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미
미가(米家)
송(宋) 나라의 유명한 서화가(書畫家)인 미불(米芾)을 가리킨다.
미가서화(米家書畫)
송 나라 명필 미불(米芾)이 자기의 서화와 고서화를 배에 싣고 강에 떠다녔으므로 황정견은 시를 지어주기를 “澄江夜夜虹貫月 定有米家書畫船”이라 하였다.
미가선(米家船)
송 나라 미원장(米元章)이 이름난 서화(書畵)를 많이 모았는데, 그것을 배에다 싣고 강으로 가니 밤에 광채가 뻗치었는데, 사람들이 미가홍월선(米家虹月船)이라 칭하였다.
미가주(米家舟)
뛰어난 서화가(書畫家)라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저명한 서화가 미불(米芾)이 항상 배에다 서화를 가득 싣고 강호를 유람했던 고사가 있다.
미간광척(眉間廣尺)
양 미간의 넓이가 한 자이다.
미거기광(微去箕狂)
미자는 은 나라 주(紂)의 서형(庶兄)으로 주의 무도함을 보고는 나라가 망할 줄을 알고 미리 송(宋) 나라로 가서 종사(宗祀)를 보존하였고, 기자(箕子)는 주의 삼촌으로서 주의 무도함을 간해도 듣지 않자 거짓 미친 체하여 곤욕을 받았었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미거조상최(未去鳥相催)
두보(杜甫)의 시에 “둥지 틀려는지 저녁 새들 시끌벅적, 어서 돌아가자고 어린 소년 보채누나[欲捿群鳥亂 未去小童催]”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20 晩晴吳郞見過北舍
미견백의인(未見白衣人)
9월 9일에 술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동진(東晉) 때의 고사 도잠(陶潛)이 9월 9일에 술이 떨어져 술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마침 그때 강주 자사(江州刺使) 왕홍(王弘)이 흰옷 입은 사자(使者)를 시켜 술을 보내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미공비급문(眉公祕笈文)
미공은 명(明)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호, 비급문은 그의 저서인데 괴벽하고 비장(祕藏)한 것들을 적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왕세정(王世貞)·동기창(董其昌) 등과 함께 유명하였다. 『명사(明史)』 卷二百九十八 陳繼儒傳
미궐비왕록(薇蕨非王祿)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주 나라 녹봉을 마다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던 일이 있다.
미근가헌(美芹可獻)
어느 농부가 등에 내리쪼이는 햇볕이 따스하고 또 미나리가 그리도 맛이 있어 그것들을 임금께 바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 嵆康 與山濤書, 『열자(列子)』 「양주(楊朱)」
미금상(美錦傷)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로 읍대부(邑大夫)를 시키려 하자 자산(子産)이 “아직 어리니, 한 고을의 행정을 배워가면서 하도록 할 수는 없다. 괜히 그 사람을 해치는 결과만 된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비단을 기술 없는 자에게 재단을 맡기면 비단을 해치는 결과와 같다.”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좌전(左傳)』 襄公 三十一
미급판여수(未及板輿隨)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해 보겠다던 소망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다.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태부인(太夫人)을 판여(板輿)에 모시고서 멀리 경기(京畿) 지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가까이 집 뜨락을 소요하기도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미남궁(米南宮)
송대(宋代)의 서화가(書畵家) 미불(米芾)의 별칭이다. 그는 일찍이 남조(南曹)의 벼슬을 지냈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에 쌀 미(米) 자가 있기 때문에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미단(未旦)
미명(未明). 날이 아직 밝기 전. 날샐 녘을 이른다.
미달불감상(未達不敢嘗)
공자(孔子)에게 계강자(季康子)가 약을 보내왔을 때, 공자가 절하고 받으면서 “나는 이 약의 성분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감히 맛보지는 못하겠습니다[丘未達 不敢嘗].”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논어(論語)』 「향당(鄕黨)」
미대(彌代)
개세(蓋世)이다. 세상에서 뛰어나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음을 이른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미대부도(尾大不掉)
‘꼬리가 크면 흔들지 못한다’는 뜻으로, 신하의 세력이 강대하면 군주가 신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尾大難棹
미도불원(迷道不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길을 헤맨다. 멀지 않다는 뜻이다. 즉, 곧 본 길을 찾게 됨을 의미한다.
미도종비별유동(迷道終非別有東)
부처의 말에 “정신을 잃은 사람이 동서(東西)를 분변하지 못하여 동쪽을 보고 서쪽이라고 착각하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먼저 서쪽이라 하던 그 자리가 곧 동쪽이요, 새로 동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衆生)이 진(眞)을 몰라보고 정신없이 허망(虛妄)하였다가 하루아침에 진을 깨닫고 보면 허망하던 그 자체(自體)가 곧 진이요, 새로운 진이 따로 없는 것이다.”라 하였다.
미도효종유시춘(未到曉鐘猶是春)
당(唐) 나라 시인 가도의 삼월회일증유평사시(三月晦日贈劉評事詩)에 “삼월이라 정히 삼십일에 당하였노니 풍광이 괴로이 읊조리는 나를 작별하누나. 그대와 함께 오늘 밤엔 잠을 자지 말자꾸나. 새벽 종이 울리기 전엔 아직도 봄이라오[三月正當三十日 風光別我苦吟身 共君今夜不須睡 未到曉鐘猶是春].”라고 한 것을 이른 말이다.
미돈(迷豚)
자신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랄품강금(味辣禀剛金)
오행(五行)으로 볼 때 매운 맛은 금(金)에 속하는 것을 가리킨다.
미랑(薇郎)
포정사(布政司)의 낭관(郞官)을 가리키니 포정사를 미성(薇省)·미원(薇垣) 또는 자미성(紫薇省)이라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미려(尾閭)
전설에 나오는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천하의 물은 바다보다 큰 것이 없으니, 모든 물이 끊임없이 모여도 찰 줄 모르고, 미려(尾閭)로 끊임없이 새어 나가도 마를 줄 모른다[天下之水, 莫大於海 萬川歸之, 不知何時止而不盈 ; 尾閭洩之, 不知何時已而不虛].”라고 하였다. 일명 옥초(沃燋)라고도 한다.
미려혈(尾閭穴)
바닷물이 빠져 나간다는 동해 밑바닥의 골짜기 이름이다.
미로서함중(米老書函重)
미로는 송(宋) 나라 때의 서화가인 미불(米芾)을 말하는데, 그는 특히 고서화(古書畫)를 매우 좋아하여 고서화를 대단히 많이 수집하였으므로, 그를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미록(麋鹿)
자신을 야인(野人)으로 자처하는 겸사로 쓰인 말이다.
미록성(糜鹿性)
사슴처럼 초야(草野)에서 뛰놀고 싶어하는 성품을 말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차운공문중추관견증(次韻孔文仲推官見贈)’에 “我本麋鹿性 諒非伏轅姿”라는 시구가 있다.
미루(迷樓)
수 양제(隋煬帝)가 일찍이 변수(汴水) 가에다 극도로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는, 신선이 여기에서 놀더라도 의당 절로 헤매게 될 것이라 하여, 이를 미루(迷樓)라 명명하고서 극도로 즐기다가 나라를 망치고 말았는데, 뒤에 당(唐) 나라가 강남(江南)을 평정하고 나서 수 양제를 뇌당(雷塘) 땅에 개장(改葬)하였다.
미루요(迷樓謠)
미루(迷樓)는 누(樓)의 이름이다. 수 양제(隋煬帝)가 만년에 황음과 사치를 극도로 하여, 전무후무하게 웅장 광대한 궁전을 새로 지은 다음, 자신이 직접 그 궁전을 둘러보고는 “아무리 진선(眞仙)이 여기서 놀더라도 의당 절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라 하고 ‘미루’라 이름 한 데서 온 말이다
미륵사(彌勒寺)
무강왕(武康王)이 일찍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사자사(獅子寺)로 행차하던 도중 못에서 세 미륵불(彌勒佛)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명하여 용화산(龍華山) 아래 미륵사를 창건함과 동시에 또 세 미륵상(彌勒像)을 세웠다고 하는데, 특히 이곳의 석탑(石塔)은 대단히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東方)의 석탑들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미만(靡曼)
‘음이 지나치게 화미하고 더딘 것’을 말한다. / 인용: 守吾齋記(정약용)
미망인(未亡人)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과부가 스스로를 겸손하며 일컫는 말이다.
미명왕한유(彌明枉韓愈)
형산 도사(衡山道士)인 헌원미명(軒轅彌明)이 한유(韓愈)의 제자들과 석정(石鼎)이란 제목으로 연구(聯句)짓기를 해 한유 제자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창려집(昌黎集)』 石鼎聯句詩序
미목반혜(美目盼兮)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인(碩人)」 중에 나오는 싯귀로 “미소 짓는 보조개는 너무 어여쁘고, 초롱초롱한 눈은 곱기도 해라[巧笑倩兮. 美目𦕎兮].”라는 구절이 있다.
미무(蘼蕪)
약초 또는 향초 이름이다. 야생초로 여름에 작은 흰 꽃이 피고 맑은 향기가 있다. 백지(白芷)라고도 한다. 옛사람이 궁궁이를 읊어서 자신의 원정(怨情)을 자위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추란(秋蘭)과 궁궁이가 당하(堂下)에 줄 이었네”라 하였고 또 사조(謝脁)의 원정시(怨情詩)에 “서로 만나 궁궁이를 읊조리니, 저 반첩여(班倢伃)의 가을 부채가 서럽네.” 등이 있다.
미미(浘浘)
물이 많이 흐르는 모양.
미미(微微)
보잘것없이 썩 작은 모양, 그윽하고 고요한 모양.
미미(亹亹)
열심히 노력하는 모양, 나아가는 모양, 달리는 모양.
미미(娓娓)
장황한 모양.
미미(彌彌)
조금씩 차차로 불어감, 불어서 퍼져 나감.
미복(微服)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남의 눈에 띠지 않도록 초라한 옷차림으로 변장하는 일을 이른다.
미복(迷復)
돌아오는 길을 잃는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나쁘다[迷復 凶]”이라고 하였다.
미봉(彌縫)
떨어진 곳을 꿰맴. 결점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 꾸며댐을 이른다. / 유의어: 미봉책(彌縫策), 고식지계(姑息之計)
미불(米芾)
송(宋) 나라 때의 서화가. 그는 특히 고서화(古書畫)를 매우 좋아하여 고서화를 대단히 많이 수집하였으므로, 그를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고 일컬었다.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탕(湯)」에 나오는 문구로 “처음부터 잘하지 않는 사람도 없고, 끝까지 잘하는 사람도 드물다[靡不有初(미불유초) 鮮克有終(선극유종)]”라는 구절이 있다. 여왕(厲王)이 무도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법도와 장전(章典)이 문란해짐을 본 소목공(召穆公)이 개탄하며 지었다고 했다.
미사여구(美辭麗句)
아름다운 말과 고운 글귀. 좋은 말과 화려한 글귀.
미산(眉山)
송(宋) 나라 때 미산인(眉山人)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은 시(詩)·문(文)·서(書)·화(畫)에 모두 뛰어났다.
미산연소악강보(眉山挻蘇岳降甫)
소씨(蘇氏)는 송(宋) 나라 때 문장가인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등 삼부자(三父子), 보후(甫侯)는 『서경(書經)』 여형편(呂刑篇)의 편찬자인 주(周) 나라 여후(呂侯)를 가리킨다.
미상(微霜)
가는 서리.
미상지문(未喪之文)
문(文)은 도(道)가 밖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지 않는다[天之未喪斯文也]”에서 나온 말이다.
미색경(美色驚)
미녀는 사람들이 다 아름답게 여기지만 사슴 같은 짐승이 보면 놀라서 달아난다는 말이다[毛嬙麗姬, 人之所美也 ;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장자(莊子)』 「재물론(齊物論)」
미생(彌甥)
외손을 말한다.
미생(尾生)
춘추 때 노(魯)나라 사람으로 신의로 유명한 고대 전설상의 인물이다. 『장자(莊子)』 「도척(盜跖)」에 “미생이 한 여인과 다리 밑에서 기한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오지 않고 강물이 불어났으나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을 떠나지 않아 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는 뜻의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는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미생고(尾生高)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 사람으로서 한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날 약속을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은 채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데도 끝내 기둥을 붙잡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다가 익사하였다고 한다. 『장자(莊子)』 「도척(盜跖)」
미생지신(尾生之信)
① 노나라의 미생이란 사람이 한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다 별안간 물이 붇는데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곧 굳게 신의를 지킨다는 뜻, 또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정직함을 이르는 말이다.
② 신의가 두터운 것을 비유하거나, 우직한 것을 비유한다. 노(魯)나라의 미생(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미성(彌性)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俾爾彌爾性”이 있고, 그 주에 “미성은 영명(永命)과 같은 뜻이다.”라 하였다.
미소(微笑)
소리를 내지 않고 살며시 웃는 웃음을 이른다.
미수(米壽)
88세. ‘米’를 세분하면 ‘八 十 八’이 된다.
미수(眉叟)
① 곽기수(郭期壽)의 자이다.
② 조선 시대 허목(許穆)의 호이다.
미수비존차호안(眉叟碑存鹺戶晏)
동해안(東海岸)은 본디 조석간만(潮汐干滿)이 심하여 바닷물이 시가지까지 올라오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늘 홍수 피해로 시달렸는데, 현종(顯宗) 때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던 허목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신기한 문장으로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을 지어 삼척포(三陟浦)에 비를 세운 결과, 그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미수시(眉叟詩)
허미수(許眉叟)의 시를 말한다.
미시파령(彌時坡嶺)
인제(麟蹄)와 속초(束草)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이를 줄여서 미시령(彌時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식(迷息)
자신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식세성(未識歲星)
한 무제(漢武帝)의 시신(侍臣)인 동방삭(東方朔)이 죽은 뒤에, 그 동안 18년간 보이지 않던 세성(歲星)이 비로소 하늘에 보이자, 무제가 “내 옆에 있던 동방삭이 세성인 줄을 지금까지도 몰랐구나.”라고 탄식했다는 설화가 한 나라 곽헌(郭憲)의 「동방삭전(東方朔傳)」에 전한다.
미실가자은정용(美實可資殷鼎用)
매화의 열매를 말한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솥에다 국을 끓이게 된다면 그대는 소금과 매실 같은 구실을 하라[若作和羹 爾惟鹽梅].”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은(殷)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한 말이므로 ‘은 나라 솥’이라 한 것이다.
미아(迷兒)
자신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악시서화(米嶽詩書畫)
미악은 송(宋) 나라 때의 명필 미불(米芾)을 가리킨다. 그의 호 중에 해악외사(海嶽外史)라는 호가 있다. 미불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송사(宋史)』 卷四百四十四
미앙(未央)
미앙궁(未央宮)은 한(漢) 나라 궁궐의 정전(正殿)이다.
미앙궁(未央宮)
① 한 나라 고조(高祖) 때 지은 궁전으로, 조현(朝見)을 하던 곳이다.
② 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미앙접장문(未央接長門)
왕과 후궁과의 사이가 밀접해졌다는 말이다. 미앙(未央)과 장문(長門)은 다 한대(漢代)의 궁전 이름인데, 미앙궁은 황제가, 장문궁은 황후가 기거하는 곳이다. 두 궁 사이에 길이 트여 왕래가 잦고 또 숙원(淑媛)이라는 관칭(官稱)까지 내려질 만큼 임금으로부터 대단한 총애를 받는다는 말이다.
미액(微液)
오묘한 물. 신기한 액체를 이른다.
미양(未揚)
아직 떠오르지 않다.
미어(謎語)
수수께끼.
미언(微言)
정미요묘(精微要妙)한 말이란 뜻으로, 사도에 관한 공자(孔子)의 오묘한 말들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중니가 죽고 나서 미언이 끊어졌다[仲尼沒而微言絶].”라 하였다.
미연방(未然防)
그렇게 되기 전에 막는다는 말로, 눈앞의 것만 보고 정에 이끌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미연지전(未然之前)
아직 그렇게 되지 아니하다.
미열우(尾熱牛)
제(齊) 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연(燕) 나라와 싸우다 궁지에 몰렸었는데, 그는 소 1천여 마리를 모아 용 무늬를 그린 붉은 옷을 입히고 뿔에는 창칼을 잡아 맨 다음, 꼬리에 횃불을 붙여 밤중에 적진으로 내모니, 연 나라 군사들은 이 성난 소들 때문에 크게 패하였다. 『사기(史記)』 卷八十二 「전단열전(田單列傳)」
미오(郿塢)
후한(後漢) 시대 참적(僭賊) 동탁(董卓)이 미(郿) 땅에 세운 창고 즉 만세오(萬歲塢)를 말하는데, 동탁이 이 창고에다 30년 이상 먹을 곡식을 저장하였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七十二 「동탁전(董卓傳)」
미오(郿塢)
한(漢)나라 말기의 잔인무도한 역신 동탁(董卓)이 어린 헌제(獻帝)를 끼고서 도읍을 장안(長安)으로 옮기고는 미(郿)라는 곳을 자기 근거지로 삼아 거기에다 보루[塢]를 쌓고 만세오(萬歲塢)라고 불렀는데, 그 후 왕윤(王允)의 계략에 의하여 자기 의자(義子)인 여포(呂布)의 손에 죽고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미옥(美玉)
불을 겪을수록 더욱 좋아진다고 한다.
미옹화방(米翁畫舫)
미옹은 송(宋) 나라 양양(襄陽) 사람 미불(米芾)로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 또는 녹문거사(鹿門居士)이며 서화(書畫)에 뛰어나 남화(南畫)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늘 서화를 좋아하여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강회발운사(江淮發運使)로 있을 때엔 자기 배 위에 패(牌) 하나를 세우고 거기에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 썼다고 한다. 참고로 황정견(黃庭堅)이 미불에게 준 시인 희증미원장(戲贈米元章)에 “창강(滄江)에 밤새도록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이는 필시 미가(米家)의 서화(書畫) 실은 배이리라.”라 하였다.
미우인(米友仁)
송(宋) 나라 미불(米芾)의 아들이다. 문장과 서화가 그의 아버지와 대등하므로 소미(小米)라 불렀다.
미우자장간공취(美羽自戕看孔翠)
공작은 자기의 깃을 무척 사랑하는 반면에 시기심이 대단하여 상대방의 깃을 보면 서로 쪼아 망가뜨리고야 만다고 한다.
미우하룡(未雩何龍)
‘우제(雩祭)도 아닌데 무슨 용이란 말인가’라는 말이다. 『좌전(左傳)』 환공(桓公) 4년 조(條)에 “龍見而雩”라 하고, 두예(杜預) 주에 ‘龍見建巳之月 蒼龍宿之體 昏見東方 萬物始盛待雨而大 故祭天 遠爲百穀 祈腺雨’라 하였다.
미원(薇垣)
①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이다. 명 나라와 청 나라의 포정사(布政司)의 별칭이다.
② 자미성(紫薇省)의 약칭으로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인데, 뒤에는 조정의 중요한 관서(官署)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로 사용하였다. 당 나라 때 중서성에 백일홍나무[紫薇]를 심은 것이 연유가 되어 자미성(紫薇省)이라 개칭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조선 시대의 의정부(議政府)에 해당한다.
미원장(米元章)
원장은 송 나라 미불(米芾)의 자인데 천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무위군(無爲軍)을 맡아보게 되어 처음으로 주해(州廨)에 들어가자 입석(立石)을 보고 자못 기이하게 여겨 곧 포홀(袍笏)을 가져오라 하여 그 돌에 절하고 늘 석장(石丈)이라 불렀다고 한다. 『燕語』
미원현(迷原縣)
경기도 양근(楊根)에 있는 고을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에 국사(國師) 보우(普愚)가 군(郡)의 미원장에 우거하고 있다 하여 장(莊)을 승격시켜 현으로 만들었다.
미원휘(米元暉)
송(宋) 나라 미우인(米友仁)의 자인데, 그는 서화(書畫)에 능하였다.
미위(微危)
『서경(書經)』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고 한 말이 있다.
미유구(微有咎)
손을 두루 초청하여 연음(燕飮)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살진 소 잡아 놓고서 이웃 어른들을 청하였나니, 그 어른들이 일 있어 못 오실지언정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오[旣有肥牡 以速諸舅 寧適不來 微我有咎].”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미인(美人)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누구를 생각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라네. 저 미인이시여, 서방에 계신 분이라네[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는데, 미인은 서주(西周)의 성군(聖君)을 비유한 말이다. 「이소경(離騷經)」에서도 미인을 가지고 임금을 비유하였다.
미인가필(美人呵筆)
유사(遺事)에 “이백(李白)이 편전(便殿)에서 명황을 모시고 조서(詔書)를 짓게 되었는데, 때는 시월이었으나 날씨가 매우 추워 붓이 얼어 글을 쓸 수 없었다. 임금이 궁빈(宮嬪) 열 명을 불러 좌우(左右)에 앉힌 다음 각기 상아필(象牙筆)을 들고 입김을 불어 녹이게 하였으므로 이백이 드디어 조서를 쓰게 되었으니, 그가 받은 은총이 이러했다.”라 하였다.
미인박명(美人薄命)
미인은 흔히 불행하거나 요절하는 일이 많다는 말이다. / 유의어: 가인박명(佳人薄命)
미자(微子)
은(殷) 주(紂)의 서형(庶兄)으로서 주를 자주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마침내 은 나라를 떠나 송국(宋國)으로 가서 선왕(先王)의 제사를 받들고 은 나라의 유민(遺民)을 다스렸다고 한다.
미장(迷藏)
아이들의 놀이의 일종인 착미장(捉迷藏)을 말하는데, 곧 베[布]로 눈을 싸매고 하는 숨바꼭질이다. 여기서는 서로 모순됨을 가리킨다. / 인용: 漫錄(김창흡)
미전(米顚)
북송(北宋)의 서화가(書畫家) 미불(米芾)의 별호이다. 매우 기이하게 생긴 거석(巨石)을 보고는 크게 기뻐한 나머지 의관을 갖춰 절을 하면서 형(兄)이라고 불렀다는 ‘미전배석(米顚拜石)’의 고사가 전한다. 『송사(宋史)』 「문원전(文苑傳)」 6 米芾
미절(弭節)
머뭇거리다.
미정갱(未政羹)
춘추시대(春秋時代) 자라국을 나눠주지 않은 정 영공(鄭靈公)을 원망했던 공자 송(公子宋)의 고사이다.
미정평(禰正平)
후한 때 사람. 이름은 형(衡)이다. 문재(文才)가 있으므로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추천하였으나, 그는 조조에게 함부로 욕질하였다. 그는 끝내 그 말버릇 때문에 26세의 나이로 황조(黃祖)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조조에게 앵무(鸚鵡)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부(賦)를 지었다.
미조(媚竈)
옛날에 “오(奧)에 아첨하기보다는 차라리 조왕(竈王)에게 아첨함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오(奧)는 안에 있는 신(神)인데 임금에 비하고, 조왕은 권신(權臣)에 비한 것이다.
미종(微尰)
미종은 각각 각기병(脚氣病)과 수종(水腫) 다리를 가리킨다.
미주약공(美酒若空)
『불경(佛經)』에 “병에다 허공을 담아 가지고 남에게 선사한다.”는 말이 있다.
미증유(未曾有)
아직까지 있어 본 적이 없이 처음 있는 일을 이른다.
미지(微之)
당(唐)의 문장가 원진(元稹)의 자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여러 벼슬을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元稹傳
미진(迷津)
번뇌(煩惱)와 미망(迷妄)의 세계. 삼계(三戒)와 육도(六道). 현실의 세계. 피안(彼岸)에 대응한 차안(此岸)의 세계를 이른다. 오계(悟界)의 피안(彼岸)에 대하여 미계(迷界)의 차안(此岸)을 일컫는 말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항해의 나루를 찾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미집구(未縶駒)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흰 망아지[白駒]가 나의 동산에서 풀을 먹는다. 그것을 매어서 오래 머물게 하리라.”라 하였다.
미천(彌天)
온 하늘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고승(高僧)을 가리킨다. 진(晉) 나라의 고승인 석도안(釋道安)이 습착치(習鑿齒)와 서로 만나 자랑을 할 때 습착치가 ‘사해(四海)의 습착치’라고 하자, 석도안이 ‘미천(彌天)의 석도안’이라 하였다. 『진서(晉書)』 卷82 習鑿齒傳
미천석(彌天釋)
미천은 하늘에 가득찼다는 뜻으로 대단히 고원(高遠)함을 말하고, 석은 중의 별칭으로 도력(道力)이 뛰어난 중이라는 뜻이다. 진(晉) 나라 습착치(習鑿齒)와 중 도안(道安)이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도안이 “미천 석도안(彌天釋道安)이오.”라 하자, 습착치가 “사해 습착치(四海習鑿齒)올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八十二 習鑿齒傳
미타(彌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약칭이다.
미타부동존(彌陀不動尊)
미타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준말이고, 부동존은 부동명왕(不動明王)을 가리키는데, 즉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체 악마를 항복받기 위하여 몸을 변모시켜 분노한 모양을 나타낸 형상이다.
미탄(未綻)
꽃망울을 아직 터뜨리지 않았다.
미파(渼陂)
섬서성(陝西省) 호현(鄠縣) 서쪽에 있는 물이름인데, 일찍이 두보(杜甫)는 잠삼의 형제와 함께 이 물에서 놀았다. 그리하여 “잠삼의 형제 모두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나를 초청해서 멀리 와 미파에 놀았네[岑參兄弟皆好奇 邀我遠來遊渼陂]”라는 시를 지었다.
미평(靡蓱)
무성한 부평초를 이른다.
미풍양속(美風良俗)
아름답고 좋은 풍속.
미피시(渼陂詩)
미파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물 이름인데, 두보(杜甫)가 일찍이 잠삼(岑參)의 초청을 받아 미파에 가 노닐면서 장편시(長篇詩) 미피행(渼陂行)을 지은 바 있다. 『두소릉집(杜少陵集)』 卷三
미피지음(渼陂之吟)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의 형제가 미피(渼陂)에서 배를 타고 흥겹게 놀았으므로 두보(杜甫)가 미피행(渼陂行)이란 시를 지었다.
미필추금궤(未畢抽金樻)금궤에 있는 책을 펴보고 국사(國史) 짓는 것을 마치지 못했다는 말이다.
미해종룡와(未諧終龍臥)
와룡(臥龍)은 서서(徐庶)가 촉한(蜀漢)의 승상으로 남양이 고향이던 제갈량(諸葛亮)을 평하여 부른 호칭인데, 제갈량이 자신의 호칭과 같이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선주(先主) 유비(劉備)의 정성에 못 이겨 결국 세상에 나오고 말았던 것을 풍자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卷三十五
미형(未形)
형체가 없다.
미호아(米虎兒)
송 나라 미우인(米友仁)의 일명이다.
미혹(迷惑)
길을 잃다, 머뭇거리다.
미회한실비제갈(未恢漢室悲諸葛)
제갈량(諸葛亮)은 촉한(蜀漢) 선주(先主)의 승상(丞相)으로, 한실(漢室)을 흥복(興復)하려고 종신토록 노심초사했으나 결국 한실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군중(軍中)에서 운명(殞命)했다.
미후도(獼猴桃)
다래나무 열매를 말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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