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문
문거(文擧)
후한(後漢) 공융(孔融)의 자(字)이다. 공융이 조조(曹操)의 미움을 사 잡혀 들어갈 때 당시 아홉 살 여덟 살인 두 아들은 태연한 얼굴로 짐짓 탁정(琢釘)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융이 사자(使者)를 잡고 부탁하기를 “죄가 나에게서 그치고 저 두 애들은 무사하게 할 수 없을까?”라고 하자 그 애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엎어진 새집 밑에 성한 알이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 했는데 그 후 곧 그들도 붙잡혀 갔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문거서(文擧書)
문거(文擧)는 후한(後漢) 때 북해 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의 자(字)이다. 선비들을 좋아하였고 특히 후진(後進)들의 앞길을 이끌어 주었으므로 한직(閑職)에 물러난 뒤에도 빈객들이 날마다 집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103
문거서중어(文擧書中語)
문거 후한(後漢) 공융(孔融)의 자(字)이다. 그가 친구인 성헌(盛憲)의 구명(救命)을 위해 조조(曹操)에게 보낸 「논성효장서(論盛孝章序)」에 “세월이 멈추지 않고 계절이 유수처럼 흘러 어느새 벌써 나이 오십을 맞았는데 …… 이 세상 친구들 거의 모두가 낙엽처럼 지고 오직 남아 있는 것을 회계의 성효장뿐이다.[歲月不居 時節如流 五十之年 忽焉已至 …… 海內知己 零落殆盡 唯有會稽盛孝章尙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보통 이 글을 「공융비세서(孔融悲歲序)」라고 부른다. 『문선(文選)』 卷41
문거숙종주사예(文擧夙從周史裔)
공자(孔子)의 20대손인 공융이 10세 때 천하에 명사로 이름난 하남 윤(河南尹) 이응을 찾아가 자기를 소개할 때 “저의 선군(先君) 공자와 당신의 선인(先人) 이노군(李老君; 노자)과는 똑같은 도덕과 의리로써 서로 사우(師友)관계를 가졌습니다.”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卷七十 「공융전(孔融傳)」
문거증수예형직(文擧曾收禰衡直)
한(漢)나라 공융(공융 자(字)는 文擧)이 미형(禰衡)의 재주를 칭찬하고 깊이 사귀었는데, 미형은 곧은 말로 남을 비평하기로 유명하였다.
문경(刎頸)
문경지교(刎頸之交)를 줄인 말로 사생을 같이하는 친구를 말한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에 “염파가 인상여(藺相如)를 공박해도 상여가 상관하지 않으니 염파가 공경하는 뜻으로 육단(肉袒; 한쪽 어깨를 드러냄)으로 가시를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와서 서로 문경지교를 맺었다.”라 하였다. 벗을 사귀는 데 상호 생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말한다. / 유의어: 물경지교(勿頸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
문경(文景)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를 말함인데, 그들은 검소하고 질박한 정치 풍토를 조성하여 한나라의 부강할 기초를 만든 임금들이다. 그들이 집권했던 시기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한다.
문계무(聞鷄舞)
진(晉) 나라 때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주부(司州主簿)가 되어, 서로 정의가 좋은 사이라서 한 이불 속에 같이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닭울음소리를 듣고는 유곤을 툭 차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악성(惡聲)이 아니냐.”라 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데에서 온 말인데, 한밤중의 닭울음이란 때 아닌 때에 닭이 운다는 뜻으로, 즉 나라에 사변(事變)이 있을 전조(前兆)임을 의미한다. 『진서(晉書)』 卷六十二 「조적전(祖逖傳)」
문공(文公)
주자(朱子)의 시호이다.
문관부잠상(聞鸛婦潛傷)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의 “왜가리가 개미집에서 울자, 아낙네는 방안에서 탄식한다[鸛鳴于垤 婦歎于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음우(陰雨)가 내리려면 구멍(穴)에 사는 충류(蟲類)들이 먼저 발동하므로, 왜가리가 그 발동하는 개미를 잡아먹고 운다는 말이다.
문관사(問官私)
진(晉) 나라 혜제(惠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화림원(華林園)의 개구리 소리를 듣고는 “이 노래 소리가 공적인 것이냐 사적인 것이냐[此鳴爲官乎爲私乎].”라고 물었다고 한다. 『晉中州記』
문군(文君)
한(漢) 나라 때 촉군(蜀郡) 임공(臨邛)의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젊었을 때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문장이 뛰어났는데, 뒤에 임공에 와 있자 왕길이 무척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임공의 부호였던 탁왕손의 연회에 함께 초대되었는데, 이때 마침 탁왕손의 딸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어 집에 있다가 사마상여의 풍류에 반하여 마침내 그를 따라 밤에 도망하였다. 『한서(漢書)』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문군로(文君壚)
탁문군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아내로, 사마상여가 임공(臨邛)에서 목로집을 차려놓고 탁문군에게 술장사를 하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七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궁(文窮)
창려집(昌黎集) 권36 「송궁문(送窮文)」의 “그 다음은 문궁(文窮)이니, 한 가지 능력만을 추구하지 않고 괴기한 표현을 일삼아 시국에 응용할 수 없고 오직 스스로 즐길 따름이다[又其次曰‘文窮’, 不專一能, 怪怪奇奇, 不可時施, 秖以自嬉].”에서 나온 것으로, 문인이 문장을 잘한 이유로 인해 곤경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문궤(文軌)
“수레는 굴대의 치수가 동일하고 책은 문자가 동일하다[車同軌 書同文].”라고 한 말을 줄여 도치(倒置)한 것으로 이는 천하가 통일되어 왕법(王法)이 동일함을 뜻한 것이다. 중용(中庸)』 28장
문극겸(文克謙)
남평인(南平人)인데, 고려 때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상으로서 특히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문신(文臣)들을 화(禍)에서 구해 내었다.
문근(聞根)
불가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의 하나로 육신의 청각을 가리킨다.
문기자(問奇字)
한 나라 양웅(揚雄)이 현정(玄亭)에 은거하였는데 가끔 사람들이 술을 싣고 와서 기자(奇字)를 물었다고 한다.
문내아제문외매(門內兒啼門外邁)
공사를 위해서는 사사를 돌볼 겨를이 없음. 우(禹)가 8년을 밖에서 치수하면서 세 차례나 자기 집 문 밖을 지난 일이 있었지만 한 번도 들리지 않았고, 아들 계(啓)가 태어나 응애응애 울음소리를 듣고서도 자식보다는 수토 평정을 위해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다. 『서경(書經)』 「익직(益稷)」
문노공(文潞公)
송(宋) 나라의 대유(大儒) 노국공(潞國公) 문언박(文彦博)을 가리킨다. 노공은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출사(出仕)하는 등 4조(朝)에 걸쳐 무려 50년 동안 장상(將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다격세치(門多擊轊輜)
문 앞에 귀객(貴客)들이 줄을 이어 수레끼리 서로 부딪칠 정도임을 말한 것이다.
문도(文度)
진(晉) 나라 때의 명신인 왕탄지(王坦之)의 자이다. 『진서(晉書)』 卷七十五
문동(文同)
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여가(與可)이다. 시문(詩文)과 각종 서체(書體)에 두루 능했으나 유독 대나무를 잘 그렸다. 『송사(宋史)』 卷四百四十三
문동도(文東道)
자는 성원(聖源), 호는 경암(敬庵)이다.
문례문시(問禮聞詩)
진항(陣亢)이 공자(孔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자네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웠는가.”라 하니, 백어는 답하기를 “나는 어른의 명령으로 시(詩)를 배우고 예(禮)를 배웠노라.”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계씨(李氏)」
문례백어(問禮伯魚)
백어는 공자(孔子) 아들 리(鯉)의 자(字)이다. “리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공자가 ‘예를 배웠느냐?’라고 물었다.”라 하였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공부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논어(論語)』 「계씨(李氏)」
문뢰상비저(聞雷喪匕箸)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대화하다가 천둥소리를 듣고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렸던 고사가 있다. 조조가 유비를 두고, 지금 세상의 영웅이라고 하자 유비는 조조의 경계 대상에서 풀려나기 위해 일부러 자기는 영웅이 못 됨을 위장하려고 때마침 이는 천둥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놀라 수저를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린 듯이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문루(抆淚)
눈물을 닦다.
문리(文狸)
황혹 반점 무늬가 섞인 이리. 얼룩이리.
문모(文母)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인 태사(太姒)를 말한다. 『시경(詩經)』 주송(周頌) 「옹(雝)」 장에 “이미 황고(皇考)를 제사하고 또한 문모(文母)를 제사하게 하였다.”라 하였는데, 그 주에 “문모(文母)는 태사(太姒)이다.”라고 하였다.
문목(問木)
한(漢) 나라 상서령(尙書令) 공광(孔光)에게 어떤 사람이 “온실성 안에는 모두 어떤 나무들로 채워져 있는가?[溫室省中樹皆何木也]”라고 물었는데, 입이 무거운 공광이 그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卷81 「공광전(孔光傳)」
문무(文武)
① 문학(文學)과 무기(武技)를 이른다.
문무(文無)
옛사람들이 서로 이별할 때 정표로 주던 약초(藥草). 당귀(當歸)라고도 하며 승검초의 뿌리를 말한다.
문무길보(文武吉甫)
주 선왕(周宣王)의 현신(賢臣)으로 험윤(玁狁)을 북벌(北伐)했던 윤길보(尹吉甫)를 말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에 “문무 겸전한 길보여, 만방이 법도로 삼는도다[文武吉甫 萬邦爲憲]”라고 하였다.
문무화후(文武火候)
불에 문화(文火)·무화(武火)가 있는데, 문화는 불을 늦추어 때는 것이요, 무화는 불을 급하게 때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도사들은 단약(丹藥)을 만드는 방법으로 말한다.
문문(汶汶)
더럽고 욕된 것. 물명예, 치욕, 도리에 어두운 모양이다.
문문산(文文山)
문산은 남송(南宋) 말기 송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충성을 다한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에 꼭 있어야 할 네 벗. 종이[紙], 붓[筆], 벼루[硯], 먹[墨]의 네 문방구(文房具). 지필연묵(紙筆硯墨)을 이른다. / 유의어: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백(文伯)
이목(李楘)의 자(字)이다.
문병(文柄)
과거(科擧)의 전형을 맡은 권한, 즉 지공거(知貢擧)를 말한다.
문병인(門屛人)
사문(師門)의 학인(學人)을 말한다.
문봉취어낙포(聞鳳吹於洛浦)
옛날 주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인 진(晉)은 젓대를 잘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놀다가 마침내 신선(神仙)이 되었다. 훗날에 왕자교(王子喬)라 불린다. / 인용: 北山移文(공치규)
문불재자호(文不在玆乎)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없어졌으니, 문(文)이 이(자신)에 있지 않느냐[文王旣沒, 文不在茲乎].”라 하였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문비(問備)
대관(臺官)의 물음에 피문자(被問者)가 그 사정을 갖춰 진술하던 일이다. 조선조 중기에 행하던 제도로 벼슬아치 중에 과오를 범한 자가 있으면 대관(臺官)이 서독(書牘)으로 문난(問難)하였으니 이것을 함사(緘辭)라 하고, 피문자가 대관의 말이 과연 옳다고 인증될 때에는 역시 서독(書牘)으로 그 사정을 갖춰 진술하여 굴복하는 뜻을 보이거나, 혹은 스스로 밝혔으니 이것을 함답(緘答)이라 한다. 추고(推考)는 바로 문비(問備)의 유의(遺意)였던 것이다.
문사서도강(聞思誓渡江)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때아닌 닭울음이 들리자 유곤을 발로 차 깨우면서 말하기를 “이는 상서롭지 못한 소리가 아니다.”라 하고는 일어나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천하가 들끓어 호걸들이 다투어 일어나게 되면 나와 그대는 마땅히 중원(中原)으로 가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그 후 조적은 석륵(石勒)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자강을 건너다가 강 한가운데서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강을 건널 때는 이 강에 몸을 던지리라.”라 하였다 한다.
문사통노훈(聞思通爐薰)
불가(佛家)의 높은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문사(聞思)는 문사수(聞思修)의 준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삼혜(三慧)이다. 『능엄경(楞嚴經)』에 “관음은 문사수를 통해서 삼매에 들어간다[觀音由聞思修 入三摩地].”고 하였으며, 소식(蘇軾)의 시에도 “이 마음 실로 향과 함께 올리나니, 문사 대사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此心實與香俱焄 聞思大士應已聞].”라는 표현과 “문혜(聞慧) 사혜(思慧)론 아직 안 되나니, 우선 비단백(鼻端白) 호흡법을 닦아 보시라[不是聞思所及 且令鼻觀先參]”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37 子由生日 以檀香觀音像 及新合印香銀篆盤爲壽, 卷28 和黃魯直燒香
문산(文山)
①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으로, 원(元) 나라에 잡혀가 끝까지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부르고 죽은 송(宋) 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② 문산(文山)은 이재의(李載毅)의 호이다. 그는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는데, 특히 『주역(周易)』을 전공했다고 한다.
문산(汶山)
지금의 민산(岷山)으로 감숙성(甘肅省)과 사천성을 가르는 산으로 민강(岷江)의 발원지이다.
문산사묘고시시(文山祠廟古柴市)
문산은 송(宋) 나라 문천상(文天祥)으로, 그의 사당이 북경의 순천부학(順天府學) 곁에 있는데, 이곳은 바로 옛날에 시시(柴市)가 있던 곳으로, 원(元)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문천상을 처형하였다.
문산우해(文山遇害)
남송(南宋)의 간악한 재상 진회(秦檜)가 금(金)에게 강화(講和)를 주장하여 주전파(主戰派)인 악비(岳飛)를 모함해 죽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악비의 군사가 중원을 거의 수복할 뻔하였다.
문산자(文山子)
문산은 이재의(李載毅)의 호이다. 그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특히 『주역(周易)』을 전공하였고,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한다.
문삼력정(捫參歷井)
삼성(參星)과 정성(井星)은 28수(宿)의 각각 하나이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시에 “삼성과 정성 만질 수 있으니 숨이 찬다[捫參歷井仰脅息]”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는 하도 산이 높아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삼성과 정성은 파촉(巴蜀)의 분야(分野)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문상삽도(門上揷桃)
정월(正月) 초하룻날 대문 위에 복숭아나무를 꽂아 재앙을 물리친다고 한다. 『진서(晉書)』 「예지(禮志)」
문생판서(門生判書)
판서로서 오히려 연소배에게 아부함을 비웃던 말이다.
문서(文犀)
무늬 있는 뿔을 지닌 무소를 가리킨다. 또는 무늬 있는 무소뿔 장식을 붙인 띠, 곧 서대(犀帶)를 말한다.
문석(文石)
대궐 뜰의 돌을 이른다. 한(漢) 나라 매복(梅福)의 상소에 “원컨대 한 번 문석의 계단을 올라 생각한 바를 다 말하겠습니다.”라 하였는데, 이는 궁궐을 뜻하는 말이다. 『한서(漢書)』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를 높인 시호(諡號)이다. 당(唐) 개원(開元) 27년에 공자를 문선왕으로 봉하였고, 송(宋) 상부(祥符) 원년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 하였으며, 원(元) 대덕(大德) 10년에 다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가시하였다가 명(明) 가정(嘉靖) 9년에 지성선사(至聖先師)로 개칭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성문선왕의 시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
문선육신주(文選六臣注)
『문선(文選)』는 양(梁) 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찬으로, 내용은 진한(秦漢)으로부터 양·제(梁齊)에 이르기까지의 시문을 선록(選錄)한 것인데 총 60권이다. 그 주석서에는 당 고종(唐高宗) 때 나온 이선(李善)의 주가 있고, 그 뒤 당 현종(唐玄宗) 때에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유양(劉良)·장선(張銑)·여향(呂向)·이주한(李周翰) 등의 주를 모아 오신주(五臣注)라 했는데, 남송(南宋) 이후에 이선주(李善注)와 오신주를 합쳐 문선육신주라 하였다.
문성(文星)
문운(文運)을 맡은 별을 말한 것인데, 문창성(文昌星) 혹은 문곡성(文曲星)을 가리킨다. 동관주기(東觀奏記)에 “이경량(李景亮)이 아뢰기를 “문성(文星)이 어두우니 반드시 과장(科場)에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문성(文成)
왕양명(王陽明)의 시호이다.
문성함장(文成函丈)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문성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문성공(文成公)
고려의 유학자(儒學者) 안향(安珦)의 시호이다. 그는 일찍이 원(元) 나라에 들어가 주자학(朱子學)을 들여왔으며, 유학(儒學)을 일으켰다. 이 공로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성상(聞省想)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을 이른다.
문소(聞韶)
① 소는 순(舜)의 악명(樂名)으로, 도(道)를 즐긴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孔子)가 제(齊) 나라에서 소를 듣고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몰랐다[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라고 하였다.
② 의성(義城)의 고호(古號)이다.
문소전(文昭殿)
조선 태조(太祖)의 왕후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사당이다.
문속(問俗)
임금의 사신(使臣)이 지방의 풍속을 물어 살피는 것을 말한다.
문수(汶水)
① 문수는 먼 길을 떠나 북쪽에 가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의 “한 번 더 나를 부르러 오면 문수 가에 있을 것이다[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②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의 이름이다. 『시경(詩經)』의 제풍(齊風)과 노풍(魯風)에 나오는 시가의 무대로 많이 나온다.
문수(文殊)
① 문수사리(文殊師利)이다.
② 문수보살. 불교에서 여래(如來)의 왼편에 있는 지혜(智慧)를 맡은 보살로서 불성(佛性)을 명견(明見)하여 법신(法身)·반야(般若)·해탈(解脫)의 삼덕(三德)을 구족(具足)하고, 불가사의한 지혜를 가졌다 한다.
문수회(文殊會)
문수는 보살 이름이다. 문수보살을 찬양하는 법회. 문수의 행사를 말한다.
문숙(文肅)
여진족을 쫓아내고 관북(關北) 지방에 9성(城)을 축조했던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시호(諡號)이다.
문숙요의조(文叔燎衣竈)
문숙(文叔)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자이다. 광무제가 일찍이 부엌에서 젖은 옷을 말린 일이 있었으므로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문슬(捫蝨)
진(晉) 나라 때 왕맹(王猛)이 환온(桓溫)을 처음 배알하고 당세의 일을 담론하면서 이를 문지르며 방약무인한 태도로 얘기를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부견대기(符堅載記)」
문슬담병(捫虱談兵)
전진(前秦)의 왕맹(王猛)이 관중(關中)에 병사를 이끌고 와 있던 동진(東晉)의 대장 환온(桓溫)을 만나 한편으론 천하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론 이를 잡으며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 한다. 『진서(晉書)』 「왕맹전(王猛傳)」
문슬담사업(捫虱談事業)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원대한 뜻을 담담하게 토로한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맹(王猛)이 누더기 옷을 입고 환온(桓溫) 앞에 나아가 옷 속의 이를 잡으며 천하 대사를 담론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卷114 王猛列傳
문슬라어강(捫蝨懶於康)
혜강(嵇康)이 산도(山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게을러 목욕하지 않아 몸에 늘 이[虱]가 있다.”라 하였다. 『절교서(絶交書)』
문슬청담(捫蝨淸談)
진(晉) 나라 때 청담으로 이름이 높던 왕맹(王猛)이 환온(桓溫)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약무인한 태도로 옷 속의 이를 문지르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데서 온 말이다.
문슬화(捫蝨話)
책 이름이다. 송(宋) 나라 진선(陳善)이 찬한 것으로 총서(叢書)에 해당한다.
문시리(聞詩鯉)
이(鯉)는 공자(孔子)의 아들인데 공자가 일찍이 혼자 있을 때 이가 추장하여 뜰을 지나니 공자가 묻되 “시(詩)를 배웠느냐.”라 하였다. 『논어(論語)』 「계씨(李氏)」
문신(文身)
교룡(蛟龍) 등의 해를 피하기 위하여 몸에 무늬를 새겨 넣고 나체(裸體)로 지내는 남방 오랑캐 부족을 뜻하는 말이다.
문신국(文信國)
송(宋) 나라 문천상(文天祥)을 말하며, 문신(文信)은 그의 자이다. 원(元) 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패하여 억류되었는데, 원(元) 세조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죽였다. 죽기 전에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을 뜻을 보이고 죽었다. / 인용: 正氣錄序(윤근수)
문심(文沈)
문징명(文徵明)과 심사(沈仕)이다. 모두 명(明) 나라 사람으로 그림과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문약반(捫籥盤)
사실을 잘못 안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일유(日喩)」에서 나온 말로서 세상에 태어나 해를 못 본 소경이 옆 사람에게 해의 모양을 물으니 해는 구리반과 같다 하였는데 두들겨보니 소리가 나므로 종소리를 듣고 해로 알았고, 또 해의 빛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촛불과 같다 하였는데 촛대와 같이 생긴 젓대를 만져보고 햇빛으로 알았다고 한다.
문양소(汶陽篠)
문양에서 나는 가느다란 대인데, 이 대는 특히 생(笙)과 화살을 만드는 데에 가장 적합하여 명물(名物)로 일컬어진 것이므로, 전하여 훌륭한 인품을 비유한 것이다.
문어(文魚)
잉어, 또는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는 물고기이다.
문여가(文與可)
여가는 송(宋) 나라 때 문동(文同)의 자이다. 문동은 시문(詩文)과 서화(書畫)에 모두 뛰어났다.
문연각(文淵閣)
내각(內閣)의 한 관청이다. 『명사(明史)』 「직관지(職官志)」
문열(文烈)
고려 때의 충신으로서 시호가 문렬인 이조년(李兆年)을 가리킨다.
문염무희(文恬武嬉)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准西碑)」에서 나온 말인데, 나라를 걱정할 줄 모르고 문관과 무관이 안일(安逸)에 빠져 향락이나 한다는 말이다.
문옹(文翁)
한(漢)나라 여강(廬江)사람이다. 경제(景帝)말에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있으면서 성도(成都)에 관학(官學)을 설치하여 소속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 들어가 배우게 하고 그들의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으며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고을 관리로 보임하였는데, 무제(武帝)때 전국의 고을에 관학을 설치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한서(漢書)』 卷八十九 文翁傳』
문옹재반(文翁在泮)
문옹은 한(漢) 나라 때 사람인데, 그가 경제(景帝) 말기에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성도(成都)에 학궁(學宮)을 세워 교육을 크게 진흥시킴으로 인하여,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천하의 군국(郡國)에 모두 학교를 세우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八十九
문옹촉사애(文翁蜀士愛)
한(漢) 나라 때의 사람으로 촉군(蜀郡) 태수가 되어 가서 사랑과 교화로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크게 문풍이 진작되어, 모범적인 지방관의 전형으로 칭송되었다.
문와위공(聞蛙爲公)
진(晉) 나라 혜제(惠帝)는 어리석은 임금이므로, 신하들과 동산에 놀다가 개구리의 우는 소리를 듣고는 묻기를 “저 개구리의 우는 것이 관(官; 公)을 위한 것인가, 사(私)를 위한 것인가.”라 하였다. / 인용: 龍鍾(서거정)
문왕(文王)
원래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문왕연이공린경(文王演易孔麟經)
난세(亂世)에 처해서도 의연히 대작(大作)을 완성했던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도 『주역(周易)』을 연역(演繹)하였다는 말이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으면서 “애공(哀公) 14년 봄, 서쪽 교외 사냥에서 기린이 잡혔다[西狩獲麟]”는 구절로 끝냈으므로, 춘추(春秋)를 인경(麟經)이라고도 한다.
문왕일반(文王一飯)
『소학(小學)』 「계고(稽古)」에 “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再飯 亦再飯”이라 하였다.
문왕조(文王操)
금조 이름으로, 은(殷) 나라 주(紂)가 무도하여 제후들이 모두 문왕(文王)에게로 돌아오므로, 문왕이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 악부(樂府)의 금곡(琴曲) 이름으로, 주 나라 문왕(文王)이 주(紂)를 물리친 뒤 봉황이 글을 물고 오는 상서가 있자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문왕지유(文王之囿)
유(囿)는 짐승을 기르는 곳이다. 담(墻)없는 동산. 주(周)문왕의 동산은 70리였다.
문왕청묘십(文王淸廟什)
『시경(詩經)』의 대아와 송(頌)의 편명이다.
문왕피우릉(文王避雨陵)
『좌전(左傳)』 희공(僖公) 32년에 “효함(殽函)에 두 언덕이 있는데 남쪽 언덕은 하걸(夏桀)의 조상인 하후 고(夏侯皐)의 무덤이 있고, 북쪽 언덕은 주 문왕(周文王)이 풍우(風雨)를 피하던 곳이다.”라 하였다.
문왕후천(文王後天)
은(殷)의 주(紂)가 유리(羑里)에 있는 감옥에다가 주 문왕(周文王)을 가두었다. 이때 문왕은 감옥에서 복희(伏羲)의 8괘(卦)를 근본으로 하여 64괘(卦)를 만들어내니 이것을 ‘문왕후천(文王後天)’이라 하며, 이때문에 주 나라의 『역(易)』이란 뜻으로 『주역(周易)』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성시(門前成市)와는 반대로,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말한다. / 유의어: 문설작라(門設雀羅)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
문외작라(門外雀羅)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하게 삶을 표현한 말이다.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책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엔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더니 퇴직한 후에는 문 밖에 새 잡는 그물을 치게 되었다.”라 하였다.
문외한(門外漢)
문 밖의 사람. 그 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이 없거나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을 이른다. 비전문가
문외한장군(門外韓將軍)
수(隋) 나라 장군 한금호(韓擒虎). 당시 진 후주(陳後主)가 향락만 하다가 한 장군(韓將軍)이 바로 성문에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문요(文饒)
이덕유(李德裕)의 자이다.
문웅(文雄)
문호(文豪)와 같은 말로, 문장으로 이름난 대작가를 말한다.
문원(文苑)
송(宋) 나라 때 이방(李昉)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들어 양(梁) 나라 말기부터 당(唐) 나라까지의 제가(諸家)의 시문(詩文)을 37류로 부류하여 수록(收錄)한 시문집이다. 양이 무려 1천 권에 달한다.
문원(文園)
한(漢) 나라 때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당(唐)의 두목(杜牧)의 시에 “문원이 소갈증이 생겨 시를 읊지 못했다.”라는 시가 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갈(文園渴)
문원은 한(漢) 나라 때의 문장가로서 일찍이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지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이르는데, 그에게 소갈증이 있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령(文園令)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던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는데, 평생 소갈병(消渴病)으로 시달렸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병(文園病)
소갈병(消渴病)을 말한다. 문원은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 그는 일찍이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그는 문장이 탁월하였는데 소갈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무릉(茂陵)에서 살다가 죽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봉황곡(文園鳳凰曲)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말한다. 상여가 무제(武帝) 때 효문원령(孝文園令)이 되었었는데 그가 일찍이 거문고를 잘 탔으므로 당시 부호(富豪)였던 탁왕손(卓王孫)의 딸 문군(文君)이 그 거문고 소리에 반하여 야반도주로 상여를 만나 함께 살았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소갈병(文園消渴病)
한(漢) 나라 때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지낸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는데, 그는 평소에 소갈병(消渴病)이 있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억매(文園憶梅)
문원은 한(漢) 나라 때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는데, 사마상여는 소갈증을 앓아서 매실을 먹고 싶어 하였다. 『사기(史記)』 卷117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포갈(文園抱渴)
문원은 한 문제(漢文帝)의 무덤을 말하는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지냈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사마상여는 풍류를 좋아하고 사부(詞賦)를 잘 지어 문장가로 유명한데, 소갈병을 항상 앓았다 하여 흔히 문사(文士)의 병에 비유한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七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문원학(文園涸)
한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지냈었으므로 문원이라고 하는데, 그의 자는 장경(長卿)이고 문장이 훌륭하였으며 소갈병을 앓았다. 『사요취선(史要聚選)』 文章
문월(問月)
당(唐) 나라 때 이백(李白)의 「파주문월(把酒問月)」에 “푸른 하늘에 저 달 몇 번이나 왔던고, 내 이제 술잔 멈추고 한번 묻노라[靑天有月來幾時 我今停杯一問之].”라고 하였다.
문유(文儒)
학자를 말한다.
문유지족자(蚊有知足者)
모기도 만족한 것을 아는 것이 있다. 변하여 사람은 만족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비유이다.
문인(文茵)
호피(虎皮)로 만든 수레에 까는 자리를 말한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그것을 미루어 열을 앎을 이른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미루어 앎. 곧, 매우 총명(聰明)하고 지혜로움을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문자(文子)
책 이름이다. 저자 미상. 일설에는 주(周) 나라 신근(辛釿)의 찬이라고도 한다. 노자의 설(說)을 13편에 나누어 해설하였다.
문자매종양(問字每從楊)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기이한 글자[奇字]를 많이 알므로 술을 가지고 글자를 물으러 오는 이가 많았다.
문자음(文字飮)
술을 마시면서 시(詩)를 읊고 문(文)을 논하는 것을 이른다. 당(唐)의 한유(韓愈)가 장안의 부호집 자식들을 조롱하면서 “문자음할 줄은 알지 못하고서 연분홍 치마폭에서 취하는 게 고작이지[不解文字飮 惟能醉紅裙]”라 하였다 한다. 『문슬신어(捫蝨新話)』
문자인(問字人)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가난한 집안 살림에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한 채 저술에만 몰두하였는데, 이따금씩 어려운 글자를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주효(酒肴)를 싸들고 찾아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卷87 「양웅전(揚雄傳)」
문자주(問字酒)
한(漢) 나라의 대학자 양웅(揚雄)이 너무 가난해서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했는데, 가끔씩 배우러 오는 이들이 안주와 술을 싣고 방문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
문장(門墻)
공자(孔子)의 담장을 가리킨 것으로, 한(漢) 나라 때 양웅(揚雄)이 “어떤 자가 공자의 담장에 기대어 이단(異端)의 글을 읽고 있더라도 그를 안으로 끌어들이겠는가?”라는 혹자의 물음에 대하여 “그가 문장에 있으면 내쫓아 버리고, 오랑캐 땅에서 읽고 있으면 끌어들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던 데서 온 말이다. 『양자법언(揚子法言)』 修身
문장(文章)
아름다운 모습을 이른다.
문장금이환(文章錦已還)
시재(詩才)도 이미 바닥이 났다는 말이다. 남조(南朝) 때 강엄(江淹)의 꿈속에 곽박(郭璞)이 나타나서 그동안 빌려 주었던 붓을 돌려달라고 하여 반환하였는데, 그 뒤로는 강엄의 시 중에 가구(佳句)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재주가 이제 바닥이 났다고 평했던 고사가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卷605 齊書引用文
문장매고명다기(文章每苦命多觭)
두보(杜甫)의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에 “文章憎命達”이라는 시구가 있다. 즉 예로부터 문장지사(文章之士)는 대부분 명운(命運)이 기박했다는 말이다.
문장미이백(文章美耳白)
송대(宋代)의 문장가 구양수(歐陽修)가 소년 시절에 어느 중이 관상(觀相)을 보고는, 귀가 얼굴보다 희어서 이름을 천하에 날리겠다고 하였다 한다. 『東坡志林』
문장일촌심(文章一寸心)
두보(杜甫) 시에 “文章千古師 得失寸心知”의 구가 있다.
문장자속궁수사(文章自屬窮愁事)
감당 못할 고통과 시름 속에서만 훌륭한 글이 나온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평원군우경열전론(平原君虞卿列傳論)」에 “우경이 만약 고통과 시름의 나날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후세에 길이 전해질 저서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虞卿非窮愁 亦不能著書以自見於後世].”라고 하였다.
문장정종(文章正宗)
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당(唐) 이전의 글을 사명(辭命)·의론(議論)·서사(敍事)·시가(詩歌)의 넷으로 분류하여 20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문재자(文在茲)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이제 돌아갔으니 문(文)이 여기 있지 않으냐[文不在茲乎]”라 하였다. 주자(朱子) 주(註)에 “도(道)가 나타난 것은 문이라 이르나니, 대개 예악(禮樂)·제도(制度) 등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문전걸식(門前乞食)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한다는 데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을 말한다.
문전성시(門前成市)
문 앞이 저자(시장)를 이룬다. 세도가의 집 앞이 찾아드는 방문객들로 저자처럼 붐빈다는 뜻으로, 세상인심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유의어: 문정약시(門庭若市)
문전수류(門前垂柳)
동진(東晉) 때의 고사 도잠(陶潛)이 택변(宅邊)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서 인하여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호한 일에서 온 말이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문전여노가인원(門前茹蘆佳人遠)
『시경(詩經)』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에 “동문의 제단 언덕에, 꼭두서니가 있도다. 그의 집은 가까우나, 그 사람은 매우 멀기만 하네[東門之墠 茹蘆在阪 其室則邇 其人甚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문전옥답(門前沃畓)
집 앞 가까이에 있는 좋은 논, 곧 많은 재산을 일컫는 말이다.
문전작라(門前雀羅)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
문점(文點)
청 나라 사람. 자는 여야(與也), 호는 남운산초(南雲山樵). 시문(詩文)과 서화에 두루 능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고려 후기의 문신 권부(權溥)의 시호이다. 권부는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학사(密直學士) 등을 거쳐, 충선왕 복위 후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의 봉호를 받았다.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온 뒤에는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注)의 보급에 힘썼고, 은대집(銀臺集) 20권을 주서(註書)하기도 하였다.
문정자(問鼎者)
초장왕(楚莊王)이 주나라에 대하여 구정(九鼎)의 경중을 물었다. 구정은 하우(夏禹)가 만들어 전해 오다가 은(殷)나라에서 혁명(革命)한 뒤에 옮겨왔고, 주나라가 다시 옮겨왔던 것인데 초장왕이 물은 것은 주나라를 멸시하여 왕권(王權)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문정홀(文貞笏)
문정은 위징(魏徵)의 시호이다. 위징이 죽은 뒤에 집안에 아직도 옛날의 서조 등이 남아 있느냐고 임금이 묻자, 홀만 남아 있다고 후손 위모(魏謨)가 대답했다 한다.
문제(文帝)
후한을 멸하고 위(魏)나라를 세운 조비(曹丕)이다.
문제관병세류회(文帝觀兵細柳廻)
한 문제(漢文帝) 때 흉노가 크게 변방을 침입하자 주아부(周亞夫)로 하여금 세류(細柳)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순시하던 문제가 이 진영의 군율(軍律)이 엄한 것을 보고는 극찬하고 돌아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주아부전(周亞夫傳)」
문제하빈(問諸河濱)
주 소왕(周昭王)이 남쪽 지방을 순수(巡守)하다가 한수(漢水)를 건너게 되었는데, 뱃사공이 미워하여 아교로 풀칠하여 만든 배에 태우니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그만 파선되고 말았다. 이때문에 소왕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 후 제 환공(齊桓公)이 제후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격하면서 이것을 추궁하자 초에서는 “하수에 물어보라[問諸河濱]”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였다. 『사기(史記)』 周本紀 注 正義, 左傳 僖公 四年
문조(文晁)
곡문조(谷文晁)인데 그림을 잘 그렸다.
문족일소(捫足一笑)
남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딴전을 피우는 것을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가슴에 부상을 당한 뒤, 발을 문지르면서 “저 놈이 내 발가락을 쏘아 맞췄다[虜中吾指].”라고 둘러댄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문종칠계(文種七計)
문종이 구천(句踐)에게 오나라를 멸하기 위해서 건의한 7가지 계책이다.
① 재물을 보내어 상대국의 임금과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며[捐貨幣, 以悅其君臣]
② 곡식의 가격을 올려 그들의 창고를 비우게 하고[貴糴粟槁, 以虛其積聚]
③ 아름다운 미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고[遣美女, 以惑其心志]
④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그들의 궁실을 크게 짓게 하여 그 나라의 재물들을 탕진하게 만들 것이며[遣之巧工良材, 使作宮室, 以罄其財]
⑤ 아첨을 잘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고[遣之諛臣, 以亂其謀]
⑥ 직간 하는 충신들을 구석으로 몰아 스스로 죽게 만들어 그 나라의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의 벽을 얇게 만들고[强其諫臣使自殺, 以弱其輔]
⑦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외원정 하게 하여 그 나라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積財練兵, 以承其弊]”이다.
문주(文州)
문천(文川)의 고호이다.
문주사(文酒社)
주연(酒宴)을 베풀고 글을 짓는 모임을 말한다.
문중자(文中子)
왕통(王通)은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인데, 자는 중엄(仲淹)이다. 어려서부터 독학(篤學)하였고, 일찍이 장안(長安)에 노닐면서 태평(太平)에 대한 십이책(十二策)을 아뢰었으나, 그 계책이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하분(河汾)에 물러나 살면서 사람을 교수하여 수업한 자가 1천 명이나 되었다. 자주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죽으니 문인들이 사시(私諡)를 문중자(文中子)라 일컬었다.
문즉병 불문즉약(聞則病 不聞則藥)
들으면 병이요, 못 들으면 약이다.
문진(問津)
나루터를 묻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학문의 길로 입문(入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장저와 걸닉이 김매며 밭 갈고 있을 때 공자(孔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보게 하였다[長沮桀溺 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라는 말이 나온다. 남에게 미혹(迷惑)을 지시해 달라고 청구하는 뜻으로 쓴다. / 유의어: 문진인(問津人) / 인용: 次友人韻(임춘)
문진자(問津者)
진(晉)나라 때 물고기 잡는 일을 업으로 하던 무릉(茂陵) 사람이 하루는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도화림(桃花林)을 만나 그곳에 들어가서 옛날 진(秦) 나라 때 피난 와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그 후 그가 다시 그곳을 가 보려고 하였으나 길을 잃어 가지 못했다. 또 남양(南陽)의 고사 유자기(劉子驥)도 그 말을 듣고 친히 가 보려고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마침내 나루터를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별천지(別天地)를 찾는 사람을 의미한 말이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六 「도화원기(桃花源記)」
문질부동(文質不同)
하(夏) 나라는 충(忠)을 숭상하였고, 은(殷)나라는 질(質)을 숭상하고, 주(周) 나라는 문(文)을 숭상하였다.
문창(捫瘡)
구준(寇準)이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상처가 날 정도로 크게 야단맞은 후 공부를 열심히 하여 나중에 훌륭하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그래서 언제나 그 상처를 만지며[捫瘡] 울곤 하였다. 『기문록(記聞錄)』
문창(文昌)
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호(諡號)인 문창후(文昌侯)의 준말이다.
②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문형(文衡) 즉 대제학을 말한다.
문창성(文昌星)
북두칠성에서 괴성(魁星)을 제외한 여섯 별의 총칭이다. 천상에 문성(文星)이 있는데, 인간의 문장(文章)을 맡았다. 인간에서 가장 문장을 잘하는 이는 천상의 문성(文星)과 서로 응(應)한다. / 인용: 與皇甫若水書(임춘)
문창성(文昌省)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문천(問喘)
한(漢) 나라 재상(宰相) 병길(丙吉)이 길에서 사람들이 싸움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났는데도 묻지 않더니, 사람이 소를 쫓아서 몰고 오는데 소가 헐떡이며 혀를 빼 문 것을 보고 병길이 수레를 멈추고 “소를 몇 리나 쫓아서 몰고 왔느냐.”라고 물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병길이 답하기를 “백성이 서로 싸워서 죽고 상하는 것은 장안령(長安令)과 경조윤(京兆尹)이 금단할 일이니 재상이 직접 간섭할 일이 아니요, 지금은 봄이라 크게 더운 철도 아니고 소가 멀리 오지 않았는데도 더위 때문에 헐떡인다면 이것은 음양(陰陽)이 조화되지 못한 것이 재상의 직책이다.”라 하였다.
문천몽(捫天夢)
왕후가 될 조짐을 말한다. 후한 때 등 황후(鄧皇后)가 어려서 부친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대단히 애도한 나머지 몸이 몹시 초췌해졌는데, 하룻밤에는 하늘을 문질러 보니 마치 종유(鍾乳) 모양과 같은 물체가 있어 이것을 빨아 마신 꿈을 꾸고는, 몽점(夢占) 치는 이에게 물으니, 성왕(聖王)의 전조(前兆)로서 길(吉)하기가 말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뒤에 과연 황후가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卷十
문천상(文天祥)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이다. 원병(元兵)이 쳐들어왔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기의 충절을 보이고 죽었다.
문철(聞徹)
(사방에) 두루 전해지다.
문첩서초명(蚊睫棲焦螟)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초명(焦螟)이라는 곤충이 모기 눈썹 위에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며 날아다니는데도 모기가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자춘추(晏子春秋)』 外篇 第8
문초췌(問憔悴)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안색으로 강변을 거닐고 있어 어부가 그 이유를 묻자, 굴원이 더러운 세상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어부가 빙그레 웃으면서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 씻으면 되지[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떠나갔다는 「어부사(漁父辭)」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문총(文塚)
당 나라 유세(劉蛻)가 문장의 초고(草稿)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한데 모아 땅에 묻은 데서 나온 말로 곧 많은 공부를 했다는 뜻이다.
문충(文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말한다. 문충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문통필(文通筆)
문통은 남북조시대 강엄(江淹)의 자이다. 그의 젊을 때 꿈에 곽박이라는 예전 시인이 오색 붓을 하나 주었는데, 그 후로 그의 문학적 재주가 발전되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문파(文波)
학문하는 반궁(泮宮) 앞으로 흐르는 물이기 때문에 문파(文波)를 흘렸다 한다.
문평문하서명인(文平門下署名人)
문평은 이지명(李知命)의 시호이다. 그는 명종 때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규보(李奎報)·유승단(兪升旦) 등 명환(名宦)을 발탁하였다. 『고려사(高麗史)』 卷九十九 李知命傳
문폐(文陛)
무늬가 화려한 돌로 쌓은 어전(御殿)의 섬돌을 이른다.
문표래고정(文豹來罟穽)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호랑이와 표범은 털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일을 자초하고[虎豹之文來田], 동작이 민첩한 원숭이는 사냥할 때 쓰기 위해 줄에 묶이는 신세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문필유질(文必有質)
공자(孔子)의 말에 “문(文)만으로도 안 되고 바탕[質]만으로도 안 되고, 문과 질이 고루 조화되어 빈빈(彬彬)한 연후에야 군자(君子)이니라[文質彬彬, 然後君子].”라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문하(門下)
집안의 하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식객(食客)을 이른다. 현재는 제자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문항포륜래불이(門巷蒲輪來不已)
겉으로는 고결한 은자(隱者)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세상 욕심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풍자한 말이다. 북송(北宋) 때 충방(种放)이 종남산(終南山) 표림곡(豹林谷)에 은거하면서 뻔질나게 황제의 부름을 받고 높은 벼슬을 하며 산골과 도성을 왔다 갔다 하였으므로, 당시에 가짜 은거자를 풍자한 「북산이문(北山移文)」의 글을 암송하여 그를 비꼬았던 고사가 전한다. 『송사(宋史)』 卷457 隱逸列傳上 种放
문행관(文杏館)
문묘(文廟) 또는 향교(鄕校)를 일컫는 말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원(元) 나라 마단림(馬端臨)이 당 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증보한 것으로 총 3백 48권이다.
문형(文衡)
홍문관 대제학의 별칭으로 홍문관 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성균관 대사성이나 지성균관사를 겸임한 사람을 말한다.
“문과급제(文科及第)의 문신이라도 반드시 호당 출신이라야만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인데,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직해야 했다. 문형은 이들 삼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이므로 더할 수 없는 명예로 여겼고, 품계는 판서급인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명예로는 삼공(三公) 육경(六卿)보다 윗길로 쳤다.”
문형부(文衡付)
마치 불가(佛家)에서 의발(衣鉢)을 전하듯, 문형을 그만둘 때에는 후임자에게 옥당의 벼루를 전하는 일이 관례화되어 있었으며, 벼루를 전할 때에는 또 서로들 시축(詩軸)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 허기(虛器)는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문혜군(文惠君)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말한다.
문호(門戶)
대문과 지게문을 이른다.
문황(文皇)
① 당 태종(唐太宗)을 가리킨다.
② 명 성조(明成祖)의 시호이다.
문황제(文皇帝)
명(明) 나라 성조(成祖)이다.
문효세자(文孝世子)
정조(正祖)의 맏아들로 정조 11년 5월 3일 홍역을 앓았으나 그 다음날 곧 나았으므로, 경사라 하여 진하(陳賀)할 채비를 하던 중 다시 별증(別症)이 발생하여 5월 10일 죽었다. 『朝鮮王朝實錄 正祖 十年 五月
문희(文姬)
동한(東漢)의 학자 채옹(蔡邕)의 외동딸인 채염(蔡琰)의 자(字)로, 전란(戰亂)으로 고국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된 여류 명인(名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란통에 흉노 땅으로 잡혀갔다가 조조(曹操)의 주선으로 돌아왔는데, 일찍이 호가(胡笳) 소리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짓는 등 음률(音律)에도 밝았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84 列女傳 董祀妻傳
문희별자도(文姬別子圖)
채문희는 후한 때 학자 채옹(蔡邕)의 딸인데, 흥평(興平)의 난에 오랑캐에게 잡혀가 거기서 아들 둘을 낳고, 조조(曹操)의 주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그 두 아들과 이별한 정경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문희연(聞喜宴)
과거 급제를 자축하는 잔치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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