. 齊侯之子, 衛侯之妻, 東宮之妹, 邢侯之姨, 譚公維私. 手如柔荑. 膚如凝脂. 領如蝤蠐. 齒如瓠犀. 螓首蛾眉. 巧笑倩兮. 美目盼兮]. 國風 衛碩人에도 나오고, 정풍(鄭風) ()에도 나오는데, 원래 시경(詩經)에는 의금경의(衣錦褧衣)’로 되어있지만, 여기에서는 의금상경(衣錦尙絅)’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과 경()은 같은 것으로 선의(禪衣)이다라고 주자가 설명하고 있지요? ()은 좌선한다는 뜻으로 쓰인 게 아니고 홑옷이라는 뜻입니다. 얇고 가벼운 옷을 말해요. 요즘에 여성들이 검은색 옷을 아래위로 입고 겉에다가 속이 비치는 흰 옷을 입던데 그 모습이 유사한 것 같아요. 노자에도 이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오는데, “성인은 반드시 갈포를 입고 속에다 옥()을 품는다[聖人被褐懷玉]”는 거예요. 이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흔히 옷의 출발이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극지방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있긴 해도, 사실 인류의 발생자체가 아프리카 등지의 더운 지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옷의 역사를 추위와 연관시켜서 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옷이 생기기 전에는 문신(tattoo)같은 게 나타납니다. 인간이나 옷에 대한 열망을 갖는 이유가 단순히 기후에 대해서 자기 몸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앞선다는 설이 카알라일(Carlyle)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게 맞는 말 같아요. 물론 인류에게 옷이 생기면서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지만, 사실 인간의 몸은 옷을 입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체온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 자체가 퇴화된 셈이죠. 지금도 목욕탕에 가서 보면 털이 많이 난 사람들이 있잖아요. 인간도 과거에는 털이 많아서 빨가벗고 살아도 견딜 만한 조건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구요. 그런데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털이 퇴화된 것입니다.

 

인간의 의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신분의 문제입니다. 옷으로써 인간의 신분을 나타낸다는 말인데, 지금도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위치라든가 분위기를 파악해 낼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왕이나 임금의 옷은 대단하게 만들었어요. 곤룡포를 보면 자수가 굉장하지요?

 

그런데 성인들은 비단옷을 입더라도 그 위에 허름한 갈포를 걸쳐서 그 비단옷을 가렸습니다. 왜 그랬느냐? “오기문지저야(惡其文之著也)” 사실 나도 한복을 입으면(지금 입고 있는 이 한복은 순수직 무명으로 만든 것인데 아주 느낌이 좋아요), 한복을 입은 사람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도 원불교 교무님들이 앉아 계신데, 정녀분들이 한복으로 까맣게 정장을 하고 사시는 그게 보통 노력이 아닙니다. 24시간을 저런 옷 속에서 산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문채가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런 옷을 입을 때는 거기에 합당하게 나 자신이 행동하게 되는데, 그게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나는 것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게 한복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례적인 의미가 있어서 강단에 설 때는 꼭 입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꼭 입는 것은 아니예요. 내가 이리에서는 잠바를 입고 다니는 게 편하죠. 전혀 표시가 안 나고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고군자지도 암연이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9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암연(闇然)’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둡다는 게 아니라 딴 것과 구별이 안 된다는 뜻이죠. 속에는 거지같은 갈포를 입고 있으면서 겉에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다니는 자들이 소인들이란 말입니다. ‘적연(的然)’은 확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일망(日亡)’ 내면은 썩어 들어가는 것이죠.

 

난 말이죠, 사실 의식적인 행동인데, 사람을 만나러 갈 적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한복을 입고 나갑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 허름하고 어설프게 입고 나오면 대하는 태도가 어설퍼집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종종 나의 외관인 옷에 대한 반응만으로 알아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정확한 판단일 때가 많아요. 하여튼 옛날 사람들의 군자지도를 묘사한 33의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군자의 는 담박하여 싫증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문채가 나고, 온화하지만 조리가 분명하다[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우리가 칠할 때 보면 광택칠과 무광택칠이 있잖아요? 그런데 옛날 우리의 공예품이나 옷을 보면 번뜩이는 걸 아주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복 비단도 번뜩이는 스타일이 아니고 광택이 싹 죽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의 한복은 한복의 제 맛을 잃어 버렸어요. 예전에는 원색을 안 썼거든요. 과거의 염색을 보면 색이 아주 담박합니다. ()은 아주 소략하고 거칠고 간략한 것이고, ()은 문채가 나다, 광채가 나다의 뜻입니다. ()은 온화롭고 따사롭다는 말인데, 그러면서도 리()하다는 것은 명석하다, 조리가 명료하다는 것이죠. ‘담이불염 온이리(淡而不厭 溫而理)’는 것이 바로 유교문명의 심미적 감각이예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의 옷이라든가 용품들을 보면 우리와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상당히 비유교적이예요. 화려하고, 뻘겋고, 원색을 과감하게 쓰기 때문에 대단히 칼라풀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담간(淡簡)하다든가 담박(淡泊)하다는 면에서는 아주 극한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담박한 맛은 끝내주는데 그것이 너무 인위적이에요. 갈포처럼 소박한 맛이 있어야지, 인위적이어서는 안 되죠.

 

 

지원지근 지풍지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먼 것의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하는 최초의 것을 알고, 은미함의 드러남을 안다면 더불어 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원지근(遠之近)’이라는 것을 보면, 앞의 25에 나왔던 시종(始終)’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죠? ‘원근(遠近)’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일 뿐이니, ‘은 곧 가까움이죠. 군자의 덕은 역시 이런 관계의 망에 대한 통합적 통찰을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25장에서도 성자 물지종시 불성무물 시고군자 성지위귀(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 誠之爲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것은 부터라는 뜻으로서, ‘풍지자(風之自)’이라는 것은 바람이 시작되는 근원를 말하는 겁니다.

 

또한, ‘미지현(微之顯)’이라는 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1에서 군자의 신독(愼獨)을 말할 때, “막현호미(莫顯乎微)”에서 나온 거죠? 이렇게 제일 마지막장과 1장의 맥락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자 주에도 먼 것이 가까운 데에서 시작하고 바람이 이는 것이 그 근원이 있으며, 은미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드러남을 알면, 즉 이 삼자를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갈 수 있다[遠之近 風之自 微之顯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앞에서 세 개의 세트로 연결된 ((()과 불염(不厭(()’라는 것은 뭐가 되겠습니까. 주자 주대로 말하면, “()ㆍ간()ㆍ온()은 갈포<덧옷:>를 밖에 껴입는 것이요, 불염(不厭)ㆍ문()ㆍ리()는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는 것이다[淡簡溫 絅之襲於外也 不厭而文且理焉 錦之美在中也].”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주자의 주를 읽겠습니다.

 

小人反是, 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 是以的然而日亡也. 遠之近, 見於彼者由於此也, 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 微之顯, 有諸內者形諸外也. 有爲己之心, 而又知此三者, 則知所謹而可入德矣. 故下文引詩言謹獨之事.
소인은 이와 반대이니, 밖으로 확 드러나지만 실제로써는 계속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원지근(遠之近)’은 멀리에 나타남이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요, ‘풍지자(風之自)’는 밖에 드러남이 안에 근본하는 것이요, ‘미지현(微之顯)’은 안에 간직한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닦으려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덕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랫글에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근독(謹獨, 愼獨)의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풍지자 저호외자본호내야(風之自 著乎外者本乎內也)’라고 했는데, 이 바람()이라는 것이 해석이 어렵습니다. 여기 바람은 덕성이 백성(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같은 그런 개념으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맹자(孟子)만장(萬章)에 나오는 백이지풍(伯夷之風)’()’개념으로 봐야 옳다는 주석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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